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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 철학에 관한 두서 없는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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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

2021. 12. 27.

   나는 시간과 공간의 철학과 관련하여 최근에 독일에 재직 중인 과학철학자 마르코 지오바넬리(Marco Giovanelli)를 주목하고 있다.

 

   과학철학의 역사를 보면, 시간과 공간의 철학에 관한 계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7세기 말에 뉴턴(1642-1727)이 자신의 물리학을 제시한 이후,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과 상대성에 관해 뉴턴과 라이프니츠(1646-1716) 사이의 논쟁이 벌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하위헌스(1629-1695)는 시간과 공간의 상대적 개념을 옹호했다. 뉴턴의 회전 사고 실험(물이 담긴 양동이의 회전, 끈으로 연결된 두 개의 구체의 회전)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이 우세를 점하는 듯 보였다.

 

   19세기 전반에 수학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발견(가우스, 볼리야이, 로바체프스키)되고 이보다 더 일반적인 리만 기하학이 개발된 것은 시간과 공간의 철학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 발견의 주된 함축은, 수학적 기하학이 단일하지 않기 때문에 복수의 수학적 기하학이 가능하고 수학적 기하학과 물리학적 기하학이 구분될 수 있다는 것, 수학적 기하학은 물리적 세계와는 직접적으로 대응되지 않는 순수한 형식체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수학적 기하학이 물리적 세계와 맺는 관계는 무엇인가?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떤 과정을 통해 결정되는가?

 

   19세기에 개발된 리만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달리 국소적(혹은 내재적) 기하학이며 일반적인 기하학이다. 외재적 기하학에서 내재적 기하학으로의 발전, 기하학은 미소영역을 기초로 단계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관점은, 입자 사이의 원거리력을 다루는 물리학에서 물리적 장(field)의 연속적인 전파와 상호작용을 다루는 물리학으로의 이행과 맞물려 있다. 또한 변화하는 곡률의 기하학이 가능해지면서 물리적 공간의 기하학에 대한 사색도 발전했다. 어쩌면 물리적 공간의 곡률 역시 시간에 따른 물질 분포의 변화에 따라 요동치는 것인지도 모른다(클리포드).

 

   19세기 후반기에 주로 물리적 공간에 집중하여 철학적 논의를 펼친 학자는 헬름홀츠와 푸앵카레다. 내가 볼 때 헬름홀츠는 인간의 추상적 사고보다는 인간이 그로부터 자신의 기하학적 사고를 추상화시킬 수 있었던 배경 혹은 기초가 된 경험적 사실에 더 주목했다. 일반적인 리만 기하학에서도 단위 물체의 길이는 물체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강체 물체의 자유 운동 원리가 물리적 세계를 기술하는 수학적 기하학의 기초(토대)다. 헬름홀츠에 따르면 이 원리를 만족하는 수학적 기하학은 물리적 기하학이 될 수 있다. 0의 곡률을 갖는 유클리드 기하학 뿐만 아니라, 일정한 양 또는 음의 곡률을 가는 기하학 또한 가능한 물리적 기하학이다.

 

   푸앵카레는 물리적 기하학과 물리학 법칙들 사이의 관계에 주목했다. 헬름홀츠의 말처럼 우리의 경험이 일의적으로 물리적 기하학을 결정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물리적 기하학을 결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푸앵카레에 따르면 그것은 규약적 선택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기 편리한 기하학을 선택한다. 푸앵카레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유클리드 기하학을 물리적 기하학으로 유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리적 기하학을 경험에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기하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측정 물체들만을 경험적으로 시험하기 때문이다. 필요할 경우 우리는 측정 물체들에 관련된 물리적 법칙들을 변경함으로써 유클리드 기하학을 물리적 기하학으로서 유지할 수 있다.

 

   마흐 역시 19세기 시간과 공간 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다. 마흐에 따르면 관성력 또한 중력을 이용하여 상대화시킬 수 있다. 물이 든 양동이가 정지해 있어도 그 주변의 모든 질량을 가진 사물들이 양동이 주변을 상대적으로 회전한다면, 양동이 속 물 중앙이 팰 것이다. 기본적인 물리적 개념은 반드시 경험적 기초를 가져야 한다는 마흐의 입장은 상대성 원리의 옹호 및 일반화와도 관련이 된다. 서로 상대적으로 등속 운동하고 있는 두 기준계가 있을 경우, 어떤 기준계가 정지하고 있는지 운동하고 있는지를 경험적으로 식별하기 어렵다. 관성 질량과 중력 질량의 일치, 등가 원리 사고 실험 역시 경험적인 사실 혹은 원리이다.

 

   1907년에 민코프스키가 제시한 시공간의 4차원적 표상 방법이 일반 상대성 이론의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등가 원리 사고 실험이 없었다면 아인슈타인이 일반 공변성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것은 그 속에 정의적(definitional)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즉, 시공간의 4차원적 표상 방법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 이 표상 방법은 물리적 상황을 나타내는 일종의 개념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 공변성을 형식적으로만 평가한다면 이는 일종의 공허한 제약 조건에 불과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인슈타인의 주장이 아주 무모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어떻게 국소적 관성계와 이에 대해 가속 운동하는 기준계가 물리 법칙을 서술함에 있어 서로 동등할 수 있는가? 왜 우리가 굳이 이렇게까지 상대성의 원리를 일반화시켜야 하는가? 하지만 일반화의 경험적 기초는 다름 아닌 등가 원리 사고 실험,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의 동일성이다. 이러한 경험적 기초가 없었다면 일반 공변성은 그저 공허한 형식적 제약 조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성 이론은 경험적으로 성공적인 이론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이론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뉴턴보다는 더 나은 대답을 제시했지만, 그의 대답은 충분히 명료하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의 시간과 공간의 철학의 문맥 내에서 상대성 이론이 갖는 의의를 해명할 필요가 있었고, 이러한 해명 과정에 아인슈타인 또한 동참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이러한 해명에 가장 성공한 사람은 논리경험주의자 한스 라이헨바흐다. 라이헨바흐의 결론은, 중력이 존재하는 일반적인 경우에도 시간과 공간의 위상적 속성들(인과적 속성들)은 여전히 유지되며, 그러한 의미에서 여전히 시간과 공간은 경험적으로 실재한다. 이에 반해 계량적 속성들은 중력이 존재할 경우 일반적인 방식으로 유지되지 않고 변한다.

 

   라이헨바흐는 시간의 위상적(인과적) 질서가 세계의 가장 기초적인 질서라는 결론을 내렸고, 공간의 3차원성은 바로 이러한 질서의 귀결이다. 그런데 20세기 전반에 수학적 표상 기법을 경험적 사실보다 좀 더 근본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등장했다. 리만 공간을 일반화시키거나, 시공간의 차원을 늘리는 방식으로 물리학을 통합하려는 프로그램을 칼루차, 바일, 에딩턴, 아인슈타인 등이 진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주요한 문제는, 이러한 통일장 이론의 기초적인 개념들을 어떻게 물리적 사실들과 연결 지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이론들을 통합한다는 것, 기존의 알려진 사실들을 도출해낸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라이헨바흐 이후 시간과 공간의 철학은 아돌프 그륀바움(Adolf Gruenbaum)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라이헨바흐-아인슈타인 논쟁과 관련하여 마르틴 캐리에르(Martin Carrier), 토머스 리크먼(Thomas Ryckman), 마이클 프리드먼(Michael Friedman)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라이헨바흐 이후 논자들의 논의는 라이헨바흐의 논의를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지오바넬리를 주목하는 것은 그가 아인슈타인, 바일, 슐리크, 라이헨바흐 사이의 논의를 문헌에 기반해서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남아 있는 문제는 아마도 시간의 방향성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라이헨바흐의 유작이 [시간의 방향(The Direction of Time)]이었다. 특히 미시세계, 양자역학에서의 시간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시간의 방향은 단순한 언어 법칙 설정의 문제일까, 아니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질서 형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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