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큰누리 2022. 1. 15. 14:21

 

 

 

<봉원사 입구의 차단기>

입장료를 받는 곳도 아닌데 왜 유명한 사찰 앞에 차단기가 있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블로거에 의하면 태고종 사찰인 봉원사의 스님들은 대처승이 많고 봉원사 바로 아래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사생활을 위해서 설치한 것 같다고 했는데 사실 확인은 못했다.

특이한 점은 차단기 안 봉원사 아래 가게에 생수를 사러 들렀고, 안에 초로의 여성이 두 분 있었는데 해가 있음에도 문을 걸어잠그고 있었다.

현금만 받는다고 해서(현금 잘 안 들고 다니는데 대략 난감...) 겨우 천원짜리 한장을 찾아 생수를 사서 나오자마자 다시 문을 걸어잠궜다.

 

 

<봉원사 입구의 淸淨檀越(청정단월)공덕비와 각종 부도, 공덕비, 송덕비들>

봉원사 입구 오른쪽에는 이런 비석들이 즐비하다.

심지어 바로 봉원사 아래에도 비석들이 많은데 원래 이 부근까지 봉원사의 영역이었고 그래서 비석들이 많은 듯하다.

스님의 부도를 제외하면 죽어서 부처님의 은덕을 입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듯하다. 

스님들의 종형 부도들은 최근에 조성된 것인지 입성이 깔끔하다.

 

 

 

<봉원사 바로 아래의 비석들>

총 6기가 있는데 사진 속의 오른쪽에서 세 번째는 사진 상태가 흐려서 판독을 못했고 나머지는 아래와 같다.

趙娘子熺貞遺哀碑(조낭자희정유애비),  淸信女己酉生姜氏明心華(청신녀기유생강씨명심화),

百圓金錢 獻納寺中 尙宮 淸信女辛丑生孫氏文O性忌四月六日O(백원금전 헌납사중 상궁 청신녀신축생손씨문O성기4월6일O),

雲巖堂禪師頌德碑(운암당선사송덕비), 慧果堂..禪師不忘碑(혜과당..선사불망비) 등이다.

 

 '淸信女(청신녀)'란 호칭은 상궁을 지칭하므로 이 비석 중 3기 이상은 상궁과 관련된 비석으로 보인다.

조낭자(趙씨 낭자)는 어쩐지 수명을 다하지 못한 젊은 여성일 듯 싶고, 오른쪽의 2기는 선사(禪師)란 호칭이 들어가 있다. 

전반적으로 봉원사에 시주를 한 이들 비석으로 보이며, 이들 중에는 상궁들이 섞여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역사나 한자에 대해 아마추어인 개인적인 판단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음--  

 

 

<유일하게 비각이 있는 大施主 全星基송덕비>

비석의 내용을 보건데 시주를 한 이의 송덕비이고, 비각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금액을 시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봉원사 16나한상>

16나한상을 모두 촬영했지만 분량이 많아 게재는 생략했다. 

사찰에서 가장 코믹하고 생동감이 있는 표정은 단연 명부전 안의 장군상인데 이 나한상들도 그에 못지 않게 표정이 다양하고 생동감이 있다. 

 

 

<봉원사 천원지방 연못>

 

 

≪봉원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 1번지.

봉원사는 889년(신라 진성여왕 3년) 도선스님이 현재 연세대가 들어서 있는 곳에 창건하였으며, 고려 말에는 태고 보우스님이 사찰을 중창하였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소실된 전각을 지인(智仁), 극령(克齡), 휴엄(休嚴)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48년(조선 영조 24년) 찬즙(贊汁), 증암(增岩)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하였다.

이때 영조가 친필로 '봉원사'라는 현판을 내렸고, 신도들 사이에서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6.25를 거치면서 전각과 영조의 친필 현판 등 많은 유물이 소실되었으나

영월(映月)스님 등 여러 주지들과 사부대중이 합심하여 중창불사가 원만히 성취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2011년 전통사찰로 등록된 봉원사는 한국불교의 전통종단인 태고종의 총본산으로서 전법수행의 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서울시 유형문화재제363호 아미타괘불도와 제364호 범종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국가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기능보유자 만봉스님(2006년 입적)과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보유자 송암스님(2000년 입적)께서 주석하였다.

현재는 구해(九海)스님이 후학양성과 보존에 힘쓰고 있으며, 특히 영산재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상 현지의 '봉원사' 안내문--

 

정조 12년(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가 설치되었으며, 고종 21년(1884년) 발생한

갑신정변의 주축을 이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스님이 5년간 주석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다.

-중략-

1966년 주지 영월스님과 도화주 김운파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소실된 염불당(현재의 대당)을 중건하였는데

이 건물은 흥선대원군의 별처였던 아소정(我笑亭)을 헐어 옮긴  것이다.

-하략-

--아래 부분은 현지 '봉원사 연혁'에서 추려 옮김.

 

 

≪태고종과 조계종의 일반적인 차이≫

한국불교는 종단 27개가 있으며 규모는 조계종-천태종-태고종 순이다.

태고종은 태고 보우국사의 통불교(通佛敎)사상과 원융(圓融)정신을 종지로 삼고 있으며 본산은 전남 순천의 선암사이다.

일제 강점기 들어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결혼한 승려(대처승)가 늘었고, 해방 이후 비구승과 대처승의 갈등이 심했다.

 이에 대처승을 허용하지 않는 조계종과 허용하는 태고종으로 크게 나뉘고, 1970년 1월 태고 보우국사의 이름을 딴 태고종이 정식 선포된다.

태고종은 대중교화를 위해 머리를 기를 수도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으며, 사찰의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출가를 하지 않고 사찰을 운영할 수 있는 재가교역자제도인 교임제도를 두고 있다.

10여개의 큰 사찰 외에 3,200여 개의 사설 사암(寺庵, 개인이 세운 작은 사찰)이 있으며, 승려 8,400여 명, 신도 500여 만명이다.

조계종보다 불교의식에 대해 철저하고 원칙적이며, 한국불교의 전통문화인 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와 제48호 단청을 보유하고 있다.

 

불경을 읽지 않더라도 명상을 통해 진리와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일파란 점에서는 조계종과 같다.

이에 비해 두 번째 규모인 천태종은 불경을 읽고 그 안에서 진리와 깨달음을 얻는 교종의 대표적인 종파이다.

 

 

조계종의 상징 삼보륜≫ 이하 종파의 상징은 각 홈페이지에서 캡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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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종의 상징 금강저와 삼제원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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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종의 상징 법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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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 배치도>

 

 

<봉원사의 400년 수령 보호수(느티나무)>

이 보호수 말고 아래에 같은 수령의 느티나무 보호수가 하나 더 있다.

 

 

<공사 중인 봉원사 최대 전각 삼천불전>

앞에 삼층석탑과 석가모니 진신불 사리탑비(왼쪽의 검은 비석)가 있다.

 

 

<봉원사 감로수(약수)와 구룡좌>

 

 

 

<봉원사 대웅전과 대당>

 

 

<봉원사 대웅전과 내부의 삼존불>

닫집이 섬세하고 화려하며, 연등도 황금색이 많아서 더욱 화려하게 느껴졌다.

삼존불을 둘러싼 다양한 탱화들도 최근에 조성했는지 상태가 아주 좋았다.

 

 

 

<봉원사 대웅전 앞마당의 촛불>

 

 

≪봉원사 대당(염불당)과 아소정≫

봉원사 대웅전 아래 동쪽에 위치한 이 건물은 아소정(我笑亭)을 이건하면서 본채 건물 자재 일부를 변형 및 축소하여 건립하였다.

'아소정(我笑亭)'은 현재 공덕동 서울디자인고교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명성황후와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후 그녀가 죽을 때까지 대원군이 가택연금을 당한 것 같은 상태로 머문 곳이다.

1966년~1967년 주지였던 최영월 스님, 김운파 스님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내부에 추사와 그의 스승인 옹방강의 글씨 편액이 있다. 

 

<봉원사 대당의 청련시경(靑蓮詩境) 편액>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푸른 연꽃이 한편의 시를 이루는 경지'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각자 외에 추사의 산호벽루(珊瑚碧樓), 추사의 중국인 스승인 옹방강의 무량수각(无量壽閣) 편액이 있다.

 

 

<대당 옆과 뒷문의 신장상들>

국가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기능보유자 이만봉스님(2006년 입적) 작품이라고 하는데 상태가 너무 좋아서 긴가민가 하다. 

 

 

 

<봉원사 대웅전 동쪽, 대당 위쪽의 영안각(靈晏閣)과 내부>

봉원사 대웅전 동쪽(대당 위쪽)에는 대웅전 바로 오른쪽(동쪽)부터 雲水閣, 靈晏閣, 전씨전각 등 3개의 당우가 있다. 

다른 전각은 특별히 안치한 불상이 없고 영안각(靈晏閣)에만 있었다.

 

 

 

<영안각과 전씨전각 사이에 있는 落河潭(낙하담)>

가끔 사찰 한켠에서 볼 수 있는 '潭'자가 들어가는 이 석물의 용도는 무었인지? 

받침대 중간 부분이 부러진 것을 대충(!) 붙였고, '갑술 7월 O일'이라고 새겨져 있다.

 

 

<봉원사 대웅전 동쪽, 대당 위쪽의 전씨전각과 옆면의 연꽃 벽화>

안내도에는 전씨전각으로 되었는데 봉원사 당우 중 유일하게 아무런 편액, 혹은 현판이 없다.

대당에는 그래도 봉원사(奉元寺)란 편액이 걸려있는데...

 

 

 

<봉원사 대웅전 동쪽, 대당 위쪽 전각들의 옆 모습>

왼쪽(원경)부터 차례로 대웅전, 운수각(雲水閣), 영안각(靈晏閣), 전씨전각이다.

사진 오른쪽 밖에는 작은 소각장이 있는데 따로 봉송각(奉送閣, 봉송疏)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봉원사 대웅전 동쪽, 대당 위쪽의 전각 운수각(雲水閣)>

3개의 전각 중 가장 왼쪽, 대웅전 옆에 있는데 유리문으로 되어있고 내부는 볼 수 없다.

 

 

<봉원사 대웅전 왼쪽에 있는 용을 탄 관음보살상>

정병을 들고 용을 타고 있다.

위쪽의 전각은 봉원사의 전각 중 가장 아기자기한(!) 칠성각이다.

 

 

<용을 탄 관음보살상과 봉원사 대웅전>

봉원사와 관련하여 유명한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이는 단청부문 인간문화재였던 이만봉스님, 개화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동인스님이다. 

그 외에 명부전 편액을 썼다고 전하는 정도전도 유명인사일 듯하다.

이만봉스님이 한 단청은 어느 것일까를 생각했지만 일반적으로 단청들이 너무 깔끔하고 딱히 안내가 없어서 판단불가였다.

개인적으로 다른 당우에 비해 낡은 극락전의 다양한 꽃창살문과 단청, 영안각(靈晏閣)의 단청과 편액이 눈에 들어왔다.

 

 

<정도전이 쓴 편액이 걸린 봉원사 명부전>

두 번째 편액 왼쪽 위에 작게 정도전 필(鄭道傳 筆)이란 글씨가 있다.

세 번째 사진은 명부전 내부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좌우에서 협시하고 그 좌우에 시왕상이 있다.

 

현지 안내문에 의하면 명부전 편액은(요약)...

이 명부전 편액은 삼봉 정도전(1342~1398) 선생이 1897년(태조 6년) 예서체로 쓴 글씨를 양각하고 금니를 칠한 것인데,

오늘날 걸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1396년(태조 5년)에 현비 강씨가 승하하자 강비의 존호를 신덕왕후로 봉하였다.

다음 해 정동에 능을 조성하고 왕후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원당인 흥천사를 창건하고 명부전의 편액을 정도전에게 쓰도록 하였다.

 

1409년(태종 9년) 태종 이방원이 신덕왕후를 폄하하기 위해 능을 지금의 정릉으로 천장하고 방치했다.

1669년(현종 10년)에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하고 능침을 수리하고 다시 원찰을 세우고 신흥사라 개명했다.

1794년(정조 18년)에 신흥사가 지금의 돈암동 흥천사로 이전될 때 명부전 건물이 이곳으로 이전되어 천불전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명부전이 중건되자 정도전이 쓴 편액을 다시 게안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명부전 편액의 왼쪽 상단을 보면 작은 글씨로 정도전 필(鄭道傳 筆)이라고 양각되어 있어서 그의 친필임을 알 수 있다.

편액의 규격은 가로 164cm, 세로 60cm이고, 글자는 가로43cm, 세로 41cm이다.

 

 

 

 

<이완용의 글로 알려진 명부전 주렴과 명부전에서 본 칠성각, 대웅전>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편액이 걸린 이 명부전에 조선을 일본에 팔아넘긴 매국노 이완용이 쓴 주렴이 걸려있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6개의 기둥에 모두 주렴이 있다. 

 

 

<봉원사에서 가장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칠성각>

칠성각이라고 해서 산신 등의 토속신앙과 관련된 탱화나 불상을 상상했는데 특이하게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약사여래상 후면과 좌우에는 칠성도 등의 탱화들이 촘촘이 걸려있다.

이곳을 포함한 다른 당우들에서 많은 공양미(쌀 포대)들이 있어서 신기했다! 

 

사진을 촬영하려고 기다렸지만 마침 절을 올리던 신자분이 아주 오래 절을 해서 다른 곳을 둘러본 후 다시 들렀다.

이날 봉원사에 사람들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칠성각에서는 두 팀이 정성스럽게 무언가 기원을 했다.

 

 

 

<봉원사 칠성각 측면의 산신도>

호랑이를 동반한 이 분은 산신(령님)이다.

혹시 이만봉스님의 작품이 아닐까 싶어 촬영했지만 내 희망사항...

 

 

<봉원사 칠성각 뒷담의 내 최애 불상>

아주 작은 불상인데 오래 전(8년 전?)에 본 모습 그대로 안녕하시다!

표정이 너무 해맑아서 봉원사, 어쩌면 일반 불상을 통틀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불상이다.

누군가 손 위에 1원짜리 동전을 올려놓은 것이 거슬려서 아래로 내려놓았다.

 

 

<미륵전 앞에서 본 용을 탄 관음보살상 뒷모습과 탑>

윗 사진은 용을 탄 관음상, 아래 사진은 미륵전 앞의 탑과 칠성각, 대웅전이다.

 

 

 

<봉원사 미륵전과 내부>

미륵전은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지금의 한글 학회)가 창립총회를 연 곳이다.

 

 

 

<봉원사 나무아미타불비와 전각들>

봉원사 가장 윗쪽 전각으로 왼쪽은 극락전, 중앙은 만월전이며, 뒷쪽으로 안산자락길이 연결된다.

극락전 안에는 박정희대통령 부부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고 하는데 마침 스님이 염불 중이어서 들여다 보는 것을 포기했다.

특이한 점은 다른 전각과 달리 문을 꽃창살로 꾸몄는데 제대로 보였다면 상당히 아름다웠을 것이다.

밖에 유리를 덧대어 난반사가 심해 보기가 쉽지 않았다.

 

 

<봉원사 극락전>

극락전 안에는 박정희대통령 부부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고 하는데 마침 스님이 염불 중이어서 안치된 불상조차 들여다 보는 것을 포기했다.

특이한 점은 다른 전각과 달리 앞면을 꽃창살로 꾸몄는데 제대로 보였다면 상당히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런데 밖에 유리를 덧대어 난반사가 심해 보기가 쉽지 않았다.

 

 

<봉원사 만월전>

이름으로 보아 전씨전각처럼 이곳도 개인적인 이유로 세워진 전각 같다.

문이 닫혀있어서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봉원사 천불전 앞의 봉원사 수위안좌인(受位安座印)>

나도 따라해 보았는데 상당히 어려운 수인이다.

삼천불전은 여전히 공사중!

 

이 외에 남연군 묘를 안치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사된 가야사에서 가져왔다는 범종이 있으나 사진 상태가 여의치 않아 게제를 생략했다.

가야사가 폐사된 이유는 그곳에 조상의 묘를 써야 2대 황제가 나온다는 풍수설 때문이었고 이 이야기는 영화화되었다.

그러고보니 봉원사는 전각 하나하나마다 절절한 역사적인 사건과 사연이 있는 사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