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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실재론의 인식론적 함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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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2016. 8. 5.

 

1. 여는 말: 구조적 실재론의 두 기원

 

존 워럴(John Worrall)은 그의 1989년 논문에서, 과학의 역사상 등장하는 이론들 사이에서 보이는 존재론적 불연속성(ontological discontinuity)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론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상당한 정도의 연속성(continuity) 또한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과학적 실재론인 구조적 실재론(Structural Realism)’을 제안한다. 이전까지의 과학적 실재론이 성공적인 지칭(successful reference)’근사적 참(approximate truth)’의 개념을 실재론을 뒷받침하는 주요 논거들로 삼았던 반면, 구조적 실재론의 관점에서는 과학 이론에서 등장하는 이론적 개념들과 법칙들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태들을 지칭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구조적 실재론에 따르면 우리가 성공적인 과학이론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구체적인 대상들이 무엇인지, 그 대상들이 어떤 속성들을 갖는지가 아니다. 인간의 인지 능력의 한계 및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이론의 불완전성 때문에, 우리는 세계를 구성하는 대상들이 무엇이고 이것들이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우리가 성공적인 과학 이론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론에서 등장하는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특정한 구조다. 과학이론에서는 대개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가 수학적 방정식들로 표현되는 까닭에, 이론을 통해 드러나는 세계의 구조는 많은 경우 수학적 형식을 띤다.

 

워럴과 자하(Elie Zahar)는 이같은 구조적 실재론의 단초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왕성하게 활동을 했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앙리 뿌엥까레(Henri Poincaré)로부터 찾는다. 뿌엥까레는 저서 과학과 가설(Science and Hypothesis)에서 다음과 같은 논변을 펼친다. 프레넬의 광학 이론에서는 빛의 전파에 있어 탄성 매질인 에테르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지만, 이후 발전된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통해 빛은 별도의 매질 없이 독자적으로 전파되는 일종의 전자기장임이 밝혀졌다. 프레넬 광학 이론에서의 빛과 맥스웰 전자기학에서의 빛은 서로 전혀 다른 속성을 갖고 있는 까닭에, 우리는 프레넬의 이론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결론 내리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프레넬 이론에서 등장하는 빛 전파에 관한 수학적 방정식들을 고스란히 맥스웰 이론에서 찾을 수 있으며, 따라서 프레넬의 이론에서 등장하는 방정식들이 빛과 관련해 세계에 존재하는 특정한 구조를 수학적으로 제대로 포착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두 이론 사이에 공통된 수학적 방정식들이 등장하는 것은 일종의 기적이 될 것이다(No Miracle Argument).

 

뿌엥까레는 과학의 역사상 수많은 이론들이 등장했다가 폐기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 이론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일정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론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급격한 변동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이론들은 기본적인 수학적 형식을 공유하고 있었고, 뿌엥까레는 이러한 수학적 형식이 세계에 존재하는 구조를 진정으로 반영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갈릴레오의 역학과 뉴턴의 역학, 프레넬의 광학과 맥스웰의 광학, 뉴턴의 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역학 등과 같은 대표적인 과학사적 사례들에서 이론들 간에 일정한 수학적 구조가 보존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과학사적 사례들에 근거해서 과학이론을 통해 세계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는 인식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을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구조적 실재론이라 말하고, 뿌엥까레는 이러한 구조적 실재론을 옹호했다.

 

하지만 구조적 실재론에 대해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접근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왕성하게 활동을 벌였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뿌엥까레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세계의 구조에 접근했다. 1927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물질의 분석(Analysis of Matter)에서 러셀은 다음과 같은 논의를 한다.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세계에 관한 다양한 지각들(percepts)을 획득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지각들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을 정확히 반영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서로 구분되는(distinct) 지각들을 경험할 경우, 이 지각들을 유발시키는 세계의 원인들(causes) 또한 상이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를 더 일반화시켜서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의 경험적 지각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특정한 수학적 관계(mathematical relation)를 파악한 경우, 이러한 수학적 관계는 세계에 존재하면서 우리의 지각들을 유발시키는 원인들 사이의 관계를 마치 거울(mirror)과도 같이 반영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 우리는 세계 속의 원인들 그 자체는 파악할 수 없지만 그 원인들 사이의 관계는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감각지각들로부터 세계의 구조를 추론하는 러셀의 접근 방식을 구조적 실재론에 대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접근법이라 한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입장을 그로버 맥스웰(Grover Maxwell)의 논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통시적인 관점에서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구조적 실재론과 공시적인 관점에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구조적 실재론은 서로 공통되는 형식적 기초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양립가능하다. 과학이론들에 등장하는 수학적 방정식들은 논리적인 형식으로 표현 가능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감각지각들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과학이론의 진술들도 논리적인 형식으로 표현 가능하다. 우리는 이 둘을 동일한 논리적 형식으로 표현함으로써, 특정한 과학이론이 내부적으로 갖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수학적 관계들을 명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렇듯 과학이론의 내용을 논리화시키는 것을 램지화시킨다(Ramsificate)’고 하며, 원칙적으로 어떤 종류의 과학이론도 하나의 램지 문장(Ramsey Sentence)으로 변환될 수 있다. 램지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특정한 과학이론 은 대부분의 경우 유한한 수의 적절한 공리들로 구성된 귀결 집합(consequence class)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공식 으로 나타나고, 이 때 는 이론 의 관찰적 술어들을, 는 이론 의 이론적 술어들을 의미한다. 이 공식에 대응되는 램지 문장은 이며, 이와 같은 램지 문장은 특정한 함축적 정의들을 만족시키는 일정한 논리적 면모들(features)을 갖고 있는 몇몇의 대상들, 성질들, 관계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주장한다.” , 과학이론에 대한 램지문장은 과학이론을 존재양화(existentially quantifying)’시킨다.

 

2. 과학이론의 램지 문장화와 그 귀결: 사소한가 사소하지 않은가?

 

     워럴, 자하, 래디먼 등 구조적 실재론을 옹호하는 입장에 속한 저자들은, 한 과학이론의 램지 문장을 통해 해당 과학이론이 세계의 구조에 대해 표현하는 바를 파악할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따라서 과학이론의 램지 문장화는 구조적 실재론의 기초이자 토대라고 할 수 있으며, 어떤 이론이 어떤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론들 사이에 어떠한 구조가 어떻게 보존되는지를 파악하는 데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이론의 램지 문장의 인식론적 의의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러셀의 저작이 발표된 다음 해에 수학자인 뉴먼(Newman)은 우리가 과학이론을 램지화시킴으로써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매우 사소하다는 반론을 제기했고, 이러한 반론은 데모포울러스(Demopoulos)와 프리드만(Friedman)에 의해 재발견되어 1985년에 다시금 제기되었다. 아래에서 뉴턴, 데모포울러스, 프리드만의 반론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한 과학 이론 H를 램지 문장화 시키는 것을 라고 하자. 이론 H에 대한 공식 를 간략하게 G(Q, T)로 표현하기로 약속할 경우, 한 이론을 램지 문장화시키는 것을 (G(Q, T))*=(t)G(Q, t)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구조적 실재론의 입장에 의하면 어떤 과학이론의 인지적 내용도 H*에 의해서 완전히 포착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램지 문장을 통해서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과학이론의 영역에 대응하는 세계의 부분 영역이 갖는 기수(cardinality) 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한 과학이론을 램지 문장화시키는 것은 해당되는 과학이론의 영역(domain)과 기수가 같은 세계의 하부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 밖에 보여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특정한 관계와 구조를 통해 과학이론에 해당하는 영역의 기수가 파악되었을 경우, 이 기수를 유지하면서 해당 영역에 임의의 다른 관계와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이론의 램지 문장화는 세계가 어떠한 관계와 구조로 구성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학이론에 해당하는 영역의 기수와 대응하는 세계의 하부 영역이 존재함을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 램지 문장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인지적 내용은 사소한 것(trivial)에 지나지 않는다.

  

    위와 같은 뉴먼, 데모포울러스, 프리드만의 문제제기에 대해 구조적 실재론을 옹호하는 여러 저자들이 반론을 제시했지만 그 중에서도 봇시스(Ioannis Votsis)와 자하(Elie Zahar)의 반론은 보다 핵심적이며, 이들의 반론은 구조적 실재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우선 봇시스의 반론을 살펴보자. 봇시스에 의하면 뉴먼, 데몬포울러스, 프리드만의 문제제기는 기본적인 측면에서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한 과학이론의 영역 D에 속하는 관계들의 집합 와 구조 S A가 파악되었을 경우, 이 영역의 농도를 유지하면서 DS(구체적 구조) A(추상적 구조)와는 다른 구조 S’, S’’, , A’, A’’, 등을 부여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먼, 데모포울러스, 프리드만은 관계들의 집합 자체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과학이론이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바의 핵심은 이러한 관계들에 있다. 질량과 질량 사이의 관계, 질량과 에너지 사이의 관계, 전하와 전하 사이의 관계, 속도와 시간 사이의 관계 등 우리가 과학이론을 통해 세계에 대해서 파악하는 핵심은 이와 같은 구체적인 관계들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들은 논리적인 차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차원에서의 지지를 받기 때문에, 한 과학이론의 영역 D에 속하는 관계들이 파악되었다고 해서 그 관계들을 임의의 다른 관계들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세계의 이차적 구조를 표현하는 이러한 관계들이 세계의 일차적 구조와 일의적으로 대응한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일차적 수준의 물리적 구조에 대한 일종의 미결정성 문제(underdetermination)가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이론에 대해 가능한 복수의 관계들 중 어떤 것이 경험적으로 더 적합하고 유의미한지를 경험적 방법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관계들의 적합성과 유의미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과학이론에 대한 해석(interpretation)이 요구되고, 이러한 해석에 배경이론(background theory)이 핵심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입장이 배경이론 선택의 상대성이라는 상대주의적 입장으로 한없이 퇴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해당 과학이론이 포함하고 있는 관계들 중 어떠한 관계들이 상대적으로 더 적합하고 중요한지를 상당히 객관적인 수준에서 파악할 수 있다. 우선 과학이론에 속하는 대상들이 해당 관계를 만족시키는지의 여부를 경험적인 수준에서 점검할 수 있으며, 또한 이 이론에 대한 선행이론에서도 이와 유사한 관계가 존재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경험적 적합성 여부의 판단 및 해당 과학이론을 역사적으로 조망해 봄으로써 우리는 과학이론이 갖고 있는 특정 관계들의 적합성과 유의미성을 평가할 수 있다.

  

    자하는 뉴먼, 데모포울러스, 프리드만의 문제제기에 대해 봇시스보다 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반론을 제시한다. 만약 하나의 과학이론에 포함되는 모든 술어들(이론적 술어들과 관찰적 술어들)이 해당 이론의 맥락 안에서만 해석된다면, 이 과학이론은 일반적인 수학적 체계와 다를 바 없게 된다. 하지만 구조적 실재론자들은 과학이론이 이론적 술어들로만 구성된이 아니라, 이론적 술어들과 관찰적 술어들을 모두 포함한 로 공식화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 우리는 여전히 과학이론 내에서 이론적 내용을 초과하는 관찰적 술어들을 구분해낼 수 있으며, 그런 까닭에 특정한 과학이론은 반증가능성을 갖게 되며 경험적으로 유의미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이론적 술어/관찰적 술어의 구분은 이전의 논리경험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방식과 같은 언어적 측면에서의 절대적인 구분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모든 과학이론들에 등장하는 술어들의 이론적 성격/관찰적 성격을 평가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을 제시하지는 못하더라도, 해당 과학이론에 따라서 그 이론과 관련된 이론적 술어/관찰적 술어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으며, 이는 실제의 과학적 실천과도 부합한다.

  

    경험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데모포울러스와 프리드만은 논리학 또는 수학의 방법을 사용하여, 과학이론에 대한 램지 문장의 경험적 내용이 일군의 경험적 일반화들로 환원됨을 보임으로써, 결과적으로 램지 문장이 말하는 것은 경험적 일반화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과학이론에 대한 램지 문장은 세계에 대한 구조를 말해주지 못하며 이는 경험적 적합성(empirical adequacy)만을 보장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데모포울러스와 프리드만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자하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T가 이론적 개념을 나타내고, FK가 관찰적 개념을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식 을 생각해보자. 이 식을 램지화 시킨 문장은 이고, 이 때 가 성립한다. 데모포울러스와 프리드만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관찰가능한 개체들 에 대해 로부터 가 논리적으로 도출되어야 한다. , 은 분석적 진술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성립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진술은 해당 과학이론의 영역에 포함되는 원소들의 수가 유한한 값 n을 넘어설 경우에 늘 반증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진술은 분석적 진술이 될 수 없다.

  

    또한 자하에 의하면 이론 X와 이것의 램지 문장 X* 사이에는 인지적 차이(cognitive difference)가 있다. 만약 이러한 인지적 차이가 실제로 존재할 경우, 이는 이론적 술어와 관찰적 술어 사이가 유의미하게 구분됨을 의미하므로 데모포울러스와 프리드만의 주장은 오류임이 드러날 것이다. 이론 X로부터 램지 문장 X*가 도출된다는 것을 형식화시켜서 표현하면 (G(Q, T))(t)G(Q, t)이 된다. 이는 램지 문장 X*로부터 원래 이론 X가 도출됨을 의미하는 식 (t)G(Q, t)(G(Q, T))과 논리적으로 같지 않다. 실제로 항상 이론 X는 그것의 램지 문장에 비해 논리적으로 더 강하기 때문에(이론 X는 반증가능하지 않지만 이 이론의 램지 문장 X*는 반증가능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XX* 사이에는 유의미한 인지적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관찰가능한 영역에서는 XX*이 구분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X*X라는 일반적인 공리를 논리적으로 도출해낼 수 없다는 것이 자하의 주장이다.

  

    이상과 같이 뉴먼, 데모포울러스, 프리드만의 문제제기에 대한 봇시스와 자하의 반론을 살펴보았고, 이는 우리가 구조적 실재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점을 시사해준다. 구조적 실재론이 등장하게 된 본래의 동기는, 이러한 실재론적 관점이 겉으로 드러나는 과학이론들 간의 불연속성문제를 해결해준다는 데 있었다. 구조적 실재론은 한 과학이론에서 다른 과학이론으로의 변천 과정에서도 불변하는 일정한 요소들이 존재함을 주장하며, 이러한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당 이론의 현재적 상태뿐만 아니라 이 이론에 대한 선행 이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 한 이론을 통해서 드러나는 세계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시적인 관점 외에도 통시적인 관점이 요구된다. 물론 하나의 과학이론에 대한 램지 문장은 그 이론이 포함하고 있는 관계들과 구조가 무엇인지를 논리적으로 명시해준다는 의미에서 중요하지만, 우리가 단지 램지 문장 자체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뉴먼, 데모포울러스, 프리드만과 같이 램지 문장의 인지적 의미를 사소한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과학이론들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데 있어 통시적인 관점은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선행이론 T와 후행이론 T*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이 두 이론이 경험적으로 충분히 성공적이었는지를 평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두 이론을 램지 문장화 시킴으로써 두 이론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선행이론에 등장하면서 동시에 후행이론에도 등장하고, 두 이론 모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일군의 관계들 가 파악될 경우, 우리는 이 관계들을 통해 추정될 수 있는 구조 S가 세계의 객관적인 구조를 반영한다는 것을 상당한 수준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통시적인 분석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현재 가장 성공적인 이론 T*가 여러 문제들에 부딪치고 있을 경우, 우리는 이 이론 이후에 등장할 새로운 후행이론 T**가 기본적으로 어떤 관계들을 포함하고 있을지에 대한 추측을 할 수 있고, 이러한 추측은 새로운 과학이론을 형성하는 데 있어 상당한 발견적법 역할(heuristic role)을 담당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보자. 과학이론 X의 램지 문장 X*이 갖는 인지적 의미는 사소하다는 뉴먼, 데모포울러스, 프리드만의 주장은 옳지 않다. 한 램지 문장에서의 관찰적 술어들은 이론적 술어로 취급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그렇기 때문에 과학이론에 대한 램지 문장은 순수한 수학적 체계가 아니다), 한 이론의 램지 문장 X*과 원래 이론 X 사이에는 엄연한 인지적 차이가 존재하며 이는 램지 문장이 일군의 경험적 일반화들로 환원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론의 램지 문장은 이론들 사이에 어떤 방식으로 특정한 구조가 보존되는지를 분석하기 위한 객관적 기초만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구조적 실재론의 논의는 램지 문장에 대한 분석이라는 좁은 영역으로 한정될 수 없다.

 

3. 인식론적인 실재론에서 존재론적인 실재론으로? 래디먼프렌치의 입장에 대한 비판

 

     이론에 대한 램지 문장과 더불어 구조적 실재론에서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은 다름아닌 구조이다. 과학이론이 특정한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 때 그러한 구조란 무엇인가? 또한, 우리가 과학이론을 통해 적어도 세계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할 때의 구조란 무엇인가? 하나의 과학이론은 구조구조가 아닌 것으로 확실하게 분리되는가? 마찬가지로 세계 또한 구조구조가 아닌 것으로 확연하게 구분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세계의 구조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면, 우리가 영원히 알 수 없는 구조가 아닌 그 무엇인가가 항상 세계에 어느 정도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가?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뿌엥까레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레넬의 광학 이론에서 등장하는 존재자들 및 그것들의 의미들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맥스웰의 전자기학에 등장하는 존재자들 및 그것들의 의미들과 논리적으로 양립불가능하다. 아주 높은 탄성을 가지면서도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낮은 밀도를 가진 에테르의 개념이 폐기된 것처럼,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전자기장의 개념 또한 이후 등장할 이론에 의해서 폐기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과학이론 속에 등장하는 존재자들 및 그것들의 의미를 신뢰할 수 없고, 그러한 존재자들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프레넬 이론에 등장하는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핵심적인 방정식들의 대부분이 맥스웰의 이론에도 등장함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이 방정식들은 세계의 객관적인 측면을 일정 부분 올바르게 기술하고 있으며, 이후에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더라도 새로운 이론이 이 방정식들을 근사적인 방식으로나마 포함할 것임을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같은 뿌엥까레의 실재론을 인식론적인구조적 실재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론적인 입장은 존재론적인 입장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뿌엥까레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여러 다양한 근거들로부터 세계에 이러저러한 구조가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뿐 이러한 구조가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강한 입장을 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이론 발전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구조가 등장할 수도 있고, 현재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세계의 구조를 진정으로 반영한다고 생각되는 이론의 특정한 측면들이 이후의 이론에 의해서 폐기될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러셀 또한 뿌엥까레와 더불어 구조적 실재론을 인식론적 입장에서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또한 우리의 감각지각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세계에 존재하는 원인들 사이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관계가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뿌엥까레, 러셀과 더불어 구조적 실재론의 주요 옹호자들인 워럴과 자하도 존재론적 차원이 아닌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구조적 실재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래디먼(James Ladyman)과 프렌치(Steven French)는 자신들의 2003년 논문에서 구조적 실재론을 인식론적 차원으로부터 존재론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본격적인 시도를 했다. 실제로 구조적 실재론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래디먼의 문제 의식은 그의 1998년 논문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98년 논문에서 그는 만약 구조적 실재론이 전통적 실재론에 대한 인식론적인 세련화(refinement)로만 생각된다면 이는 어떤 이득도 얻지 못할 것이며, 대신 이 입장이 일종의 형이상학적 입장으로까지 발전되어야 함”(래디먼 1998: 411)을 주장한다. 래디먼은 뉴먼, 데모포울러스, 프리드만이 과학이론의 램지 문장화에 대해 제기한 사소화의 문제가 구조적 실재론을 인식론적 관점에서 이해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이와 같은 관점에 머물러 있을 경우 과학사에서 벌어지는 이론 변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래디먼 또한 구조적 실재론을 램지 문장으로 국소화시켜서 이해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취하는 그의 전략은 인식론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저자들과는 다소 방향을 달리한다.

  

    래디먼은 과학이론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이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에서 존재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으로 나아가는 좋은 단서를 제공해준다고 주장한다. 램지 문장을 통해 과학이론의 구조를 이해하려는 것은 과학이론에 대한 논리경험주의자들의 접근 방법인 구문론적(syntactic) 접근 방법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반면, 우리가 과학이론을 의미론적(semantic) 차원에서 접근할 경우 우리는 과학이론에서 언어적 차원의 진술들을 초과하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래디먼에 따르면 추상적인 이론적 구조가 현상에 대한 낮은 수준의 모형들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과학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심오하고 새로운 예측들은 고도로 이론적인 모형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얻어진다.” 이러한 추상적인 이론적 구조가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단지 우연의 결과라고 취급한다면, 이는 기적을 거부하는 논증의 요구를 회피하는 셈이 된다. 뒤이어 래디먼은 과학이론의 구조로부터 세계의 구조의 존재를 추론하는 인식론적 차원을 넘어서, 실제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구조이며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이러한 구조로부터 비롯된다는 존재론적 차원의 주장으로 나아간다.

  

    래디먼은 이렇듯 구조의 존재론적 입지를 정당하기 위해, 이전까지의 대상(object)’의 개념을 구조의 관점에서 재개념화(reconceptualize)할 수 있음을 보이려 한다. 우리가 인식론적인 관점에 머물러 있을 경우, 우리는 현재 우리가 과학이론을 통해 파악한 구조 너머에 있는 특정한 대상들(objects)’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의 역사상 인간이 이와 같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특정한 관계들 및 구조를 점차적으로 더 잘 파악해 온 것이 아니라, 특정한 구조를 가진 이론이 제시되고 이후 이 이론으로부터 이 이론 속에 등장하는 수학적 구조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이에 관한 대상 개념들이 파생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 과학이론의 구조가 세계에 존재하는 일정한 대상들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점차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적 시기에 우리가 대상에 대해 가졌던 여러 종류의 개념들은 우리가 당시에 갖고 있던 과학이론의 구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주장은 특히 양자역학의 사례를 통해 가장 잘 보여질 수 있다. 우리는 양자역학에서 등장하는 수학적 구조를 토대로 전자 등과 같은 입자들의 특성을 파악하지만, 이러한 입자들이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대상들처럼 개별적으로 존재하면서 특정한 성질들을 가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입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개별적인 대상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표현들을 사용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런 표현들이 전자를 나타내는 수학적 구조에 대한 일종의 은유(metaphor)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

  

    하지만 래디먼과 프렌치의 이와 같은 존재론으로의 도약은 그들의 생각처럼 쉽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 과학이론에 대한 램지 문장에 집중하는 것은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의 한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이고, 이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는 통시적 관점에 입각한 인식론적 입장을 통해서 보완될 수 있다. 자하 또한 통시적 관점에서 과학이론이 갖는 특정한 구조에 대해 파악했을 경우 이것이 과학자들에게 과학적 탐구의 지침을 제공하고 상당한 정도의 동기를 부여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구조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우리가 구조에 대한 통시적 접근 방법을 택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 구조에 대한 존재론적 입장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래디먼과 프렌치가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이론을 의미론적 관점에서 이해한다고 해도, 낮은 수준의 모형을 발전시키고 심오한 예측을 제시하는데 추상적인(높은 수준의) 이론적 모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으로부터 그것이 세계에 존재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가는 데는 상당한 비약이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추상적 모형이 실제 세계의 구조를 상당히 잘 반영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지만, 이러한 존재에 대한 추론으로부터 존재로의 이행은 래디먼과 프렌치가 제시한 논거들을 통해서는 정당화될 수 없다.

  

    또한 래디먼과 프렌치가 주장하는 것처럼 구조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받아들일 경우, 이는 과학적 활동에 있어서의 경험적인 관찰자료들의 중요성을 부당하게 약화시킬 위험을 낳는다. 비록 하나의 강력한 과학이론이 완성된 이후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갖는 상()이 이러한 강력한 이론에 의존해서 급격하게 변화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과학의 역사를 돌아볼 때 늘 새로운 이론은 감각경험으로부터 그 단초가 발견되었으며 이 이론의 타당성 또한 감각경험들과의 합치 여부로 평가되었다. 이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들은 상당히 많다. 갈릴레오 시대 이후 지금까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대성의 원리 또한 기본적으로는 우리의 감각경험으로부터 추론된 원리이며, 패러데이의 전자기장 개념은 그가 행한 무수한 전자기 실험들을 근거로 했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의 전개를 위해 주축으로 삼은 동등성 원리(principle of equivalence)’ 또한 뉴턴의 시대 때부터 경험적인 관찰을 통해 알려진 원리였으며, 하이젠베르크(Heisenberg)가 자신의 행렬역학을 창시할 때 직접 관찰가능한 요소들만을 유의미하게 취급하라는 실증주의의 관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것은 그가 쓴 부분과 전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조가 감각경험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시될 수 없음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한계를 감안할 때에도 잘 이해될 수 있다. 래디먼과 프렌치는 우리가 갖는 대상의 개념이 우리의 과학이론에 완전하게 의존한다는, 우리의 과학이론에 의해 우리의 대상 개념이 완전하게 구성된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이론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과학이론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다채롭고 풍부한 감각경험들 중 많은 부분들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감각경험에 기반해서 형성된 개념들을 자유롭게 결합해서 감각경험의 총체를 보다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 과학이론의 체계를 구성한다 해도, 그리고 이 이론이 이전 이론에 비해 우리가 갖는 감각경험의 총체와 매우 높은 수준으로 합치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이 이론 체계의 구조가 언젠가는 거짓이라고 판명될 수 있음을 건전하게 의심할 수 있다. 만약 존재론적 우선 순위를 경험보다는 구조에 두는 래디먼과 프렌치의 관점을 취한다면, 이러한 입장은 결과적으로는 이후 우리가 새로운 과학이론을 추구하는 데 있어 일종의 장애물의 역할을 할 것이다.

  

    여전히 래디먼과 프렌치는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우리가 새로운 이론을 구성할 때 가장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높은 수준의 이론이 제시하는 추상적 구조이다. 핸슨(Hanson)과 쿤(Kuhn) 이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것처럼, 과학이론과 관계된 감각경험에는 이론이 적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감각경험을 크게 신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에는 구조적 실재론에 대한 인식론적 입장에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비록 관찰에 어느 정도의 이론이 적재된다고 하더라도, 과학의 역사는 늘 우리가 어떤 과학이론의 경험적 적합성과 비적합성을 상당히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구조적 실재론에 대한 인식론적인 입장에서는, 이론들 사이의 존재론적 의미가 변동하는 반면 수학적 방정식들은 상호간 보존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수학적 방정식들을 통해 제시되는 정밀하고 일반적인 예측이 우리의 경험적 관찰결과와 합치하는지의 여부가 해당 이론의 존재론적 의미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의 입장에서는 관찰의 이론적재성을 수용하면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지는 감각경험의 신뢰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구조적 실재론을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하려는 래디먼과 프렌치의 입장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근거로 반박했다. 첫째, 인식론적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램지 문장의 사소화 문제에 대응할 수 있다. 둘째, 비록 과학이론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 방법을 택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존재에 대한 합리적 추론으로부터 존재로의 비약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들다. 셋째, 만약 구조에 존재론적 우선권을 부여하게 될 경우 이는 새로운 과학이론의 형성을 일정 정도 저해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이론을 형성하는 데 감각경험이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 사건들을 과학사에서 풍부하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우리가 갖는 감각경험의 내용이 현재의 과학이론에 의해 상당 부분 영향을 받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론은 우리의 감각경험의 많은 부분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늘 감각경험에 의한 반증의 위험에 놓여있다.

  

    비록 구조가 과학이론의 형성과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함을 인정하더라도, 이러한 구조로부터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각경험의 내용들이 도출된다는 것은 너무 과도한 주장이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감각경험의 내용들은 늘 우리의 갖고 있는 과학이론의 경험적 영역을 초과한다. 과학이론이 경험적으로 유의미한 것은 이 이론의 경험적 영역이 열려 있기 때문이고, 이는 어떠한 과학이론이라도 늘 감각경험에 의한 반증가능성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만약 특정한 이론의 경험적 영역이 닫힐 경우, 다시 말해 이 이론과 관련된 감각경험들이 이론에 의해서만 전적으로 결정될 경우, 그것은 과학이론이 아닌 하나의 수학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이 문제와 관련되는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상기하는 것이 우리의 논의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과학에서 논리적 기초는… …항상 새로운 경험이나 새로운 지식에서 유래하는 더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4.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ESR)은 구성적 경험론(CE)으로 포섭되는가?

 

    구성적 경험론을 주장하는 철학자 반 프라센(van Fraassen)2006년에 출판된 한 논문에서 구조적 실재론자들이 말하는 구조의 개념이 구성적 경험론에 의해서도 충분히 포섭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구성적 경험론에서는 한 과학이론이 경험적으로 적합할 경우(empirically adequate) 그 이론을 받아들이지만, 그 이론에 포함되어 있는 관찰불가능한 존재자들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과학이론에 대한 반실재론적 입장을 취한다. 우리의 감각경험을 신뢰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모든 과학이론을 평가하는 최종적인 심급을 감각경험에 둔다는 의미에서 구성적 경험론자는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자와 다소 유사한 입장에 있다. 하지만 구성적 경험론자가 과학이론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구조적 실재론자보다 더 엄격하다. 구조적 실재론자의 경우 한 과학이론이 내적으로 충분한 통일성과 일관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감각경험에도 충분히 적합하다면, 그리고 이전 이론의 구조를 반영하던 주요한 수학적 법칙들이 현재의 이론에도 상당부분 반영되어 있다면, 이 이론의 구조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독립적인 외부 세계의 구조를 상당히 잘 반영하는 것으로 추론한다. 반면 구성적 경험론자는 이러한 추론의 타당성마저 의심하고 거부한다. 구성적 경험론자는 한 이론이 경험적으로 적합한지의 여부를 판단하고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반 프라센은 구조적 실재론을 비판하기 위해 경험주의적 시각에서 과학사적 사건들을 재해석한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이론의 본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논란이 늘 있어 왔다. 과학이론은 세계의 특정 부분만을 추상화시킨 결과물인 까닭에 세계의 나머지 부분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과학이론이 말하는 것만이 실제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인가? 갈릴레오 시대의 전통 철학자들은 수리천문학자들의 이론이 세계를 추상화시킨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 반면, 이에 갈릴레오는 수, 질량, 크기 등과 같은 1차 성질들만이 실제로 존재하며 질적 성질들인 2차 성질들은 1차 성질로부터 유도된다고 대응했다. 데까르뜨(Descartes)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구체적인 물리적 메커니즘이 배제된 뉴턴(Newton)의 원격 힘 개념에 강하게 반발했지만, 뉴턴 역학이라는 수학적 체계의 강력함이 경험적으로 광범위하게 확인되면서 현상현상에 대한 원인과는 구분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과학이론의 수학적 법칙들은 세계의 일정 부분만을 추상화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되다가도, 이후 그 이론이 경험적 적합성을 획득하게 되면 과학이론의 수학적 법칙들 그 자체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반 프라센에 의하면 데까르뜨의 유일한 목표는 인간의 마음에 완전히 이해될 만한 세계를 심리적으로 구성하는 것”(반 프라센 2006: 283)이었고, 이는 과학자의 목표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이미지를 재현(represent)하는 데 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마흐(Mach), 볼츠만(Boltzman), 헤르츠(Hertz) 등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취했으며, 다만 플랑크(Planck)만이 동료 철학자들의 이러한 반실재론적 입장을 이단(heretic)’이라며 개탄했을 따름이다. 과학이론의 구조가 세계에 대한 추상인지, 아니면 세계 그 자체인지에 대한 반복되는 논쟁들은 결국 그 이론이 경험적으로 적합한지의 여부에 의해 마무리되었다는 것이 과학의 전반적인 역사를 조망하는 반 프라센의 시각이다.

  

    다음으로 반 프라센은 래디먼이 주장하는 급진적인(radical, 혹은 존재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을 비판한다. 우선 반 프라센은 래디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대칭성(symmetry)’, ‘동형성(isomorphism)’, ‘유관한 동등성(relevant sameness)’ 등과 같은 개념이 맥락의존적임을 지적한다. 만약 이러한 개념들이 맥락의존적이라면 이 개념들이 객관적인 어떤 것을 지칭한다고 보기 힘들다. 또한 모든 것이 구조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할 경우 이는 이전까지의 실재론과 다를 바 없게 되며, 래디먼의 주장처럼 구조 만이 존재할 경우 우리는 구체적 실재와의 접촉을 상실하게 되고 이는 용납하기 힘든 입장이다. 뒤이어 반 프라센은 워럴과 자하가 취하는 인식론적 입장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다. 그에 따르면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자들이 실재론을 옹호하는 논증은 정신분열적이다. 과학적 지식이 경험의 영역에서 실질적으로 축적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로부터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실재를 추론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구조적 실재론보다 형이상학적인 부담이 적은 경험주의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구조를 충분히 해명할 수 있음을 보인다. 우리가 갖고 있는 현재의 과학이론이 이전까지의 과학이론에 비해 경험적으로 성공적인 까닭은 우리가 과학이론에 대해 경험적 성공의 요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적 성공에 수학적 형식을 띤 구조가 잘 작동하는 것은, 그러한 구조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감각경험들로부터의 표상이 갖는 구조와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인간 또한 일종의 역학적 체계(mechanical system)에 지나지 않는 까닭에, 아무리 이 체계가 정교하다 하더라도 세계를 표상하는 데에는 늘 특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과학이론이 갖는 수학적 구조는 오직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적 구조에만 관련된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로부터 외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구조를 추론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처럼 경험주의의 시각에서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구조적 실재론자들보다 더 안전하고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한다.

  

    위와 같은 반 프라센의 주장에 대해 나는 네 가지의 논거를 들어 반박하고자 한다. 우선,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자들의 논증은 반 프라센이 말하는 것처럼 정신분열적이지 않다. 우리는 갈릴레오 역학에서 뉴턴 역학으로의 이행, 프레넬 광학에서 맥스웰 광학으로의 이행, 고전 역학에서 상대론적 역학으로의 이행 등에서 특정한 수학적 방정식들의 형식이 유지되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는 우연히 발생한 결과가 아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구성할 때 이 이론이 이전 이론의 경험적 영역을 포섭할 수 있도록 해주는 대응 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를 이론 구성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제약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과학이론이 이전의 이론과 형식적인 측면에서 일종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우리 이론의 경험적 영역 또한 점차적으로 확장됨을 확인한다. 이제 우리는 묻는다. 대체 우리 과학이론의 구조’(이론의 내용과는 구분되는)는 무슨 이유 때문에 경험적인 적합성을 갖는 것일까? 비록 우리가 직접적으로 세계에 대해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우리의 감각경험뿐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밖에 우리와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감각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우리의 과학이론이 경험적 적합성을 갖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우리가 체험하는 현상적인 차원의 감각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감각경험의 원인이 되는 세계로부터 비롯된다. , 과학이론의 경험적 적합성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외부 세계에 의존하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과학이론으로부터 세계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합당한 근거를 갖는다. 물론 과학이론의 구조로부터 세계의 구조에 대해 추론하는 것의 합당함을 논리적으로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기적을 거부하는 논증의 요구를 충족시켜준다는 점에서 건전하다. 또한 인식론적 입장을 취하는 구조적 실재론자들은 세계의 구조를 향하는 이러한 우리의 추론이 오류일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은 실재론적 오류가능주의(realist fallibilism)’의 입장을 취하며 이는 매우 온건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조적 실재론자들의 논증은 반 프라센의 주장처럼 정신분열적이지 않다.

  

    둘째, 구성적 경험론자들은 자신들이 기적을 거부하는 논증의 요구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기적을 거부하는 논증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구성적 경험론의 입장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만약 이 요구를 받아들이면 어느 정도의 형이상학적 부담을 떠안게 되기 때문에,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구성적 경험론은 상대적인 형이상학적 경제성을 확보한다. 동시에 구성적 경험론자들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는 입장에 대해 불필요한 형이상학적 부담을 떠맡고 있다는 이유로 비판을 가할 수 있다. 그러나 설명과 해명이 요구되는 지점에서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이는 철학적 탐구의 기본적인 존재 이유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구조적 실재론자들은 구성적 경험론자에게 묻는다. 우리의 과학이론이 경험적으로 적합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경험적 성공의 요구를 만족시켰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과학이론은 어떻게 경험적 성공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는가? 과학자들이 성공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인가? 그러한 답변은 순환적이지 않은가? 해명해야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는 것 아닌가?

  

   또 하나 지적할 것은 구성적 경험론자들이 말하는 경험적 적합성의 개념 자체가 일종의 귀납 원리(Inductive Principle)’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성적 경험론자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귀납원리를 받아들이는 논거를 제시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이러한 논거가 우리의 감각경험에 기반할 수는 없으므로(순환적이기 때문에), 구성적 경험론자들 또한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에 대한 근진도(verisimilitude)’ 개념에 호소해야 한다. 만약 구성적 경험론자들이 그러한 형이상학적 부담을 안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다시 한 번 기적을 거부하는 논증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셈이 된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구성적 경험론자들은 우리가 경험적 적합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로부터 비롯한다는 방식의 대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으로는 문제가 되는 상황을 적절하게 해결할 수 없다. 여전히 구성적 경험론자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이론의 적합성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해명해야 하며, 더 나아가 이러한 해명이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이러한 해명은 구조적 실재론의 입장에서 제시하는 과학이론의 경험적 적합성에 대한 해명과 대등한 수준이어야 함은 분명하다.

  

    셋째, 그렇다면 과연 과학사의 사례들을 설명하는 구성적 경험론의 입장은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의 입장보다 더 합당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할 때 구성적 경험론자인 반 프라센이 과학사적 사례들을 해석하는 방식은 사후적이고 임시방편적이다. 과학사에 대한 검토를 하기 전에 우리가 미리 전제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과학사의 개별 사례들을 분석할 경우 과학자들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이론적 작업을 했는지를 최대한 정확하게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흐, 맥스웰, 헤르츠는 정말로 반 프라센의 말대로 과학이론에 대한 반실재론적 입장을 취했는가? 뿌엥까레와 아인슈타인 또한 단지 현상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새로운 이론을 전개했는가? 이러한 물음들에 정확하게 답하기 위해서는 해당하는 과학자가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이론적 작업을 전개해 나갔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해야 한다. 아인슈타인과 뿌엥까레의 작업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자하는 아인슈타인과 뿌엥까레가 궁극적으로는 과학이론에 대한 실재론적 입장을 취했다고 결론을 내리며, 마흐와 볼츠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결론을 내린다. 나는, 적어도 아인슈타인과 뿌엥까레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반 프라센이 아니라 자하가 옳다고 생각한다. 맥스웰, 볼츠만, 마흐, 헤르츠에 대해서는 더 면밀한 역사적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이 반 프라센이 말하는 것처럼 엄격한 경험주의의 입장을 취했다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이들에 대한 어떤 평가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분명한 판단 근거는 과학사로부터 주어질 것이다.

  

    이에 대해 반 프라센은 다음과 같이 대응할 수 있다. 과학자들이 실제로 과학이론을 대했던 방식은 그 방식의 철학적 합당성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비록 아인슈타인, 뿌엥까레, 마흐, 볼츠만 등이 과학이론에 대한 실재론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철학적 입장이 건전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러한 입장보다 형이상학적 부담이 더 적은 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가 과학철학자에 의해서 밝혀진다면, 과학철학자는 과학자들에게 이러한 보다 나은 철학적 입장을 갖도록 규범적인 제안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형이상학적 부담이 더 적은 철학적 입장이 더 건전한 입장임을 전제하고 있고, 이는 그 자체로 자명한 전제가 아니라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전제이다. 과학이론에 대해 일정한 철학적 입장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과학자들 자신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과학사를 통해 우리는 과학자들이 늘 과학이론에 대해 특정한 철학적 입장을 취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철학적 입장이 과학이론을 발전시키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또한 알 수 있다.

  

    넷째, 따라서 적어도 과학이론과 관련된 철학적 입장이라면, 그러한 입장을 단지 형이상학적 부담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건전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우선 구성적 경험론의 입장 또한 일종의 형이상학적 입장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자. 어떤 철학적 입장이 방법론적 판단에 의해서 반증이 불가능해질 경우이러한 입장은 형이상학적 성격을 갖는다. 구성적 경험론이 경험적 적합성의 개념을 별도의 논거 없이(귀납의 원리를 전제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이는 방법론적 판단에 의해 반증이 불가능함을 의미하므로 이 입장은 형이상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의 입장 또한 일종의 형이상학적 입장이다. 왜냐하면, 비록 이 입장이 오류가능주의를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이 때의 오류가능이란 과학이론의 구조로부터 세계의 구조로 추론하는 구체적인 내용에만 해당될 뿐, 과학이론의 구조로부터 세계의 구조로 추론하는 과정 그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퍼의 용어를 빌리자면 구성적 경험론과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은 모두 과학이론과 관련된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할 때 구성적 경험론의 프로그램은 형이상학적 부담을 피하는 대가로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단점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이 프로그램은 방법론적으로 부적절하다. 좀 더 면밀한 과학사적 탐구가 요구되기는 하지만, 과학의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과학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과학이론에 대한 실재론적 입장을 취했으며, 이는 경험주의의 입장이 실제의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음을 귀납적으로 증명해준다. 과학이론에 대한 철학적 입장인 구성적 경험론이 과학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지 못하는 입장이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입장의 적절성 여부를 문제시하게 된다. 반면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은 방법론적 실재론의 입장을 취하며, 따라서 자신의 오류 가능함을 인정하면서도 과학이론과 관련된 작업을 앞으로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교적 명확하고 분명한 지침들을 제공한다.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이론이 어떤 종류의 연구 프로그램에 속하는지, 이 프로그램의 중심 가설과 긍정적 발견법(positive heuristic)은 무엇인지를 명시해준다. 또한 이 프로그램은 과학자로 하여금 일련의 이론들에서 어떠한 수학적 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보존되고 발전되었는지를 철학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과학자 본인들이 과학이론에 대해 얻을 수 있는 확신과는 다른 수준의 확신을 제공한다.

  

    이 밖에도 구성적 경험론의 프로그램이 퇴행적 연구 프로그램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근거는 이 프로그램이 임시방편적인 방법을 통해 과학사적 사례들에 대한 반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는 데 있다. ‘과학적 이미지’, ‘세계에 대한 과학적 표상’, ‘경험적 적합성등과 같은 표현들은 맥락에 따라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반 프라센은 이와 같은 표현의 애매모호함을 이용해서 어떤 경우에는 데까르뜨를, 어떤 경우에는 볼츠만과 마흐를, 어떤 경우에는 뿌엥까레를 경험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만약 우리가 과학사적 탐구를 통해 위와 같은 반 프라센의 해석을 반박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반 프라센은 그러한 반박을 회피하거나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만약 반 프라센이 구성적 경험론은 퇴행적인 프로그램이 아님을 보이려 한다면, 그는 이 프로그램의 입장에서 과학이론의 경험적 적합성을 판단할 수 있는 방법론적인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가 특정 과학이론의 경험적 적합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부담을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성공적인 과학이론들에 전가한다면, 그는 순환논리에 빠질 뿐만 아니라 다시 한 번 과학철학 본연의 임무를 회피하는 셈이 된다.

 

5. 맺는 말: 구조적 실재론의 인식론적 함축

 

    지금까지 나는 뿌엥까레와 러셀이라는 두 철학자들로부터 비롯된 구조적 실재론이 서로 양립가능하며, 구조적 실재론을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존재론적인 입장으로까지 강화하려는 래디먼과 프렌치의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음을 보였다. 또한 나는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을 구성적 경험론의 시각에서 포섭하려는 반 프라센의 시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러한 시도가 성립될 수 없음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이라는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프로그램이 어떠한 의의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임으로써, 이러한 입장이 과학이론에 대한 실재론으로서 충분히 강력하게 기능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자 한다. 내가 생각할 때, 과학이론에 대한 실재론적 혹은 반실재론적인 철학적 입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이다. 과학이론에 대한 복수의 형이상학적 프로그램들이 경쟁할 수 있으며, 비록 단기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들 중 어떤 것이 진보적인지 퇴행적인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 같은 복수의 프로그램들 중 진보적인 것이 퇴행적인 것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과학이론에 대한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진보성과 퇴행성을 평가하는 궁극적 기준은 다름아닌 과학이론과 관련된 우리의 과학적 활동이다. 이에는 과학이론을 구성하는 과학자들의 현재적 활동, 과학이론의 역사, 과학이론을 추구한 과학자들의 역사 등이 포함된다.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이 갖는 장점은 그것이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이라는 과학적 방법론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이 방법론에 의하면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은 견고한 핵과 보호대로 구성되어 있고, 견고한 핵을 이루는 중심 가설들은 (방법론적 판단에 의해 반증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띤다. 자하는, 과학사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은 그 견고한 핵에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때 견고한 핵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연구 프로그램의 긍정적 발견법에는 수학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 비록 한 연구 프로그램에 속하는 일련의 이론들의 외연이 달라지는 경우에도, 대응 원리, 대칭성 원리(symmetry Principle), 동일성 원리(identity principle) 등과 같은 발견법적 원리들을 적용함으로써 프로그램 내부에서의 발전이 일어나고, 이러한 원리들을 적용하는 데 있어 수학은 본질적인 규제적(regulative) 역할을 한다.

  

    구조적 실재론이 주장하는 바의 핵심은 일련의 이론들 사이에서 수학적 형태로 표현되는 구조의 동일성이 보존된다는 데 있고, 왜 이러한 보존이 가능한지를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은 잘 설명해준다. 이 방법론이 단지 이와 같은 설명의 기능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방법론을 기초로 해서 과학사의 주요한 사건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고, 이렇게 재구성된 과학사가 실제의 역사적 사실들과 합치하는지의 여부를 되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은 과학사에서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사실들을 예측(또는 후측)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경험적으로 유의미하다.

  

    또한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은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과 더불어 과학이론에 대한 의미론적 관점과도 연계될 수 있다. 과학이론을 구문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의미론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론적 관점에 기반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과학이론을 진술들의 집합이 아닌 여러 층위의 구조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한 과학이론을 구조적 실재론 및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을 기반으로 재구성할 수 있고, 이 때 어떤 구조가 보존되며 어떤 구조가 변화했는지를 밝힐 수 있다. 거칠게 예상하자면, 이론의 가장 상위 층위에 있는 추상적 구조는 하부 구조들의 기본적인 구성 양식에 강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감각경험과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은 이론의 경험적 영역과 맞닿아 있는 하부 구조들일 것이다. 이렇듯 특정한 과학이론을 구조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것 또한 과학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합리적 재구성이며, 이러한 합리적 재구성이 어느 정도나 실제 역사와 일치하는지는 경험적으로 확인되어야 할 문제이다.

  

    근대의 물리학이 17세기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처럼, 과학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적 담론은 20세기의 논리경험주의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도 과학적 방법론 및 과학이론의 실재성 등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일선의 과학자들 및 소수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논의가 일군의 철학자 집단에 의해서 전문적인 수준으로 발전되고 평가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논리경험주의자들의 통합과학운동은 과학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과학이론들 자체를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수준에 이른 최초의 사례였다. 비록 과학이론 및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논리경험주의자들의 견해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이 밝혀졌다 하더라도, 이후 과학에 대한 철학적 담론의 규모와 수준이 논리경험주의만큼의 강력함을 띠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만약 논리경험주의의 과학철학적 담론이 하나의 연구 프로그램이었다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연구 프로그램은 논리경험주의의 담론보다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더 진보적이어야 한다.

  

    내가 인식론적인 구조적 실재론의 입장을 옹호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입장이 현재까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여러 중요한 과학사적 사건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구조적 실재론의 당면 과제는, 현재 우리에게 이론 간 불연속적 단절을 대표한다고 알려져 있는 과학사적 사례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고, 이로부터 구조적 실재론의 논제를 강하게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본다. 반면 나는 구성적 경험론의 입장에서 얼마나 정교한 수준으로 과학사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지, 얼마나 객관적인 방식으로 과학사에서 등장하는 과학이론들의 경험적 적합성을 평가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러한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구성적 경험론이 기반하는 과학-독립적인 과학적 방법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성적 경험론은 한 과학이론의 경험적 적합성 여부 판단을 과학이론들에게 전가하거나, ‘경험적 적합성이 별도의 철학적 해명이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개념이라고 부당하게 전제하려고 하지만, 이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과학철학의 본래적 소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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