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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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2021. 11. 6.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다

조선왕조는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 태조의 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다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어진은 현존하는 유일본이다

뿐만아리라 어진을 봉안할 때 쓰였던 신연, 향정자, 가교 등의 의식구들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경기전 경내에 자리한 어진박물관은 태조어진과 어진 봉안 관련 유물을

영구 보존하기 위해 건립된 국내 유일의 어진 전문 박물관이다

 

어진박물관

태조어진실 · 어진실 · 역사실 · 가마실 등이 있다

 

 

 

 


태조어진(1872년/비단에 채색/220×151㎝/국보 317호)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어진으로 1872년(고종 9)에 모사한 진본이다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룡포 차림으로, 백옥대와 흑화를 착용한 전신상 어진이다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귀가 아주 컸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 혼란기에 큰 전공을 세우고 영웅이 되어 조선을 건국하였다

전주는 태조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으며

1872년 구본이 낡아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 8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해 경기전에 모셨다

 

 

 

 

역사실

경기전 건립, 태조어진 봉안, 태조어진의 수난과 보존, 태조어진의 관리, 경기전 제례

전주의 조선왕조 관련 유적지, 조선왕조실록 등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

 

 

 

 

명견루(明見樓) 현판

명견루는 풍남문 이전의 전주부성 남문 편액이다

1734년(영조 10)에 전라감사 조현명이 전주부성을 개축하고 남문을 명견루라고 이름하였다

전주성을 새로 쌓을 때 반대가 심했는데

영조의 명견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하여 '명견루'라고 이름하였다

이 편액은 풍남문 안에 걸려 있던 것을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다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

 

 

 

 

풍남문과 풍패지관(전주객사)

 

 

 

 

영조실록(1781년(정조 5)

조선 21대왕 영조대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이다

영조 15년 3월 22일조에 풍패지향 전주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전주는 국조 시조의 본향이고 태조가 왜구를 정벌할 때에도 일찍이 이곳에 머물렀으므로

국가에서 주나라의 기(岐)와 한나라의 풍패처럼 여겨..."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과 전주사고

 

 

 

 

정전 · 내신문 · 외신문

 

 

 

 

오목대와 이목대

 

 

 

 

이목대비 탁본

 

 

 

 

오목대 탁본

 

 

 

 

조경단 지석(연대 미상)

조경단 조성과정에서 출토되어, 건지산이 시조의 묘역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준 석물이다

「조경단의궤」에 돌의 상면과 왼쪽 면에 51자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해독이 안되는 글귀로 비결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물의 출토는 신이(神異)한 일로 여겨지고 길조의 증거로 생각되어 묘역 조성의 확신가져다 주었다

나무 뿌리를 뽑던 중 발견되었는데, 석물을 찾은 자들에게 각각 40원의 상금이 주어졌다

석물이 찾아진 곳에는 봉분을 쌓았다

조경단 도형의 '의묘소(疑墓所)가 이곳이다

 

 

 

 

조경묘(지방유형문화재 제16호)와 조경단

조경묘는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과 시조비 경주김씨 위패를 봉안한 왕실의 시조 사당으로

1771년(영조 47) 경기전 북편에 건립하였다

이때까지 조선왕실의 시조를 모시는 사당이 없었다

*

조경단은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소로 건지산에 있다

1899년(광무 3) 이한의 묘역으로 여겨지는 건지산 왕자봉 자락에 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하였으며

고종이 친히 「대한조경단」이라고 쓴 비를 세웠다

 

 

 

 

조경묘 시위유사 임명장(1886년 · 고종 23)

이규찬을 조경묘 시위유사로 임명하는 첩이다

조경모는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과 시조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며, 이규찬은 왕실의 후예이다

시위유사는 조경묘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종실로 구성된 충의군 중에서 선발한다

 

 

 

 

조경묘 참봉 임명장(1903년 · 광무 7)

류관현을 조경묘 참봉에 임명하는 칙명이다

 

 

 

 

경기전 중앙대제 의식과 제기

 

 

 

 

경기전 제례

 

 

 

 

경기전 관리

 

 

 

 

이교의 무과 홍패(1875년(고종 12)

경기전 수문장에 임용된 이교의의 무과 급제 홍패다

이교의는 무과 병과에 1,037등으로 급제하였다

무과는 원래 28명을 선발하는 시험이나, 한 번에 몇 천명을 선발하기도 하여 만과(萬科)라고 하였다

 

 

 

 

경기전 건축구조와 건물 기능

 

 

 

 

경기전 건립과 중건

태조어진을 봉안한 전주의 정전을 경기전이라고 칭한 것은 1442년(세종 24)이다

 

 

 

 

운용문(雲龍文) 암막새

경기전 서편 부속건물지에서 출토된, 용의 발톱이 5개인 와당과 3개인 와당 조각이다

용 문양이 힘차고 역동적이다

'운용'이란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르는 용이라는 뜻으로 천자나 왕후, 영웅을 이르는 말이다

 

 

 

 

드므 · 부시와 발 · 정자각 거북이 · 하마비

 

 

 

 

태조어진의 전주 봉안 · 태조어진의 수난과 보존

흑장통 · 어진 받침대와 용두 · 향낭 등이 전시되어 있다

 

흑장통은비상시 어진을 긴급히 대피하기 위하여 만든 원형 통이다

원통형의 소나무를 길이 방향으로 반분한 후 그 속을 파내고

이것을 다시 맞대어 대나무 통 모양으로 만들었다

 

 

 

 

태조어진의 전주 봉안

 

 

 

 

태조어진의 수난과 보존

 

 

 

 

용두

돌로 만든 것으로 어진 앞에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진실

조선시대 임금의 초상화(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가 전시되어 있다

 

 

 

 

현존하는 어진과 역대 왕들의 어진 제작

 

 

 

 

어진 제작 방법

 

 

 

 

세종어진(현대/비단에 채색/114×164㎝/표준영정모사)
세종어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의 세종어진은 김기창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것으로 1973년 국가 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어진박물관 소장 세종어진은 김영철화백이 표준영정을 모사한 것이다

 

 

 

 

영조어진(1900년/비단에채색/83x203cm/보물제932호)
1744년 영조 51세 때 사대부 화가 조영석 등이 그린 어진을

1900년(광무4년) 조석진 · 채용신 등이 모사한 영조 반신상이다

현재 어진실에 있는 영조어진은 1900년의 반신상 어진을 토대로 하여 전신상으로 모사한 것이다
영조는 31세에 왕위에 올라 83세까지 장수한 최장수 왕이며 재위기간(52년)이 가장 길었던 왕이다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전개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하였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경기전 뒤에 위치한 조경묘는 영조 47년(1771)에 창건한 것이다

 

 

 

 

정조어진(현대/비단에 채색/114×164㎝/표준영정복제)
정조어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의 정조어진은 이길범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것으로 1989년 국가 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여기 어진실의 정조어진은 표준영정을 촬영한 사진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조선왕조의 중흥을 꾀한 군주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 학문을 발전시켰으며, 탕평정치를 전개해 붕당의 폐단을 해소하고

왕권을 강화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큰 포부를 갖고 화성을 축조하여 천도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철종어진(2016년/비단에 채색/202x107cm/이철규 모사 · 보물 1492호)
철종이 31세 되던 1861년(철종 12)에 그린 것이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이안했다가 1954년 화재로 오른쪽이 1/3쯤 소실된 것을 복원하였다

융복(군복) 차림이며, 초상화에서 보기 드문 손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오른손에 무관의 지휘봉인 등채를 잡고 왼손 엄지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사용하는 깍지를 끼고 있다

용모에 순수한 인품이 반영되어 있으며, 눈썹이 짙고 쌍커풀이 진 동그란 눈에 눈동자가 안으로 모여 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1849년 19세에 즉위하였다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안동김씨 세도정치 속에서 정치를 바로 잡지 못한 채 1863년(철종 14) 33세로 병사하였다

 

 

 

 

고종어진(현대/비단에 채색/114×164㎝)
2001년 권오창화백이 사진을 보고 모사한 고종어진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으므로, 이전의 조선 왕들과 달리 황제복인 황룡포 차림이다
신정왕후(조대비)는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고 그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가 고종황제이다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했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다

고종은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문제가 되어 폐위되었다

1919년 승하하였으며, 고종 독살설은 3.1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순종어진(현대/비단에 채색/114×164㎝)
2001년 권오창화백이 사진을 보고 모사한 순종어진이다

면류관을 쓰고 십이장복을 입은 대례복 차림이다

장복(곤복)은 의례를 행할 때 착용하는 것으로 황제는 십이장복, 왕은 구장복이다

십이장복이란 명칭은 옷에 들어가는 문양의 수가 12가지라는 뜻이다
순종황제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고종의 뒤를 이어 1907년 황제로 즉위하였다

1910년 조선왕조가 몰락하면서 일제에 의해 ‘이왕(李王)’으로 강등되는 등 수모를 겪다가 1926년 승하하였다

순종 장례날인 6월 10일을 기해 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황산대첩

1390년(고려 우왕 6) 왜구들이 500척의 대선단으로 진포(금강 어귀)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나세와 최무선 등이 이들을 공략하여 배들을 불태우고 대승을 거두었다

왜구들은 퇴로가 막히자 지리산 일대로 모여들었다

이에 태조 이성계가 충청 · 전라 · 경상 3도 도순찰사가 되어 왜구 대토벌전을 펼쳐

운봉 황산에서 왜장 소년장수 아지발도를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왜구의 수가 10배나 많았으나, 살아남은 왜구는 겨우 70명이었으며

왜구들에게 노획한 말만도 1,600여 필이었다

*

황산대첩은 왜구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싸움으로

최영의 홍산대첩, 정지의 관음포전투와 함께 고려말 왜구를 진압한 3대 대첩의 하나다

태조 이성계는 1380년 황산대첩으로 고려조정에 그 이름을 높이고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다음 1392년 새왕조를 개창하였다

 

 

 

 

가마실

1771년 조경모의 위패를 봉안할 당시 사용하였던 가마와

1872년 태조어진이 모사되어 봉안될 당시 사용하였던 가마들을 전시해 놓았다

*

태조어진 봉안행렬이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다

300여 명이 태조어진 봉안행렬에 참여하였으며

한양에서 전주로 태조어진을 모셔오는데 7박 8일이 소요되었다

 

 

 

 

신연(1872년/나무/180×97×130)

어진을 이안하거나 환안할 때 신연을 비롯하여 여러 가마들이 동원되었다

현재 경기전에는 1872년 어진을 전주로 모셔올 때 쓰였던 신연 2점, 향정자 2점, 채여 1점 등이 보존되어 있다

태조어진이 유일하듯이, 어진 이안 때 사용된 신연을 비롯한 의장물들도 유일한 것들이다

따라서 태조어진과 경기전처럼 의장물들도 잘 보존되어야 할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흑장궤(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

1872년 태조 어진을 새로 모사한 후

경기전에 봉안할 때 사용하던 어진 이안 궤이다

 

 

 

 

조선왕실의 가마

 

 

 

 

위패봉안 신연(1771년/나무/267×101.5×128)
신연은 어진의 이안이나 봉안에 사용하였던 가마를 말하며

위 신연은 조경묘에 모셔진 위패를 이안할 때 사용되었던 가마이다

둥근 지붕 형태의 가마로 꼭대기에는 호리병 모양의 정자를 장식하였으며

사면에 난간을 높게 설치하고 사방에 휘장을 둘렀다

내부에는 흑장궤가 좌우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옻칠한 나무를 끼워 세웠고

그 아래에는 흑장궤가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윤여축을 설치하였다

 

 

 

 

가마의 각부 명칭

 

 

 

 

가교(駕轎 · 1872년/나무/102×119.7×177)
가교(駕轎)는 조선시대 고관의 행차 때 사용하던 가마로

1872년 태조어진을 봉안할 때 어진 봉안 책임자인 배왕대신(陪往大臣)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연과 마찬가지로 2개의 가마채 위로 옥교를 얹었으며

내부에는 교의를 설치하고 몸체판에 금색으로 연화문을 그렸다

익장(翼帳)에는 전후좌후에 30개의 낙영을 달았다

가마채 끝 부분 및 몸체와 접한한 부분에 각각 용머리를 장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