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마당

새만금갯벌 2006. 7. 12. 10:17
비전향장기수 허영철 일대기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2006·07·12 03:37 |

“9월 28일, 남대문에 미 탱크가 들어와서 육탄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돌았다. 퇴각한 미군이 다시 상륙해서 서울을 향해 진격해 온다는 정보도 받았고, 중앙청에 태극기가 올라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지도부에서는 이제 그만 서울을 빠져나와 의정부까지 나오라고 한다. 시내 건물들은 적막하리만큼 고요하고 달빛에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그 뒤에 몸을 숨기면서 서울 거리를 빠져나갔다.
나는 그때 달이 휘영청 밝았던 밤. 서울을 빠져나오던 비감한 심정을 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수도가 수십 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다가 이제 겨우 해방이 되었는데, 일제 대신 미국에 점령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36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감방에서 보낸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이 구술하고 기록한 그의 일대기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가 출판사 <보리>에 의해 출판되었다.

위의 글은 이 책 본문에서 따온 글로 우리가 배워 온 현대사와는 확연이 다른 시각이다. 그러나 이 다른 시각은 허영철의 일대기 속에 엄연한 현실로 존재한다.

허영철은 최근에 미군기지평택이전반대집회, 8.15민족공동행사, 맥아더동상철거시위현장에 다녀왔다. 한 시위 참가자가 “옛날에는 미군이 주둔할 필요가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군이 머물 필요가 없으니 물러가라고 하는 거라고...”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얘기 들으면 안타깝지. 통일운동에도 관심이 있고 시위에 참가할 정도로 알 만한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는 게. 그래서 내가 미국 놈들이 우리 역사에서 필요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조목조목 얘기했지. 신미양요, 가쓰라 테프트조약, 6.25전쟁, 정전협정 같은 것들 말이야...”


허영철 구술·기록. 보리 펴냄. 1만2500원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출소했지만 여전히 역사문제는 내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살아온 생애 내내 역사는 단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허영철은 1920년 부안군 보안면 성동에서 태어났다. 성동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해 2년 정도 학교 교육을 받았으나 다니던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줄포 보통학교로 편입했지만 허영철은 형편이 어려워 진학하지 못하고, 동네 서당을 다녔다.

그 후, 열일곱 어린나이로 노동자 생활을 시작해 국내 곳곳의 공사판은 물론, 일본의 공사판을 떠돌았다.

그런 그는 조국이 해방되자 남로당에 들어가 적극적인 공산당 활동을 벌이다 육이오전쟁 때 부안군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연합군의 인천상륙 뒤 ‘서울방어전’에 투입됐다가 인민군과 함께 후퇴, 그해 3월에 중앙당학교에 입학하여 맑스·레닌주의와 정치, 경제, 철학 등과 관련한 소양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청수면(이북)에서 임시 인민위원장을 지낸 뒤, 장풍군(이북) 인민위원회로 배치되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직을 맡아 활약했다. 남한과 북한에서 군당 인민위장과 부위원장 직을 수행하게 되는 특이한 경험을 하였던 것이다.  

1952년, 남한의 각 지구당 사업을 지원할 공작원을 훈련시키고 파견할 목적으로 설립된 금강학원에 들어갔고, 54년 남파됐으나 약 1년 뒤 광주에서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및 간첩 미수’의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구형받아 복역하고 1991년, 36년 만에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그는 체포되어 무기형을 받을 때만해도 돌 무렵 아이가 중학교를 마칠 무렵이면 세상에 다시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수감생활은 강산이 세 번 반 변했을 장장 36년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가 27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는데, 남한에는 40년이 넘게 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는 긴긴 수감생활을 하면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매서운 찬바람이 씽씽 불고 세상이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붙어도 그 저류에는 항상 통일을 바라는 역사가 흘렀다고 나는 믿어. 1980년 5월과 1987년 6월처럼 화산처럼 폭발하면서 역사를 전진시켜왔다고 말아야. 그래서 통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는 살아왔어. 평화통일은 역사의 순리이고 법칙이니까.”

갑철, 상철 두 동생은 전쟁 때 변산에 입산해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사살되었다. 큰집과 작은집의 두 형들도 일찍부터 좌익 활동을 했는데 변산에 입산했다가 모두 산에서 전사했다.  

6개월 남짓 결혼생활을 한 뒤 40년간 남편과 생이별을 한 부인(조경자)은 식구들을 데리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 했다. 이것저것 물건들을 들고 이고 하루 육십리 길을 걸어 다니며 행상을 했다. 이사만 서른 번 넘게 다녔고, 흘린 눈물만 다 모아도 몇 동이는 되고도 남는다.

그런 부인이지만 지금은 남편의 편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술회 한다. “그래도 아내는 내 원망을 거의 하지 않는다. 자식들에게도 그런 원망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참 고맙다. 눈물겹게 고맙다.”

자녀(아들 진, 딸 옥선)들도 마음고생이 많았다. 부인은 이렇게 술회한다. “서울대학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딸이 경찰들이 자꾸 찾아오고 하니까 어느 날 사표를 던지고 내려왔다. 아무 말 없었지만 딸도 많이 답답했을 거다. 그나마 나중에는 복직할 수 있었고, 지금은 결혼해서 미국에 산다. 아들은 대학(전북대 정외과)을 졸업하고 나서도 5년을 놀았다. 신원이 조회에 걸리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학교 다닐 때 교직과목을 들어 두어서 지금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는 출소 후, 부안 진성아파트 경비로 1년쯤 근무하고, 95년 3월1일부터 2001년 3월 31일까지 김제 시영아파트로 옮겨 일했다. 그는 적당히 일할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열심히 했다. 김제 시영아파트 주민들로부터는 이러한 성실함에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허옹은 이에 대해

“왜 열심히 하냐? 누군가 묻는다면, 공산당원이라면 비록 조직을 떠나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책무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내 모습이 곧 당을 대신 할 수 있으므로, 그러므로 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변산공동체 윤구병 선생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한테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인가?’ 하고 물었을 때 그 분 말씀이 이랬다. ‘읽고 나서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 그렇다. 이 책에는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많을 것이다. 특히 당신이 평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나도 처음에 이 글을 읽고 몹시 불편했음을 고백한다.”고 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몹시 불편했음을 고백한다.


고향인 보안면 성덕마을을 둘러보는 허영철 선생ⓒ부안21


허영철이 말하는 허영철

나는 1920년에 출생했다.
올해가 2006년, 내 나이 87세이다.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분들은 역사의 역동기를 살아왔다. 우리 민족이 수난기를 겪어 왔다고도 생각한다.
나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철이 들면서부터 육체노동으로 단련되었다. 1936년 함경남도 단풍선 철로 공사에 지원해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고, 1940년에는 일본 유바리탄광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귀국했다.
1945년 8·15 해방이 되고 뜻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독립국가 건설에 동원되었다. 나도 적은 힘이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50년 고향인 부안이 인민군대에 해방되고 난 뒤, 미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인민위원회를 재건하는 등 민주개혁 사업을 했고, 9월 중순에는 정치학원에 학생으로 추천받아 서울로 갔으나,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퇴로가 없어져 평양으로 갔다.
그때 미군의 폭격으로 수도 평양을 비롯해서 조국이 불바다가 되었는데도 나는 당분간 중국 동북 지방에 있는 학교로 공부하러 가는 기회가 주어졌다. 학교를 나와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지방정부에 나가서 실무 사업도 익히고 많은 것을 배웠다. 도치면 인민위원회 위원장, 장풍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1953년 7월 27일 3년여에 걸친 전쟁이 끝나고 승리의 기쁨에 젖은 인민들이 숨 돌릴 사이 없이 전후 복구 건설 사업에 열심히 일어서는 것을 나는 보았다. 1950년 4월 제네바 회의에서 조선의 통일을 주장하는 공화국의 정당한 제안은 미제의 음모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때 공화국의 정당한 제안은 남쪽 인민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이 정당한 제안들을 알리고 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나는 1954년 8월에 남쪽으로 나왔다.
남쪽에 와서 약 1년간 있었으나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미수로 무기형을 받았다. 1955년 7월 하순에 체포되어 만 36년이 지나서 1991년 2월 25일에 출감하게 되었다.
내가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북에서 보낸 1951년 초부터 1954년 8월까지 4년간의 기간이 가장 주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과정을 가장 중요하게 기록에 남기고자 한다.
공화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보안면 반평리 사는 외사촌 형수와ⓒ부안21

내가 아는 허영철

허영철 선생은 넓은 사람의 바다 속에서 여러 사람들과 부드럽게 교류하면서도,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세계관이 확립되어 실천과 이론이 통일된 지식을 갖춘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확신합니다.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노동 현장의 진실도 경험하였고,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에는 분단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한 뛰어난 애국자입니다. 선생의 지식은 실천과 경험으로 쌓여진 사고방식 위에 과학적으로 정립돼 있습니다. 선생은 학교 교육에서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독학으로 익힌 수학과 물리, 과학 같은 지식이 비범합니다. 이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선생께서 자기가 일생 걸어 나온 소중한 인생 경로를, 특히 분단된 조국을 왕래하며 터득한 지식을 글로 쓴다고 합니다. 이것은 학생 청년은 물론 부강한 통일 조국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서가 되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선생의 자서전 출판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박정평(비전향 장기수/혁명 동지)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이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짓뭉개고 있을 때 그 헌법에 따르는 국민의 권리를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이 누구인가. 당신이고, 나인가? 천만에. 그 사람들은 따로 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고 적화통일을 획책하는 무리에 속했다는 이유로 세계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장기 투옥을 감수하면서, 그 잔혹한 전향공작에도 꺾이지 않고 끝까지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고수한 ‘비전향 장기수’들이 바로 대한민국 헌법을 가장 충실하게 수호한 분들이다. 참 역설적이지 않은가? 벽에도 귀를 달고, 밤 말은 쥐를 시켜 듣고 낮말은 새를 시켜 듣던 그 정보 정치의 공포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입은 얼어붙고 손발은 마비되어 옴짝달싹 못하고 숨죽이고 있을 때 관 속 같은 독방에서 국헌을 준수하기 위해서 그 폭력적 국가 기구들에 감연히 맞선 사람들이 ‘국가를 참칭한 반국가 단체’에서 보낸 첩자들이라니.
/윤구병 추천사 ‘인민의 수호 전사 허영철’중에서


고 백산고등학교 정진석 이사장과 지운 김철수 선생 묘소에서ⓒ부안21

허영철 연보

1920 11월 5일 전북 부안군 보안면 성동에서 태어났다.

1926 성동의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1928 다니던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줄포 보통학교로 편입했지만 허영철은 형편이 어려워 진학 못하고, 동네 서당에 다니게 되었다.

1930 부안군 주산면과 백산면 경계 지역의 배수로 공사 현장에서 농민 폭동 사건이 벌어진다. 부당하게 폭행당하고 모욕당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서서 현장 사무소를 방화하게 이르고, 일본 헌병대가 지원을 나올 정도로 사건이 커진다.

1932 전반적으로 농촌이 곤궁했던 시기, 허영철의 집안도 소작료를 내지 못해 소작권을 빼앗기는 등 곤경을 겪었다.

1936 조선총독부 알선으로 함남 단풍선 철로 공사에 지원하여 노동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서 인금 인상을 요구하다가 일본인 감독 이와나가와 크게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처음 조직적 행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1938 아직 결혼에 뜻이 없었지만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허영철은 집안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된다.

1940 조선총독부 알선으로 일본 북해도 탄광 노동자에 지원하여 북해도의 유바리 탄광으로 떠났다.  
      
1941 여름에 아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귀국하지 않고 계속 일본에 머물렀다. 12월 7일 탄광에 출근해 일본의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듣게 되었다.

1943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같이 일하던 김형곤과 함께 귀국했다.

1945 8월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조선이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 후 처음 열린 대규모의 줄포 난장에서 과거 친일 관리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1947 남로당이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와 지방당을 조직적으로 가동시켜 1947년 3월 22일 24시간 총파업을 계획했다. 부안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대규모 농민 투쟁을 조직하게 되었고, 이때 허영철도 비교적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투쟁이 실패로 끝난 이후, 투쟁 및 사업방식에 대해서 회의하게 되었다.

1948 북에서 8월 25일 총선을 실시,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허영철은 8월 25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선거 사업에서 보안면 선거위원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공산당 활동으로 두 차례 검거되었다.

1949 2월 지명수배를 피해서 충남 안면도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후 춘천, 충북 단양 등으로 옮겨 다녔다.

1950 영월 산업 도로 공사 현장 노동자로 근무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과 함께 부안으로 내려와 부안군당 활동을 시작했다. 8월 15일을 기해 남한 지역에서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면서, 허영철도 부안군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인민위원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9월, 서울 아카데미에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전황이 위급하여 곧바로 서울시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1951 1월 4일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한국 정부가 서울에서 철수했다가 3월 18일에 재탈환했다. 이때 인민군과 함께 후퇴했다가 3월에 중앙당학교에 입학하여 맑스·레닌주의와 정치, 경제, 철학 등과 관련한 소양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청수면에서 임시 인민위원장을 지낸 뒤, 장풍군 인민위원회로 배치되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직을 맡았다.

1952 2월, 장풍군에서의 생활을 종결짓고, 남한의 각 지구당 사업을 지원할 공작원을 훈련시키고 파견할 목적으로 설립된 금강학원에 들어갔다.

1954 1953년 말까지 금강학원에서 준비 기간을 마치고 대남 사업을 대기하고 있었다. 7월 낚싯배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첫 시도에서는 기관총과 소총사격으로 실패하고, 다시 한 번 시도하여 해안을 통과하는 데 성공하여 목적지인 법성포에 도착했다. 전귀환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55 약 1년 정도 광주에서 머물다가 7월 20일 피체되어, 홍성재판소로 보내졌다. 9월, ‘국가보안법 위반 및 간첩 미수’의 죄목으로 피소되었고, 1차 공판에서 무기징역을 구형받았다.

1956 사상 전향 문제가 제기되었다. 모든 좌익수에 대해서 전향과 비전향으로 분류하는 작업이 시행되었고, 비전향자들은 전부 출역이 중단되었다.

1960 공주교도소에서 4·19를 맞았다. 4·19를 계기로 국가보안법 위반자와 특별조치령 위반자들에 대한 감형이 예상됐지만, 간첩이라는 죄명이 붙은 이들은 제외되었다. 부식 문제로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1961 5·16 쿠테타로 교도소 안의 상황도 급변했다. 육군 중장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명의로 새로운 법령들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1961년 8월 9일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1월 대전으로 이감 온 후로는 처음으로 아내와 장모, 처제가 면회를 왔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1964 3월, 감옥 내 동료의 자살 사건에 항의하며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1965 3월, 1961년 이후 면회가 금지되었는데, 딸과의 면회가 허락되었다. 공주교도소 이후 9년 만에 딸과 만나는 것이었다.

1967 4월, 목포로 이감되었다.

1969 5월, 다시 대전교도로소 이감되었다. 대전교도소에서는 면회는 물론이고 편지도 못하고 영치금도 쓸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이에 항의하며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1973 7월, 사회 참관의 시행으로 외부로 처음 나가게 되었다.

1974 7월, 공주교도소에서 만난 이후 17년 만에 면회 온 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몇 차례의 면회가 모두 허용되지 않았다.

1975 감방 동료들과 박정희 정권과 관련한 시국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유로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에 항의해 단식 투쟁을 벌였다. 12월, 대구로 이감가게 되었다.

1976 4월, 동료 손윤규가 가혹 행위로 죽게 되자 농성에 들어갔다.

1978 부마 사태로 수감된 학생들이 교도소 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벌였다. 학생들이 용공분자로 몰릴 것을 우려해 동참하지 않다가 4일 뒤 함께 단식에 들어갔다.

1979 1월, 광주교도소로 이감하게 되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비상조치법에 걸린 학생들 및 인혁당 사건 관련 인사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9월,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벌였다.
        
10·26 사건 이후 비상조치법 위반자들은 거의 출감할 수 있었다.
        
12·12 사태 소식을 듣게 되었다.

1980광주교도소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맞이하게 되었다. 7월,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전주에 이감된 뒤에 처음으로 아들과의 면회가 가능했다. 11월 교도소 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벌였다.

1991 2월 26일, 형 집행정지로 출옥하게 되었다.

1994 11월, 부안읍에 있는 진성아파트에서 경비원 생활을 시작해 1995년 3월까지 근무했다.

1995 김제 시영아파트로 직장을 옮겨 2001년 4월까지 근무했다.

2005 평양에 다녀왔다.

/허철희/huh@buan21.com
출처 : 변산 마포초등학교 6회 동문회
글쓴이 : 허정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