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미래

세상다담 2008. 7. 22. 22:33
 

산업혁명, 맬서스의 저주를 거부하라!


18세기 말 영국은 국내외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바다 건너 프랑스에선 혁명이 일어나 왕의 목이 단두대에 잘려나갔고, 곧이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혁명사상이 거침없이 도버해협을 건너오고 있었다. 국내에선 1760년 이후 급속하게 전개된 인클로저운동*으로 수백년 동안 살아온 터전에서 말끔히 쓸려나간 농민들이 하루 아침에 도시빈민으로 전락하여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낳고 있었다. 한편, 그간 산업화의 단물을 실컷 빨아들인 중간계급(지주와 노동자의 중간에 끼어 있다는 의미임. 오늘날의 제조업자)은 지주계급의 권력독점에 불만을 품고 전방위적이고 주도면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배집단 사이의 대립과 새로운 사회문제의 폭증, 여기에 프랑스에서 건너온 급진적인 혁명사상의 결합은, 그간 잘나가던 영국사회를 갑자기 경색되게 만들었다. 전체 역사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어수선한 분위기는 사상의 열매를 위한 자양분을 공급해왔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는 새로운 사회질서의 원리와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모색이 정치세력 사이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복잡하게 진행된 시기였다.


인클로저운동*

‘울타리치기’로 알려진 인클로저 운동은 16세기 이후 영국 모직물 산업의 발달로 양모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새로운 돈벌이에 눈이 먼 귀족과 젠트리가 대규모 목양지牧羊地를 만들기 위해 공유지를 사유화하고, 인근의 토지를 강제로 병합하는 현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뿌리 뽑힌 수많은 농민은 유랑민으로 전국을 떠돌게 되는데, 이미 헨리 8세 시기에 유랑민 82,000명을 교수대에서 처형할 정도로 유랑민 문제는 심각했다. 당시의 세태는 토모스 모어가 자신의 저서 『유토피아』에서 “적게 먹고 온순했던 양이 이제 사람을 잡아 먹는다”고 힐난하게 꼬집을 정도였다. 카를 마르크스는 인클로저운동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며, 직접 생산자(농민)를 생산수단(토지)으로부터 분리시켜 대규모 무산대중이 창출되는 과정으로서 ‘본원적 축적’단계의 모범적인 사례로 설명하고 있다.


18세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무렵, 시끌벅적한 도시에서 벗어난 한적한 시골의 한 아름다운 농장 저택에서 대니얼 맬서스라는 목사와 그의 아들이 최근 유행하고 있는 개혁사상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대니얼 맬서스는 자신과 아들의 주장이 하나로 모아지기보다는 끝 모를 평행선만 긋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무척이나 놀라게 된다. 아들의 견해는 논리적이긴 했지만 지나치게 비관적인 결론으로 치닫고 있어, 루소 철학을 신봉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선뜻 아들의 주장에 찬성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이 인간 사회의 미래에 대한 의미 있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한 견해를 출판해보라고 권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서재로 들어가 집필을 시작했다.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의 『인구의 원리에 관한 에세이』, 즉 『인구론』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타났다. 동시대 거의 모든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낙관적인 미래관을 폈다면, 유독 맬서스만은 비관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다. 그래서 그의 경제학은 ‘음울한 과학’이라고 불렸지만, 이 음울한 경제학자의 선견지명은 그가 바로 『인구론』을 집필하던 그 시기에 자신의 과학이 허물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맬서스의 과학을 붕괴시킨 역사의 소용돌이는 바로 ‘산업혁명’이었던 것이다.


맬서스의 음울한 세계

일단, 맬서스가 만들어낸 세계로 들어가 보자! 맬서스의 세계는 그가 고안해 낸 ‘인구법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시간도 아닌 사회시간에 유일하게 외운 법칙은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맬서스의 인구법칙인데. 『인구론』에서 맬서스 자신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세계인구의 총수를 1억이라고 가정할 때, 인구는 1, 2, 4, 8, 16, 32, 64, 128, 256의 비율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1, 2, 3, 4, 5, 6, 7, 8, 9의 비율로 증가한다. 이렇게 될 경우 2백년 후에는 인구와 식량의 비율은 259 : 9, 3백년 후에는 4096 : 13, 그리고 2천년 후에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커진다.


맬서스의 설명은 이처럼 매우 간단명료하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어 나가다가 다음에 어떤 문장이 이어질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굉장히 두려운 생각이 들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식량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시점, 어떤 사회에서 식량 생산에 비해 인구의 증가가 현저하게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과잉인구는 생산된 식량이 부양할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이때 생산과 인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필연적인 법칙이 작동하는데, 맬서스는 인구의 과도한 증가를 억제하는 것으로 단호하게 전쟁과 살육, 자연재해와 기근, 전염벙을 꼽고 잇다. 그에게는 성욕이 포기될 수 없는 본능으로 남아있는 한, 대중의 빈곤과 비참함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시장의 작동을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으로 신성시하면서, 경제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간섭을 거부했다면, 맬서스도 생산과 인구가 균형을 이루는 메커니즘을 ‘신의 섭리’로 묘사하면서, 자유방임의 원리를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다음은 맬서스가 인구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마련한 처방전으로, 전직 목사로서 그의 직업이 무색할 정도이다.


적어도 식량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몫으로 나누어진 후에는 생존수단의 증가율이 어떠하든, 이것에 의해 인구증가가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수준을 넘어서 태어난 아이들은 성인의 사망에 의해 여유가 생기지 않는 한 반드시 죽어야 한다. ․․․․․․․․ 그러므로 죽음을 가져오는 자연의 작용을 헛되고 어리석게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쉽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기근이라는 무서운 행태의 재난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자연을 위해 다른 형태의 파멸을 부지런히 준비해두어야 한다. 빈민에게는 청결을 권고하지 말고 그 반대의 습관을 장려해야 한다. 도시의 거리는 더 좁게 만들고 집집마다 더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게 하고 전염병이 잘 돌도록 유인해야 한다. 시골에서는 썩은 연못 근처에 마을을 만들고 특히 불결한 늪지대에 정착하도록 해야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질병을 특별히 퇴치하려는 것을 비난해야 한다. 또 무질서를 추방하는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인류에 봉사하겠다는 자비롭지만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비난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매년 죽는 사람이 늘어 나면 ․․․․․․․․ 아마도 우리는 모두 사춘기에 결혼해도 되고 완전히 굶어 죽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맬서스가 발견한 법칙은 그의 부친이 느꼈듯이 매우 논리적이며 또한 현실적이다. 오늘날에도 인도와 방글라데시, 아프리카 등 제3세계가 겪고 있는 기아와 빈곤, 부족들 간의 전쟁, 병충해 및 자연재해-정확히 얘기해서 인구법칙 때문은 아니지만-등은 맬서스가 나고 자란 곳인 영국, 더 광범위하게 말하자면 유럽에서 이런 현상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인구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더러운 환경을 유지한다거나 돌림병을 방치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반대로 인구감소를 억제하기 위해 정부가 두팔 걷고 나설 정도다. 농축산물의 경우 판매보다 생산이 문제가 된 경우는 아주 오래전 일이며,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쌀농사의 흉년과 풍년에 나라 전체가 울고 웃던 시대는 거의 아련한 기억 속의 옛 일이다. 기아와 빈곤이 문제가 아니라 비만이 문제가 된 시대 속에 우린 살고 있다.

이렇게 볼때, 맬서스는 자신의 현실에 대해선 천재적인 설명을 시도했지만, 당대의 역동성을 잡아채 미래의 경향을 예측하는 데는 서툴렀다. 그는 자신의 편협한 법칙으로 인해 새로운 동력이 개발되고, 그 힘으로 움직이는 다양한 기계가 발명되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면서 생간이 급격히 증대되고 있던 당대의 현상과전망을 무시했다. 인구의 증가를 생산성의 증대로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점차 현실화되던 ‘산업혁명’의 시기에 생산이 정체되어 있던 중세에 딱 들어맞는 맬서스의 시대착오적인 법칙은 서서히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 교양세계사, p.403~409, 동서역사문화연구회, 2007. 4, 우물이있는집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