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길산역~정약용유적지~팔당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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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2022. 4. 30.

운길산역에서 다산길로 다산유적지와 다산생태공원을 둘러보고

한강변을 걸어 팔당역에서 마쳤다

 

 

운길산역

시점이다

 

 

 

 

한강하구로부터 84km 빗돌 · 두물머리종합안내판

〈두물머리이야기 안내판〉 2개가 옆에 쓰러져 있다

이곳 말고도 여러 곳의 안내판이 쓰러져 있다 

 

 

 

 

북한강철교로 가는 길이다

 

 

 

 

진중삼거리로 가는 길이다

 

 

 

 

돌미나리집

미나리전 · 묵무침 · 잔치국수 · 골뱅이무침 등을 판다

 

 

 

 

조안리(조동 · 鳥洞)

조동마을은 고유어로는 새울 혹은 새월마을이라 불리는데, 다음과 같은 입향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박씨 선조가 한양 가는 길에 마을 앞을 지날 때 해가 저물어 쉬게 되었는데

새소리가 듣기 좋고 물이 좋아 가려던 길을 멈추고 여기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조동에서는 능내리를 거치지 않고 예봉산 등성이를 넘어 팔당리로 가는 고개가 있었는데

그 고개 이름도 새재(鳥嶺) 혹은 새고개라 하였으니 과연 새소리가 일품인 지역임은 분명한 듯하다

 

 

 

 

정암산

 

 

 

 

능내역으로 가는 길이다

 

 

 

 

들깨잎단지 아치

 

 

 

 

족자섬 앞이다

 

 

 

 

족자섬

접착제로 붙인 이야기 안내판이 밑에 떨어져 있다

 

 

 

 

열차카페

 

 

 

 

능내역

1956년 역원배치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여

1967년 보통역(역장이 배치되어 있는 역)으로 승격하였다가

2008년 중앙선 복선전철노선이 국수역까지 연장되면서 선로가 이설되고 폐역이 되었다

이 역을 대신하여 근처 진중리에 운길산역이 신설되었다

*

가까운 곳에 있는 「한확의 묘」로 인해 마을 이름이 「능내」로 되었다

 

 

 

 

능내역

폐역되기 전인 2003년 8월 1일 사진이다

 

 

 

 

성가정 마재성지(도마성전)

4개의 주련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현판이 걸려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은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이었던 토마스(도마)의 고백이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부활한 예수 몸에 난 상처에 손을 대본 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고백하였다

 

 

 

 

마재성지 명례방

마재는 정약현 · 정약전 · 정약종 · 정양용 등 4형제의 고향으로 한국 천주교회 요람지의 하나다

마재가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되기 시작한 시기는 1784년 한국천주교회 공동체 성립 이전부터다

 

 

 

 

마재의 성가정

 

 

 

 

성모자상

 

 

 

 

성가정 마재성지 예수 성심상

예수님의 손을 잡고 예수성심께 바치는 봉헌기도문이 앞에 있다

 

 

 

 

다산유적지 다산기념관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이자 차 문화 부흥을 이끈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유적지로

다산기념관  · 문화관 · 문도사(사당) · 여유당(생가) · 묘소 · 동상 등이 있다

어려서부터 글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다산은 16세에 서학(천주교)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는 훗날 그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요직에서 물러나거나 유배되는 아픔을 여러 번 겪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다산의 긴 유배 생활은 그의 방대한 저작이 탄생하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되어준다 

 

 

 

 

다산기념관

다산 정약용, 조선의 과학기술을 일으키다

 

 

 

 

문도사(文度祠)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사당으로 생가와 묘소가 있는 정약용 유적지에 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영정

 

 

 

 

정약용 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제7호)

문도공 다산 정약용 선생(文度公茶山丁若鏞先生) · 숙부인 풍산홍씨(淑夫人豊山洪氏) 지묘

정약용 선생은 이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아버지 나주 정(丁)씨 재원(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尹)씨(고산 윤선도 후손)의 막내 아들로 태여났다

이곳 마현(마재) 마을은 선생이 태여나고 묻히신 곳이다

위로 이복 맏형인 약현(若鉉)과 동복형인 약전(若銓) · 약종(若鍾) 그리고 누이 정혜(매형 이승훈)가 계셨다

서울에서의 관직생활(1783~1800)과 전라남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1801~1818)을 제외하고는

주로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여유당(與猶堂)

묘소에서 내려가며 봤다

 

 

 

 

여유당(與猶堂)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으로

집 앞으로 내(川)가 흐르고 집 뒤로 낮은 언덕이 있는 지형에 자리잡고 있어 선생은 수각(水閣)이라고도 하였다

당호(堂號)인 여유(與猶)는 선생이 1800년(정조 24) 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여유당기(與猶堂記)를 통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 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두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 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 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 못한다

*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운명이라고 말하랴

*

노자의 말에 "여(與)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 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거라"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깍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중략)

*

내가 이러한 의미를 해득해 낸 지가 6, 7년이나 된다

당(堂)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해보고 그만두어 버렸다

초천(苕川)으로 돌아옴에 이르러서 비로소 써가지고 문미(門楣)에 붙여놓고

아울러 그 이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아이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여유당(與猶堂) 현판

정약용 선생이 형조참의로 있던 1799년(정조 23)에는 선생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 해는 정약용 선생을 비롯한 남인의 정치적 스승이었으며

정조의 충직한 신하였던 번암 채제공 선생이 돌아가신 해이기도 했는데

이 무렵 정조는 정약용 선생을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으며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흔한 광경으로

선생이 판서가 되고 재상이 되어 제2의 채제공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노론 벽파는 선생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이는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에서 천주교와의 관계를 모두 고백했고

그 뒤 곡산부사로 외직(外職)에 나가 선정을 베풀고 돌아온 터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노론은 교활하게도 형 약전을 공격해서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는데

가족이 물러나면 벼슬자리에 있는 다른 가족도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분노했고 세상이 혐오스러웠다

벼슬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선생은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관직을 그만 두기를 청하였다

정조는 계속 만류하였지만 선생이 벼슬을 거부하자 할 수 없이 그해 7월 26일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1800년(정조 24) 봄에 아버지 정재원이 낙향했던 것처럼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마현으로 돌아와서 집의 문미(門楣)에 여유당이란 현판을 붙이고 은신하였다

그해 6월 12일 달밤에 정조의 유시를 전하려 규장각 아전이 한서선(漢書選) 10질을 가지고 찾아왔다

"5질은 남겨서 가전(家傳)의 물건으로 삼도록 하고

나머지 5질은 제목의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를 부르리라"

선생은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렸다

노론 틈에 정조를 홀로 남겨놓고 온 것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은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6월 28일 정조는 노론에 둘러싸여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여유당(與猶堂) 빗돌

다산의 후손인 정일권 국회의장의 휘호를 자연석에 각자하여 비를 세웠다

 

 

 

 

실학연수(實學淵藪)

실학의 모든 것이 모여 있는 곳이란 뜻이다

 

 

 

 

거중기(擧重器)

1792년(정조 16) 다산 정약용이 서양의 기술과 도르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창의적으로 만든 기구로 높이는 4.4m, 너비는 1.7m이다

'기기도설'을 연구한 다산 정약용이 골차로 거중기를 만들어 수원성을 쌓는 사업을 지휘하면서 직접 만든 것으로

이 기계를 써서 건설 경비를 4만 냥이나 절약하였고

거중기를 이용하여 노동자 두 사람이 약 10톤 또는 그 이상의 무거운 자재를 높은 곳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 축조에 사용하였으며

다산 선생의 과학사상과 앞선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다

 

 

 

 

다산생태공원

달빛따라 즐기는 여유당 마당이다

 

 

 

 

소내나루 전망대

양자산 · 팔당수질개선본부  · 소내섬 · 용마산 · 검단산 등을 볼 수 있다

 

 

 

 

소내나루 전망대 안내판

양자산 · 팔당수질개선본부  · 소내섬 · 용마산 · 검단산 등이 안내되어 있다

 

 

 

 

소내섬

 

 

 

 

양자산 · 팔당수질개선본부

 

 

 

 

수월정 방향이다

 

 

 

 

자선콘서트

 

 

 

 

수월정(水月亭)

물속에 비친 아름다운 달을 볼 수 있는 정자다

수월정 난간에는 초승달에서 보름달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변하는 달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다

*

友欲月下飮(우욕월하음) / 다산 정약용丁若鏞

友欲月下飮(우욕월하음) 벗이여 달 아래서 마시려거든

勿放今夜月(물방금야월) 오늘 밤 달을 놓치지 말게나

若復待來日(약복대래일) 만약에 내일로 미룬다면

浮雲起溟渤(부운기명발) 바다에서 구름이 일 것이며

若復待來日(약부대래일) 또 내일로 더 미룬다면

圓光已虧缺(원광이휴결) 둥근달이 이미 이지러질 거야

 

 

 

 

등나무 포토존

 

 

 

 

조망대A · 수생식물원 갈림길

 

 

 

 

검단산 · 쇠말산

수초 밑이 붕어들의 산란으로 소란하다

 

 

 

 

다산길 안내판

 

 

 

 

차량 진입금지

팔당호로 들어가는 문이다

 

 

 

 

팔당호

예빈산 · 예봉산이 보인다

 

 

 

 

능내리 연꽃마을 머루터널

 

 

 

 

연화낭자 이야기 · 다산길 안내판

 

 

 

 

능내리 연꽃마을 · 석실마을 방향안내판

 

 

 

 

자전거 용품점

스팀세차도 해준다

 

 

 

 

남양주 다산길

예전  철로가 남아 있던 길이다

 

 

 

 

카페 봉주르

남자 동상이 곁눈질로 보는 듯하다

 

 

 

 

팔당댐

팔 선녀가 내려와 놀던 자리에 여덟 개의 당(堂)을 지어 놀았다 해서 팔당이다

댐 흰색 아치가 멋지게 보인다

 

 

 

 

봉안교회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노동의 가치를 크게 여겼던 가나안농군학교의 창립자인 일가 김용기 장로가 남긴 명언이다

김용기 장로의 고향 조안면 봉안마을에는 1914년 설립된 봉안교회가 있다

김용기 장로는 이곳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회를 담당하고 농사꾼이 되기로 결심한다

김용기 장로는 모두가 바라는 이상향, 낙원인 봉안이상촌 건설을 꿈꾸었고 최종에는 조국의 국권회복을 목표로 했다

1931년 김용기 장로가 드디어 봉안교회 일원들과 뜻을 모아 이룩한 것이 봉안이상촌이었다

 

 

 

 

봉안터널

 

 

 

 

봉안터널

 

 

 

 

남한강 팔당역 자전거길 안내판

 

 

 

 

예봉산 자락 벼랑길이다

 

 

 

 

4대강 국토종주 남한강자전거길 안내판

 

 

 

 

팔당역(폐역) 앞에 있는 다리다

 

 

 

 

팔당 연인길

 

 

 

 

천사의 날개

EDIYA COFFEE로 가는 토끼굴이다

 

 

 

 

팔당대교~와부 도로건설공사

팔당역 앞 다리공사로 팔당역으로 가는 길이 막혀 지나쳤다 돌아갔다

 

 

 

 

팔당역

마침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