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2021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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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첫사랑 / 김응숙

첫사랑 김응숙 모든 일에는 중개자가 있기 마련이다. 눈이 동그랗고 피부가 까무잡잡했던 혜경은 나보다 한 살 어린 동네 친구였다. 그녀의 집은 동네 맨 위에 있었는데, 일층짜리 양옥이었지만 대문 입구에 커다란 파초나무가 서 있는 제법 부잣집이었다. 나는 그녀의 공부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가끔씩 그 집을 드나들었다. 파초그늘을 지나며 마주보이는 창문의 노란색 커튼은 언제나 조금 열려 있었다. 그 방은 그녀 오빠의 방이었다. 사업을 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해외출장이 잦은 모양이었다. 거실 전면을 차지한 장식장에는 각양각색의 양주병이 즐비했다. 그 아래에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형에서부터 허리에 풀치마를 두른 토인인형까지 줄을 지어 서있었는데, 세상의 인종은 다 모아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맨 위 칸에는 검은색..

댓글 좋은 수필 2021. 3. 24.

05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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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당선 수필 [2021 한국경제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인테그랄 / 유성은

[2021 한국경제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인테그랄 유성은 남편과 나는 고집이 세고 까다롭고 자존심이 강하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단 세 가지 공통점이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운명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너무 평범한 만남을 더 그럴싸한 의미로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편의점 가판대에서 색다른 과자봉지를 한 번쯤 집어 보고 싶은 유혹 같은 것이었다. 그의 썰렁한 농담에 내가 박수를 치며 웃게 되었을 때, 차비를 아끼려고 늘 걸어서 다니던 그가 불현듯 저녁을 사겠노라 했을 때 우리의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뜨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재채기만큼이나 숨겨지지 않았던 설렘, 상대의 의미 없는 행동에도 심장을 쓸..

05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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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당선 수필 [2021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고주박이 / 김순경

[2021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고주박이 김순경 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고즈넉한 산길을 걷다가 죽 늘어선 아름드리 고목을 만난다. 빗물이 천천히 몸피를 적시자 늙은 산벚나무가 까맣게 변한다. 겨우내 봄을 기다리던 꽃망울들이 가지마다 터질 듯 부풀어 있다. 세상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어도 때맞춰 꽃을 터뜨리려는지 마지막 기운을 모은다. 봄을 알려주는 노거수 사이에 그루터기 하나가 눈길을 끈다. 초라한 몰골이 지난 세월을 말해준다. 살점이 뜯겨나간 조장鳥葬처럼 곳곳에 응어리진 뼈마디가 드러난다. 상주도 백관도 보이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썩어간다. 껍질이 벗겨지고 없는 거무스름한 속살이 조금씩 삭아 내렸다. 억센 뿌리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던 우듬지도 기억 속에만 남..

05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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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당선 수필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안아주는 공 / 김미경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안아주는 공 김미경 그 집에서 아이가 주로 지내는 놀이방은 나의 일터다. 놀이방 한 켠에 공이 오종종히 모여 앉아 있다. 한데 어우러진 노랑, 초록, 빨강, 분홍색 공이 줄기를 자른 꽃송이를 둥글게 묶어 만든 플라워 볼처럼 보인다. 공을 집어 들어 바닥에 던진다. 저녁 강 물 위로 뛰어오르는 피라미처럼 탄력적으로 튀어 오른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이 바닥을 칠 때, 공은 제 몸을 딛고 일어난다. 방바닥을 박차고 오른 공이 아치형 발걸음을 뗀다. 그러다 냅다 달음질친다. 공이 달려가서 아이를 안아준다. 공을 품에 안은 네 살짜리 아이 얼굴에서 분홍색 실타래 웃음이 풀려나온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 두 눈에 미음 돌 듯* 그늘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가 아니던..

03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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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당선 수필 [2021년 전북도민일보 수필 당선작] 초배지 / 우마루내

[2021년 전북도민일보 수필 당선작] 초배지 우마루내 시어머니가 화장대 앞에서 당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칠십 년의 세월이 말해주듯이 하염없이 거친 얼굴이다. 한여름의 밭에서 기미가 올라왔고, 스킨과 로션 없는 생활을 해오면서 요철이 심해졌다. 형광등에 반사될 때마다 초배지(初褙紙) 같은 피부가 아른거린다. ​ 초배지는 초배할 때 사용되는 종이다. 초배가 정식으로 도배하는 정배 전의 애벌도배라면 초배지는 애벌벽지다. 초배지의 특성상 보이지 않는 장소에 작업하기 때문에 벽지보다 허름한 신문지나 부직포가 사용된다. 그러나 아무리 허름한 종이여도 초배하지 않은 벽은 매끄럽지 않고 벽지가 쉽게 떨어진다. 외유내강이라는 한자성어처럼 외부가 말끔하기 위해서 초배지가 내부에서 단단하게 받쳐주어야 하는 것이..

01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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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당선 수필 [2021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달항아리 / 이다온

[2021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달항아리 이다온 진열대 위로 둥실 달이 떠오른다. 은은한 불빛이 바닥에 고인다. 조명을 받은 항아리는 방금 목욕하고 나온 아낙네 같다. 천의무봉의 살결이 백옥처럼 희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데도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진다. 자세히 보면 달항아리는 좌우균형이 맞지 않는 비대칭이다. 보름달이 약간의 기울기를 가진 것처럼. ​ 가슴이 사라졌다.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왼쪽 가슴을 확인했다. 불룩하게 솟아있던 자리가 분화구처럼 푹 꺼져 있다. 움푹 팬 곳에 낯선 어둠이 만져졌다. 두꺼운 밴드가 선홍색 칼자국을 애써 가렸다. 와락, 울음이 밀려왔다. 재빨리 환자복을 내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덮었다. ​ 이태 전이었다. 부산스럽게 외출준비를 하고 있을 때 왼쪽 가슴에서 ..

24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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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물고기의 시간 김정화

물고기의 시간 김정화 목포 바다에 갈치가 터졌다는 소식이다. 태풍이 한차례 바닷물을 뒤집어놓아 물고기들의 이동에 낚시꾼들은 이미 들떠 있다. 밤낚시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거창한 이유야 없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끈들을 잠시나마 벗어 던지고,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에 자신을 풀어놓고 하룻밤쯤 있으면 삶에 위로가 될 것 같았다. 기회는 쉽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낚시 동행 광고를 내었지만 태공들은 한결같이 옆에 있으면 조황에 방해가 된다는 대답이었다. 방법은 따로 있었다. 초보도 가능한 낚싯배가 있다는 것이다. 뱃삯만 지불하면 미끼는 물론 낚싯대도 빌려준다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낚싯배 신청을 하고도 이런저런 핑곗거리가 생겼고 또 태풍에 미루어졌다가 겨우 나의 시간에 맞추어 출조일을 잡았다. 난생처음 ..

댓글 좋은 수필 2020. 12. 24.

12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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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몸짓 / 김응숙

몸짓 김응숙 그해 1월, 우리 집 단칸방에 달력 하나가 걸렸다.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우수수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벽에 발라진 얇은 벽지에는 희미한 회색 꽃무늬가 엇갈리며 그려져 있었다. 그 벽지에 빈대자국 같은 붉은 녹물을 남기며 박힌 못에 기다란 열두 장의 달력이 걸린 것이다. 보통은 국회의원의 얼굴이 동그랗게 실린 벽보 같은 커다란 한 장짜리 달력이었지만, 어쩌다 색색의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절을 하거나 그네를 타거나 하는 달력이 걸리기도 했다. 운이 좋은 해는 아랫동네 쌀가게에서 주는 하루에 한 장씩 뜯어내는 일일달력이 걸리기도 했는데, 그런 해는 노상 그 가게에서 외상으로 쌀을 가져오던 어머니가 설을 맞아 어쩌다 그 외상값을 다 갚았던 해였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해 우리 집 ..

댓글 좋은 수필 2020. 1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