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장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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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2022. 5. 8.

서희 장군 묘(徐熙將軍墓 · 경기도 기념물 제36호)

서희(徐熙)는 고려의 문신으로 거란의 80만 대군을 피 흘리는 전투 없이 대화로 물러나게한 외교관이다

서희는 이천(利川) 서씨로 광종 11년(960)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쳤다

성종 1년(982) 송나라에 가서 중단되었던 국교를 맺고 검교병부상서가 되어 귀국했다

고려의 적극적인 북진정책과 친송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고려 성종 12년(993)에 소손녕을 대장으로 한 8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西京 · 평양) 이북을 떼어주고

강화하자는 의견 중에서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서희는 이에 적극 반대,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가서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이때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에 반박

국명으로 보아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설득하여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그리하여 압록강 동쪽의 여진이 점거한 280리 땅, 즉 지금의 평북 일대를 보존하는 위대한 공을 세웠다

고려 성종 묘정에 제향되고 덕종 때 태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장위(章威)다

서희의 묘는 부인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직사각형 돌로 2단 호석을 두른 직사각형 봉분이다

 

 

서희 장군 묘 홍살문

서희 장군 묘 안내문이 옆에 있다

 

 

 

 

서희 장군 묘 안내문

서희는 942년(태조 25) 태어났으며, 960년(광종 11) 과거에 급제한 뒤

내의시랑을 거쳐 983년(성종 2) 병관어사 · 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고, 태보 · 내사령의 최고직에 올랐다

 

 

 

 

서희 장군 묘역으로 가는 길이다

 

 

 

 

서희 장군 묘

고려 초기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문관으로 전략적 안목과 대국을 보는 시야를 갖춘 탁월한 전략가이자 명재상이다

서희는 942년(태조 25) 태어났으며 998년(목종 1)에 죽었다

 

 

 

 

서희 장군 묘

묘역은 전체적으로 3단정제(三段庭制)로 되어 있어 고려시대 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서희 장군 묘

서희와 부인 청주한씨의 합장묘이다

가운데 비석, 좌우 문 · 무인석 한 쌍, 작명등이 있다

봉분 아래에 2단의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서희 장군 묘

쌍분(雙墳) 가운데에 묘비가 세워져 있고, 4개의 고석으로 받친 상석(床石)이 있다

장명등은 1기씩 놓여 있었으나 왼쪽 장명등은 도난 당해 없다

 

 

 

 

서희 장군 묘비

송검교병부상서 고려태보태사내사령 익장위서공희지묘

(宋檢校兵部尙書 高麗太保太師內史令 謚章威公熙之墓)

*

송검교병부상서는 서희가 성종 1년(982) 송나라에 가서 중단되었던 국교를 맺고

송나라 임금으로부터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검교병부상서가 되어 귀국했다

*

고려태보태사내사령은 정일품으로 임금의 자문관이며

내사령은 내사성의 최고의 지위이다

*

장위는 고려 초기의 문관 벼슬 이름이다

 

 

 

 

장명등(長明燈)

지금 있는 장명등은 머릿돌을 2개 얹은 상태인데, 후대에 변형된 것이다

 

 

 

 

무인석 · 문인석

석인은 좌우 2쌍이 있는데, 문인과 무인의 차례대로 배치하였다

문인은 홀을 쥔 복두공복형(幞頭公服形)이고 무인은 긴 검을 손에 쥔 형상이다

무인은 갑옷을 입지 않고, 직령포를 입었는데, 15세기 전기의 양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 묘역은 고려시대의 묘제가 일부 남아 비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오른쪽 문 · 무인이다

 

 

 

 

무인 · 문인

왼쪽 문 · 무인이다

 

 

 

 

서희 장군 묘

좌우 상록수와 잔디마당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산신제단(山神祭壇)

서희 장군 묘 윗쪽에 있다

 

 

 

 

서희 장군 묘(기념물 제36호) 비

 

 

 

 

준공표

정민공(貞敏公) 장위공(章威) 묘역 확장 개수 준공비다

 

 

 

 

서필(徐弼) 부부 합장묘

고려 전기 관인으로 개국공신 서신일(徐神逸)의 아들이며 서희의 아버지이다

처음에는 서리로서 관직에 진출하여 내의령에 이르렀으며

광종의 개혁정책을 지지하여 신임을 받아 사후에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에 추증되었다

광종은 후주에서 온 쌍기를 정치 고문으로 삼고 귀화해온 중국인들을 특별대우하여

호족 출신 신하들의 집을 뺏어 귀화인 출신 신하에게 주었는데

서필은 이에 대해 항의하여 잘못을 고치게도 하였다

 

 

 

 

서필(徐弼) 부부 합장묘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의 아들 내의령 서필(徐弼) · 손자 내사령 서희(徐熙)

증손자 문하시중 서눌(徐訥) · 좌복야 서유걸(徐惟傑) · 고손자 평장사 서정(徐靖) · 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 평장사 서공(徐恭) ·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서필(徐弼) 묘비

고려삼중대광태사 내사령 익정민서공필지묘

(高麗三重大匡太師 內史令 謚貞敏弼之墓)

 

 

 

 

무인석 · 문인석

석인은 좌우 2쌍이 있는데, 문인석과 무인석의 차례대로 배치하였다

오른쪽 문 · 무인석이다

 

 

 

 

무인석 · 문인석

오른쪽 문 · 무인석이다

 

 

 

 

서필(徐弼) 부부 합장묘

 

 

 

 

상산재(象山齋)

서필 · 서희 신도비(神道碑)와 서희 장군 사적비가 있다

 

 

 

 

상산재(象山齋)

고려의 명재상 서필과 고려의 외교가 · 문신 서희의 사당이다

 

 

 

 

상산재(象山齋) 현판

 

 

 

 

서희 장군 사적비

1979년에 세운 빗돌이다

 

 

 

 

서희신도비

고려태보내사령 송검교병부상서 증태사이천백 익장위서공희신도비명

(高麗太保內史令 宋檢校兵部尙書 贈太師利川伯 章威公熙神道碑銘)

 

 

 

 

서필신도비

고려내의령 증삼증대광태사령 익정민이천서공필신도비명

(高麗內儀令 贈三重大匡太師貞敏利川神道碑銘)

 

 

 

 

서희 · 서필 신도비(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