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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진보’라는 착오… 中 ‘좌익 보수’ 일인지배 정권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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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2.

 

‘좌파=진보’라는 착오… 中 ‘좌익 보수’ 일인지배 정권의 완성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2.01.01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13회>

 

 
<1989년 5월 중순 단식 투쟁에 나선 톈안먼 광장의 자유파 시위대. 사진/ Jian Liu, https://www.nytimes.com/2019/05/30/world/asia/tiananmen-square-protest-photos.html>

‘우파=보수, 좌파=진보’는 낡은 분석틀...역사발전 역행 세력을 ‘진보’라고 미화

2022년 대망의 임인년(壬寅年) 새해 첫 날이다. 대선을 두 달 앞둔 절체절명의 이 순간,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현실정치를 보면, 낡은 이념에 집착하는 수구적 좌파도 있고, 새로운 이념을 개창하는 진보적 우파도 있다. 물론 그 역도 얼마든지 관찰된다. 그럼에도 현대 한국어에선 “좌파=진보,” “우파=보수”라는 거짓 등식이 이미 고착된 듯하다.

 

“보수”라는 정치용어 속에는 낡음, 수구, 구태, 부패, 기득권 등의 부정적 의미가 스며들어 있는 반면, “진보”라는 정치용어는 일반적으로 새로움, 바꿈, 창조, 발전, 진화, 혁명 등의 긍정적 의미와 연결된다. 대중들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누구든 보수의 탈을 쓰면 불리한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 이유야 어렵잖게 설명된다. 계몽주의 시대부터 “진보(進步, progress)”는 근대세계의 제1의제(議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진보”는 전근대의 신분제적 차별,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평등, 빈곤, 질병, 불합리, 부조리로부터 인류를 해방하는 문명의 개화, 과학기술의 발전, 경제적·사회적 발달, 법적·제도적 진화, 자유와 인권의 신장 등을 의미한다.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하고, 더 발달되고, 더 풍요로운 세상으로 더 나아가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때문에 어떤 세력이든 “진보”라는 이름을 선점하는 순간 재빨리 옳고, 바르고, 진취적이고, 개혁적이고, 도덕적이라는 이미지를 띠게 된다. 반면 어떤 세력이든 “진보” 대신 “보수”라 불리는 순간, 정치적 수세에 몰리고 만다.

 

동아시아 현대사를 돌아보면, 경제성장과 인권신장에 기여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주동세력이 “보수”로 낙인찍힌 반면, 경제성장에 실패하고 인권 유린을 자행한 공산주의 정권들이 “진보”의 훈장을 달고 있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흔히 보인다. 비근한 예로 오늘의 한국 정치에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종하는 민중파(PD)와 북한의 “주체사상”과 “수령론”을 맹신하는 자주파(NL)가 공히 “진보”를 자처해왔다. 다수 언론들도 편의상 그들을 “진보세력”이라 불러주고 있다. 그 결과 역사의 진보를 이끈 “보수” 세력이 수구로 몰리고, 역사 발전에 역행한 “운동권” 세력이 “진보”라 미화되는 언어적 착오가 이어지고 있다.

 

 
<1953년 3월 9일, 타임지의 표지 모델로 선정된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 초상화 아래에는 “자유의 뿌리는 깊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1950년대 냉전의 정점에서 개인의 기본권, 경제적 자유주의, 정치적 민주주의, 개방주의, 국제공조를 추구했던 이승만의 노선이 “보수”였나? 폐쇄적 명령경제와 고립적 민족 지상주의 노선으로 개인의 자유를 말살한 김일성의 노선이 “진보”였나? 경제성장과 인권신장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승만의 정책이 역사의 발전을 이끈 “진보” 노선이고, 김일성의 정책이 역사발전에 역행한 “반동” 노선이다. 마치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고립적 계획경제가 반동적이었고, 덩샤오핑의 개방적 시장주의가 진보적이었던 점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한국 정치의 근본적 개혁을 위해선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 대신 중국 정치의 분석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보수파”와 “개혁파”의 구분법을 도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미지가 실체를 왜곡하는 정치언어의 속임수를 퇴치하지 않고선 민주주의가 순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스탈린과 만찬을 나누는 김일성의 모습. 사진/공공부문>

시진핑 정권은 ‘좌익 성향의 보수파’...오른쪽이 개혁파 성향

정치 분석의 도구로서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은 이미 실효성을 상실한 부정확한 분석틀일 뿐이다. 중국 정치를 분석할 때는 보수와 진보 대신 “보수파”와 “개혁파”(혹은 “자유파”)의 구분법이 흔히 쓰인다.

 

오늘날 중공중앙의 정치에서 “보수파”는 의문의 여지없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하고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옹호하는 중공중앙의 “좌파”를 의미한다. 반면 시장경제와 민영 기업을 중시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추구하는 “우파”를 “개혁파” 또는 “자유파”라 부른다. 문화혁명 시기 “우파”라는 단어는 인격살해의 낙인이었기 때문에 “우파”라는 용어는 잘 쓰이지 않지만, 보수파가 왼쪽에 있다면, 개혁파가 오른쪽에 있음은 자명하다.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앞두고 2021년 6월 개장된 중국공산당 기념관. 사진/asia.nikkei.com, “Chinese Communist Party has lessons to keep from fallen dynasties.”>

그러한 맥락에서 2013년 초 집권 이래로 국제관계, 대민통제, 사상·이념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강화해온 시진핑 정권은 중국정치의 스펙트럼에서 “보수적인” “좌파” 정권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집단의 개혁 요구를 억압하며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시진핑 정권은 “보수적”이며, “사회주의 기본노선” 및 레닌주의 “인민독재”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좌파”이다. 쉽게 말해, 중국 정치에서 시진핑 주석은 “보수적 좌파세력” 혹은 “좌파적 보수 세력”의 영수라 할 수 있다.

시진핑 정권은 결코 돌연히 출현한 중국 정치의 아웃라이어는 아니다. 시진핑 정권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선 1976년 문화혁명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후부터 숨 가쁘게 전개됐던 “보수파” 대 “개혁파”의 투쟁을 통시적으로 조감해야 한다.

 

경제 자유화 추구 ‘개혁파’와 사회주의 원칙 견지 ‘보수파’의 대결

 

1978년 이래 “개혁개방”의 시대가 열리면서 중공중앙의 정치 판도는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결로 펼쳐졌다. “개혁파”는 적극적으로 경제적 자유화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정치적 민주화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면 “보수파”는 개혁개방의 속도에 제동을 걸면서 사회주의 기본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 “개혁파”의 영수는 중공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과 국무원 총리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이었다. “보수파”의 영수는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 위원회의 천윈(陳雲, 1905-1995)과 국가 주석 리센녠(李先念, 1909-1992)이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상대적으로 자유주의 성향의 “우파”였으며, 천윈과 리센녠이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좌파였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최고영도자로서 중공 총서기와 국가주석의 위에 군림했던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설계자로서 진취적인 실용주의 경제 개혁을 주도했다. 덩샤오핑은 그러나 일방적으로 “개혁파”를 지지하기 보다는 보수파와 개혁파를 모두 적절히 활용했다. 1980년대 초기 덩샤오핑은 경제개혁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 후야오방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지만,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던 1986년 이후부터는 “보수파”에 힘을 실어 1989년 6월 4일 “톈안먼 대도살”을 방조했다. 요컨대 덩샤오핑은 “보수파”와 “개혁파”가 상호긴장 속에서 길항(拮抗)하는 중공중앙의 대립적 통일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개혁개방 시대 중공중앙의 정치는 바로 “보수파”와 “개혁파”의 끊임없는 싸움이었다.

 

 
<“당의 기본 노선을 견지하고 100년 동안 동요하지 말자!” 1992년 덩샤오핑은 “남순 강화”에서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를 기본원칙으로 천명했다. 중국 광둥성 선전(深圳)의 포스터>

짝수 해는 개혁파의 자유운동, 홀수 해는 좌파의 반격 이어졌던 시소게임

1980년대 중공중앙 “보수파”의 대표적 이론가 덩리췬(鄧力群, 1915-2015)은 1976년 이후 중국의 정치에서 묘한 현상을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1976년 마오쩌둥 사망 이후 중공중앙의 정치에선 짝수 해에는 개혁파의 자유화 운동이 일어나고, 홀수 해에는 이에 대한 좌파의 반격이 뒤따르는 흥미로운 주기성(週期性)이 발견된다. 이후 중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지식인 양지성(楊繼繩, 1940- )은 그의 저서 “중국 개혁시대의 정치투쟁”에서 덩리췬의 가설이 결코 틀리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1) 1976년(짝수 해)에는 마오쩌둥 사후 사인방(四人幇)이 전격적으로 체포되면서 문혁이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하는 놀라운 정치적 급변이 이어졌다. 반면 1977년(홀수 해)에는 당시 중공 총서기 화궈펑(華國鋒, 1921-2008)이 1950년대 마오쩌둥 노선으로의 전면 회귀를 선언하는 이른바 “양개범시(兩個凡是)”를 추진했다. 여기서 “양개범시”란 “마오쩌둥이 했던 모든, 마오쩌둥이 추진했던 모든 일은 다 옳았다”는 뜻으로 당시로선 가장 극단적인 좌파 노선의 모토였다.

 

 
<1978년 베이징 시단의 민주장 운동. 사진/ chinadaily.com.cn, “China during the Early Days of Reform.”>

2) 1978년(짝수 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구호 아래 덩샤오핑이 주도하는 “진리(眞理) 표준 토론”이 일어나서 마오쩌둥 시대를 비판하고 정리하는 대대적인 정치 개혁의 움직임이 일었다. 이에 호응한 베이징 시민들은 시단(西單)의 벽에 수많은 대자보를 붙이며 민주적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이른바 “민주장(民主墻) 운동”을 일으켰다. 1979년(홀수 해),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인민민주독재, 중공의 영도적 지위,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마오쩌둥 사상 등 “4항의 기본원칙”을 발표한 후, “민주장 운동”에 연루된 다수 자유파 지식인들을 검거했다.

3) 1980년(짝수 해), 후야오방이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선발되면서 개혁파 지식인들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광명일보(光明日報)>>를 위시한 여러 언론에 자유파 지식인들의 시론이 발표되었다. 1981년 (홀수 해), 자유파의 준동에 격분한 천윈은 보수파를 규합해서 자본주의 자유화를 비판하는 이념투쟁을 개시했다.

 

4) 1982년(짝수 해)에는 다시 중앙정치에서 개혁파가 득세하면서 비판적 지식인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특히 이후 마오쩌둥을 악인이라고까지 혹평한 철학자이자 언론인 왕뤄수이(王若水, 1926-2002)의 인도주의 관련 논평이 널리 읽혔다. 1983년(홀수 해)에는 이에 대한 반발로 좌파 인사들이 사회주의적 명령경제를 보위하는 논설을 다수 발표했다.

 

5) 1984년(짝수 해) 봄에는 덩샤오핑이 남방의 특구를 돌면서 개방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중공중앙은 연안 지역 14개 도시를 개방했다. 1985년(홀수 해) 7-9월 천윈은 공산주의 이상을 옹호하며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권력투쟁의 여파로 개혁파의 주동적 인물이 두 명 중앙정치에서 낙마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6) 1986년(짝수 해) 덩샤오핑이 다시금 개혁개방의 당위를 역설했고, 곧 정치개혁의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이 해는 자유파 지식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치 개혁의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2월 전국 각지에선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이어졌다. 1987년(홀수 해)에는 중공중앙 총서기 후야오방이 낙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좌파들이 대대적인 정치공세를 벌이면서 일군의 자유파 지식분자들은 당적을 박탈당했다.

 

7) 1988년(짝수 해) 여름 이후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비판적 지식인인 팡리즈(方勵之, 1936-2012) 등이 본격적으로 중공 정부를 비판하는 강력한 자유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베이징의 대학에선 토론회, 연구회 등 “자유 민주” 인사들의 정치활동의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리고 1989년(홀수 해) 6월 4일 베이징 톈안먼 대도살이 발생하면서 좌파의 극단적 활약이 이어졌다.

 

 
<1989년 4월 후야오방을 추모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베이징 톈안먼 광장의 시민과 학생들. 사진/ Jian Liu, https://www.nytimes.com/2019/05/30/world/asia/tiananmen-square-protest-photos.html>

1976년부터 1989년까지 중국 정치에서 발견되는 이른바 두해 주기로 반복되는 이른바 쌍년(雙年)의 주기성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신의 섭리일까? 역사의 숨은 법칙일까? 그보다는 중공중앙이 마오쩌둥 사후 개혁개방의 과정에서 갈팡질팡 좌지우지 왔다갔다 방황했음을 보여준다. 개혁파가 득세를 하면, 이듬해는 어김없이 보수파의 반격이 이어졌다.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던 덩샤오핑은 1989년 6월 “톈안먼 대도살”로 커다란 정치적 오점을 남겼지만, 1992년 보수파의 반동 정치가 극에 달하자 남방의 6개 도시를 돌며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른바 “남순 강화”는 중앙정치의 흐름을 단번에 역전시키는 결정적 계기였다.

그 후로 20년이 지나서 권좌에 오른 시진핑은 지난 10년의 통치 과정에서 조야의 반대세력을 모두 제압하고 당헌의 임기 규정까지 폐기하는 강력한 일인지배의 기반을 완성했다. 개혁개방을 주도했던 덩샤오핑과는 달리 시진핑의 통치는 보수파 일색임을 부정할 수 없다. 호주의 언론인 맥그래거(Richard McGregor)이 지적하듯, 정적도, 비판자도, 후계자도 보이지 않는 일인지배는 실상 오늘날 중국의 가장 큰 약점일 수도 있다.<계속>

 

 
<1989년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중국의 언론인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사진/Carl Ho,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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