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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는 과학관의 연구원이자 학예사의 글쓰기 공간입니다.

끝없는 싸움, 끝없는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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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022. 5. 7.

   싸움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것은 곧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쉬는 때조차 싸우는 도중에 있다. 어쩌면 더 잘 싸우기 위해 쉬는 것인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경우 왜 싸우는지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대부분 생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 태어난다. 태어나면서 직면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혹독한 경쟁이다.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싸우다 보면 어느새 싸우며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싸움의 과정에서 몇몇 개체들은 목숨을 잃는다.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다. 인간의 마음과 자아는 인간이 개성을 발휘하여 서로 경쟁하면서 사회를 유지하게끔 해주는 정교한 장치인데, 이 장치의 작동에 문제가 발생하면 인간은 견디지 못한다.

 

   나는 나의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마음은 감상적이고 유약한 편이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특정한 현상에 낭만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를 즐겨한다. 나의 지성적 재능은 지극히 평범하다. 나는 변화를 싫어하며 익숙한 일을 반복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세상을 바꾸기보다는 세상의 질서에 순응해왔다. 나는 질서에 따르며 질서를 유지하고 개선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나는 오래전부터 나를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나는 원칙과 질서를 존중하며,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공정함 또한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반칙이나 편법을 쓰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나의 아이들도 그렇게 살아가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어진 제도와 법률의 범위 내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선택과 전략은 얼마든지 사용해도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나는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제도를 활용했다. 왜냐하면 과학고등학교에서의 나의 내신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검정고시를 치르면 수학능력시험 결과에 맞게 내신 성적을 평가받을 수 있었고 이는 나에게 아주 유리했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과학고등학교 학생 중 많은 경우 2학년을 마치고 KAIST에 진학했기 때문에, 2학년을 마친 후 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검정고시를 보더라도 졸업한 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나에게 유리한 선택을 했다.

 

   나는 내가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학부 학점이 좋지 않았지만 대학원 진학에는 성공했다. 이 성공에도 운이 따랐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할 당시 대학원 진학이라는 것이 그다지 인기가 없었고, 경쟁률이 높지도 않았다. 나는 육군 학사장교 제도에 지원했다. 군 복무를 경험해보고 싶었고, 복무를 통해 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은 내가 자연대학 소속의 대학원에 적을 둔 상태에서 입대했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의 문과 출신들과 달리 정보통신 병과를 받았다는 것이다. 나의 군대 동기들 대부분은 학부에서 통신공학을 전공한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육군 정보통신학교에서 평균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고, 이는 오랫동안 나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강원도 홍천군에서 근무한 것 또한 나의 운이었다. 나는 부대 외부에 있는 간부 숙소에서 지낼 수 있었고, 홍천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군 복무 이후 대학원으로 돌아와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연구실에 살다시피 하면서 공부를 했다. 석사 과정에서 아주 열심히 공부해서 학부 때와는 달리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이때도 운이 좋았다. 유독 이 시기에 내가 수업을 수강했던 과목의 교수님들께서 성적을 비교적 후하게 주셨기 때문이다. 석사 과정 성적이 좋았기에 나는 운 좋게도 박사 과정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나의 지적 역량은 박사 과정에 진학할 정도로 우수한 것은 아니었다. 박사 과정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면서도 나는 일종의 싸움을 치렀다. 더 저렴한 원룸(고시원 같은)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동안 모아둔 돈을 가지고 취업을 준비했다. 나는 그전에 법학, 행정학, 경영학에 대해 전혀 공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턱대고 공무원 시험과 공공기관 입사 준비를 했고, 취업 준비 6개월 만에 한국장학재단 취직에 성공했다. 나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도 최종 합격을 했으나 한국장학재단을 선택했다.

 

   2012년 1월에 한국장학재단에 입사한 후, 1년 반동안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2013년 가을부터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 박사 과정 수업을 수강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도 운이 좋았다. 내가 모신 팀장님께서 대학원 수업 수강을 허락해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 과정에서 라이헨바흐의 책들을 번역할 기회도 얻었다. 나는 내 앞에 기회가 오면 주저하지 않고 그 기회를 잡았다.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책을 번역한 출판사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출판사였지만, 그런 것은 나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 기억에 2015년 11월에 한국장학재단 본사가 서울에서 대구로 이전했다. 나는 직장을 따라 대구로 내려왔다. 하지만 나는 2016년 8월에 박사 과정을 수료할 수 있었다. 국내 대학 간 학점교류 제도를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도 충청북도 청주에 소재한 한국교원대학교 소속의 교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2016년 12월에 첫째가 태어나는 바람에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논문자격시험에도 꾸준히 응시하여 합격했다. 나에게 이 모든 과정은 싸움이었다. 내가 할 일들을 회피하지 않으면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워서 얻은 결과다.

 

   2017년 7월에 국립대구과학관으로 이직한 것 역시 전략적 선택의 결과였다. 국립대구과학관에서 이례적으로 과학사 및 과학철학을 전공한 석사 이상의 직원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곳에서 아내가 일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내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치렀고 공정한 절차를 거쳐서 합격했다. 만약 합격하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한국장학재단에서 근무했을 것이므로 나에게는 아쉬울 게 없었다. 국립대구과학관으로 이직하면서 출퇴근 시간이 크게 단축되어 육아가 쉬워지고 여유 시간에 공부하는 것 역시 더 편해졌다. 국립대구과학관으로의 이직은 이 모든 것을 고려해서 선택한 결과였다.

 

   국립대구과학관 이직 후 나는 3권의 책을 번역해서 출판했고, 3편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했고, 둘째와 셋째를 보았으며, 2021년 4월에는 선임 연구원으로 진급했다. 이 모든 것들은 노력과 운이 결합한 결과다. 올해인 2022년 1월부터 12월까지 나는 육아휴직을 하고 있다. 이 또한 신중한 선택이었다. 내가 육아휴직을 함으로써 아내가 오랜 육아휴직을 끝내고 직장 업무에 전념할 수 있고, 향후 아내와 내가 모두 직장 생활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육아휴직 동안에는 국가에서 육아휴직 수당을 지급하므로 재정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 또한 이 기간에 나는 박사학위 논문 작성 작업을 할 수 있으므로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육아를 정상적으로 하면서 틈틈이 하는 논문 작업이라 육아휴직 제도를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육아휴직 제도를 십분 이용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지금껏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나에게 맞는 전략적 결정을 해 왔다. 이 결정 과정에서 의외이거나 예외적인 것은 있었을지 몰라도 부정하거나 부당한 것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얄밉게 행동한 경우는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박사과정생으로서는 으레 하기 마련인 수업 조교나 과정 조교를 하지 않았으며, 학회 총무간사를 맡지도 않았다. 그 점에서는 죄송한 마음이 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필수적인 의무 사항인 것은 아니었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나에게 가장 유리하면서도 규정을 위배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장 전략적인 선택을 할 것이다. 끝없이 싸우고, 불리할 경우 한없이 도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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