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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납, 헴펠, 라이헨바흐의 성격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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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

2022. 1. 24.

   내가 한창 과학철학에 대한 열정을 키우고 있던 대학 학부 시절의 일이다.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등과 같은 최신의 물리학 이론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성찰을 기대하고 과학철학 수업을 들었던 나는, 어쩌면 너무나 쉽고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헴펠의 [자연과학철학]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음, 그렇지’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 시시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과학철학자는 너무 겸손한 것 아닌가. 헴펠의 이 책은 과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사실들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런데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헴펠은 인격적으로 너무나 훌륭하여, 그가 재직했던 프린스턴 대학에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아마 헴펠은 늘 겸손하고, 친절하고, 한결같이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는 토머스 쿤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아도 그렇다. 과학철학에서 헴펠은 ‘최후의 논리경험주의자’라 불린다. 라이헨바흐에게서 박사학위를 받고 카르납과 함께 연구했던 헴펠은 과학철학에서의 ‘과학적 설명’ 이론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과학 이론에 대한 철학적 해명으로도 유명하다. 그렇듯 논리경험주의 과학철학의 전통을 대표하는 헴펠이, 과학사를 근거로 논리경험주의에 강력한 도전을 했던 쿤과도 서로 존경하며 각별하게 지낸 것으로 알고 있다.

 

   여러 정황들을 보면 헴펠은 라이헨바흐보다 카르납과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과학철학에서 카르납은 ‘관용의 원리’로 유명하다. 카르납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과학 언어를 이용하여 자연 세계를 서술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이론 내적 논리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복수의 과학 언어들 중에서의 선택은 실천적인 근거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우리가 A라는 과학 언어를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와 다른 언어 B를 선택한 사람들을 비난할 수 없다. 우리는 상대방의 선택을 우리의 선택만큼이나 존중해야 한다. 물론 철학자는 분석을 통해 언어 A를 사용하는 경우의 장점과 단점, 언어 B를 사용하는 경우의 장점과 단점을 밝힐 수 있겠지만, 이와 같은 해명이 과학 언어의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카르납 역시 비인간적일 정도로 침착하고 친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카르납은 자신에 대한 포퍼의 철학적 비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논평을 했다. 아마 카르납은 인격적인 측면에서 헴펠과 비견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는, 어쩌면 헴펠이 카르납에게서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철학 그 자체보다도 중요한)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 라이헨바흐는 뛰어난 지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카르납과 헴펠에 비해서는 다소 다혈질적이지 않았나 싶다. 예를 들어 카르납이 상대성 이론뿐만 아니라 당시 이에 대안적인 이론들까지 공평하게 다루었다면, 라이헨바흐는 적극적으로 상대성 이론을 옹호하며 이 이론에 대한 각종 비판들에 대응했다. 다혈질적인 성격에는 장단점이 있는데, 중요한 단점들 중 하나는 적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카르납과 헴펠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평가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카르납과 헴펠의 과학철학은 나에게는 그다지 큰 흥미를 끌지 못했지만, 이후 삶을 살아오면서 이들을 조금 더 잘 이해하고 더 존경하게 되었다. 철학은 철학이지 과학이 아니며, 철학은 과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지만 철학이 과학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규정할 수 있지도 않다. 예를 들어, 철학은 그저 과학에 나오는 각종 진술들의 의미를 좀 더 논리적이고 분명하게 밝힐 수 있을 뿐이며, 그와 같은 규명 또는 해명이 과학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과학자들이 관심을 갖든 그렇지 않든 철학적 분석 결과는 철학 고유의 독립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나는 대학원 시절 제본을 해 두었지만 지금껏 제대로 읽지는 않았던 카르납의 [세계의 논리적 구조와 철학에서의 사이비 문제들]을 꺼내 들었다. 예전에 나는 ‘대체 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전체 지식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지금은 이러한 논리적 재구성이 일종의 철학적 분석 혹은 해명의 작업이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논리학적 도구를 이용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자연 세계에 대한 지식을 재구성하면, 우리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자연 지식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카르납은 자신의 논리적 재구성이 결코 논박될 수 없는 확실한 지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또한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다. 하지만 철학이 체계적인 견해 표명 이외에 어떤 것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카르납과 헴펠을 생각하면서 철학의 겸손함과 독립성 모두를 떠올린다. 철학은 자연과학과 같은 다른 분과 학문들을 존중하며 철학이 감히 주제넘게 자연과학의 실제를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철학 고유의 분석이 줄 수 있는 통찰의 의미와 가치를 다른 학문에 구걸하지 않는다. 철학은 철학이지 과학이 아니며, 철학이 인기가 없고 가난할 수 있을지언정 철학은 자신의 가치를 다른 학문에 의존하지 않는다. 라이헨바흐는 자신이 철학을 하지 않았다면 물리학을 했을 것이라 말했다. 아마 카르납과 헴펠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들은 철학을 했을 것이라 말했으리라. 나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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