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사회

세상다담 2008. 8. 20. 02:36
 

■ 존재와 사랑 1 - 정서현, 김이나


“물은 흐르든, 고여 있든 혼자 놀이할 줄을 알지요.”

정서현은 난간에서 내려서며 중얼거렸다.

“호수는 제 꼬리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빙빙 돌아요.”

“제 손바닥을 갖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찰박찰박 두드리고.”

“익사한 영혼처럼, 커다란 장화를 신고 점펑점펑 자기의 무덤 속을 거닐고요.”

정서현은 하-웃으며 그리고 또 있느냐는 듯 이나를 쳐다 보았다.

“저 자신의 빈 주머니를 터는 파산한 남자처럼 투덜대요. 곧 자살할 것처럼요......”

그 말을 마치나 이나는 입을 꼭 다물고 자갈을 차며 걷기 시작했다.

왜 글을 중단하셨어요?

한동안 말이 없었던 이나가 갑자기 물었다. 정서현은 한때 몇 권의 책을 내기도 한 소설가였다.

“약해서지. 글이 단순히 표현이 아니라, 현실적인 무기가 되기를 요구하는 시대를 지나오면서 난 글을 잃었어. 내 체질 자체가 투사적이지 않았고 묵묵히 모멸을 겪으며 자기의 문학 세계를 수호할 만큼 강하지도 않았던 셈이지. 글을 포기한 뒤로, 난 이제 모든 것에 대해 그다지 심각해지지 않아요. 그냥 존재하기로 했어요. 오늘 밤에는 사무실의 여자 동료와 호숫가에 서서 자갈돌을 툭툭 차면서 존재하지요. 이것으로 충분해요. 어제나 내일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런 순간들의 편린이 내 삶이오. 난 이제 생에 대해 아무것도 싣지 않게 되었어요.”

그 말을 할 때 정서현은 문득 자신이, 내일도 모레도 수많은 밤마다 이렇게 이나와 밤 산책을 하며 호숫가의 돌을 차게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를 느끼고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이미 시효가 지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변해 버렸다. 이제 흩어져버리는 삶의 편린들로서는 만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무리지어야 할 끝말이 자동적으로 흘러나왔다.

“생에 대해 지나치게 식어버렸어. 일종의 타락이지......”

그게 타락이라면 자신은 이제 구원되고 있는 것인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이 새롭고 엄청난 욕망에 의해? 그는 뭔가를 향해 꿈틀거리기 시작한 자신을 냉소했다.

“전에 부장님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다시 글을 쓰시게 되기를 바래요.

정서현은 걸음을 멈추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이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글을 쓰지는 못할 거요.

이나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p.33~34, 전경린, 1997. 2, 도서출판 문학동네 中에서

 

 

 

■ 존재와 사랑 2 - 정서현, 김이나


전 내일 제 방으로 돌아가겠어요. 언젠가 제게 물으셨죠? 어떤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 꼭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구요. 그리고 뭔가를 두려워하느냐고 물으셨죠. 전, 뭔가를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한 남자를 기다렸어요. 바로 이곳에서 견디는 것이 내 삶이었죠. 오랫동안 전 한 점 위에 박히고 또 박히는 못 같았어요. 못요. 느슨해지면 더 세게 박아넣고 휘어지면 펴서 박아넣었죠. 그 아픈 곳이 제 가슴인지도 모르고. 황량하고 공허했지만 아주 이따금 긴 기다림이 보상을 받는 것 같은 좋은 시간들도 있었어요. 그러나 모든 것이 부질없이 끝나버렸어요. 저도 이제는 흘러가고 싶어요. 아는 사람이 없는 외진 곳으로 가고 싶어요. 나 자신의 현실 외엔 모든 것이 아득한 옛날이 되어버렸으면 해요. 계절은 꼬리를 물고 다른 계절로 이어지고, 꽃들은 남 몰래 피었다가 산산이 흩어지고, 아이들은 자라고 남자와 여자들은 늙고, 세상은 모두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정말이에요. 아주 남루해져도 상관없어요.”

......


“난 요즘, 아니 당신을 만난 그 순간부터, 늘 이나 당신만을 생각하며 지냈소.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봤지만 어쩔 수 없었소. 난 삶을 잊어버린 것이오. 먹는 것, 걷는 것, 잠자고 숨을 쉬는 것, 그런 것은 당신에게 예속되었고 난 불안한 존재가 되어버렸소. 결국, 이나 당신은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소. 존재하는 것들은 어떤 곳에 이르기 위해 어떤 모습을 갖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이오. 난 당신이 사랑이라는 정서마저 우스꽝스럽게 여기게 됐다 해도 상관없소. 이것은 나의 문제요.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가 당신에게 하는 것을 허용하기만 하면 되는 거요. 어쩌면 나의 감정이라는 것도...... 당신을 생각하면 난 몸 안의 어떤 것이 물결치는 것을 느껴요. 아주 맑아지고 이상한 의욕이 차오르지. 살아보고 싶은 느낌인지 죽고 싶어지는 느낌인지 모를 이상한 의욕, 그것은 무채색의 3월 정오에 빈 공중을 향해 그냥 짓게 되는 미소 같은 것이오. 가파르게 흘러보내고 싶은 당신의 세월 속에 나를 받아줄 수는 없겠소? 우리 함께 겹쳐 흘러갈 수는 없겠소? 아무런 희망도 없더라도 말이오.”


 

: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p.176~178, 전경린, 1997. 2, 도서출판 문학동네 中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꼭 집어 어딘지 모르지만
참 여운이 많이 남드란 생각이 들었는데
자기가 올린 이 내용, 참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