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심리

세상다담 2009. 12. 15. 14:06
한국의 정체성한국의 정체성 - 10점
탁석산 지음/책세상

 

 

 

 

   만득이가 아프리카의 한 소국을 방문한다고 가정하자(아프리카의 소국을 예로 들어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만득이는 자랑스러운 대한의 남아로서 세계 최강국인 조국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한 소국에 도착하고 보니 공항의 건물이 모두 한옥 양식이다. 만득이는 약간 의아스럽다. 이 나라는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라는데 왜 자신들의 고유한 건축 양식을 포기했을까? 그는 의구심을 가진 채 호텔로 가기 위해서 택시를 탄다. 택시 기사는 한국어를 구사하려 애쓴다. 만득이는 한편으로는 한국어가 세계 공용어이므로 기사가 한국어를 하려고 애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사가 한국어를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에 다시금 의구심이 생긴다. 여기는 기사의 나라가 아닌가?

 

   기사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라디오를 켠다. 라디오에서는 설운도의 ‘다 함께 차차차’가 신나게 흘러나온다. 기사는 짧은 한국어로 설운도가 이 나라에서 최고의 인기 가수라고 말한다. 지난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이 나라를 방문하여 유력한 후보를 만나기까지 했다고 한다. 만득이는 눈길을 차창 밖으로 돌린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복을 입고 있다. 디자인도 한국의 것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또한 거리 곳곳에는 한정식이란 간판을 단 고급 식당이 눈에 띈다. 만득이는 여기가 과연 아프리카의 한 구석인가 하고 의아해한다.

 

   택시가 모퉁이를 돌자, 대학생들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들은 ‘한국놈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휩쓸 태세이다. 그들은 주체적 국가와 주권 사수를 맹렬히 외친다. 하지만 그들 역시 대부분 한복을 입고 있다. 택시 기사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막걸리와 한국산 소주를 가장 좋아하며, 한국 가수인 조용필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또한 한국 사람이라면 단지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나라에서 취직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만득이가 보기에 이 나라는 의식주 모두가 거의 한국화되었고, 음악, 미술, 영화 등도 예외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득이는 과연 이 나라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의심을 갖는다.

 

: 한국의 정체성, 22~23쪽, 탁석산, 책세상, 2009. 4.

 

 

 

 

http://blog.daum.net/hjandej2009-12-15T05:06:350.31010

 

아프리카의 한 소국을 방문했던 만득이는 그 나라의 정체성을 의심했다. 그래도 철학에서는 정체성이 지켜질 것으로 생각한 만득이는 철학회에 가본다. 철학회에 가보니 철학자들은 한국의 성리학에 관해 열띤 논쟁을 하고 있다. 주기론과 주리론 중 어느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논란을 벌인다.
(...)
왜 이들은 남의 나라 철학에 그토록 열정적인가? 도대체 한국철학이 이들이 현재 겪고 있는 절박하고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준단 말인가? 이들은 여가생활로 인류의 보편성이라는 이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려는 것일까? 만득이는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한국에는 더 이상 주기론․주리론 논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 자신의 지금의 문제라는 것을. 만득이는 지금도 자신의 문제로 씨름하는 철학자가 있다고 믿고 싶다.

: 한국의 정체성, 120~121쪽, 탁석산, 책세상, 200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