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사회

세상다담 2012. 7. 25. 16:47

   

   

 

   

선백의 생애 - ①

윤일주 ( 註. 윤동주 시인의 친동생 )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이런 전보 한 장을 던져주고 29년간 시와 고국만을 그리며 고독을 견디었던 사형 윤동주를 일제히 빼앗아가고말았으니 이는 1945년 일제가 망하기 바로 6개월전 일이였습니다.

 

   1910년대, 북간도 명동 ( 註. 현주소 : 중국中國 지린성吉林省 옌볜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룽징시龍井市 명동촌明東村 ) - 그곳은 새로 이룬 흙냄새가 무럭무럭 나던 곳이요, 조국을 잃고 노기에 찬 지사들이 모이던 곳이요, 학교와 교회가 새로 이루어지고 어른과 아이들에게 한결같이 열과 의욕에 넘친 모든 기상을 용솟음치게 하던 곳이었습니다.

   

   1917년 12월 30일, 동주형은 이곳에서 교원의 맏아들로 태여났습니다. 그의 생가는 할아버지가 손수 벌재하여 지으신 기와집이였습니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함북 회령이요, 어려서 간도에 건너가시여 손수 황무지를 개척하시고 기독교가 도래하자 그 신자가 되시여 맏손주를 볼즈음에는 장로로 계시였습니다.

 

   동주형의 근실하고 관용함은 할아버지에게서, 내성적이요, 겸허함은 아버지에게서, 온화하고 치밀함은 어머니에게서 각각 물려받은 성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아명은 해환이였고 그아래로 누이와 두 동생이 있었습니다.

 

 

   얌전한 소학생 해환은 아동지 《어린이》의 애독자였고 그림을 무척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1931년에 명동소학 ( 註. 1925 ~ 1931 ) 을 마치고 대립자 ( 註. 1931 ~ 1932 ) 라는 곳에서 중국인관립학교에 1년간 수학하였으니 시 “별 헤는 밤”의 패, 경, 옥이란 묘한 이국소녀의 이름은 이때의 추억에서 얻어진것이 아닌가 합니다.

 

   1932년 그가 룡정 은진중학교 ( 註. 1932 ~ 1935 ) 에 입학하자 저희 집은 룡정에 이사하였습니다. 중학교에서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습니다. 축구선수이던 그는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네임도 혼자 만들어 유니폼에 붙이고 기성복도 손수 재봉틀로 알맞게 고쳐입었습니다. 낮이면 운동장을 뛰여다니고 초저녁에는 산책, 밤늦게까지 독서하거나 교내잡지를 만드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거나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끝까지 즐기던 이 산책은 이때로부터 비롯되였습니다.

 

   운동복이거나 문학서적만 들고 다니는 그의 성적에 뜻밖에도 수학이 으뜸가는것에는 다들 놀랐습니다. 특히 기하학을 좋아함은 그의 치밀한 성품에서였다고 짐작됩니다.

 

 

   1935년 봄, 3학년을 마칠즈음, 그는 불현듯 고국에로의 류학을 꿈꾸고 겨우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평양 숭실중학교 ( 註. 1935 ~ 1936 ) 에 옮기였습니다. 그의 습작집으로 미루어 평양시절 1년에 가장 문학에의 의욕이 고조된듯합니다. 이즈음 백석시집 《사슴》이 출간되였으나 백부 한정판인 이 책을 구할 길이 없어 도서실에서 진종일을 걸려 정자로 베껴내고야말았습니다. 그것은 소중히 지니고 다닌 모양으로, 지금은 나에게 보관되여있습니다. 평양류학도 끝을 맞게 되었으니 숭실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교케 되었던 까닭입니다. 1936년 다시 룡정에 돌아와 광명중학교 ( 註. 1936 ~ 1938 )  4학년에 들었습니다. 이때 당시 간도에서 발간되던 《카톨릭소년》지에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동요 몇편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그의 비운은 중학교 졸업반에서부터 비롯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그는 진학할 과목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때 벌써 많은 동요와 시고를 가지고있던 그에게 문학이외의 길이란 생각조차 할수 없었습니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젊어서 문학에 뜻을 두어 북경과 도꾜에 류학하고 교원까지 지내셨건만 자기의 생활상 실패를 아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고싶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의사가 되기를 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듣지 않고 아버지의 퇴근전부터 산이고 강가이고 헤메다가 밤중에야 자기 방에 돌아오는 날이 계속되였습니다. 한숨이 늘고 가슴을 두드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년을 두고 아버지와의 대립이 계속되다가 졸업이 닥쳐오자 그는 이기고말았습니다. 할아버지 권고로 아버지가 양보하신것입니다. 소학과 은진중학 동창이며 고종사촌이며 또 동갑인 송몽규형과 동행하여 서울로 온것은 1938년 봄이였습니다. ( ②, ③ 에서 계속 )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82~191쪽, 윤동주, 연변인민출판사, 2011.2.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10점
  윤동주 지음, 신형건 엮음/보물창고

 

기존의 판본과 달리 어린이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윤동주의 동시들을 제2부에 모아 놓았다는 점,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는 '청년 윤동주'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산문을 수록했다는 점, 그리고 시인의 극적인 생애와 시 세계와의 연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도록 상세한 연보를 덧붙였다는 점 등이 이 책의 특징이다.

 

     

저기 사진에 장준하가 아니라 송몽규 아닌가요?
김상 님께서 좋은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트위터를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글도 보이네요.

백찬홍 @mindgood
장준하 선생이 숭실중 재학때 문익환 목사(뒷줄가운데), 윤동주 시인(오른쪽)과 함께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뒷줄 왼쪽)입니다만 장호권 박사에게 문의한 결과 다른 분으로 확인됐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t.co/Fsi8sO2b

제가 사진에 글을 적을 때, 분명 어딘가에서 참고를 했을텐데 시간이 흘러 확인해 드릴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동생분은 지금도 살아계신가요? 가슴따듯한 글이네요.. 만약에 아버지께서 그때 아들에게 이기셨으면 저희들은 윤동주시인의 시를 아마 많이 볼수 없었겟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