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사회

세상다담 2012. 2. 27. 21:09

 

 

 

 

독립문까지 빤히 보이는 한길에도 골목길에도 집집마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연기가 오르는 집이 어쩌면 한 집도 없단 말인가. 형무소에 인공기라도 꽂혀 있다면 오히려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  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 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 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268~269쪽(12. 찬란한 예감), 박완서, 웅진닷컴, 2003.3.29. (재판 100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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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아 : 마디풀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1미터 정도로 줄기가 곧으며, 6~8월에 흰 꽃이 핀다. 산기슭에서 흔히 자라고 어린잎과 줄기를 생으로 먹으면 새콤달콤한 맛이나 예전에는 시골 아이들이 즐겨 먹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작가 박완서가 자화상을 그리듯이 쓴 성장소설. 1930년대 개성에서의 어린 시절부터 1950년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20대까지의 이야기를 맑고도 진실하게 그려냈다. 1992년 처음 출간되어 10년이 넘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교정을 보느라 다시 읽으면서 발견한 거지만 가족이나 주변인물 묘사가 세밀하고 가차없는 데 비해 나를 그림에 있어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거나 생략한 부분이 많았다. 그게 바로 자신에 정직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이 점점 단명해지다 못해 일회적인 소모품처럼 대접받는 시대건만 소설쓰기는 손톱만치도 쉬워지지 않는구나. 억울하면 안쓰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억울하다. 웅진에서 성장소설을 써 보라는 유혹을 받았을 때, 성장소설이란 인물이나 줄거리를 새롭게 창조할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자서전 비슷한 거려니 했기 때문에 솔깃하게 들었다. 요컨대 좀 쉽게 써 보자는 배짱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바로 보기처럼 용기를 요하는 일은 없었고, 내가 생겨나고 영향받은 피붙이들에 대한 애틋함도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뼛속의 진까지 다 빼 주다시피 힘들게 쓴 데 대해서는 아쉬운 것투성이지만 40년대에서 50년대로 들어서기까지의 사회상, 풍속, 인심 등은 이미 자료로서 정형화된 것보다 자상하고 진실된 인간적인 증언을 하고자 내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했다는 걸 덧붙이고 싶다. 잘난 척하는 것처럼 아니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지쳐 있고 위안이 필요하다. 기껏 활자공해나 가중시킬 일회용품을 위해서 이렇게 진을 빼지는 않았다는 위안이.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웅진닷컴, 2003.3.29. (재판 100쇄)

   

 

   

 

     

세상다담 님은 왜 블러그에 ..
다담님의 글쓰기는 없나요?
짧막한 글이라도 올려놓을수 있는
방하나 만드시면 좋을텐데 아쉽당..^^*
그쵸? 아직 多讀에도 못 미치는 터라... 多作, 多商量... -.-;;
그래서 핑계로... 다른 분들의 생각을 그대로 읽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야...

부족하지만, '세상 끄적이기'를 통해 아주 아주 가끔 써놓기는 해요.
점점 더 늘려볼게요. 제 생각을 가라앉힌다는 것... 정말 쉽지 않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