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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풀이를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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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022. 5. 12.

   가끔 부산을 방문하여 은퇴하신 아버지를 찾아뵈면, 아버지께서 스마트폰으로 장기나 바둑을 두시거나 스도쿠 퍼즐을 A4 용지에 출력해서 풀이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유 시간에 취미로 퍼즐을 풀고 계시는 것이다. 장기는 실제 전쟁 상황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왕, 호위무사, 대포, 전차, 코끼리부대, 기마부대 등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바둑의 경우 장기보다 가능한 경우의 수들이 많아 더 변화무쌍하지만, 장기와 달리 실제의 상황과는 약간 유리된 느낌이다. 장기보다 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규칙을 적용하는 게임이라 그런 것이다.

 

   장기, 바둑과 같은 게임 혹은 퍼즐 풀이는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일을 재미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장기 선수, 바둑 선수의 퍼즐 풀이 실력은 일반인의 실력과 확연하게 차이 난다. 유사하게, 축구, 농구, 배구, 탁구와 같은 체육 활동의 경우에도, 이 활동을 재미로 할 수 있지만 이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선수들은 천부적인 재능과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전문가로 거듭난다. 재능이 있으나 재정 형편이 좋지 않아 비용이 많이 드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경우, 전문가 수준으로까지 실력이 발전하지 못한다.

 

   실제로 자연 현상들과 대면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이 수집되고 체계화되어 이에 대한 이론이 수집되면 이른바 ‘교과서’가 만들어지고, 이 단계에서는 굳이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에 관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연 현상들과 대면할 필요가 없어진다. 특정한 부류의 자연 현상에 관한 교과서를 읽으면 여러 자연 현상들을 이해하고 이에 관련된 문제들을 풀 수 있다. 실제로 실험 하기를 귀찮아하는 책상물림인 사람이 이론 물리학을 잘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인간으로서 얻는 가장 기본적인 경험들(지각적 사실들) 및 이에 관련된 이론적 진술들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자연 현상을 이해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유를 생각하면 흥미롭다. 자연과학의 두꺼운 교과서(물리, 화학, 생물 등)는 아주 복잡하고 정교한 게임 혹은 퍼즐 풀이를 위한 지침서와도 같다. 장기 선수, 바둑 선수, 축구 선수, 농구 선수가 있는 것처럼, 자연과학에도 선수가 있다. 물리학자, 화학자는 일종의 선수들이다. 바둑 기사가 다른 기사와 대결을 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축구 선수가 다른 선수들과 시험을 하면서 후배 선수들을 양성하는 것처럼, 물리학자는 다른 물리학자와 이론적 혹은 실험적 대결을 하면서도 후배 물리학자들을 양성한다. 자연과학이 일종의 퍼즐 풀이의 단계로 접어든다는 통찰을 제시한 사람은 토머스 쿤이지만, 내가 알기로 이러한 비유를 썼던 사람은 쿤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자연과학이라는 게임 혹은 퍼즐 풀이의 독특한 점이 있다. 우선, 이 게임의 규칙이 불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조 규칙뿐만 아니라 핵심 규칙 모두 변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서 뉴턴 물리학으로 교체되었을 때, 핵심 규칙과 보조 규칙 모두 큰 변화를 겪었다. 그렇다고 해서 게임에 등장하는 대상들이 큰 변화를 겪는 것은 아니다. 이 대상들이 갖는 의미, 이 대상들이 따라야 하는 규칙이 변한다. 여기서 중요한 단서가 있다. 게임의 규칙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변화시킨 규칙이 변화시키기 전의 규칙보다 더 잘 자연 현상을 설명하거나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자연과학이라는 게임 혹은 퍼즐 풀이는, 자연 현상에 대해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사람마다 실력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자연에 대한 흥미와 관심은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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