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종류별/프랑스

쉿다리 2008. 4. 15. 12:40

샤또 딸보(Château Talbot)


  월드컵의 영웅, 히딩크가 4강의 위업을 달성한 2002년 월드컵 열기 속에서 우리나라가 막 16강에 진출했을 때, 그는 “오늘밤은 와인 한잔 마시고 푹 쉬고 싶다.”고 말했다. 바로 그날 밤 그가 마신 와인이 샤또 딸보 98년산이었다고 한다. 그는 샤또 딸보를 즐겨마셨다고 하는데, 이 와인은 터프하면서도 동시에 부드러움과 섬세함을 가진 히딩크의 이미지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백년전쟁은 프랑스와 영국이 지금의 보르도 지방을 두고 치른 100년간에 걸친 전쟁이다.  백년전쟁 또한 표면적으로는 프랑스내 영국령과 플랑드르 지방의 양모를 둘러싼 전쟁이지만 보르도의 와인 산지를 되찾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와인전쟁이라고들 언급하곤 한다.

  당시 프랑스는 국왕의 통치력이 약해 아키텐, 노르망디, 부르고뉴는 공작 령으로, 샹빠뉴, 브르따뉴, 앙주는 백작 령으로 왕의 세력이 미치지 못한 곳이었다.  12세기의 유럽, 그 역사의 중심에는 프랑스 왕국, 아키텐(Aquitaine) 공국(公國), 잉글랜드 왕국이 등장한다. 프랑스 왕국이 쇠퇴일로에 있었던 반면, 아키텐은 윌리엄 10세의 나라였다. 윌리엄 10세는 공작의 신분이지만 그가 소유한 아키텐의 면적이 당시 프랑스 왕국 국토의 3배를 넘을 정도로 부유했으며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윌리엄 공작에게는 아주 아름다운 딸, 엘레아노르가 있었다. 당대의 여걸이자 프랑스 남서부에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엘레아노르가 15세 되던 1137년에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결혼 조건에 이 땅들을 왕실 직영으로 편입시키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던 것에서 비롯된다.  꽃다운 나이에 따분한 파리생활과 사랑없는 결혼은 결국 이혼으로 끝을 맺었다. 알리에노르는 루이 7세와 결별하고(당시 30세) 앙주의 백작이자 노르망디의 공작인 앙리(당시 17세)와 재혼하면서 지참금으로 자기 소유의 땅을 몽땅 가지고 가버리는데, 이 앙리가 2년 후에 영국의 왕, 헨리2세가 되는 기묘한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1154년 헨리2세가 왕위를 계승받게 되었을 때, 그는 본래 갖고 있던 앙주 땅과 함께 노르망디, 브르따뉴, 리무쟁, 가스꼬뉴, 아키텐까지 프랑스 왕국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백년 전쟁의 싹이 되었다. 하지만 보르도가 영국에 속했던 이 시기에 보르도 와인은 영국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와인의 명산지로 명성을 쌓게 되었다. 완벽한 기후와 토양조건에 무역항으로서의 보르도 항까지 갖춘 보르도가 와인 재배와 판매에 최적지로서 유럽에 입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당시 영국 국민들은 와인의 명산지로 불리던 아키텐 출신의 프랑스에서 시집온 왕비를 환영했다. 당시의 결혼 관습은 신부의 재산을 모두 결혼지참금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엘레아노르의 전재산은 영국 왕실의 소유가 되었고, 풍요로운 보르도 땅 전체가 하루 아침에 영국의 재산이 됐다. 당시 영국에서는 지하수가 오염되어 있었기에 음료수 공급을 위해 보르도,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와인을 수입해서 사먹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보르도가 영국에 병합된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보르도는 수자원이 풍부한 땅. 또한 보르도 항구에서 배를 띄우면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로 가는 뱃길이 짧아 운송비가 적게 드는 이점이 있었다. 보르도 와인은 영국인들에게 영국 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영국령인 보르도 와인에는 관세를 부과하지 않아 가격 또한 싸졌다. 이러한 지원 정책에 힘입어 보르도 와인은 런던항의 와인 하역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스페인, 포르투갈의 와인은 경쟁에서 밀려나게 됐고 나중에 주정강화 와인으로 수출 상품을 변경하게 된다.

 

    자랑스러운 왕비, 영국의 우대정책 등으로 한층 고무된 보르도 사람들은 점점 최고의 와인을 만들어 런던으로 보내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차츰 그 결과가 와인의 품질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보르도 와인은 ‘여왕의 와인’ 혹은 ‘와인의 여왕’이라 불리며 지금까지도 세계 와인 시장에 군림하고 있다


   백년 전쟁말기, 혜성처럼 나타난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으로 진군한다. 이교도의 손에서 프랑스를 구해내자며 진군하는 잔 다르크는 비록 적이지만 희생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단신으로 적진에 달려가 이렇게 명령한다. “나는 피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 그냥 물러가라.” 이때 이 말을 듣고 고뇌하면서 퇴각했던 영국장군이 바로 톨벗, 프랑스어식으로 발음하면 딸보이다.  그는 까시티옹(Castillon) 전투에 참여해 1453년 7월 17일 끝내 장렬하게 전사하게 된다.  이로써  영국은 프랑스에서 떠나게되고 아울러 보르도에 대한 모든 권리도 없어지게 된다.

 

   샤토 탈보는 바로 영국군의 총사령관인 존 톨벗에서 유래가 된 것이다. 프랑스의 상징인 와인에, 그것도 백년씩이나 철천지원수로 싸운 적장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딸보 장군의 면모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그 기개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톨벗을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탈보가 되며 샤토 탈보의 라벨의 샤토 탈보 아래를 자세히 보면

'Ancien Domaine du connetable Talbot Gouverneur de la Province de Guyenne 1400~1453'

이란 문구가 적혀있는데 이는 '기옌 지방의 영주 총사령관 탈보의 오랜 영지 1400 ~1453'이란 뜻이다.

 

   물론 샤또 딸보가 프랑스 와인등급 중 최고 등급인 그랑 크뤼 클라쎄에 들어있는 고급와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샤또 딸보에 대한 엄청난 인기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이다. 이 요상한 이름의 와인은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 와인으로,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도 샤또 딸보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다고 할 정도이다. 그 인기 비결은 바로 짧고 기억하기 쉽고 부르기 쉬운 브랜드 이름 때문이다. 보통의 와인 이름은 길기도 길뿐더러 사실 발음조차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니 아직까지는 와인에 대해 잘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번만 들어도 바로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 바로 샤또 딸보였던 것이다. 1970년대, 국내 대기업들이 전 세계로 진출하던 시절, 종합상사 수출 담당 직원들은 전 세계 바이어들을 상대로 비즈니스 접대를 해야 했다. 적당히 아는 척도 하게 해주면서, 고급와인임에도 가격은 비교적 저렴하고, 그런대로 마실만하며 무엇보다도 발음하기 쉬운 샤또 딸보는 당시 우리 수출역군들의 비즈니스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던 것이다.


   샤또 딸보는 보르도의 중추적인 네고시앙(Négociant:와인 도매상) 중 하나인 꼬르디에(Cordier) 사에서 소유하고 있었다. 샤또 딸보는 1855년 그랑 크뤼 분류에서 4등급으로 채정되었다. 국내에서는 너무 흔히 보이는 탓에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싸구려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오해와 달리 썩 괜찮은 와인이다.

 

테이스팅노트

 

생줄리앙 와인답게 풍부하고 부드러우며 충만한 자두, 까시스 등의 붉은 과일 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과일의 풍미와 훌륭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깊은 오크 느낌에서 그랑 크루 와인의 전형성을 느낄 수 있다.

 
   
샤또 딸보 - 2001  
레드(Red)
   
빈티지 2001
지역/국가 생 쥴리앙(Saint Julien)
와인생산자 샤또 딸보(Ch' Talbot)
용량 750ml
알코올도수 12.5%
포도품종 까베르네 쇼비뇽(Cabernet Sauvignon)66%, 멜롯(Merlot)27%,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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