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독서·토론

세상다담 2011. 4. 22. 00:06

 

 

 

 

   (...) 그런데 이런! <아주 훌륭하다!>라고 긁적거리기 위해 연필을 기울이자 내가 쓰려는 말이 이미 거기에 적혀 있다. 그리고 기록해 두려고 생각한 요점 역시 앞서 글을 읽은 사람이 벌써 써놓았다. 그것은 내게 아주 친숙한 필체, 바로 내 자신의 필체였다. 앞서 책을 읽은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 전에 그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모든 것이 무(無)로 와해되어 버린다면, 대관절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인가를 한단 말인가? 어쨌든 언젠가는 죽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 (...)

 

   어렴풋이 떠오르는 인용문을 찾으려면, 나는 며칠이고 책을 뒤적인다. 저자를 잊어버린 데다가, 이책 저책 찾고 있는 동안 생면부지의 작가들이 써놓은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글들 가운데서 헤매고, 결국에는 원래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로 어떤 책이 내 인생을 변화시켰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감히 답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책이 전혀 없었다고? 모든 책이 다 그렇다고? 어떤 한 권의 책이라고? - 나는 모른다.

 

   그러나 혹시 -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해 본다 -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 있다. 의식 깊이 빨려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

 

: 깊이에의 강요, 83~88쪽, 파트리크 쥐스킨트, 열린책들, 1996.8.30. (초판 6쇄)

 

 

 

파트리크 쥐스킨트 ( Patrick Süskind, 독일, 1949. 5. 26. ~ )

연약한 체격, 지나칠 만큼 반짝거리는 가느다란 금발머리에다 유행에 한참이나 뒤떨어진 스웨터 차림의 남자. 이 사람이 바로 전세계 매스컴의 추적을 받으면서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이다. 1949년 독일 암바흐에서 태어나 뮌헨대학과 엑 상 프로방스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그는 일찍이 시나리오와 단편을 썼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34세 되던 해 한 작은 극단의 제의로 쓴 『콘트라베이스』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한 예술가의 고뇌를 그린 남성 모노드라마인 이 작품은 <희곡이자 문학 작품으로서 우리 시대 최고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러한 관심 속에서 그는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장편 소설 『향수』(1985)를 발표한다. 냄새에 관한 천재적인 능력을 타고난 주인공 그르누이가 향기로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기상천외한 이 소설은 발표되자마자 전세계 독자를 사로잡았다. 그후, 그는 세 번째 소설 『비둘기』를 통하여 조나단 노엘이라는 한 경비원의 내면 세계를 심도 있게 묘사, 유럽 매스컴으로부터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 평가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인 성공에도 아랑곳없이 이 괴이한 작가 쥐스킨트는 모든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고,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발설한 사람이면 친구, 부모를 막론하고 절연을 선언해 버리며 은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는, 평생을 사람과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별난 인물을 그린 『좀머 씨 이야기』(1991)를 발표하여 또 한번 전세계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니 나를 제발 좀 그냥 놔두시오!>라고 외치며 자꾸만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려고만 하는 좀머 씨의 모습은 가난한 은둔자로서 살아가는 쥐스킨트 자신의 기이한 삶의 행로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유일한 단편 모음집인 『깊이에의 강요』는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 등의 세 편의 단편 외에 「그리고 하나의 고찰」이라는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 역시 다양한 소재를 토대로 무거운 주제를 유머러스하고 가볍게 터치하는 작가 특유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어 일관된 작가 의식을 보여 준다. 특히, 이 작품집에서는 작가 쥐스킨트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엿보이며, 그의 작품을 밀도 있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책날개에서 )

 

 

 

  깊이에의 강요 - 10점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열린책들

 

그 동안 쥐스킨트가 발표한 단편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과 에세이 한 편을 한데 묶었다. 짧은 이야기 뒤로 남겨진 긴 여백 속에서 작가의 세상을 보는 시각을 읽을 수 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삶의 작은 이야기들에 따스한 눈길을 돌리고,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전반적으로 긴 여운이 남는 이야기들이다.

 


 

     

좋습니다. 쥐스킨트의 '비둘기'를 읽고 싶었는데 미루고 있네요
^^
전 <향수>를 읽다가 멈춰두고 있어요.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싶기도 하고... ^^*
깊이에의 강요 한번 읽고 싶어지네요~
이분의 책은 별로 읽은 기억이 없어서 한번 봐야겠어요~
잘 보고 갑니다.^^
정말 짧은 단편인데... 뭐랄까 반전이 깊어지게 만든답니다. ^^*
저두 잘 보고 다녀 갑니다~
이곳 제주시는 햇빛이 너무나 강렬하네요~
더 따뜻한 곳이 부러울 때가 많답니다. ^^*
유채꽃이 한창이겠죠? 벌써 졌나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 읽고 머리가 댕 했어요..여행지에 책을 들고 가는 버릇이 있어 그 곳에서 읽었는데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요.
그쵸? 좀머 씨는 왜 그렇게 돌아다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