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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는 과학관의 연구원이자 학예사의 글쓰기 공간입니다.

初志一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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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021. 11. 27.

   세상에는 삶의 다양한 길들이 있다. 그 길들 중 옳고 그른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길게 이어지는 길과 짧게 끊어지는 길이 있을 뿐이다. 길게 이어진다고 해서 옳은 길인 것은 아니다. 다만 운이 좋기도 했고, 길을 걸었던 이의 의지가 강해서 그렇게 길게 이어졌을 뿐이다. 나는 내가 걷는 길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란다. 길이 길게 이어지면 이 길을 걸으며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고 그 깊이도 깊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책을 통한 사람 혹은 생각과의 만남이 그다지 실리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판매를 목적으로 쓰이는 책들도 많다. 그러나 문학이나 철학, 과학 책들 중에는 판매가 주된 목적이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한 연구와 사색이 주된 목적인 책들이 제법 많다. 예를 들어 라이헨바흐를 생각해보라. 나는 라이헨바흐를 직접 본 적도 없고, 그와 직접 이야기한 적이 없으며, 그가 개인적으로 나에게 도움이나 피해를 준 적이 없다. 내가 라이헨바흐와 접촉하게 된 것은 내가 상대성 이론의 철학적 의미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1927년에 [시간과 공간의 철학]을 써서 1928년에 출판하지 않았다면, 그 책을 1986년 당시 철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이정우 선생님이 번역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책이 1999년에 부산에 있는 서점인 영광도서의 한 서가에 꽂혀 있지 않았다면, 나라는 사람은 지금껏 라이헨바흐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라이헨바흐는 [시간과 공간의 철학]에서 과학적 철학, 과학철학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표현을 읽은 나는 과학철학을 공부하고자 했고 철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의 철학 교육 과정은 나의 기대와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았다. 다양한 분야의 교수님들이 다양한 종류의 철학을 가르쳤고, 과학철학 교수님의 주된 관심사 역시 나의 관심사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았다. 이때 나를 안내해준 것은 도서관에 꽂혀 있던 책들이었다. 책 역시 사람이 쓴 것이라 책을 읽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과 만나 대화하는 것이었지만, 책을 통한 만남은 내게는 훨씬 더 우연적인 것이었고 이익에 무관심했다. 이는 사심 없는 깊은 대화와도 같았다.

 

   과학철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학문의 전통이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나마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며, 나 자신 역시 이 전통을 잇는 사람들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전통이 사심 없이 길게 이어지기를 원한다. 내가 오직 책을 읽음으로써 라이헨바흐의 철학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나는 나 이후에 나로 인해 과학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사람들 역시 나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기보다는 나를 도구로 삼아 전달되는 언어와 생각의 매력에 빠져 과학철학을 연구하게 되기를 바란다.

 

   한반도가 갑작스러운 재난을 만나 초토화되지 않는 이상, 물질화된 생각은 책, 논문, 파일 등의 형태로 남아 다른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소유물이 되고, 내가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발견했던 것처럼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언젠가 내가 번역하거나 쓴 책을 어디선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온갖 정보들이 범람하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란 어쩌면 더욱 더 끈질기고 길게 나의 길을 걷는 것 아닐까. 사심 없이 쓰였기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더 깊이 들어가기에 시대를 뛰어넘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나를 한 명의 전승자로 본다. 나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다. 나는 하나의 전통을 바깥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이 전통 속에 참여해서 이 전통을 잇는 사람이다. 내가 이 전통을 잇는 방식이 전형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방식의 전형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전통이 내 안에서 살아남아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된다. 그렇기에 나는 나를 통해 전달되는 이 전통이 더 길게, 더 멀리까지 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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