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2021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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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종이 위의 집 / 김응숙

종이 위의 집 김응숙 사무실의 문을 열기가 망설여진다. 공인중개소 앞 사 차선 도로 너머에는 초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단독주택들이 좁은 골목을 끼고 어깨를 맞대던 오래된 동네였는데 재건축이 된 모양이다. 하긴 전철역이 가깝고 나름 학군이 좋은 곳이니 개발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새 아파트는 한낮의 햇살 아래서 거대한 트리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반짝거리는 아파트가 깨끗이 닦아놓은 사무실 통유리에 그대로 얼비친다. 통유리에는 일정한 크기의 흰 종이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종이마다에는 ‘00 아파트 00평, 00억’ 등의 매매정보가 쓰여 있다. 평수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정 가격 아래의 아파트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통유리가 또 하나의 아파트 단지이기라도 한 것처..

댓글 좋은 수필 2021. 9. 2.

23 2021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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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당선 수필 [2021년 흑구문학상] 구멍 늧을 읽다 / 김원순

[2021년 흑구문학상] 구멍 늧을 읽다 김원순 떨켜가 드디어 잎자루의 물구멍을 닫아버렸다. 체념한 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별리의 가을이 못내 아쉬워 흘리는 나무의 눈물이다. 열정의 구멍이 스르르 닫혀버린 내 몸에서 떨어진 잎들이 생의 겨울이 올까 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의지, 도전, 끈기, 인내, 용기, 목표 그리고 믿음의 잎들. 결기의 겨울을 건너기 위해 잎자루를 야멸치게 내치는 수문장, 떨켜. 떨켜가 수문의 기척을 낼 때까지 봄은 준산빙벽을 오르내리며 오기와 극기로 심신을 단련시킨다. 눈 속의 노란 복수초와 매화의 안위를 살피는 눈, 동장군보다 매서운 봄이다. 내 열정의 구멍마다 풍구를 돌려보지만 기척도 않는다. 구멍이 한 생명을 키우거나 버린다는 것을 생의 구멍을 진중히 여닫아본 사람만이 안다..

18 2021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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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마당가의 집 / 김응숙

마당가의 집 김응숙 ‘부산시 동래구 망미동 00번지’ 어린 시절 살았던 집 주소이다. 수영강이 광안리 바닷가로 흘러들기 전 오른쪽으로 흘깃 눈을 돌리면 보이는 나지막한 산 아래에 들어앉은 동네였다. 남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면 팔도시장과 5번 버스 종점이 있었다. 그곳에서 큰길을 건너면 광안리의 푸른 바다로 이어졌다.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갈대가 우거진 수영강둑이 길게 누워있었고, 그 너머로 수영비행장이 보였다. 강둑에는 저녁마다 핏빛보다 더 짙은 노을이 지곤 했다. 그 동네는 부산의 변두리 중의 변두리였다. 겨우 전기가 들어와 있었을 뿐 신작로에서는 언제나 먼지가 풀풀 날렸다. 동네 앞 넘실거리는 보리밭 건너 저 멀리 큰 공장의 지붕이 보이고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들이 보였다.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

댓글 좋은 수필 2021. 7. 18.

24 2021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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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첫사랑 / 김응숙

첫사랑 김응숙 모든 일에는 중개자가 있기 마련이다. 눈이 동그랗고 피부가 까무잡잡했던 혜경은 나보다 한 살 어린 동네 친구였다. 그녀의 집은 동네 맨 위에 있었는데, 일층짜리 양옥이었지만 대문 입구에 커다란 파초나무가 서 있는 제법 부잣집이었다. 나는 그녀의 공부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가끔씩 그 집을 드나들었다. 파초그늘을 지나며 마주보이는 창문의 노란색 커튼은 언제나 조금 열려 있었다. 그 방은 그녀 오빠의 방이었다. 사업을 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해외출장이 잦은 모양이었다. 거실 전면을 차지한 장식장에는 각양각색의 양주병이 즐비했다. 그 아래에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형에서부터 허리에 풀치마를 두른 토인인형까지 줄을 지어 서있었는데, 세상의 인종은 다 모아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맨 위 칸에는 검은색..

댓글 좋은 수필 2021. 3. 24.

05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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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당선 수필 [2021 한국경제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인테그랄 / 유성은

[2021 한국경제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인테그랄 유성은 남편과 나는 고집이 세고 까다롭고 자존심이 강하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단 세 가지 공통점이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운명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너무 평범한 만남을 더 그럴싸한 의미로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편의점 가판대에서 색다른 과자봉지를 한 번쯤 집어 보고 싶은 유혹 같은 것이었다. 그의 썰렁한 농담에 내가 박수를 치며 웃게 되었을 때, 차비를 아끼려고 늘 걸어서 다니던 그가 불현듯 저녁을 사겠노라 했을 때 우리의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뜨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재채기만큼이나 숨겨지지 않았던 설렘, 상대의 의미 없는 행동에도 심장을 쓸..

05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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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당선 수필 [2021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고주박이 / 김순경

[2021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고주박이 김순경 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고즈넉한 산길을 걷다가 죽 늘어선 아름드리 고목을 만난다. 빗물이 천천히 몸피를 적시자 늙은 산벚나무가 까맣게 변한다. 겨우내 봄을 기다리던 꽃망울들이 가지마다 터질 듯 부풀어 있다. 세상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어도 때맞춰 꽃을 터뜨리려는지 마지막 기운을 모은다. 봄을 알려주는 노거수 사이에 그루터기 하나가 눈길을 끈다. 초라한 몰골이 지난 세월을 말해준다. 살점이 뜯겨나간 조장鳥葬처럼 곳곳에 응어리진 뼈마디가 드러난다. 상주도 백관도 보이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썩어간다. 껍질이 벗겨지고 없는 거무스름한 속살이 조금씩 삭아 내렸다. 억센 뿌리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던 우듬지도 기억 속에만 남..

05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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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당선 수필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안아주는 공 / 김미경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안아주는 공 김미경 그 집에서 아이가 주로 지내는 놀이방은 나의 일터다. 놀이방 한 켠에 공이 오종종히 모여 앉아 있다. 한데 어우러진 노랑, 초록, 빨강, 분홍색 공이 줄기를 자른 꽃송이를 둥글게 묶어 만든 플라워 볼처럼 보인다. 공을 집어 들어 바닥에 던진다. 저녁 강 물 위로 뛰어오르는 피라미처럼 탄력적으로 튀어 오른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이 바닥을 칠 때, 공은 제 몸을 딛고 일어난다. 방바닥을 박차고 오른 공이 아치형 발걸음을 뗀다. 그러다 냅다 달음질친다. 공이 달려가서 아이를 안아준다. 공을 품에 안은 네 살짜리 아이 얼굴에서 분홍색 실타래 웃음이 풀려나온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 두 눈에 미음 돌 듯* 그늘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가 아니던..

03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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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당선 수필 [2021년 전북도민일보 수필 당선작] 초배지 / 우마루내

[2021년 전북도민일보 수필 당선작] 초배지 우마루내 시어머니가 화장대 앞에서 당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칠십 년의 세월이 말해주듯이 하염없이 거친 얼굴이다. 한여름의 밭에서 기미가 올라왔고, 스킨과 로션 없는 생활을 해오면서 요철이 심해졌다. 형광등에 반사될 때마다 초배지(初褙紙) 같은 피부가 아른거린다. ​ 초배지는 초배할 때 사용되는 종이다. 초배가 정식으로 도배하는 정배 전의 애벌도배라면 초배지는 애벌벽지다. 초배지의 특성상 보이지 않는 장소에 작업하기 때문에 벽지보다 허름한 신문지나 부직포가 사용된다. 그러나 아무리 허름한 종이여도 초배하지 않은 벽은 매끄럽지 않고 벽지가 쉽게 떨어진다. 외유내강이라는 한자성어처럼 외부가 말끔하기 위해서 초배지가 내부에서 단단하게 받쳐주어야 하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