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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상감마마 어우동을 / 어떻게 아셨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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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시절

2021. 1. 21.

 

 

@상감마마, 어우동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於乙于同 "연산은 너무 어려서 차마 못 건드렸습니다"

 

 

 
 
▲ 영화 <왕의남자>에서 연산과 장녹수
 
 

'어우동과 연산군'을 다함께 기대해 보자는 얘기에 호기심과 함께 고개를 갸우뚱 하시는 독자님들이 계셨을 것이다.

 

여색을 좋아하는 연산과 희대의 섹시녀 어우동 사이에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어떤 질펀한 얘기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독자님들은 기대에 벗어나는 얘기이지만, 연산과 어우동은 육(肉)으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희대의 색녀(色女) 어우동은 장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섹스스캔들로 1480년, 그러니까 연산 아버지 성종 11년 10월 18일 교형에 처해졌다. 세종 때에도 감동(甘同)이라는 여자가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 있었지만 극형은 면했다. 지체 높은 선비들만 상대했기 때문이다. 헌데 어우동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양반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섭렵했다.

 

이것이 신분질서를 존중하는 사대부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통치의 근간인 위계질서를 파괴했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때문에 극형을 면치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때 연산군 나이 네 살이었다. 그러니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연산과 어우동은 시로 만나게 된다.

 

 
 
▲ 창덕궁 후원에 있는 부용정. 시심을 가다듬기에 좋았을 정자다.
 
ⓒ2006 이정근
 

연산은 동궁 시절 공부는 소홀히 했지만 시(詩)를 좋아했다. 재위 시절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승정원에 내려 보내고 정원(政員)들로 하여금 훈평을 청하며 교감을 나누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시에 율이 맞는 답시를 지어 올리라 명하기도 했다. 답시(答詩)가 늦으면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시가 내려오면 승지들은 몸둘바를 몰라 했다.

재위 12년 동안 신하들에게 내려준 시와 발간된 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반정군에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위리안치 된 후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워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실록에 등재된 시는 삭제할 수 없어 120여 편의 시가 보존되어 오늘에 전한다.

滿苑春色爛艶陽 동산에 가득한 봄빛은 햇빛에 찬란한데
芳風和拂麗新粧 꽃바람이 새로 단장한 옷자락을 나부끼네
濃綠嫩紅繁華地 짙은 녹색 연분홍 번화도 하이
誰奉淸狂竊露香 그 누가 청광(淸狂)을 위하여 이슬 향기 가져왔나

아름다운 칠언절구(七言絶句)다. 학문의 깊이가 얕으면 이러한 시를 뽑아 올릴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시 중에서도 고난도의 작풍(作風)으로 일컬어지는 회문고시(回文古詩), 즉 위에서 읽거나 아래에서 읽어도 뜻이 통하고 말이 되는 시도 곧잘 지었다. 다음은 연산의 회문고시다.

芳樹吐花紅過雨 아름다운 나무가 꽃을 토하니 붉은 것이 비를 겪고 入簾飛絮白驚風 주렴에 버들개지 날아드니 흰 꽃이 바람에 놀래네 黃添曉色靑舒柳 누른빛에 새벽빛이 겹쳐 푸른 빛 버들에 퍼지는데 粉落晴天雪覆松 분이 청천(晴天)에서 떨어져 눈이 소나무에 덮였네

 

 
 
▲ 창덕궁 상서원. 승정원과 함께 왕명을 출납하던 곳이다
 
ⓒ2006 이정근
 

이렇게 시(詩)를 좋아하는 연산이 어느 날, 어우동의 시에 대하여 묻자 신하가 다음과 같이 따지고 들었다. 하늘 같이 받들어 모셔야 하는 만인지상 임금에게 불경하기 짝이 없는 언행이다.

“사족(士族)으로 얼우동(於乙于同)이란 여자가 시(詩)를 지었다 하는데 그러한가? 그 당시 추안(推案)을 궐내(闕內)로 들이라”하자, 승지 등이 아뢰기를 “얼우동은 바로 박원창(朴元昌)의 딸이온데, 음행(淫行)죄로 사형에 처했으며 이른바 시는 간부(奸夫) 방산수(方山守)가 지은 것입니다. 이러한 더러운 사실을 상께서 보신다는 것은 부당하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들이지 말라” 하였다.(연산군일기 3년 12월)

들이지 말라 했으면 들이지 않으면 될 일이지 따지고 들었다.

승지가 다시 아뢰기를, “이 일은 서연(書筵)이나 경연(經筵)에서는 반드시 아뢴 자가 없었을 것 이온데 전하께서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필시 상달(上達)한 자가 있을 것이오니 청컨대 들려주옵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나는 성종 조 때에 이미 이 일을 알았는데 오늘 우연히 기억이 난 것이다. 대범 나의 뜻한 바를 경등이 반드시 그 연유를 모두 알고자 하여 마치 추문(推問)하듯 하니 심히 불가하다”하매, 승지 등이 아뢰기를, “여염집의 추한 일을 만약 상달한 자가 있다면 당연히 공손치 못한 죄로써 다스려야 하옵니다.”(연산3년 12월).

 

 
 
▲ 선릉. 연산 아버지 성종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2006 이정근
 

기가 막히다. 대간에서 공급하는 뉴스만 받고 지방방송은 끄라는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지방방송 채널을 폐쇄해야 하고 채널을 개설한 자를 추적하여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소리다. 만백성의 소리를 듣고 정사를 펴야 할 임금에게 무서운 협박이다.

언로(言路)가 막혀서 못해 먹겠다고 아우성치는 간원(諫員)들이 언로를 막고 있는 셈이다. 한 마디로 임금의 귀와 입은 막고 자신들의 말만 들으라는 뜻이다. 간원들의 공세에 지칠 대로 지친 연산은 9월, 몸소 한강 건너 선릉에 나가 머리를 식히며 선왕 성종의 지혜를 구했다. 허지만 지하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해주랴.

이러한 마음고생 중에서도 연산은 백성들을 챙겼다. 연산 2년 7월 어서(御書)를 승정원에 내리기를,

“내가 지금 관리들의 법 쓰는 것을 보면 남형(濫刑)하는 폐단이 없지 않다. 죄 있는 자가 석방이 되고 죄 없는 자가 혹형(酷刑)에 시달리며, 살려야 될 자는 곤장에 맞아 죽고 죽어야 할 자가 죽음을 면한다. 관리들은 모름지기 나의 뜻을 받들어서 날마다 형장(刑杖)을 조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원통하고 억울함이 없게 하라.”

 

 
 
▲ 창덕궁 인정전. 연산이 열아홉 어린 나이에 즉위했던 곳이며 무오 옥사가 펼쳐졌던 창덕궁의 중심 건물이다.
 
ⓒ2006 이정근
 

시향(詩香)을 뒤로 하고 <연산군일기>에 무오사화(戊午士禍)라 기록되어 있는 1498년 옥사(獄事) 속으로 들어가 보자.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촉발된 옥사에서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가 능지처참에 처해지고 이목, 허반 등은 참형을 당했으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김종직은 묘가 파헤쳐지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희생이 컸다. 이러한 선비들의 희생은 연산의 선대인 세종 조나 세조 조, 그리고 성종 조에도 있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이미지의 사화(士禍)라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화라 함은 피해를 입은 선비의 입장에서 화(禍)를 당했다는 의미가 크고 그 무게중심이 희생당한 선비에게 쏠려 있다. 그 성격도 그렇다. 무지몽매한 군주의 횡포에 의한 참극이나 학살극이 아니었다. 선대 태종시대부터 꾸준히 닦아 내려온 왕권(王權)에 신권(臣權)이 무모하게 도전하다 빚어진 참화였다.

 

 
 
▲ 폐비 윤씨묘. 중전에서 폐비가 되어 사약을 받고 거적데기 장례를 치렀으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에 준하는 릉으로 조성되었다. 아들 연산이 폐위되자 다시 회묘로 위상이 추락한 폐비윤씨.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으며 회묘라 부른다.
 
ⓒ2006 이정근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사당 문제를 밀어붙이자 사간원을 비롯한 사헌부, 홍문관 등 삼사(三司)가 총동원되어 벌떼처럼 상소를 올리고 줄줄이 사퇴해 버렸다.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 등의 아뢴바 세 가지 일이 다 사소한 것이 아닌데도 모두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이것은 신 등이 직책에 나가기 어려운 소이입니다.”(연산 2년 9월. 3가지 조건-유교(성종의 가르침), 신주, 사당)

장마가 시작되는 5월부터 시작된 기 싸움은 찌는 듯 한 무더위 속에 지루하게 이어졌다. 즉위 초기에 나이 어린 임금을 길들여 놓겠다는 사람파의 파상공세는 집요했다. 삼사는 물론 승정원과 예문관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동원되었다. 이 무렵 연산에게는 자신을 떠받쳐줄 세력이 없었다. 그것을 사림(士林)이 노린 것이다.

 

 
 
▲ 살곶이다리. 연산이 마음이 괴로울 때면 아버지 성종을 찾아가기 위하여 건넜던 다리. 연산은 이 다리를 건너 뚝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능참사찰 봉원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선릉을 참배했다. 세종때 착공하여 성종 14년(연산 7살 때)에 완공한 다리이다.
 
ⓒ2006 이정근
 

10월이 되자 사림의 공세는 더욱 거칠어졌다. 실록을 다시 들여다보자.

노사신(盧思愼)·윤효손(尹孝孫)은 의논드리기를, “신하가 인군에게 세 번 가하여 듣지 않으면, 말하는 책임이 있는 자가 그 말이 인정되지 않는 것인즉, 떠나는 것입니다. 지금 대간이 아뢰어 청하기를, 세 번에만 그치지 않았으니, 사직하며 물러가기를 구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이건 신하가 임금에게 해서는 아니 될 강요고 불경스런 협박이다.

지루한 공방이 3년간 지속되었다. 사림(士林)들이 공격하고 연산이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밀리기만 하던 연산은 막무가내 밀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반격의 칼을 갈고 있었다. 아버지 성종의 3년 탈상이 끝나자 칼을 빼 들었다. 조의제문은 좋은 빌미였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무오사화이고 연산 4년 7월에 벌어진 옥사(獄事)다.

여기서 잠깐, 연산의 신하로서 선대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김일손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조의제문을 왜 실록에 삽입했느냐는 것이다. 물론 조의제문의 해석의 여지는 있다. 하지만 공초에서 연산이 제시한 논거를 김일손은 반증하거나 반박하지 못했다. 묵시적으로 긍정한 셈이다.

 

 
 
▲ 연산군 묘. 용상의 자리에 있었건만 폐위되었기에 릉이 되지못하고 대군에 준하는 묘로 도봉산 자락 도봉구 방학동에 쓸쓸이 묻혀있다.
 
ⓒ2006 이정근
 

세종에서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는 물길을 수양대군에서 예종 성종 연산으로 돌려버린 세조를 부정한 김일손과 그의 스승 김종직의 생각은 일견 원론에 충실한 생각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을 수용할 토양이 아니었다. 그러한 바탕을 알면서도 결행한 김일손과 사림은 무모한 도전이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왕권에 도전하는 신권을 용납하지 않은 왕권주의자 연산을 폭군이라 한다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하들의 희생을 요했던 태종 이방원과 세종. 그리고 세조와 성종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왕권강화를 위하여 덕(德)을 버리고 패도주의로 흐른 만년은 무리수였지만 무오사화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충돌이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역사적 의미와 해석에서 무오옥사를 사화(士禍)라는 단일 안목으로 규정하고 연산은 폭군이라는 딱지를 붙여 연산의 실정과 패악으로 열거한 <연산군일기>는 그를 폭군으로 낙인찍어야 자신들의 거사에 명분을 얻을 수 있는 당시 반정군의 정서를 대변했지 않았을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조의제문 원문과 국역문을 첨부한다.

조의제문(弔義帝文) 원문

丁丑十月日, 余自密城道京山, 宿踏溪驛, 夢有神披七章之服, 頎然而來, 自言: “楚懷王^孫心爲西楚霸王所弑, 沈之郴江。” 因忽不見。 余覺之, 愕然曰: “懷王南楚之人也, 余則東夷之人也。 地之相距, 不啻萬有餘里, 而世之先後, 亦千有餘載。 來感于夢寐, 玆何祥也? 且考之史, 無沈江之語, 豈羽使人密擊, 而投其屍于水歟? 是未可知也。” 遂爲文以弔之。 惟天賦物則以予人兮, 孰不知尊四大與五常? 匪華豐而夷嗇, 曷古有而今亡? 故吾夷人, 又後千載兮, 恭弔楚之懷王。 昔祖龍之弄牙角兮, 四海之波, 殷爲衁。 雖鱣鮪鰍鯢, 曷自保兮, 思網漏而營營。 時六國之遺祚兮, 沈淪播越, 僅媲夫編氓。 梁也南國之將種兮, 踵魚狐而起事。 求得王而從民望兮, 存熊繹於不祀。 握乾符而面陽兮, 天下固無大於芉氏。 遣長者而入關兮, 亦有足覩其仁義。 羊狠狼貪, 擅夷冠軍兮, 胡不收而膏齊斧? 嗚呼! 勢有大不然者兮, 吾於王而益懼。 爲醢腊於反噬兮, 果天運之蹠盭。 郴之山磝以觸天兮, 景晻愛以向晏。 郴之水流以日夜兮, 波淫泆而不返。 天長地久, 恨其可旣兮, 魂至今猶飄蕩。 余之心貫于金石兮, 王忽臨乎夢想。 循紫陽之老筆兮, 思螴蜳以欽欽。 擧雲罍以酹地兮, 冀英靈之來歆。

조의제문(弔義帝文) 국역문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懷王)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문(文)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비록 전유(鱣鮪), 추애(鰌鯢)라도 어찌 보전할손가.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느니, 당시 육국(六國)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編氓)가 짝이 되었다오.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종(將種)으로, 어호(魚狐)를 종달아서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름이여!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건부(乾符)를 쥐고 남면(南面)을 함이여! 천하엔 진실로 미씨(芈氏)보다 큰 것이 없도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는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겠도다. 양흔낭탐(羊狠狼貪)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축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려.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을 솟음이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에 가깝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도 장구(長久)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표탕(瓢蕩)하도다. 내 마음이 금석(金石)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을 따라가자니, 생각이 진돈(螴蜳)하여 흠흠(欽欽)하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

연산군 교서 원문

其曰: ‘祖龍之弄牙角。’ 者, 祖龍秦始皇也, 宗直以始皇比世廟。 其曰: ‘求得王而從民望。’ 者, 王, 楚懷王^孫心, 初項梁誅秦, 求孫心以爲義帝, 宗直以義帝比魯山。 其曰: ‘羊狠狼貪, 擅夷冠軍者。’ 宗直以羊狠狼貪指世廟, 擅夷冠軍, 指世廟誅金宗瑞。 其曰: ‘胡不收而膏齊斧?’ 者, 宗直指魯山胡不收世廟。 其曰: ‘爲醢腊於反噬。’ 者, 宗直謂魯山不收世廟, 反爲世廟醢腊。 其曰: ‘循紫陽之老筆, 思螴蜳以欽欽。’ 者, 宗直以朱子自處, 其心作此賦, 以擬《綱目》之筆。 馹孫贊其文曰: ‘以寓忠憤。’ 念我世祖大王當國家危疑之際, 姦臣謀亂, 禍機垂發, 誅除逆徒, 宗社危而復安, 子孫相繼, 以至于今, 功業巍巍, 德冠百王。 不意宗直與其門徒, 譏議聖德, 至使馹孫誣書於史, 此豈一朝一夕之故? 陰蓄不臣之心, 歷事三朝, 余今思之, 不覺慘懼。 其令東西班三品以上, 臺諫、弘文館, 議刑以啓。”

연산군 교서 국역문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했다.’는 조룡은 진 시황(秦始皇)인데, 종직이 진 시황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그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왕은 초 회왕(楚懷王) 손심(孫心)인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을 치고 손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에게 비한 것이다.

그 ‘양흔 낭탐(羊狠狼貪)하여 관군(冠軍)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종직이 양흔 낭탐으로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金宗瑞)를 베인 데 비한 것이요.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종직이 노산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반서(反噬)를 입어 해석(醢腊)이 되었다.’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었느냐 하는 것이요. 그 ‘자양(紫陽)은 노필(老筆)을 따름이여,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다.’고 한 것은, 종직이 주자(朱子)를 자처하여 그 마음에 부(賦)를 짓는 것을, 《강목(綱目)》의 필(筆)에 비의한 것이다.

그런데 일손이 그 문(文)에 찬(贊)을 붙이기를 ‘이로써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이 난(亂)을 꾀해 화(禍)의 기틀이 발작하려는 찰라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 없앰으로써 종묘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신데,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들과 성덕(聖德)을 기롱하고 논평하여 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무서(誣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의 연고이겠느냐. 속으로 불신(不臣)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나는 이제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동·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홍문관들로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