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나바위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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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2021. 12. 5.

익산 나바위성당(사적 제318호)

나바위란 너른 바위가 펼쳐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익산 나바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귀국하면서

첫발을 내딛은 역사적인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성당이다

건축공사는 1906년 베르모렐(장약실) 신부가 주도하여 이듬해 완공하였다

처음에는 정면 5칸, 측면 13칸 규모의 한옥 성당으로 지었는데

1916년에 목조 종탑을 헐고 성당 전면부에 벽돌조 종탑을 증축하였다

이에 흙벽을 벽돌벽으로 개조하고, 회랑에 있던 툇마루도 제거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건물 내부 기둥에는 칸막이를 쳐서 남녀의 공간을 분리하였다

나바위성당은 전통 한옥과 서양식 벽돌조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성당은 서양식 한옥의 구조를 절충하고 신도들에게 남아 있던 유교적 관습을 반영하여

건물을 지은 사례로서 근대기 성당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성당의 북쪽 언덕에는 1915년 베르모렐 신부가 휴식과 기도를 위해 세운 망금정이 있고

그 옆에는 1955년에 세운 김대건 신부 순교비가 있다

망금정 아래 바위에는 화산리 마애삼존불이 새겨 있다

현재 성당의 사제관은 나바위 성지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수성심상 · 요셉 베르모렐(장약실) 신부 공적비

나바위 본당 초대 주임 요셉 베르모렐 신부가 1897년 본당을 건립하였다

당시 천주교는 박해를 받지 않았고 본당 설립 2년 후에는 신앙의 자유가 완전 보장되었다

그러나 요셉 베르모렐 신부가 본당을 설립한 이후

여전히 천주교에 적대감을 가진 지방 토착 세력

보수적인 주민들간 모진 갈등을 겪으면서도 1906년 나바위성당을 건축하였다

1908년 부주교직을 수행하기 위해 나바위 본당을 떠났다

이 비는 22년 동안 온몸을 바친 요셉 베르모렐 신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54년 제11대 본당 주임 김후상 신부가 세웠다

 

 

 

 

나바위성당 본당

 

 

 

 

나바위 성지 역사관(구 나바위 본당 사제관)

나바위 성당과 함께 지어진 사제관이다

1917년 12월 사제관 신축공사를 하여 다시 건립된 사제관은

여러 차례 보수를 하면서 사제관으로 사용하다가

2019년 6월 29일에 나바위 성지 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하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

 

 

 

 

나바위 성지의 역사와 사건들

1845. 10. 12

고 페레올 주교, 안다블뤼 신부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익산 화산 나바위에 상륙

 

 

 

 

풍금(1908년 / 크기 815cm×835cm)

성당에서 운영했던 계명학교(1908년~1946년)에서

음악시간과 무용시간에 사용했던 풍금이다

 

 

 

 

나바위 성당 사진과 성경책

 

 

 

 

나바위성당 본당 · 치유의 경당

 

 

 

 

나바위성당 본당

성당 후면의 지붕 아래 중앙 벽부에서 닻 모양의 십자가 붙어 있다

*

닻 모양의 십자가(1906년 / 크기 300×200mm)

성당 건립 당시 용마루 밑에 부착했던 닻 모양의 십자가로 중국인 목공이 제작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교회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세 생활의 험난한 항해로부터 천국으로의 안전한 정박을 바라는 교회의 희망을 뜻한다

이곳의 닻 십자가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이곳이 김대건 신부님 일행이 40여 일 항해 끝에 안착한 곳이라는 점에서

성당을 지을 때 닻 십자가를 사용한 것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본당 내부

 

 

 

 

제대와 예수성심상

성당 제대 주변에 있는 세례대와 성상들은 중국 남경 라자로수도원에서 제작한 것으로

성당 건축 때 들어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예수성심상

 

 

 

 

성 김대건 신부

 

 

 

 

세례대(1906년)

세례 의식 때 사용했던 세례대

중국 남경 성 라자로 수도원에서 제작한 것으로 성당 건축 때 들어온 것이다

 

 

 

 

본당 내부

초기에는 건물 내부 기둥에 칸막이를 쳐서 남녀의 공간을 분리하였다

 

 

 

 

창문

 

 

 

 

화산천주교회

성모동산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평화의 모후성모상 · 성 김대건신부 성상

망금정과 성 김대건신부 순교기념탑이 언덕 위에 있다

 

 

 

 

성 김대건신부 성상

성 김대건 신부의 고귀한 순교정신과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해

2007년 박 미카엘, 유 안나마리아 부부의 봉헌으로 세웠다

처음에 다른 곳에 봉헌할 계획으로 제작하였으나 조건이 맞지 않아 세우지 못한 채로 보관하고 있다가

뒤에 나바위 성지와 연계가 되어 이곳에 세우게 되었다

지금 이성상은 김대건 신부 순교기념탑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바로 나바위성당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성지를 찾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여 주고 계신 듯 위엄있는 모습으로 서있다

재료는 함열석이며 성상 높이는 4m, 받침대는 제대 모양이다

 

 

 

 

망금정 · 성 김대건신부 순교기념탑

화산 정상에 있다

 

 

 

 

성 김대건신부 순교기념탑(익산시 향토유적 제16호)

1955년 성 김대건 신부 나바위 상륙 11주년과 함께

시복 30주년, 성당 건축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기념탑이다

1955년 4월 5일 기공식을 하고,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 상륙한 10월 12일을 택하여 제막식을 가졌다

이 기념탑은 나바위 본당 단체 중 일심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화산 서쪽 기슭에 있던 큰 암석을 깨어 목도로 옮겨 화산 정상에 있는 반석 위에 세웠다

기념탑 크기는 김대건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길이 13.5m, 넓이 4.8m, 깊이 2.1m)를 본떠

같은 크기로 탑 높이 4.5m, 기념비 1.82m, 십자가 1.2m로 제작하였다

 

 

 

 

망금정(望錦亭)

금강 황산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화산 끝자락에 너른 바위가 있어 나바위로 불리는 곳에 있다

예전에는 망금정 아래까지 금강 강물이 넘실거렸으나

1925년 일본인들이 이 일대를 간척하면서 금강 줄기가 바뀌어 지금은 비닐하우스로 뒤덮인 평야로 바뀌었다

망금정은 이곳에 나바위성당이 설립된 이후

초대 대구 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조용한 분위기를 감탄하였고

1912년부터 해마다 5,6월이면 화산 정상인 이곳에서 금강을 굽어보며 피정을 하였다

1915년 주임신부인 요셉 베르모렐 신부는 피정하시는 주교님을 위해

"아름다움을 바란다"라는 뜻으로 이곳에 망금정을 지었다

 

 

 

 

십자가의 길 14처

 

 

 

 

예전에는 망금정 아래까지 금강 강물이 넘실거렸으나

1925년 일본인들이 이 일대를 간척하면서 금강 줄기가 바뀌어

지금은 비닐하우스로 뒤덮인 평야로 바뀌었다

 

 

 

 

마애삼존불

망금정 뒷쪽 바위에 있다

 

 

 

 

망금정 · 성 김대건신부 순교기념탑

 

 

 

 

소세 신부 묘

나바위 본당 2대 주임신부인 소세 신부(Hippolytus Soucet · 소세덕)은

1921년 10월 11일 밤 발에 병이 나서 강경읍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였으나 결국 돌아가셔다

소세 신부는 전임 신부인 장약실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10월 21일 선종하셨다

소세 신부의 나바위성당을 바라보며 눕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안장되셨다

 

 

 

 

평화의 모후상

평화의 성모님이 서 계신 자리는 전라북도 삼대 명당자리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초대 주임 요셉 베르모렐 신부님께서 본당을 설립하고

본당을 짓기 위해 준비하던 중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화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암자와 그곳에 살고 계신 스님이었다

암자가 있는 상태로 성당을 지을 수는 없어

고민 끝에 하루는 스님을 찾아가 성당을 지으려는 뜻을 밝히고 이곳에서 나가줄 것을 정중히 부탁하였다

그러나 스님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고 쫓겨나와 하루하루를 기도로 보내셨다

그렇게 두세 달이 지난 어느날, 스님이 바랑을 짊어지고 신부님을 찾아와서 하는 말씀이

"이제 나는 이곳을 떠나니 이 화산과 암자는 신부님 마음대로 하십시오"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뜻밖에 일에 놀란 신부는 이 일에 대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수소문하셔고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신부님께서 스님을 찾아간 그 다음날부터 스님의 꿈에 매일같이 웬 여인이 나타나서

'이 자리는 내 자리이니 이곳에서 빨리 나가거라'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1960년대에 성모님을 그 자리에 모셨고

지금도 성모님은 높은 곳에서 나바위성당을 굽어보시며 우리의 기도를 전구해주고 계신다

 

 

 

 

평화의 모후 성모동산

 

 

 

 

치유의 경당

1956년에 건축된 이 건물은 당시 진료소와 성당의 강당으로 사용되었다

성 바오로회 수녀님들에 의해 운영되었던 이 진료소는 단순히 약을 나누어 주는 시약소의 단계를 넘어

소규모 의원에 못지않은 의료기구를 갖추고 있어 간단한 수술까지도 가능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진료소는 이 지역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는 것은 물론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역할도 함께 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육체적 치료와 마음의 치유 또한 주었던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장소라 하겠다

 

 

 

 

예수님 성상

대 데레사 성녀가 영적갈등을 겪고 있을 때 회심케 한 성화 "ECCE HOMO"를 성상으로 만든 것이다

많은 유명 작가들이 그렸던 "ECCE HOMO" 성화는 사형선고를 받고 기중에 묶인 예수님을 그린 것으로

당시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상처가 난 몸에 가시관과 자주색 옷을 두른 다음

군중 앞에 선 예수님을 두고 "자 이 사람이오! (ECCE HOMO)라고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따라서 경당에 들어가는 순례객은 예수님의 공로를 통하여 인간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치유를 청하는 것이다

 

 

 

 

수탉바위 전설

이곳 나바위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나바위라는 이름은 화산 끝자락으로 넓은 바위가 펼쳐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이름에 걸맞게 화산 전체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많다

그 중에서도 특이하게 풍선처럼 둥근 바위가 있는데, 수탉 바위라고 불린다

옛날 이곳 사람들은 무척 가난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탄한 신령은 그들을 도와주고자 하였다

이 마을에는 수탉이 한 마리 있었는데, 이 수탉에게 황금알을 낳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탉이 알을 낳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기에 사람들이 보지 않도록 동트기 전에 알을 낳게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해가 뜬 뒤 순번대로 매일 한 사람씩 와서 황금알을 가져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첫 번째 사람이 빨리 가져가고 싶은 욕심과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수탉이 알을 낳기 전부터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수탉은 알을 낳다가 누군가 보고 있는 것을 알고는 놀라 그 자리에서 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돌로 굳어진 바위가 그대로 남아 '수탉 바위'라고 불리고 있다

이는 어떤 순간에도 욕심을 부리지 말고 정직하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으로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

 

 

 

 

십자바위

십자가가 선명하게 보이는 이곳은 십자가의 길 제6처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 얼굴을 닦아 드림을 묵상하는 곳이다

큰 바위 위에 깊고 선명하게 십자가 형태로 갈라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자리는 바로 김대건 신부님이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조선시대 이곳에는 금강이 흘렀고

고기잡이배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뱃길이 화산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제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기억을 담고 있는 화산의 바위

김대건 신부님 역시 금강 줄기를 통해 조선에 들어와 사목활동의 첫발을 내딛으셨다

바로 이때부터였을까 마치 십자가 위에 순교자의 얼이 우리 영혼에 새겨지고

그분들의 뒤를 따르는 후손들의 기도가 깊이 새겨진 듯

뚜렸한 십자 모양이 지금 우리 눈앞에 드러나고 있다

 

 

 

 

김대건 신부 일행 착지처

한국 최초의 사제이며 순교자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5년 8월 31일 중국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한석문 가롤로, 최형 베드로, 이제의 토마스를 비롯한 11명의 조선 신자들과 함께

포교지인 한양을 향하여 라파엘호를 타고 항해하였다

그러다 폭풍우와 풍랑을 만나 돛대와 키가 파손되어 표류하다가 제주도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배를 정비하여 한양을 향해 다시 출발하였지만

반파 상태인 배로는 항해가 불가능하자 계획을 바꾸어 강경포구에 정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당시 강경포는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였으므로 번잡하고

황산포는 나루가 있어 사람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특히 라파엘호는 누가 봐도 중국에서 온 배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기에

배를 숨기기에 좋은 조건을 지닌 아주 작은 나암포 화산 언저리가 착륙하기에 알맞은 곳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상해를 떠난지 42일만인 1845년 10월 12일 밤 8시경

포구에서 좀 떨어진 외딴곳 이곳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닻을 내렸다

 

 

 

 

라파엘호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1845년 4월 30일 제물포에서 상해로 가고

8월 17일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8월 31일 조선으로 돌아올 때 탔던 무동력 목선으로

길을 인도하는 대천사 성 라파엘이라는 이름을 붙인 배이다

*

라파엘호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페레올 주교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증된 제주도 용수성지 라파엘호와 같은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배의 규모는 길이라파엘호 길이 13.5m, 넓이 4.8m, 깊이 2.1m이다

 

 

 

 

성 김대건 신부 일행 착륙지점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