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애호가의 삶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는 과학관의 연구원이자 학예사의 글쓰기 공간입니다.

카페의 단골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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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020. 12. 20.

   나는 어지간한 음식은 다 잘 먹는다. 식성이 까다롭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가끔씩 어떤 음식이 몹시 먹고 싶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경우도 거의 없다. 차나 술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나는 드립 커피도 괜찮고 일회용 커피도 괜찮다. 또한 나는 저렴한 와인이든 고급 와인이든 상관없고 그냥 있는 대로 마신다. 비슷한 논리가 옷이나 신발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몸에 맞고 너무 이상하지만 않으면 입고 다니고, 발 크기에 맞으면 그냥 신고 다닌다.

 

   나도 내가 왜 이런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저 이런 나를 이해해 주는 아내에게 감사할 뿐이다. 주중에 회사 나갈 때는 돈 쓸 일이 거의 없다. 점심값 4천원을 빼고는 대부분 돈을 쓰지 않는다. 차의 경우 회사에 구비되어 있는 1회용 커피나 녹차를 마시면 된다. 딱히 하는 운동도 없다. 몸이 좀 뻐근하다 싶으면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며 턱걸이와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나는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책 말고는 사서 모으는 것이 없다. 그런 내가 자주 누리는 유일한 사치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내가 카페에서 주로 하는 일이란 죽치고 앉아 멍하게 음악을 들으며 이런 저런 생각들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경우 카페에 혼자 간다. 가끔씩 부모님이나 장모님이 집에 오시면 아이들을 맡겨 놓고 아내와 함께 카페에 간다. 아내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라, 대개 카페에서 우리는 별 말을 하지 않고 각자 할 일을 한다. 물론 책을 읽고 논문을 읽고 글도 쓰지만, 나는 그냥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 그 자체를 즐긴다. 제법 괜찮게 선곡된 음악을 들으며 나에게 주어진 짧은 여유 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커피의 맛을 음미하듯 시간의 여유를 음미한다.

 

   카페에 자주 다녀서 그런가, 이제 마스크를 낀 카페 직원의 얼굴 윗부분만 보아도 그 사람이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간다. 요일별로 일하는 직원들이 바뀐다. 직원들도 나를 보면 ‘저 사람이 또 왔군’, ‘저 사람은 늘 아메리카노를 시키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 창가에 있는 자리 하나를 잡는다. 수업 준비를 할 필요가 없어 비교적 여유로운 요즘, 나는 예전에 번역하다 잠시 멈추었던 라이헨바흐의 [물리적 지식의 목표와 방법]을 조금씩 번역한다. 1929년에 독일의 물리학 핸드북에 수록된 바 있는 이 글은 라이헨바흐의 물리 철학을 집약하고 있다. 번역을 과도하게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여유 있게 설렁설렁 한다.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번역한다. 경쟁하듯 열심히 하려고 하지 않는다. 천천히 즐기면서 한다.

 

   라이헨바흐의 [경험과 예측](1938년) 번역도 출판사와 약속이 되어 있다. 나는 이 책이 20세기 경험주의의 대표작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을 번역한다고 해서 우리나라에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라 예상한다. 이게 비관적인 예상일까? 아니다. 현실적인 예상이다.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번역을 해서 우리말 책이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내가 이어가는 전통은 다수가 아닌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어지는 전통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변방에서 사는 게 편하다.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계속 논문 작업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논문 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지는 다소 불확실하지만, 나는 심사위원들의 의견을 수용하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를 갖고 있으므로, 계속 수정한다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후에도 계속 연구를 해서 논문을 써 나갈 것이다. 물론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해 계속 써 나간다는 건 나의 자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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