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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총격사건에 이제라도 언론과 국회의원들의 관심을 바라며!
‘세상의 불운들은 대부분 내 운명을 관통하고 행운들은 모조리 비껴 지나간다’고 한, 한사 정덕수님의 말씀 그대로 불운은 내 가족들의 행복을 무참히 관통하고 말았습니다. 세종시다 4대강이다 난리들이지만, 용산참사가 이제야 합의를 보고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인터넷과 뉴스로 보며 마음은 어쩔 수 없이 그이와 아이들 걱정부터 하게 됩니다.
오늘(1월 8일) 6인실로 병실을 옮겼습니다. 좀더 편하게 그를 간병해 주고 싶지만 물리치료 다녀온 사이 침대 위에 놓여진 병원비중간정산표의 숫자를 보면 ㅡ지금까지의 병원비 1700여만원ㅡ 어쩔 수 없이 한숨만 나도 모르는 사이 절로 납니다. 완쾌는 요원한 일이고 최소한 그이 혼자 거동을 할 수 있기까지도 기약없이 계속될 일이기에, 한 푼이라도 더욱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불편함을 걱정하는 마음보다 앞섭니다. “6인실이라 해도 위치가 좋아 방에서 제일로 넓은 자리네요”란 말로 그와 나를 다독거려 봅니다.
이제 겨우 6인실로 옮겼을 뿐인데 벌써 걱정입니다. 같은 병실의 환자 대부분이 뇌의 손상을 입은 환자입니다. 폐암말기의 어르신도 계신데 여기 다인실로 옮겨 오자마자 벌써 병원에선 퇴원을 얘기한다고 합니다. 국립병원이라 입원기간이 길지 않아요. 다른 요양 병원이나 재활병원을 알아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이가 옮겨온 침대의 전 주인도 역시 완치되어서 나간게 아니라 합니다. 입원일수가 너무 길어져 고향의 다른 병원으로 어쩔 수 없이 옮긴 거랍니다. 척추손상을 입은 환자는 경과를 좀더 지켜보기 때문에 뇌손상환자에 비해 입원일수가 길다고는 하지만, 이제 이 서울대학병원을 나서고 나면 뼈가 부러지거나 응급상황이 생기지 않는 한 다시는, 재활을 목적으로 입원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치료기간이 기약이 없는 우리로서는 조금이라도 더 이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는 게 나으므로 솔직히 퇴원을 해야 한다는 말만으로도 섭섭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벌써부터 퇴원이 걱정입니다. 여기서 나가고 나면 국립재활원에서도 국립이라 3개월로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데… 어디로 다시 옮겨갈 것이며, 180일이 지난 후 후유장애 판정은 여기 서울대학병원에서 받아야 한다는데… 그 땐, 또 어떻게 여기에 다녀가야 할까요.
잠시 밖으로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이젠 인도의 턱하나, 지하철의 계단이 그냥 예사로이 봐 넘겨지지가 않습니다. 그동안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정말 많은 장애우들에겐 죄송하게도 전혀 신경조차 쓰지않았던, ㅡ일상적인 생활 속의 길들 하나하나가 모두 장애고 걸림돌입니다. 그나마 서울엔 인도로 올라서는 길의 턱이 대부분 없습니다만, 저희가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가게 될 지방의 인도는 거의 모두 턱이 있습니다. 아주 조그만 턱만으로도 휠체어를 올릴 수 없어 낑낑대며 올려야 할 것입니다. 속으론 한숨과 울음을 삼키고! 지하철입구가 계단으로만 되어 있으면 참… 도대체 그사람과 같은 사람은 살아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서럽고 암담하기만 합니다. 먹고싶은 음식이 있어도 그럴테지만, 사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 있어도 가게가 계단으로 된 이층 삼층에 있거나 지하에 있다면 꿈도 꾸지 못하고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제가 옆에 있을 수는 없을텐데, 앞으로 살아가며 순간순간 만나게 될 이런 아무도 관심갖지 아니하는 장애물들로인해 마음을 다칠 그를 생각하면, 온 몸이 발 밑으로 빨려들어가 땅 속으로 꺼져버릴 것 같은 기분까지 듭니다. 조금만 먼 거리라도 일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힘들어 장애인 콜밴이 서울에선 운영된다기에 전화를 해보니 복지카드가 없으면 이용할 수가 없답니다. 복지카드란 사고일로부터 180일이 지나 후유장애 판정으로 장애 등급을 받으면 나오는 카드랍니다. 다가오는 설에도 그는 여전히 병원에만 있어야 하겠지요. 움직일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움직일 방법이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왜! 도대체 왜!! 그가 장애란 이름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그나마 목숨이라도 건진 걸 다행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랍니다. 그래요. 목숨을 건진 것만은 분명 다행이고, 감사한 일 맞지만 그 전에 이런 일은 없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현실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열심히 잘 살 생각만 하랍니다. 현실… 현실이라고 말하는 그들은 도대체 그이가 짊어져야 할 현실이 어떤건지 알고나 하는 소립니까?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져야 하는데, 요즘의 전 정말 그렇게 강해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습니다. 점점 더 나도 통제할 수 없을만큼… 의외의 순간에 수시로 밀려드는 서러움 때문에, 가슴 아림 때문에… 온 몸에 힘을 주며 눈물을 참아내야 합니다.
병원 복도를 걷다가 발이라도 삐끗하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감기 기운으로 새벽 도뇨시간에 일어나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울 때마다 또 억장이 무너집니다. 천년만년 건강한 몸으로 그의 곁을 지킬 수는 없을 것이기에…
‘나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없으면… 그와 내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하는 생각에 가슴이 다시 먹먹해집니다. 물론 내가 없어도 살아가겠지만,, 지금도 고단한 삶 얼마나 힘들고 아프겠습니까? 그러한 생각이 피하면 피할수록 수시로 나를 더욱 괴롭히기에 마음이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얼마전 다녀가신 블로거님들과의 인터뷰 중 “가장 힘든 일이 뭐냐는, 앞으로 바라는 것이 뭐냐”는 마지막 질문에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이들이지요. 뭐…”
그동안 없는 말수 더 없어진 그가 가슴에 품고 있었던 말이었을 겁니다. 전화통화 할 때마다 아빠부터 찾을 만큼 아이들과 잘 놀아주었는데 이제 아이들에게 그런 것들을, 또한 건강한 아빠로서 해줄 수 있는 일들을 해줄 수 없음을 가슴아파하는 그입니다. 장애인이란 이름으로 자라나는 애들에게 상처는 주지않을까,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 미리 걱정하는 그입니다. 한번씩 힘들어하는 나의 두 볼을 감싸고 가만히 들여다 보며 눈으로 나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말해주는 그입니다.
왜 그가 이런 미안함을 가져야만 함니까? 왜 그가 이런 걱정을 해야만 합니까?
아무도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미안하다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아이들과 저와 그리고 세상을 대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요. 여러분들의 힘 하나, 하나를 저희에게 보태주십시요. 한 개인이 하기엔 너무 벅찬 일임을, 도저히 한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임을 그동안 철저한 무관심속에서 뼈져리게 느낀 저희입니다. 사이판에서는 연락을 끊은 상태이고, 여행사도 역시 아무 얘기가 없습니다. 정부는… 내 나라 대한민국 또한 한낱 하나의 서민일 뿐인 저희를 버 · 렸 · 습 · 니 · 다.
이 잊지 못할 시간들을 나중에 아이들과 둘러앉아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세상은 참 살 만한 곳이며, 내 나라 대한 민국은 자랑스러운 조국이었음으로 회상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께서 도와주시고 만들어주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하소연 할 곳 없는 저에게 힘을 낼 수 있도록 여러분 정말 도와주십시요. 이제 영원히 스스로 걸을 희망이 없는 그이, 그리고 제 어린 것들의 엄마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요.
국민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만드는 정부는 이미 권력이 아니다. 고객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고, 발생한 사건에 대해 책임회피를 하는 기업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피해자 가족 카페 : 사이판 총격사건ㅡ그 후 더 붉어진 눈물’ ☜위로와 응원의 글을 남겨주세요.
※다음 아고라 청원 : ‘사이판 총격피해 한국인에게 대책을’ ☜서명에 참여해주세요.
아래는 현재 이 사건의 해결에 힘을 보태고 있는 블로거와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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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3시 반쯤 시작된 수술이 24일 새벽이 된 조금전 12시 10분경 끝나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2시간이면 끝난다던 수술이, 속절없는 시간을 내 몸 속의 피를 말렸습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초조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드리며 무사히 끝나길… 정말 무사히 끝나기만을 빌었습니다. 오늘 수술 내용은 대동맥을 막고 파편들을 제거할 계획이나 정확한 시술 내용은 열어봐야 상황을 알 수 있으므로 수술시 결정할 것이다고 들었습니다. 수술로 파편들을 제거하고 혈관들을 꿰매더라도 다시 터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인조혈관으로 대체해야 할 상황이 생길 수 있답니다. 이 시술은 완전히 무균상태로 되어야 할 시술이지만, 총알들이 원래 깨끗한 것들이 아니라 여러 균들에 감염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큰데, 인조혈관일 경우 감염되면 더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경우들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결과는 끝내 제 혈관끼리 이을 수 없어 인조혈관을 삽입했기에 감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빌어야하는 상태인 거지요. 수혈도많은 양을 받아야 하고, 폐상태도 좋지 않다는데 더욱 기막힌 일은 장이 부어 또 닫지를 못하고 열린 채로 중환자실에서 붓기가 가라앉기까지 지켜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술을 할 내용을 듣던중 “장이 부으면 장유착이 있을수도 있다던데…”라고 걱정하자, 장유착은 있을 것이며 지금은 우선 생명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거기에만 집중하자는 대답과 함께, 총알이 박힌 자리가 콩팥과 하반신으로 가는 혈관들이 다발로 갈라지는 시점이라 더욱 어려웠으며, 수술을 위해 장시간 피가 통하지 않게 했기 때문에 신장도 나빠졌을 것이라 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에게,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들이 생겨야 합니까? 아무리 이해해보려해도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은 동정을 얻기 위해서도 이해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제발 빌건데, 잠시라도 진심으로 그의 완치를 기도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생기면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게 회복돼서 내 곁으로, 그리고 아이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가닥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나에게 자꾸만 멈추지 않고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까?
돈이 많아서 팔자좋게 외국으로 놀러다닐 수 있는 형편도 아닙니다. 2005년 늦은 결혼을 하고 남편의 친구들끼리 부부계를 만들어 2006년부터 매달 한 가구당 4만원씩 모았습니다. 남편들이 40세가 되는 해에는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우리도 해외여행 한 번 가보자 한 것이었습니다. 올해 2009년이 바로 신랑들 40세가 되는 해였습니다. 10월까지 곗돈을 모아 비수기인 11월에 사이판으로 출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계원들 중에는 그 흔한 신혼여행 한 번 외국으로 못 간 사람도 많고, 모두 직장생활에 맞벌이도 많고 자녀들도 다들 있어(여러 가지 이유로 두 눈 질끈 감고 부부들끼리만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19일 목요일까지 직장일을 하고, 밤 9시 비행기로 사이판으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23일 월요일 새벽에 한국에 도착해 월요일부터 출근할 수 있게끔 일정을 잡아, 주 5일 근무자라면 금요일 하루만 직장휴가를 내어 조금이라도 덜 눈치보고 다녀오게끔해서, 피곤하긴 해도 여행을 간다는 생각에 다들 뿌듯하기도 하고 들뜬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캄캄한 새벽에 사이판 공항에 도착해 휑한 거리를 지나 숙소에서 대충 눈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정말 소태같이 짠 베이컨을 아침으로 먹고는 머슥거리는 속을 달래며, 서로 쳐다보고 그래도 정말 잊지못 할 즐거운 여행으로 만들자고 나선 길이었습니다. 10시 출발시간을 조금 넘겨 숙소에서 출발해 관광지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었습니다. 채 40분이나 지났을 10시 45분경 참으로 어이없고, 꿈에서도 상상조차 못한 총격사건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냥 전쟁유적지이니 특별한 폭죽이벤트라 생각했을 뿐이고, 뜨거운 것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고 땅에서 튕겨 오를 때도 그것들을 피하며 생각했습니다. ‘참 리얼하게도 하네. 위험할텐데’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총알이고, 그 총탄에 내 남편이 쓰러질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누구에게 가서 멱살이라도 붙들고 소리 지르며, 누구에게 가서 하소연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이판… 사이판에서 비행기 내줬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 남편이 죽지 않고 여기서 아직 살아있는 거 맞습니다만, 가장 안전하다고 간 곳에서 상상조차 못한 총에 맞아 이지경이 됐는데 고맙다고만 해야할까요? 사경을 헤매는 이 와중에 ‘비행기 띄워줘서 감사합니다’라고만 해야하나요? 사고난 후 사이판에서 제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뭔 줄 압니까. 여기서 이런 사건이 처음이라 처음이라 … 처음이라… 처음이라… 그 소리 지겹도록 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총맞은 제남편이 처음으로 비행기 타고 고국으로 돌아왔나 보네요.
처음이라서 시내에서 5분거리 밖에 안되는 관광지에서 전화기도 안 터져 구급차도 못부릅니까?
처음이라 목이 터져라 구조요청을 해도 한참만에 주변사람들(가이드와 일행)이 직접 차로 옮겨 병원으로 갔음에도, 응급실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있지도 않았습니까? 고함을 지르고 울부짖어도 느긋하게 간이침대 밀고 나와, 처음이라 응급실 같지도 않은 입구 첫 방에 사람 들여다 놓고, 이사람 저사람 다 들락거리며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손도 대지 못한답니까? 병원에 단 2명밖에 없는 의사 중 한사람이 드디어 수술에 들어가기까지, 그것도 CT한장 찍지못하고 급하게 들어가야만 했다던 수술이 병원에 간지 한시간 반이 넘어서야 시작한 수술입니까?
처음이라 초동수사하는 경찰도 무엇을 물어볼지 잘 모르며, 경찰에게 했던 말 관광청 사람에게, FBI에게, 또 누군지 기억도 안나는 이사람 저사람에게 5번이고, 6번이고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해야만 했습니까?
처음이라 총상 입은 사람,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다됐다 회복실로 들어간다”했다가, “중환자실로 들어간다”했다가, “아직 아니다”고 했다가, 집도의가 나와서 “수술 잘됐다”했답니까? “언제 중환자실로 옮겨지냐”니까 “수술이 덜 끝났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했다가, 한참 기다린 후에 수술실 옆 작은 방으로 들어오라기에 들어갔더니, “총알은 다 꺼냈다. 최선을 다했지만 총알이 박힌 위치가 너무 어려운 위치라 하반신은 못쓰게 될 확률이 90%지만 희망을 잃지마라. 유감이다”했습니다. 이 말에 “얼굴이라도 한 번 보자”니까 “아직 마무리가 덜 끝났으니 잠시 기다리라”더니, 또 한참을 기다리니 돌아와서 한다는 말이, “장이 부어 배를 닫지 못했다. 4~5일 경과 지켜보고 난 후 장붓기가 가라앉으면 봉합수술을 하고 안정을 취한 후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텐데, 기간이 적어도 1~2주일은 걸릴거라”하고…
처음이면 그렇게 꾸물댈 시간에 바로 옆 미군기지가 있는 괌, 적어도 총상환자가 처음은 아닌 곳으로 보냈어야 옳은 것 아닙니까? 자신 없으면 자문이라도 구했어야죠! 그 사람은 나에게, ‘그 사람이 한 시술이 최선이며 그 방법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게 했습니다만, 한국에 오니 뭐라는 줄 아십니까?
“그쪽에서 응급처치는 잘해뒀더군요”입니다.
최선을 다했고 그 방법밖에 없었으며, 그 시술로 1~2주 그것도 빠르면 1~2주, 아니면 더 길게 사이판에서 안정을 취하고 돌아갈 수 있다던 그 것이 <응 급 처 치>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 말 듣고, 사이판에서 무작정 기다렸으면…
네, 안정ㅡ 취했겠지요. 영원히!
아주, 아주ㅡ 영 · 원 · 히 말입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지만 그래도 ‘살았구나’하고 눈물로 10%에 희망을 걸고 기도하고 있던 중입니다. 오후 늦게 하나투어의 통역과 교대할 관관청통역이 왔을 때, 마침 중환자실에 있다가 잠시 나와 만난 일행들과 이야기 하던 중이었는데 일행들은 “총알을 못꺼냈다고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통역에게 “한번만 가서 의사에게 물어봐 달라”니까, “같은 의사가 그 사람에게는 총알을 못빼냈으며, 앞으로 영원히 하반신을 못쓰게될거라고 했다”는 겁니다. 정말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얼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 때, 한국말을 하는 FBI가 와서 인터뷰 하겠다는데(낮에도 왔을 때 여기 경찰이 수첩에 다 적어 조사해 갔으니 가서 물어보라고 돌려보냈던 사람이 다시와서 처음부터 말을 해야만 한다해서), 복도에서 반쯤 나간 정신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의사가 마침 퇴근한다고 지나가기에 급히 “저 의사가 집도의”라며 잠시 세워서 그사람에게 뭐라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무언가를 물어보기에, “다른 거 말고 꼭 하나만 물어봐달라”고 FBI에게 부탁했습니다. “왜 나에게는 이렇게 말을 해놓고, 통역에게는 그렇게 희망없이 말했느냐? 도대체 뭐가 진실이냐”고 말입니다.
FBI가 들려준 대답이 뭐라는줄 아십니까? “자기는 척추전문외과의가 아니라 척추에 손 댈 수 없었으며, 제 남편은 생존확률이 50%다”라는 겁니다. 그것도 처음있는 사건이라 그렇습니까?
그 의사도 미국에서 왔다기에 저는 정말 촌사람답게 실력있는 사람으로 믿었더랬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기에 며칠 기다려 봉합수술이 끝나고, 며칠 지나고 안정이 되면 돌아오면 될 줄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있다간 사람 죽겠구나’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나도 뉴스들을 통해서 ‘우리나라 정부가 외국에서 발생한 한국인들의 일에 건성이고 무관심하다’고 알고 있었기에, 낮에 온 사이판영사라는 사람도 대면대면하다가 -어차피 아무것도 안해줄테니깐- 그날 밤에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사이판에 있던 한국인들이 -적어도 병원에 있던 사람들은 다 놀라더군요) 괌 총영사가 “유감입니다”라고 전재한 뒤 뭐라뭐라면서 “가기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를 붙잡고 “최선을 다한다는 말만 하지말고 당신도 알지않느냐 같은 병도 누구에게 진료받으면 깨끗이 나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받으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여기 있는 의료진도 실력이 좋겠지만 나는 믿을 수가 없다. 제발 기회를 달라. 저 사람 2살 4살 아이들이 있다. 나 혼자 키울 자신 없다 제발 살려 달라 바로 옆 괌에 미군기지가 있지 않느냐? 거기엔 총상을 다뤄 본 사람도 많을 것이니 거기 의사라도 불러달라. 한국에 갈 수있는 상태라면 한국에 가게라도 해달라 제발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마음이 진정이 안 되어 오늘은 여기서 글을 줄입니다. 나중에 다시 쓰겠겠습니다. 사이판에서 더욱 어이없던 일들과, 여기 도착해서… 그리고 진행되는 일들을…
이젠 누가 읽어보든, 아니든… 뭐라 하든, 말든… 이것이 그의 사고 당하기 직전의 여행에 관한 기록이며, 동시에 뭐라도 하고 있다는 무능한 나에 대한 조그만 위로로 이 글을 계속하려 합니다.
아울러 여러가지로 신경써 주신 하나투어 관계자분들과, 사이판 관광청장님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합니다. 서현주씨, 자원해서 봉사해 준 박성진씨, 괌에서 와준 의사와 간호사 캐런, 그리고 괌총영사님과 사이판영사님께도. 처음 국내에 소식을 알려주신 YTN관계자분들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특별히 정말 친절하게 애써주시고 계신 서울대병원 외과, 신경외과, 혈관외과의 의사선생님들과 중환자실 간호사분들께 감사의 말씀올립니다.
2009. 11. 24. 03 :18
(※이 글은 블로그든, 카페든, 게시판이든 얼마든지 퍼가셔도 좋습니다. 널리 퍼뜨려 주세요.) 함께 한다는 것은 태산도 옮기고, 기적도 만들어 내는 법이다.
※피해자 가족 카페 : 사이판 총격사건ㅡ그 후 더 붉어진 눈물’ ☜위로와 응원의 글을 남겨주세요.
※다음 아고라 청원 : ‘사이판 총격피해 한국인에게 대책을’ ☜서명에 참여해주세요.
아래는 현재 이 사건의 해결에 힘을 보태고 있는 블로거와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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