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큰누리 2020. 10. 15. 22:46

* 본 답사기는 2015년 7월 4일, 종로구 해설사를 모시고 '나홀로 테마여행'에서 주관한 '서울장동팔경'에 대한 내용이다.

  까마득하게 5년 동안 잊고 지내다가 요즈음 코로나 19로 답사를 못하게 되어서 옛날 놓친 답사기를 정리하는 중이다.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

겸재 정선(1676-1759)은 숙종2년 병진년에 한성부(서울) 북부 순화방에서 탄생했다.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부근 - 인왕산 동쪽, 북악산 서남쪽 기슭이며 현재의 경복고등학교 안으로 추정된다.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로 성공한 후 지금의 종로구 옥인동에 있었던 자수궁 근처로 이사했으므로 장동8경의 무대에서 두루 산 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노론의 거두 김창집(1648-1722)의 동생인 김창협(1658-1721), 김창흡(1653-1722), 김창업(1648-1721)과 교유하며

그들의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후원으로 사대부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  

김창집(66세)의 천거로 38세에 음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이래 위수, 한성부 주부, 경상도 청하 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모친상을 당하자 벼슬을 내려 놓고 상경한다.

이후 다시 65세 때부터 80세 넘은 나이까지 양천현 현령, 첨지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종2품)를 역임했다.

 

‘장동’종로구 통의동, 효자동, 청운동 등을 일컫는 옛 지명으로, '장동팔경'이란 겸재가 태어나고 평생을 기거했던 인곡유거를 비롯하여

장동 주변 일대의 산수 중 8곳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본인이 내적으로 느낀 의미를 개성 있게 표현한 작품들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는 실제의 경관을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내적으로 느낀 감정을 개성 있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壯洞春色)>

1. 취미대(翠微臺) : '취미'란 산 중턱을 일컫는 말로 현재의 청와대 동쪽 일대 북악산 기슭을 그린 그림이다.

 

2. 대은암(大隱岩) : 남곤(1471-1527)의 집터에 있는 북악산 기슭 육상묘 위쪽 바위를 그린 그림으로 취미대 그림과 반대 시점에서 그렸다.

 

3. 독락정(獨樂亭) : 현재 청와대가 있는 세종로 1번지 동쪽 산골짜기로 대은암의 동쪽 끝자락 개울물이 흐르는 돌 위에 지어진 띠로 엮은 소박한 초가 정자이다.

 

4. 청송당(聽松堂) : 청송당은 '솔바람 소리를 듣는 집'이란 뜻으로 조선 중기에 큰선비로 유명한 청송 성수침(1439-1564)의 독서당 이름이다.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기상고 안에 있다.

 

5. 창의문(彰義門) : 인왕산 자락과 북악산 자락이 서로 마주치는 골짜기 능선 위에 지은 사소문 중 북소문이다.

 

6. 백운동(白雲洞) : 백운동은 인왕산 자락이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인왕산 동편 북쪽 끝자락 부근이다.

   현재의 종로구 청운동 8번지 일대이며, 자하문 터널과 이어지는 자하문길 서쪽 골짜기이다.

   청운동이란 이름은 1914년 일제가 경성부 제도를 실시하며 동명을 개칭할 때 청풍계와 백운동을 합쳐 지은 이다.

 

7. 청휘각(晴暉閣) : 청휘각은 현재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부근에 있던 정자이다.

   청음 김상헌(1570~ 1652)의 손자인 문곡 김수항(1629~1689)옥류동 저택의 후원에 지었던 정자이다.

 

8. 청풍계(淸風溪) : 청풍계는 인왕산 기슭의 북쪽으로 현재의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 골짜기를 일컫는 이름이다.

   원래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청풍계(靑風溪)라 불렸는데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국한 선원 김상용이 별장을 지은 이후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인 淸風溪로 바뀌었다.

 

9. 수성동(水聲洞) :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과 맞닿은 옥인동의 경계에 있으며 서울의 중심을 흐르는 청계천의 원류 중 하나이다.

  수성동은 원래 안평대군의 집터인 비해당이 있던 으로 시내와 바위가 아름다워 여름철 노닐며 관상하는 명소였다.

 

 

<장동팔경(壯洞春色) 답사 코스>

포스팅1.

경복고 안의 (운강대, 효자유지를 보고) '장동8경'을 그린 겸재 정선 집 터에서 답사 시작 - 창의문(자하문)

- '백운동천(白雲洞天)' 刻字 - 경기상고 안의 청송당유지(聽松堂遺址) - 서촌 청풍계, 백세청풍 刻字

- 청운동 현대家 정주영 가옥, 크라운제과 회장가옥 - 유진인재개발원(舊 청운각 요정), 청운산장 刻字

 

포스팅2.

인왕산 자락길 - 인왕산 자락길 구름다리 - 인왕산 도끼바위 - 수성동계곡(목교, 사모정, 기린교) - 답사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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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서촌 웃대를 답사할 때 이곳을 들렀고 답사기를 블로그에 남겼는데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제목 : 경복고등학교와 경기상업고등학교 안의 유적, 그리고 몽혼(夢魂)

http://blog.daum.net/hhl6103/619

 

 

<경복고 정문과 언덕의 雲江臺, 효자遺地>

운강대 각자(刻字)는 이곳이 선조 때 승지를 지낸 운강 조원의 유지였음을 뜻한다.

조원은 스승인 남명 조식으로부터 아름다운 선비(嘉林)이란 칭송을 들을 정도로 인품이 뛰어났다.

 

그의 소실이었던 이옥봉은 허난설헌에 버금가는 명류일컬어진다.

첩으로 들어가면서 한 '시를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겨 쫓겨나자 남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한 '몽혼'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명시이다.

이옥봉은 조원에게 쫓겨난 후 혼자 살다가 온몸에 시를 쓴 종이를 수백 겹 감은 채 중국 해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그 종이에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란 내용과 시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위의 내용은 40여 년이 지나 승지가 된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의 원로대신과 대화를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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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夢魂)           이옥봉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요새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신지요?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달 비친 사창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꿈 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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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의 장남인 조희정차남인 조희철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어머니를 해치려 하자 몸으로 막다가 왜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그 둘은 효자로 표창되어 쌍효자가 되었고 효자동도 이들에게서 유래되었다.

 

 

 

<담쟁이로 덮인 고풍스런 경복고 본관>

뒷산은 북악산이다.

 

 

<경복고 마당 복판의 畵聖 謙濟 정선의 집터와 자화상인 '讀書餘暇(독서여가)' 부조>

답사 때문에 경복고, 경기상고를 가끔 들렀는데 서울 한복판에 아직도 이런 고즈넉한 곳이 남아있어서 갈 때마다 기분이 좋다.

북촌은  관리들이 살던 곳이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합리적인 주택들이 늘어선 곳이라면 서촌은 조선 후기까지는 왕가의 사당 때문에 

잘 보존되다가 근대 이후에 아름다운 주변 경관 때문에 재벌의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대가 높고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인왕산, 수성동 쪽이나 남산쪽 전망도 좋고, 서울에서 가장 조용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이다.

볕이 좋은 날, 아무런 생각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서울에서 동네 골목길을 걷고 싶다면 이곳 만한 곳이 없을 것 같다.

 

사진은 경복고 교정 중앙에 위치한 겸재 정선의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다.

'장동팔경'을 그린 겸재 정선이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며 정선은 관직 때문에 임지에 있는 기간을 제외하면 평생을 이 근처에서 살았다.

정선이 태어나 14세까지 살았다는 집터는 지금 시각으로 보면 주변 풍치가 탁월한 서울에서도 최고의 요지이지만

당시의 정선은 넉넉치 못한 집안 환경 때문에 일찌감치 벼슬 준비를 하는 것조차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마루에 느긋하게 앉아 부채를 부치는 초로의 남성은 겸재 정선의 자화상인 '독서여가(讀書餘暇)'를 부조로 표현한 것이다.

'독서여가(讀書餘暇)도'는 양천구 양천로에 있는 '겸재정선미술관' 계단 참에도 채색 부조로 큼직하게 묘사되어 있다.

양천현감을 지냈기 때문에 현재의 강서구에는 겸재정선미술관 외에도 소악루 등의 정선 관련 재현 유적이 꽤 있다.

 

 

 

<경복고를 나서서 내려다본 청운빌라>

윗사진은 인왕산과 수성동 계곡쪽, 아래 사진은 남산 방향이다.

서울에 이곳 만큼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지고 고즈넉한 곳이 또 있을까 싶어 갈 때마다 마음이 당기는 곳이다.

 

 

 

<청운빌라 위(창의문 입구)의 최경식경무관 동상>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목을 따러 내려온' 김신조 등 북한 특공대(!) 31명과 대치하다 순국한 분이다.

 

 

<창의문(彰義門) 안팎과 문의 천장>

창의문은 영조 때 이르러서야 사소문 중 가장 늦게 문루가 지어졌고 그 때문에 상태가 가장 좋다.

그와 더불어 잘 하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의지와 상관 없이) 옹립되었기 때문에 조선의 역대 왕 중 가장 쪼잖은 왕으로 기억되는 인조가

반정 당시 들어온 군사를 이끌고 들어온 문이기도 해서 창의문 물루의 현판에는 인조반정 공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자신의 공적에 비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이등공신으로 책정된 것에 대한 불만으로 '이괄의 난'이 발생했다.

 

 

 

 

<창의문(彰義門) 바깥쪽의 빗물 배수구>

연잎 모양의 유려하고 아름다운 배수구(물받이)이다.

답사를 다닐 때마다 느끼는 것으로 야외에 있는 유적은 약간만 지붕이 있어도 보존상태가 어마어마하게 달라진다.

창의문의 아름다운 물받이는 위에 지붕이 걸쳐 있어 보존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창의문(彰義門) 위쪽의 모습, 현판과 인조반정 공신 명단>

두 번째 사진에서는 메주 같은 조선 초기의 서울성곽의 돌 벽돌이 언뜻 보인다.

세 번째 사진에는 창의문 현판이 보인다.

네 번째 사진의 공신 현판은 들여다 보다 뭉뚱그려져 보기 힘든 현판의 상태 때문에 귀찮아서 포기했다.

 

 

 

 

 

<경기상고 서쪽 담장(사진 오른쪽), 자하문 터널, 백운동천(白雲洞天) 각자 바위>

터널 위쪽에 백운동천(白雲洞天) 각자 바위가 있다.

세 번째 사진은 백운동천(白雲洞天) 각자 바위 윗쪽의 요수정 터 맞은편에 있는 조형물이다.

재야 사학자 이순우선생님이 안내한 2013년의 서촌 웃대 답사를 하며 처음 들렀을 때

'서울에 이런 자연이 있다는 사실' 에 무척 놀랐던 곳이다.

 

 

 

 

<부르나이대사관>

부르나이라면 어마어마한 석유 부국, 국왕이 다스리는 이슬람 국가 등이 연상된다.

 

 

<경기상업고등학교>

경기상고는 1923년 5월에 동숭동에서 경기공립상업학교로 개교하였으며 경기도 관할이어서 '도상(道商)'으로 불리었다.

동숭동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부지가 먹혀 1926년 구)농상소 자리에 있던 제2고등보통학교(現 경복고) 뒤로 이전했다.

1946년 9월에 경기공립상업중학교로, 1952년에 서울상업고등학교로 개칭(이때 청운중으로 중, 고 분리)되었다.

1968년 이후에 경기상업고등학교로 개칭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뒤의 산은 북악산, 동북쪽 바깥 건물은 1952년에 분리된 청운중학교이며, 청운중학교와 경기상고 사이에 청송당 터와 聽松堂遺址 刻字 있다.

 

 

<聽松堂遺址(청송당유지) 각자가 있는 경기상고 정문과 교정, 북악산>

청송당은 '솔바람 소리를 듣는 집'이란 뜻으로 조선 중기의 큰 선비였던 청송 성수침(1439-1564)의 독서당 이름이다.

뒷산은 북악산이며, 경복고와 경기상고, 청운중은 서로 지척에 있다.

 

 

 

<경기상고 교정의 무성한 소나무 터널과 고풍스러운 본관 현관>

 

 

 

<경기상고 동쪽에서 본 후관과 聽松堂遺址(청송당유지) 각자>

청송당은 청송이 34세 나던 해인 중종 21년(1526) 병술년 봄에 자신의 집(현재의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기상고 안)에 지었다. 

기묘사화로 스승인 정암 조광조(1482-1519)를 비롯하여 많은 사우들이 사약을 받는 등 화를 입자 청송은 출사를 포기하고

독서에 전념하기 위해 자신의 집 뒤에 청송당을 지었다 한다.

聽松堂遺址(청송당유지)란 '청송당 터'란 뜻이다. 

 

 

 

<서촌 청운동 골목길>

청운동이란 이름은 1914년 일제가 경성부 제도를 실시하며 마을을 통폐합하여 동명을 개칭할 때 청풍계와 백운동을 합쳐 지은 것이다.

이곳은 인왕산의 세 봉우리 중 중심인 낙월봉 줄기가 흘러내려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곳이어서 계곡이 깊고

개울물이 풍부하며 바위 절벽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도성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로 꼽혔다.

 

사진 속의 골목 끝(대각선 접점)에 백세청풍 각자(百世淸風 刻字)가 있고, 그 오른쪽은 김상용 집터이다.

 

 

 

<서촌의 김상용 집터와 그 아래 담벼락의 백세청풍 각자(百世淸風 刻字)>

청풍계는 인왕산 기슭의 북쪽에 해당하는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 골짜기 일대이다.

원래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청풍계(靑風溪)라 불렸는데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국한 우의정 김상용이

별장으로 꾸미면서부터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인 淸風溪로 바뀌었다고 한다.

척화파였던 동생 김상헌이 청나라에 잡혀가자 형 김상용은 지조를 지키기 위해 강화도성 남문에서 자결하였다.

 

'백세청풍'이란 말은 충절과 곧은 절개의 상징으로 충신들을 배출했던 고택에 현판으로 걸거나,

자기가 살던 지역에 바위글씨나 비석에 새겨 기념하기도 하였다.

현재 종로구 청운동의 김상용이 살던 청풍계 안에도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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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안내문에 의하면

"청풍계는 자연풍경이 빼어났던 곳으로 선조 40년(1607) 김상용이 들어와 살던 곳이다.

김상용은 이곳의 풍경에 감탄하여 바위에 '大明日月百世淸風(대명일월백세청풍)'이라 새겼었다.

일제시대에 주택을 지으면서 훼손되어 지금은 '百世淸風'이라 새긴 바위만이 남아서 김상용의 자취를 전하고 있다." 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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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世淸風' 각자에 대해서 현지에 이런 안내문이 있음에도 우암 송시열이 김상용의 절의가 자손만대에 이르라는 의미로

청풍계 바위에 새겨놓았다는 견해도 있다.

'이곳 풍경에 감탄하여...' 새겼다는 설명 외에 당시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사대적이었기 때문에

원래의 '大明日月백세청풍' 은 명나라를 찬양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서촌(청운동)의 현대家 가옥들>

당시 가이드하신 분의 설명에 의하면 윗사진은 현대에서 중요한 손님을 모시던 가옥이라고 했는데 현재의 용도(!)는 잘 모르겠다.

두 번째, 세 번째 사진은 언뜻 보아도 보안이 상당히 살벌(!)해 보이는 古)정주영 현대회장의 집으로 대문에 청운장(淸雲莊)이라 적혀있다.

정주영 가옥 바로 위에 크라운 제과 회장의 가옥舊 청운각(유진인력개발원), 청운산장 각자가 있다.

 

 

 

 

<유진인력개발원 입구에서 본 C제과 회장 저택>

C제과 회장 저택 바로 아래는 고)현대 정주영 회장 저택이다.

 

 

<요정 청운각과 설립자 조차임>

1956년 조차임이 이시영의 사저인 청운동 자택을 그의 가족들에게 빌려서 고급 요정으로 개장했으며

청운각의 전성기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요정이었다.

 

황해도 사리원(함흥이라고도 함)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한 조차임은

6.25 전쟁 때 피난 내려오면서 하루아침에 집안이 몰락했다.

열아홉 살의 나이에 요정의 기생이 되었고, 기생이 된 지 열흘 만에

쉰일곱 살의 조흥은행 중역인 한재경에게 시집을 갔지만 6·25 때 남편 한재경이 납북되었다.

그러자 혼자 부산으로 피난 가 술장사를 시작했고, 유일한 혈육인 딸을 낳아 서울로 온 후

낙원시장 입구에서 ‘산형’이라는 술집을 2∼3년 했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 53의 26번지에 있는 전 부통령 이시영의 저택을 그 가족들로부터 빌어

청운각이라 이름 지어 고급 요정으로서 영업을 시작했다.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이 이곳 청운각에서 맺어졌다.

1968년 6월 6일 암으로 죽으면서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 2억 여원을 사회에 헌납(장학재단 설립)했고 요정 청운각은 문을 닫았다. 

 

 

<크라운제과 회장 저택 위쪽의 舊 청운각(現 유진인재개발원)과 안의 청운산장(淸雲山莊) 각자>

'청운산장(淸雲山莊)' 刻字는 유진인재개발원 동쪽 언덕 위에 있으며, 그 위에 수성동계곡으로 이어지는 쪽문이 있다.

뒤쪽의 숲은 수성동계곡으로 이어지는 '인왕산자락길'이다.

 

 

 

 

<수성동계곡으로 향하며 내려다본 舊 청운각(現 유진인재개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