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인물

진달래 2010. 3. 13. 11:17

죽게되면 말없이 죽을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 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 되어야 겠지만
제 명대로 살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것 같지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때 나를 찾아 올련지 알수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 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나를 쏠련지 알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걸음 란걸음
죽어오고 있다는것임을 상기할때 사는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결연된 것이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 지라도 네 하고 선뜻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 이기보다 지금 살고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 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걸 남길만한 처지가 못되기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처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세상에 올때도 혼자서왔고 갈때도
나 혼자서 갈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의 음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인간의 선의지
이것 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된 이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른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전에 내가할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런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수 없는것이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있다.
허물이란 너무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괴의 눈이 멀고 작을때에만
기억이 남는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 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일로해서 돌이킬수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득 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때 같은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가 없고 말을 더덤는 불구자였다.

대여섯된 우리는 그엿장수를 둘러싸고 엿 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일이 돌이킬수없는
이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만약 넉살좋고 건장한 엿장수
엿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자라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수 없이 많다
그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
인지 그때 저지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일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수없다. 내가 살아 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것 같다.


내가 죽을때는 가진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것이다.

본래무일물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 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읽던책이 내 머리맡에 몇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꼬마에게 주고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것은 아예 소용없는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 보다 한술 더떠 거창한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게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 커녕 몹시 화나게 할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 명료한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대신
어느 여름날 좋아하게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고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것없이 없애 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걸 남겨 이웃을 구하는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싶지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 나라 같은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번이고 볼수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되어 금생에 못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