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사회

세상다담 2012. 9. 24. 23:26

 

  

  

  

“좁은 독방에 해가 삐뚤게 들어오기 시작한다. 처음엔 점 하나 찍어놓은 크기였지만 그것이 점점 커지기 시작해 나중엔 신문지 크기로 커진다. 신문지크기만 한 햇빛을 맞을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두 시간 정도다. 그러나 이 한 점의 햇살만으로도, 그 햇빛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게 손해는 아니다. 그 햇살이 없었으면 나도 숨을 끊었을지 모른다.”  - 신영복

  

수 년 전 신영복 선생의 강연회에서 이 말을 듣는 순간 제 정수리에서 뭔가가 자르르 흘러내렸습니다. 당시 선생의 말씀은 저에게 당신을 살아가게 했던 ‘신문지만 한 크기의 햇살’이상이었거든요. 선생은 저에게 시대를 살아가는 힘이었고, 삶을 견뎌내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아니 선생은 당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도 큰 선물이셨죠. 공부라면 담 쌓고 살던 제가 2년 전 큰 맘 먹고 성공회대에 편입한 것도 순전히 선생 때문이었으니까요. 물론 권총(F학점)을 수십 개 차서, 얼마를 더 다녀야 할지 모르겠지만, 뭐 대수입니까? 저는 전문대도 11년이나 다녔는데요……. 여하튼 막 봄이 움트는 교정에서 선생과 마주 앉았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보면서 나는 이런 세월을 견디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20년 하고도 20일, 억울하고 분하지 않으셨나요?
 

그런 질문도 들어봤죠. 그런데 어느 시대나 역사적 격랑 속에 희생된 사람이 상당히 많아요. 지금도 이집트, 리비아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있어요. 크게 보면 민족의 운명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민족, 특정인에 대한 분노는 온당치 않아요. 20년을 견디는 힘은 하루하루 찾아오는 깨달음이었어요. 그래서 그 시절을 ‘나의 대학 시절’이었다고도 술회하지요. 뭔가를 깨닫는 삶은 견디기 쉬워요. 감옥에서 보면 나가는 날만 기다리는 단기수들이 더 괴로워했어요. 나 같은 무기수는 시간이 지난다고 빨리 나가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하루하루가 의미가 있었어요. 우리 삶도 그래야 해요. 성과, 속도, 효율…… 뭔가에 자꾸 도달하려고 하는데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거죠. 삶과 인생에 대한 생각이 부족하다 싶어요.

  

    

지금 세상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세계 모든 질서가 그렇죠.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있고 그 중하위권에 우리나라가 매달려 있는 형국이기 때문에 여기서 떨어지면 어루 삶이 정지되는 구조 속에 살고 있어요. 구제역에 걸린 가축이 산 채로 매몰되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 사회의 다른 인간적인 가치와 가능성도 매몰되고 있지 않나 하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이럴수록 우리 시대를 짓누르는, 빨리 깨뜨려야 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배타적인 자기를 경쟁력 있게 만들려는 노력이지요. 지금 이 시대에 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결국 물질적 성과를 획득하는데 유능한 경쟁력입니다. 그런데 그게 현재 우리 사회의 기본 가치가 돼 있잖아요. 나라도 그런 포맷으로 만들고 있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진짜 소중한 건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바꾸지 못할 뿐이죠.

  

  

비인간적이고 패륜적인 톱니바퀴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지만, 용감하게 도로에서 기수를 틀어 차문을 열고 길 위에 서고 싶지만……, 두렵기도 하고 방법도 모르겠어요.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중장기적인 정책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데, 사실 쉽지 않아요. 그러나 많은 사람이 고민하고, 고민이 깊은 공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럼 가능성은 있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회 곳곳에 숲을 만들자는 거예요. 작은 숲을 만들어 우선 견디고, 다시 숲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여러 가지 수준의 연대를 하면서 사회적 역량을 결집할 수 있어요. 여럿이 함께 가면 뒤에 길은 생겨나거든요. 우리 자신의 주체적 결정권 없이 뭔가 밖에서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우리 역사의 아픈 잔재예요. 함께 고민해서 함께 결정하면 됩니다.

  

  

함께 뜻을 모아 가면 그 뒤가 길이라는 말씀이시네요. 역사의 결정권자 역시 언제나 민중이라는 것이고요. 그나저나 선생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늘 직접적이거나 자극적인 단어가 없어요. 그런데 어떤 격한 말보다 훨씬 깊이 와 닿아요.

  

  

전에 선생님께서 자유의 의미를 말씀하시길, 자기의 이유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반 에덴이 쓴 동화 이야기를 자주 예화로 들어요. 아버지와 아들이 길섶에 있는 버섯을 가리키며 ‘이게 독버섯이다’라고 말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독버섯이 충격을 받아 쓰러지죠. 옆에 있던 친구 버섯이 위로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일 뿐이야. 식탁에 오를 수 없다, 먹을 수 없다는 자기들의 논리일 뿐인데 왜 우리가 그 논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우리 자신이 갖는 인간적 이유, 존재의 의미를 가져야죠. 신자유주의적 가치와 질서에 포획당한 환경에서 투철한 자기 이유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 이유를 가지면 개인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견딜 수 있는 힘, 자기 삶을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힘이 생겨요.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거죠.

  

  

선생님 말씀 들으면 부처님 말씀 듣는 것 같아요.

  

그게 문제이긴 해요. 나도 내가 이야기하는 만큼 살지 못한다는 반성이 있어요. 내가 썼던 글도 교도소와 가족이라는 이중의 검열을 전제로 하다 보니 항상 반듯하고,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지요. 그렇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았어요.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무서움도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그런지 독자들을 만나면 반듯하고 쓰러지지 않는 모습만 보여줘야 하고, 저를 그렇게 보는 것도 부담스러워서 가능하면 독자들을 만나는 걸 피하고 싶어요.

  

  

하하. 전 사실 선생님이 당신도 당신이 말한 만큼 못 산다고 하시고, 당신도 죽을 결심을 한 적 있다고 하신 게 큰 위로와 위안이 됐어요. 선생님도 저렇게 생각을 할 수 있구나 한거죠. 그런데 선생님. 지금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길게 봐야죠. 사회 변화는 국가 권력을 탈취하면 확실하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공유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나치스 독일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러시아가 있는데 그건 아니라는 걸 보여줬죠. 결국 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아주 다양한 수위의 수많은 실천, 꾸준하고 부단한 참여, 오케스트라처럼 수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다양한 노력이 결집되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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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지만, 그래도 이 시대를 살면서 감사한 것은 선생 같은 ‘숲’이 계셔서가 아닐까? 누군가에게 숲이 되어주는 그런 삶.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고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된다. 나도 그런 숲의 삶을 본받으며 살 수 있을까?

  

  

  :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 287~295쪽(신영복) 중에서, 김제동, 2011.9.5. (초판 42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