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사회

세상다담 2012. 7. 26. 07:28

   

   

 

   

선백의 생애 - ③

윤일주 ( 註. 윤동주 시인의 친동생 ) 

 

 

   도꾜와 교또에서의 그의 고독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태평양에서는 전화(战火)가 들끓고 존경하던 선배들은 붓을 꺾거나 변절하였고 사랑하던 친구들은 뿔뿔이 헤여졌고 하숙방에서 홀로인듯한 자기를 발견하고 스스로 눈물 짓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 註.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이 중화민국을 침략한 이후 1941년에 미국은 일본 제국에 경제 제재와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반발한 일본 제국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이 참전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태평양과 아시아의 영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영어: Pacific War, 일본어: たいへいようせんそう)이라 한다 ) 

  

 

     ……

  

     륙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쉽게 씌여진 시”에서

     

  

     

   그러나 홀로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며 그의 고독만으로 항거하기에는 현신의 물결은 너무 거센것이였습니다.

  

   1943년 7월, 귀향일자를 알리는 전보를 받고 역에 나갔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매일 같은 마중 끝에 한 열흘후에 온것은 우편으로 보내온 차표와 그 차표로 찾은 약간의 수화물뿐이였습니다. 차표를 사서 짐까지 부쳐놓고 출발직전에 경찰에 잡혔던것입니다. 교또대학에 있던 몽규형도 함께 잡혔습니다.

  

   압천서(川署)에 미결로 있는 동안 당시 도꾜에 계시던 당숙 영춘선생이 면회했을 때는 “고오로기”란 형사의 담당으로 일기와 원고를 번역하고있었으며 매일 산책이 허락된다고 하더랍니다. 곧 나갈것이니 안심하라고 하던 형사의 말은 결국 거짓이 되고말았습니다.

  

   동주와 몽규 두 형이 각 2년 언도를 받고 후꾸오까형무소에 투옥된 1944년 6월이래, 한달에 한 장씩만 허락되는 엽서로는 그의 자세한 옥중생활은 알길이 없었으나 《영화대조신약(英和对照新约)》을 보내라고 하여 보내드린 일과 “붓끝을 따라온 귀뚜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고 한 나의 글월에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 라고 답장을 주신 일이 기억됩니다.

  

  

   판결문의 결론은 결국 한민족에 대한  애착이 반제국주의 행위이기에 치안유지법 위반이 되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 판결문에는 윤동주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대하여 당 재판소는 검사 에지마 다카시가 참여하여 심리를 한 결과 징역 2년의 판결을 내리고, 구류되었던 120일은 징역일수에 산입 처리한다고 밝히고 있다. 징역형의 이유는 윤동주가 어릴 때부터 민족 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감화 등에 의해 치열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갖고 있었으며, 일본의 조선 통치 방침을 비판하고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에 직면해 열세한 일본의 패배를 몽상하고 그 기회를 틈타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는 것이 이유로 적혀져 있다.

( 출처 :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406 )

  

  

   매달 초순이면 꼭 오던 엽서 대신 1945년 2월에는 중순이 다 가서야 상기한 전보로 집안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말았습니다.

  

   유해나마 찾으러 갔던 아버지와 당숙은 우선 살아있는 몽규부터 면회하니 “동주!” 하며 눈물을 쏟고 매일같이 이름 모를 주사를 맞노라는 그는 피골이 상접하였더랍니다.

  

   “동주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소리를 웨치고 운명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간수의 말이였습니다.

  

   아버지가 후꾸오까에 가신 동안에 집에는 한 장의 인쇄물이 배달되였으니 그 내용인즉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는 가져가거나 불연(不然)이면 구주제대(九州帝大)에 해부용으로 제공함. 속답 바람.”이라는 뜻이였습니다. 사망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백골 몰래 또 다른 고향에”가신 나의 형 윤동주는 한줌의 재가 된채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땅 간도에 돌와왔습니다. 약 20일후에 몽규형도 같은 절차로 옥사하였으니 그 유해도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동주형의 장례는 3월 초순, 눈보라치는 날이였습니다.

  

   자랑스럽던 풀이 메마른 그의 무덤우에 지금도 흰눈이 내리는지-

  

   10년이 흘러간 이제 그의 유고를 판각함에 있어 사제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으며 시집 앞뒤에 군것이 붙는것을 퍽 싫어하던 그였음을 생각할 때 졸문을 주저하였으나 생전에 무명하였던 고인의 사생활을 전할 책임을 홀로 느끼며 감히 붓을 들었습니다. 이로 하여 거짓 없는 고인의 편모나마 전해지면 다행이겠습니다.

  

1955년 2월

사제 일주 근식(谨识)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82~191쪽, 윤동주, 연변인민출판사, 2011.2.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10점
  윤동주 지음, 신형건 엮음/보물창고

 

기존의 판본과 달리 어린이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윤동주의 동시들을 제2부에 모아 놓았다는 점,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는 '청년 윤동주'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산문을 수록했다는 점, 그리고 시인의 극적인 생애와 시 세계와의 연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도록 상세한 연보를 덧붙였다는 점 등이 이 책의 특징이다.

 

     

정말 잘 읽고 갑니다
윤동주님에 관한 소중한 정보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너무 맘이 아프네요...
윤씨 형제의 깊이에 감복하고 제 자신이 얼마나 얕은지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