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그림

세상다담 2016. 11. 10. 23:41




Liberty Leading the People, 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1798-1863), 1830

Oil on Canvas, 260 × 325 cm, Le musée du Louvre, Paris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은 외젠 들라크루아가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1830년에 그린 그림이다. 그림 가운데 여성은 자유를 상징하며, 한 손에는 프랑스 국기(La Tricolore)를 다른 손에는 총검을 휘드르고 있다. 이 작품은 들라크루아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린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 시대를 이끄는 대표적인 프랑스 화가였다. 그의 낭만주의 사상과 양식은 계몽주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또 그는 정확한 묘사를 요구하는 그 시대의 예술사조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붓질을 특징으로 삼았다. ( 출처 : 위키백과 )




프랑스 대혁명(1789-1794) → 제1 공화정  제1 제정  나폴레옹 전쟁  왕정복고  7월 혁명(1830)

  2월 혁명(1848)  제2 공화정(1848~)  제2 제정(1852~)  파리코뮌  제3 공화정 




자유의 여신이 이끈 '7월 혁명(1830)'은 성공적인 듯 했으나,

공화정이 들어서기까지 그 뒤로도 무려 18년이 필요했고,

그나마 4년 뒤엔 또다시 제정(帝政)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 번에 바뀔 수 있다는 믿음, 이는 아마도 환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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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구제도의 모순이 심화되어있었다. 구제도 아래에서 제 1신분인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은 여전히 면세특권을 비롯하여 봉건적 특권을 소유하고, 제3신분인 평민만이 모든 재정적인 부담들을 안고있었다. 여기에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재정상태는 사치스러운 궁정생활과 미국의 독립전쟁등 대외 전쟁 자금비용에 쏟아부을대로 쏟아부어서 파탄 상태에 이를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면세특권을 주장하여 재정문제 해결에 근본적인 대안이 없는 상태였다. 이러한 사회적 대립과 함께 루소같은 계몽사상가들의 혁명사상이 시민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미국의 독립혁명 소식도 이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 프랑스 대혁명과 제1 공화정


재정문제가 심각해지면서 1789년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1614년이래로 단 한번도 소집하지않았던 삼부회를 소집하였다. 삼부회에서 특권신분과 평민층의 대립으로 파행을 치닫다가 제3 신분 대표들끼리 독자적으로 테니스 코트선언을 하여 국민의회를 구성하게된다. 이에 국왕 루이 16세는 국민의회를 탄압하게 되는데, 이때 파리시의 시민들이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프랑스 대혁명의 막이 오르기 시작한다.


국민의회는 서둘러 봉건제의 폐지를 선언하였고, 이어서 프랑스 인권선언을 발표하여 혁명의 기본이념을 천명하였다. 국민의회는 1791년 입헌 군주제와 제한선거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해체되었다. 그 이후 새로운 헌법에 의해 소집된 입법의회가 탄생하였는데, 혁명에 온건파세력인 지롱드 당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는데, 1792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랑스 혁명에 간섭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와중에 파리시민들이 왕궁을 습격하여 국왕과 왕비를 잡아가둬 왕권이 정지되었고, 입법의회가 대외적,대내적으로 미온한 태도를 보이면서 곧 해산된다. 1792년 9월에는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국민공회는 강경 혁명파인 자코뱅 당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화정을 선포하고, 국왕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공개처형식을 하는 등 유럽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1793년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여 국내의 반혁명 세력들을 처형하거나 탄압하고, 봉건적 공납의 무상폐지등 급진적인 개혁등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지나친 공포정치에 대한 반발로 인하여 로베스피에르는 처형되었고, 다시 온건파 지롱드 세력들이 장악하게 된다.


1795년 입헌 공화정과 제한선거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제정하여 5인의 총재가 협의하여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도록 하는 총재 정부를 구상하였다. 하지만, 총재 정부는 재기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고위층들의 무능과 부패함으로 프랑스 국민들의 실망이 커지게 된다. 결국, 나폴레옹이 이를 이용하여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통령 정부를 세우게 된다.



♣ 프랑스 제1 제정


1799년 나폴레옹은 쿠테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이어서 철저한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하고 언론과 사상을 통제하여 독재권력을 확립하였다. 그는 대내적으로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고,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하여 혁명의 성과를 정착 시켰으며, 대외적으로 오스트리아제국을 격파하고 영국과 타협하여 정권을 안정시켰다. 이렇게되자, 그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게되고, 나폴레옹은 독재에 야망이 커져 종신 통령이 되었다가, 1804년 국민투표에 의해 나폴레옹 1세로 즉위하여 황제가 되면서 프랑스 제1 제정이 시작되었다.



♣ 나폴레옹 전쟁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여 프랑스 제1 제정이 시작되었고, 이에 오스트리아,프로이센등은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하자, 나폴레옹은 이들 국가와의 전쟁에 나섰다. 나폴레옹은 해전에서 영국 넬슨 제독한테 트라팔가 해전에서 대패를 겪었으나, 육전에서는 오스트리아를 무너뜨리고 빈껍데기뿐인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켰으며,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을 굴복시켜 유럽대륙을 제패하였다.


유럽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폴레옹이었지만, 오직 영국만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1806년, 영국과 유럽대륙간의 무역을 금지하는 이른바 '대륙봉쇄령'을 내리게 된다. 이 대륙봉쇄령은 성과를 거두지못하고 오히려 몰락의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1812년 대륙 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비밀리에 무역을 했던 러시아 제국을 응징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대원정길에 나섰지만,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등으로 참패를 하였고, 뒤이어 대프랑스 동맹군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격렬하게 맞붙어 패전함으로써 제1제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생활중 나폴레옹은 다음해에 엘바 섬에 탈출하여 재기를 꾀했으나, 1814년 워털루 전투에서 다시 크게 패하여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된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각지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념인 자유주의가 전파되고 크게 영향받아 민족주의 의식이 각성되게 된다.



♣ 왕정 복고와 제2 공화정


1814년, 나폴레옹 1세가 실각함에 따라 프랑스 제1제정이 몰락하고, 유럽에는 빈체제가 이루어졌다. 그럼에 따라 프랑스 혁명으로 멸망한 프랑스의 기존왕실인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여 루이 18세가 국왕으로 즉위한다. 그렇게됨으로써 프랑스는 혁명이전과 다름없는 궁정정치를 하게되었지만, 루이 18세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여 노동자나 농민등 하층민들에 대해서 온건 정책을 취함으로써 국내 안정을 도모했었다. 또한 프랑스 혁명 시절의 자유주의 사상도 제한적이지만 어느 정도 인정을 해 주었다.


그러나, 루이 18세가 사망한뒤 샤를 10세가 왕이되면서 자유주의,평등사상의 혁명정신과는 달리 선거권 제한과 로마 가톨릭의 복권 등 반동적인 정책등 특권정치를 펴게된다. 1830년 7월 국민들은 이에 봉기를 하여 샤를 10세를 국외로 쫓아내게 된다(7월 혁명,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어서 자유주의사상과 평등주의 사상에 입각한 루이 필리프 1세가 국왕으로 즉위(1830년)한다. 루이 필리프는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는 등 나름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치게 되지만, 프랑스 국민들의 바램과는 달리 몇몇 세력있는 부르주아(자본가)계층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특권정치를 부여하게되자, 1848년 2월, 프랑스 국민들은 또다시 혁명 봉기를 하게 된다(2월 혁명). 그렇게 됨으로써, 국왕 루이 필리프역시 국외(영국)으로 도망간다. 그 이후 프랑스는 왕정복고체제에서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 프랑스 제2 제정


2월 혁명이후, 1848년 제 2공화정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은 쿠테타를 일으켜 독재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1852년 국민투표로 황제로 즉위하여 나폴레옹 3세라 칭하면서 제 2제정을 열었다. 그가 즉위하자 당시 프랑스 시민들은 그의 황제 등극을 열렬히 축복했으며, 프랑스가 다시금 유럽의 지배자로 우뚝 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또한 국민들의 기대대로 나폴레옹 3세는 전임 왕들의 폐단 정리와 내정개혁을 단행하고 대외 팽창을 통해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할려 했으나,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나폴레옹 3세는 포로로 잡히는등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 뒤 패전국이 된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독일 제국에게 넘겨주게 되었으며, 독일이 프랑스에 배상금인 50억 프랑을 요구하였으나 단 몇개월만에 이를 갚아 전 유럽과 독일, 그리고 비스마르크 수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독일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이후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 3세가 보불전쟁에서 패한뒤 포로로 잡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자, 왕정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불만이 팽배해 있던 당시 프랑스 사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 파리코뮌 봉기


보불전쟁에서 프랑스의 패전 혼란속에 수도인 파리는 온갖 이념과 각종 정치세력의 대결의 장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으며, 더욱이 '야만인의 나라'이라고 무시했던 프로이센에게 점령당한 수치로 인한 파리 시민의 소요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일반 시민들중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무리가 무장을 하고 봉기, 1871년 파리를 장악한후 3월 18일 그들만의 사회주의적 자치 정부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정부'로 불리는 파리 코뮌이라 한다. 파리시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은 파리 코뮌을 수립하고 정부에 대항하였으나, 얼마못가 정규군에 의해 1871년 5월 28일 진압되었고, 이후 제 3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파리코뮌 봉기는 마르크스나 레닌등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의 탄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고 있다.



♣ 제 3 공화정


프랑스는 1870년에 일어난 보불전쟁에서 패배해 제2제정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를 내쫓고 1871년 아돌프 티에르 를 대통령으로 하는 제3공화국을 수립했다. 같은 해에 일어난 코뮌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하고(파리 코뮌) 해군을 함정정비에 대한 계획을 세워 해군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제3공화정 8대 대통령인 레이몽 푸앵카레 대통령 재임 중이었을 때 1914년 8월,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독일제국은 전쟁초기에 단숨에 프랑스를 정복할 거라 확신했었지만, 프랑스는 과거 1870년때의 보불전쟁에 대한 복수심이 강하게 불타올랐기에 저항이 강했다. 그럼에따라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무찌르면서 전쟁의 양상은 참호전형식으로 장기전에 접어들었으며 또한 전쟁이 고착화되어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1917년까지 독일군과 대치 상황을 두고 지겹게 싸웠고 어느 한쪽 밀리지 않는 양상이 되었다. 1917년 미국이 참전하면서 막대한 물량공세를 퍼부으면서 독일군을 격파하고,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끝낸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는 패전국인 독일에 대해 베르사유조약을 통하여 가혹하게 다뤘는데, 이는 프랑스가 전쟁을 두려워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베르사유 조약은 뒷날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불씨가 되기도 한다. 전쟁이 끝난후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을때 프랑스도 역시 불황의 늪에 시달렸었는데, 이에 프랑스 정부에서는 식민지들 하고 무역형식으로 하는 블록 경제체제로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한편, 1930년대에 독일에서 나치스가 집권하고 히틀러가 총통이 되면서 국제연맹 탈퇴, 재군비선언, 라인란트 비무장 지대 점령,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주변나라를 합병하는 데에도 프랑스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 문서 출처 : 프랑스의 역사, 위키백과, ko.wikipedia.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