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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는 과학관의 연구원이자 학예사의 글쓰기 공간입니다.

반복, 우연,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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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020. 8. 2.

   고등학생 시절 나를 매료시켰던 책의 제목은 [시간과 공간의 철학]이었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철학, 특히 과학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연히 고등학생 시절에 나는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충분히 똑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젠가 꼭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다. 똑똑해지기는 어렵지만 무엇인가를 계속 해나가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똑똑하지 못했던 나는 이 책과 관련된 주제들로 계속 돌아오는 길을 선택했다. 비슷한 책을 읽고, 비슷한 주제를 생각하고, 이런 일들을 계속 반복한다. 마치 기계와도 같이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한스 라이헨바흐의 [시간과 공간의 철학]을 보면, 책 속에 그의 예전 저작들인 [상대성 이론과 선험적 지식] 및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래서 나는 이 책들을 직접 찾아봤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없었다면 이 책들을 찾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책들을 보니 [시간과 공간의 철학]이 좀 더 잘 이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상대성 이론과 선험적 지식], [상대성 이론이 공리화]를 번역했다. 번역이라는 노동을 끝내고 나니 라이헨바흐의 입장이 좀 더 잘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런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내가 라이헨바흐를 연구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옛날 사람을 연구하느냐”며 나에게 되물었다. 논리경험주의자 라이헨바흐는 이미 한물 간 사람 아니냐고.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아니었다. 그의 글은 나에게 그 누구의 글보다도 큰 기쁨을 주었으므로, 최소한 나에게는 계속 그의 저서들을 연구하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라이헨바흐가 “대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나의 직감이라는 것이 그다지 믿을만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 역시 잘 안다. 그렇지만 내 인생은 나의 것 아닌가.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과연 그것을 나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시간과 공간의 철학]을 통해 물리적 기하학의 철학적 문제를 알게 되었고, 바일과 라이헨바흐 사이의 논쟁을 알게 되었으며, 말년의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의 철학적 의의를 두고 라이헨바흐와 의견을 달리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과학 이론의 철학적 의의를 분석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더 구체적으로 카시러, 바일, 에딩턴 등 당대의 다른 학자들 역시 상대성 이론의 철학적 의의를 자기 고유의 방법으로 분석해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계속 이 분야에 돌아오고 이 분야에 머무르며 읽고, 생각하고, 번역하니 계속 예전에 알지 못했던 정보들이 파악되고 흥미로운 생각들이 떠오른다.

 

   내가 시간과 공간의 철학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나우 : 시간의 물리학]을 번역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우]의 번역을 계기로 리 스몰린(Lee Smolin), 팀 모들린(Tim Maudlin), 션 캐롤(Sean Carroll)과 같은 동시대의 물리학자-철학자들을 알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갖다 보니 상대성 이론의 역사 전문가들인 위르겐 렌(Jurgen Renn), 미셸 얀센(Michel Janssen), 로버트 디사(Robert Disalle)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번에 서평을 위해 읽고 있는 책 [The Physicist and The Philosopher]에서도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발견하고 있다.

 

   결국 나의 결론은 아주 뻔하고 진부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무모하게라도 계속 하자. 머리가 좋지 않더라도 계속 반복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깊어지고 아는 것도 많아진다. 또한 한 가지 일을 계속하면 그 일과 관련된 우연들이 이따금씩 생기고, 그렇게 우연들이 쌓이면 다른 우연을 만날 확률도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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