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이야기

미루 2014. 10. 14. 16:36

                                      회나무 집

 

                                                                          한 정 애

 

  큰집을 두고 사람들은 회나무 집이라고 불렀다. 오래 되고 키가 큰 회나무는 할아버지의 내리사랑만큼이나 커다란 그늘과 많은 것을 주었다.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다 덮을 만큼 넓은 나무 아래에는 이웃 어른들의 이야기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큰집을 수시로 드나들던 내게는 그 나무아래는 놀이터요, 이웃 사람들의 들고남을 다 지켜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봄날의 화려한 꽃 잔치가 끝나고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면 나무는 눈 같은 꽃을 피웠다.   

  회나무는 길상목이라고 하던가. 할아버지는 자손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가문이 번창하고 장차 큰 인물이 나거나 제 앞가림은 제대로 하는 자손을 바라지 않는 부모가 있을까만, 할아버지의 집안과 자손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회나무의 꽃과 열매를 말려서 약재를 만들었다. 나는 어리지만 할머니를 도와 꽃잎과 열매 말리는 일을 했다. 다른 약재와 섞은 환약은 효험이 좋았는지 소문을 듣고 회나무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환자들을 대하는 할아버지의 태도는 언제나 따뜻했던 모습으로 기억된다.

  자손들의 성공을 열망하며 회나무를 심었던 할아버지는 가문의 영광도, 자손들의 성공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가 약재를 만들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처방해 주기도 했다. 시골이지만 세월의 변화로 민간요법을 믿고 찾아오는 사람이 자연히 줄어들었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가족 그 누구도 약재 만드는 법을 배우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기도 한다.

  언제까지 우리 집안을 지켜줄 것 같았던 회나무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몇 해 지나지 않아 태풍에 쓰러졌다. 우리들 마음속에 언제나 같이 있어 할아버지처럼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 나무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자 집안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나무가 서 있던 자리를 볼 때마다 걱정을 안고 다녔다.

  그 무렵,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큰집 둘째 오빠가 농사를 지어 보겠다며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농사일에 가끔 힘들어 하기도 했지만 차츰 재미를 붙여 가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친구와 놀러 간다며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버스와 충돌하였다.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달려갔을 때는 오빠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젖먹이 딸과 겨우 걸음마를 하는 아들을 두고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떠났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 집에도 우환이 찾아왔다. 남동생이 사고를 당하여 뇌사 상태로 여러 해를 보냈다. 오랜 병원생활을 했지만 결국 가족들 곁을 떠났다. 같이 있었던 동료나 친구들에게 이유를 물어보아도 계단에서 넘어져 다쳤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부모님의 소원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도 차도가 없자 병원생활을 정리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과 작별했다. 그 뒤에도 집안의 가지가 하나씩 잘려 나가는 변고와 사고가 이어졌다.

  연이은 사고에 극도로 예민해진 집안 어른들은 조상을 달랜다며 굿을 하고, 점쟁이를 찾아가는 일이 잦아졌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았지만 할아버지 산소가 문제로 불거졌다. 할아버지 생전에 자식들에게 묻힐 자리를 봐 두었으니 거기다 꼭 묻어달라며 자리까지 보여주며 부탁을 했었다 한다. 장례식 날 방향이 맞지 않는다는 풍수의 말만 믿고 그곳에서 조금 비껴난 곳에 산소를 섰다고 훗날 큰아버지가 말했다. 또한 그 자리는 큰 인물이 묻힐 자리에 산소를 써서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동안 흉흉한 이야기가 번져 나갔지만 폭풍우가 잠잠해지면서 어둠의 그림자도 조금씩 벗겨져 나갔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저미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하나씩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상처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우리 집일 게다. 남동생을 낳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그 아들 때문에 힘든 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회나무에서 많은 것을 얻기도 했지만 나무가 쓰러지고, 그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자손들이 하나씩 부러져 나갔다. 가문의 번창함과 자손들의 성공을 열망하며 회나무를 심었지만 나무가 쓰러지면서 상처로 가득한 세월의 연속이었다.

  할아버지의 바람은 많은 것을 잃고 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당시 대학 다니는 큰손자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자랑거리였고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대학만 나오면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공들였던 큰손자는 지금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되어 있다. 증손자는 약관의 나이에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활약하고 있다. 오토바이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증손자는 국내 프로배구단에서 선수로 뛰며 꿈을 키우고 있다. 나머지 자손들도 제 자리를 지키며 흔들림 없이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흔들리는 바람에 자손들이 다치고 그 후유증으로 아픔을 삭이는 시간이 길었다. 세월의 바람 앞에 쓰러진 회나무처럼 우리 집안에도 많은 상처가 있었다. 아직도 그 상처가 다 아물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바람에 흔들리며 부러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회나무 같이 품 넓었던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어린 날처럼 우리의 웃음소리를 조금씩 찾아가는 일이 기쁘다

 

 

 

 

                             

 

 

 
 
 

그룹명/나의 이야기

미루 2014. 4. 1. 21:34

 

 

                                                                             시어머니의 유산

                                                                                 한 정애

 

  자명종이 따로 없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가 단잠에서 깨어나게 한다. 눈을 비비며 베란다 창문을 열면 밤새 새로운 꽃들이 뾰족이 얼굴을 내밀며 인사를 건넨다. 하루 일을 화초를 돌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시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화초기에 어쩔 수 없이 물려받아 키우게 된 게 대부분이다. 어머니는 죽어가는 식물도 살려내는 재주를 가졌다. 버려진 화초를 가져와 상처 난 곳을 다듬고 잘라낸 다음 볕이 잘 드는 곳에 두고 아침마다 화초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순이 돋고 꽃을 피운 화초를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게발처럼 줄기가 옆으로 뻗어 간다고 해서 게발선인장, 겨울이면 하얀 꽃을 피우는 화월과 꽃 기린은 가장 오래된 식구다.

  화초를 볼 때마다 어머니 말씀이 생각난다. 자기 죽음을 예견이라도 했는지 봄이 되면 새순이 돋고 꽃을 피우는데 새로이 싹이 돋아나듯 내 병도 나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뇌졸중으로 병이 깊은지라 식구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고 끝내 새봄을 맞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화초를 볼 때마다 그 모습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갈팡질팡했다. 화초 키우는 일이 익숙지 않을 때라 무거운 짐처럼 떠안게 되었지만, 키우다 보니 재미를 들이게 되었다. 분홍색 꽃이 아름다운 패랭이, 종이처럼 바스락거린다고 해서 종이꽃, 보랏빛 매 발톱, 꽃 중에 으뜸이라는 금낭화를 거실로 들여놓았다. 꽃을 피운 화초들은 집안 식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처음부터 잘 키웠던 건 아니다. 물을 제때 주지 않아 시들거나 온도를 맞추지 못해  얼어 버리기 예사였다. 종류에 따라 적절하게 물 주기와  적당한 온도와 햇볕. 바람. 세 박자가 맞아야 탈 없이 잘 커는 것 같다조금만 방심하면  벌레가 생겨 가장 성가시고 어려운 일인 것 같다어쩌다 죽기라도 하면 식구들 눈치를 보게 된다. 화초를 보며 어머니를 생각하는 식구들 때문이다 

  몇 해 키우다 보니 화분 관리 하는 것이 시들해졌다. 꽃을 보는 즐거움은 있지만 집을 비울 수 없는 게 흠이었다. 물을 자주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며칠 집을 비운 뒤 돌아와 보면 그사이를 견디지 못하고 너부러져 있다.

 몇 해 전부터 전자파를 막아준다는 다육식물에 마음을 빼앗겼다. 물을 자주 줄 필요가 없으니 키우기가 훨씬 수월했다. 잎사귀마다 싹이 돋아나 식구가 금방 늘어났다. 다육이도 야생화 못지않게 고운 꽃을 피워 키우는 재미가 솔솔 하다.

  주변에서 화원을 하라고 할 만큼 잘 키운다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되었다. 이웃에서 올 때마다 하나씩 가져가지만 시들어 버린다며 다시 가져가기를 반복한다. 식물도 사람과 같아서 목마르면 물을 주고 상처가 나면 약을 발라준다. 가끔은 긴 머리도 잘라주고 집이 좁으면 화분 갈이를 해 주어야 잘 자란다. 사람처럼 식물도 주인의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듣고 큰다고 한다. 꽃을 피우면 예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봄 햇살에 붉게 물든 다육이 모습이 아름답다. 겨우내 꽃을 피우는 게 발 선인장은 식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매년 꽃피우던 화월은 올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삐죽하게 키만 크는 것 같아서 내버려 두었더니 잎이 까칠하고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어 식물 영양제라도 주어야 할 것 같다.

 짐처럼 떠안은  화초지만 지금은 집안에 소중한 보물로 자리 잡고 있다. 화초를 키우면서  애를 태운 날도 있었지만 얻은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았다지금은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화초처럼 우리 가족의 뿌리도 튼실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룹명/나의 이야기

미루 2012. 4. 30. 20:20

 

                                                                               길 위의 사람들

 

                                                                                                                                                                한 정 애

 

대전에서 생활하는 아들을 만나기 위하여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도착했다. 대합실이나 광장 쉴만한 곳은 대부분 노숙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명당자리로 기차역 대합실을 꼽는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광장에는 자선 단체에서 나온 밥 차가 사람들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노숙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지나가다 밥 차를 보고 오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반찬이래야 국과 몇 조각의 김치가 전부였지만 밥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받아든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가득했다.

파산으로 빚쟁이를 피해 집을 나왔거나 가족이 해체되어 집으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이 거리를 배회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종일 벤치에 앉아 있거나 오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기도 한다. 얼마 전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판 돈 50억을 가진 사람이 집도 없이 노숙생활을 한다는 기사가 사회면을 장식했다. 그가 알려지게 된 데는 돈이 든 가방을 잃어버려 경찰에 신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손 벌리는 사람들을 피해 노숙생활을 했다고 한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도 걸인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농사를 짓기는 했어도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사흘이 멀게 찾아오는 걸인들에게 배부르게 밥을 주기란 쉽지 않았다. 주로 셋이나 넷이 패를 지어 오거나 가족끼리 헛간이나 양지바른 길옆에서 며칠씩 묵어가기 예사였다. 동네 잔칫집과 초상집이 있는 날은 걸인들의 발길이 잦았다. 여자나 아이들이 지나가면 힘을 과시하며 위협을 하기도 했다. 걸인에게 쫓겨 혼이 난 일이 있었던 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숨거나 방문을 잠그고 눈앞에서 멀어질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어느 초여름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남자아이 혼자 동네에 들어왔다. 친구네 외양간에 자리를 잡은 뒤 밥을 얻으러 이집 저집 기웃거리고 다녔지만 배를 채우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며 또래 아이들이 시비를 걸기도 했지만 가끔은 놀이에 끼워주기도 하였다. 해가 지면 볏짚이나 거적을 이불삼아 한기를 달랬다. 날이 지나도록 기가 죽었고 동네 아이들과 시비가 붙은 날은 외양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끼니를 굶을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양간을 지나가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경련을 일으키는 아이를 보았다. 어디 아픈지 물어봐도 대답이 없었다. 할머니에게 달려가 “외양간에 있는 애 죽으려는지 벌벌 떨고 있다”고 말하니 물에 만 밥을 들고 와 떠 먹여 주며 뭐라고 하셨다. 먹을 것이 들어가서 그런지 마음을 달래줘서 그런지 한참 지나자 몸을 뒤틀던 경련도 멈췄다. 그 후로 때마다 끼니를 챙겨 주시며 동네 아이들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살피셨다. 며칠 뒤 기운을 차리고 조금씩 움직이며 밥을 얻으러 다녔다.

며칠 뒤 동네에서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외양간을 살펴보니 누운 자리만 패인 체 남아 있었다. 할머니에게 외양간에 살던 애 안 보인다고 하였더니 “잘 사는 동네로 갔겠지” 라고 하셨다. 무서웠던 기억 때문에 걸인만 보면 도망부터 쳤던 나였지만 그의 모습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광장 한쪽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관객은 밥 차에서 허기를 면한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웃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폐 몇 장 모금함에 넣는 것으로 책임을 면하려고 한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보다 주변을 둘러보고 배고프고 마음을 다친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우리들의 몫인 것 같다. 크게 남을 도우려고 하기보다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하다 보면 언젠가는 큰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