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읽고

2007. 10. 25. 00:27
“1933년 대황구 사건과 2007년 정상회담의 대차대조”
김상일 교수의 ‘세기와 더불어’ 주체사상 들러 보기 ③
2007년 10월 12일 (금) 12:30:30 김상일 tongil@tongilnews.com

김상일(한신대 전 교수, Korea Project Director, Claremont Center for Process Studies)

전 한신대 철학과 교수였고 단군학회 회장을 역임한 김상일 교수는 지금 미국 클레어몬트 과정사상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 반공을 하든 용공을 하든 북을 바로 알고 김주석 자신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며 독후감 연재를 제안하였습니다. 김  교수는 평소에 전공해 온 철학과 문명사 이해 등 다방면의 지식을 토대로 회고록을 격조 높게 평가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하였다고 밝혔습니다. 이 연재를 통하여 6.15 시대에 사는 남북한 모두가 남북의 역사와 이념을 고루 고루 습득하고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매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보여준 말과 행동은 마치 전위 무용가 머시 커닝햄이나 전위 음악가 케이지가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것을 방불케 하였다. 커닝햄은 사전에 아무런 안무도 없이 아니, 안무를 했다고 하더라도 무대 위에서 즉흥적으로 춤을 추고 춤을 추는 과정에서 안무를 해 나간다. 그리고 춤을 추다가도 흥이 나지 않으면 그만 두기도 한다. 케이지 역시 피아노 앞에서 즉흥 작곡을 하고 어떤 때는 피아노 뚜껑을 덮고는 무대 뒤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소위 이 두 사람의 무용과 음악을 포스트 모던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김 위원장도 포스트 모던적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남한 언론들은 이번 두 정상의 모습이 분명히 대조되는 것을 보고 노무현 대통령은 ‘논리적 대화형’ 그리고 김 위원장은 ‘직관적 통치형’이라고 대비시키고 있다. 현대 분할 뇌 이론으로 볼 때에 전자는 좌뇌적 그리고 후자는 우뇌적이라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국제 정상회담에서 즉석에서 회기를 하루 더 연장 할 것을 요청하는 것은 그 전례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무용으로 말하면 안무 내용이 없는 것을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즉답을 피하자 “대통령이 그걸 못하십니까. 대통령께서 결심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의아해 하면서 김 위원장은 돼 묻는다. 신문들은 이러한 김정일 위원장의 말을 두고 돌발적 혹은 국제 외교상 상식에 벗어나는 것, 그래서 이번 회담을 두고 비정상적 정상회담이라고 까지 사설에 싣고 있다.(조선일보 2007.10.4)

그러나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을 자세히 읽어 보면 이것은 비정상도 아니며 차라리 그럴 만한 역사적 맥락마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북을 방문하면 거리에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구호를 자주 접하게 될 것이다. 이 구호가 나오게 된 배경은 다름 아닌 동녕현성 전투이후에 얻은 뼈저린 교훈 때문이다.

북은 언제나 현재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바로 1930년대 김일성의 항일 유격대 시기와 일대일 대응을 시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1929년부터 1945년까지 16년은 역사의 모형이라는 사실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때를 이데아로 한 혹은 모형으로 한 연상 작용을 해 나가는 것이 북의 현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원형적 모형 즉 이데아를 알지 못하면 북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번 정상 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에게 한 말의 모형은 1933년 9월 6일 밤부터 9월 7일 낮까지 있었던 동녕현성 전투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대황구에서 있었던 13인 병사 유격대원들 몰살 사건을 알지 않으면 북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란 말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황구 사건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우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는 것이며, 이번 김 위원장의 '대통령이 결심하면 모든 것이 되지 않느냐'고 묻는 맥락이 바로 이 사건에 연관이 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동녕현성 전투는 엄청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난공불락의 이 성을 공략하여 수백 명의 적을 섬멸했다는 것 이외에 이 전투를 치룬 이후 그동안 적대 관계에 있던 구국군(장개석 군)을 유격대 편으로 끌어들였다는 큰 의의가 있는 전투였다. 크게 부상당한 구국군 사충항 여단장을 김일성 부대가 구해주었다는 것은 전투 이후 두 부대 사이의 우의를 한결 두텁게 만들어 이 전투를 통해 둘 사이에 항일 공동전선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호사다마'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동녕현성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왕청에 돌아와 쉬고 있을 때에 훈춘현 대황구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병사 13명이 일본 토벌군의 습격을 받아 총 한 방 쏘아 보지 못하고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3명 가운데는 김일성 사령이 그렇게도 아끼던 오빈과 반성위가 들어 있었다. 이 두 사람 특히 오빈을 잃은 슬픔과 아픔에 대해서는 여기서 글로 다 전달할 수 없을 정도이다. 회고록을 읽지 않고는 그 표현을 다 전할 수 없다.

그 날은 추석 다음 날이었다. 외 딴 집에서 그 날도 보초를 세우고 쉬고 있는 데 이 틈을 탄 일본 토벌대는 한 밤중에 이 외딴집을 포위하고 불의의 습격을 하여 방 안의 유격대원 13명을 단숨에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과 이번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을 일대일 대응 시키지 않을 수 없다. 말의 배경과 진의를 전달하고 조선 ‘민주주의’의 모형을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이 다급하고 아찔한 순간 유능한 군사 전략가 지휘관이 있었다면 적의 약한 고리를 치고 일단 포위망을 뚫고 재빨리 방 안을 빠져 나오는 것이 상책이었을 것이다 라고 김 사령은 이때를 회고하고 있다.(3권-210쪽) 아버지 김 사령의 말 “그러자면 지휘관이 정황을 똑똑히 포착하고 제 때에 결단을 내려야한다”는 말은 아들 김정일 위원장의 “대통령이 결단하면...”이란 말과 정확하게 일대일 대응이 된다.

그러나 대황구 외딴집 안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방 안에는 백일평 같은 유능한 군사 지휘관도 있었고 위에서 말한 오빈도 반성위도 있었다. 오빈은 용정 동흥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산포대를 점령할 때에는 작탄을 안고 돌격로를 헤쳐나간 위기 탈출의 경험이 있는 명장 가운데 명장이었다. 이런 그가 죽었다는 것은 “청천벽력 같은 충격을 주었다”(3-214)고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던져지는 질문은 “그럼 왜 그들이 방 안에서 고스란히 앉아 죽을 수밖에 없었느냐?”이다. 바로 그 사연이 기가 막힌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극단적 군사 민주주의’가 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들 극단주의자들을 ‘극단적 좌경주의자들’이라고도 한다. 김일성 사령의 한 평생이 이런 극단주의자들과의 싸움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뇌리 속에는 이런 김일성 자신이 마치 극단주의자인 것처럼 각인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의 회고록의 대부분은 당시 만주벌에 활개 치고 돌아다니던 좌경 모험주의자들 그리고 극단주의자들과의 투쟁으로 얼룩져 있다.

이들 극단주의자들은 적들이 집을 완전 포위하고 일제 사격을 가하며 옥조여 오는 마당에 이들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하나에서 열까지 반드시 회의에서 토의되어야 하며 다수결의 원칙에 의하여 집체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은 군대의 지휘와 관리에서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철칙으로 되어 지휘관들이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으로 이것을 무능의 탓이 아니라 극단적 군사 민주주의의 중압으로 온 기능마비의 병폐이다”(3-210)라고 한다. 이것은 지난날의 이야기도 아닌 지금도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 포위망을 뚫을 것인가 말 것인가” 마치 햄릿의 고민을 방불케 하는 토의를 진행하면서 “이러다간 다 죽는다 싸움부터 해 놓고 보자 하면 지휘관들은 회의 결과도 없이 어떻게 전투를 하는가 하면서 그 제의 자체를 일축해 버리고 말았다.”(3-211) 마치 대선을 코앞에 두고 신당 대선주자들과 당 지휘부가 경선방법을 놓고 벌이는 작태와 비슷해 보인다. 다수결 원칙에 의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종말을 지금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일반 투표에서는 지고도 부시는 대통령이 되는 이런 모순이 바로 극단적 민주주의의 한계인 것이다. 이것을 두고 장 마리게노는 ‘민주주의의 종말’이라고 한 것이다.

그 당시 시체더미에서 겨우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오빈은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나는 지금 동무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소. 그러나 당원으로 하는 부탁하는 것이니...”(3-211) 하면서 처절한 부탁을 하나 남긴다. 그 내용을 회고록에서 읽기 바란다. 오빈은 당시에 당으로부터 지휘관의 자격을 모두 박탈당하고 평당원으로 백의종군 할 때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백의종군하던 이순신도 이렇게 권한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사 민주주의의 최대 희생자의 이름으로 그는 기록될 것이다.

극단적 군사 민주주의자들의 의사결정 방법을 여기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령 ㄱ 이라는 도시를 친다고 할 때에 1. 당 소조회의를 연다. 여기서는 도시 이름은 비밀에 붙이고 그 도시의 지도를 놓고 그 도시를 칠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를 토론한다. 2. 다음은 지부회의에서 같은 문제를 놓고 같은 방법으로 토론을 반복한 다음 거수 다수결로 결정한다. 3. 다음은 전대회의에서는 위 소조회의와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 같으나 다른 점이 있다면 비당원 군인들도 토의에 참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결정이 난다고 해도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점검을 받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김 사령은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의제를 던져 놓고는 여럿이 모여 앉아 결론을 도출해 내기 위하여 “하자 말자, 된다 안 된다, 이길 수 있다 없다는 식으로 끝없는 논쟁을 펼치군 하였다. 군사민주주의 덕으로 모두가 평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개개명창이 되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대는 론쟁은 무한정 시간을 끌었다.”(3-216) 이를 재미있는 속담을 들어 “소뿔도 각각 념주도 몫몫”이라고 한다. 자칫 생각하면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지금 실현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신당에서 지금 20만명을 상대로 휴대전화 여론을 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의 부정과 객체의 해체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철학에서는 오래 동안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논쟁이 되어 오던 ‘거짓말쟁이 역설’이 ‘러셀 역설’로 둔갑되어 19세기 말부터 수학에 나타난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하면 참말이다’와 같이 결국 “참말이면 거짓말 거짓말이면 참말”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학자 괴델은 증명의 문제에 있어서 ‘이다도 증명이 가능하고 아니다도 증명 가능하다’를 1932년 증명하여 이를 ‘괴델 증명’이라고 한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해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다 아니다. 된다 안 된다’는 모두 '결정 불가 undecidability'일 뿐이다. 객관적 진리의 부정 그리고 객체의 해체와 함께 ‘주체 subject’의 문제가 등장한다.

북의 주체사상이 등장하는 맥락도 결코 여기서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배경과 과히 멀지 않다. 김 사령은 이렇게 철저한 군사 민주주의에 의하여 내려진 결론이라 하더라도 “그러는 사이에 적정에는 변화가 생기고 각급 회의들에서 모처럼 토의 결정된 작전방안은 무용지물이 되군하였다. 설사 그 방안 때문에 싸움을 하는 경우에도 혁명군은 정황조건의 변화 때문에 막대한 희생을 당해야 했다”(3-216)고 회고하고 있다. 객체의 해체와 함께 주체의 개입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알랭 바디우가 주체의 문제를 새롭게 해석함이 그대로 유효할 수 있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서 최근에는 건축에 있어서도 청사진을 먼저 만들어 놓은 다음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고, 집을 지어 나가는 과정에서 청사진도 만들어져 간다고 한다. 지도가 아직 만들어 지지 않은 경우는 지도를 만들어 가면서 여행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방법을 ‘과정적 process’ 이라하며 이러한 경영기법을 ‘과정 경영’이라고도 한다. 기성품과 같은 객관적 진리는 없으며 주체의 참여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과정이 결국 객체를 형성한다. 이런 점에서 주체사상은 항일 유격대의 투쟁 방법에서 뚜렷이 나타난다고 본다.

김 사령은 대황구 사건에서 아까운 동지들을 잃은 충격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극단적인 군사 민주주의에 대하여 전율에 가까운 감정으로 역겹게 대하였으며 혐오감과 경계심을 가지고 그것을 반대한 것은 그것이 유격활동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백해무익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지금 북이 서구 사회의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혐오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일 수도 있고, 김 위원장이 하루 더 묵어가라고 할 때에 노대통령이 “경호책임자와 의전 책임자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고 했을 때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결정하면 될 일을 심지어는 의전과 경호 책임자에게 까지 물어 보느냐 하는 의아심의 발로일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글을 쓰는 나의 추측이지만 타당성이 있는 추측이라고 본다.

그러면 극단적인 군사 민주주의에 이렇게 혐오하고 경계하는 북에서 최고 지휘자의 위치와 의사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전원 참가에 의한 토론과 다수결 원칙을 극단주의라고 배척할 때에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느냐 이다. 그것이 바로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이다. 이 구호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지 않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것은 ‘당’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존재이냐 하는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당은 어떻게 결정하느냐 이고 당원은 누구이냐 하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당의 의사결정에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은 있느냐 하는 것이다.

회고록 첫 권의 표지는 “언제나 인민을 믿고 인민에 의거하면 백번 승리하지만 인민의 버림을 받게 되면 백번 패한다는 진리를 삶과 투쟁의 좌우명으로 삼아야한다”로 장식하고 있다. 그러면 인민대중의 직접적인 참여에 의한 의사결정 즉 극단적 민주주의와 이 좌우명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극단적인 군사 민주주의자인 프랑스의 소부르죠아사상가 프루동으로부터 러시아의 바쿠닌이나 크로보뜨낀 등은 진실로 인민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새 제도, 새 생활을 꾸릴 수 없게 하는 백해무익한 조류의 사상가들로서 엄정한 역사적 판정을 받은 퇴물이라고 혹평을 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민주주의는 무제한한 자유에 대한 환상을 조성시키고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대공업이 크게 발전하기 못하고 소부르죠아적 농민적 사상 근성이 지배적인 지역과 나라들에선 일정한 정도 파급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즉, 무정부주의가 일정한 몫이라도 차지하게 된 이유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극단적 민주주의가 갖는 이러한 효과도 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를 끌어들인 예도 있다는 것이다. 쏘비에트 정권이 공민전쟁 시기 우크라이나의 무정부주의 집단인 마흐노 일당과의 합작을 실현했던 것이 좋은 예이다. 이러한 예들 때문에 극단적인 군사 민주주의가 항일 유격활동 기간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어 엄청난 피해를 입혔던 것이다.

극단적인 군사 민주주의는 수정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름 밑에 무절제 무질서가 조장되어 사회적 혼란과 방종을 야기시키고 말았다. “이런 이치를 념두에 둘 때에 우리는 극단적 부루죠아 민주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이에는 사상적 공통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3-225) 김 사령은 “항일전 초시기에 극단적 군사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극복하지 못하였더라면 우리는 해방 후 그처럼 짧은 기간에 인민군대를 불패의 대오로 강화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3-228-9)라고 회고하고 있다. 선군정치의 기틀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발언이다.

그러면 지휘관과 인민대중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모든 문제를 일단 당 조직에서 토의하는 것을 절대적 원칙으로 삼고 있으나 대중의 창발적인 의견이 당 조직을 통하여 군사작전수립에 반영되는 것을 환영한다. 그러나 그런 집체성이 지휘관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는다와 같다. 항일유격대의 복무 조례는 군인 집단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한 다음 지휘관들이 먼저 그 복무조례를 자각적으로 지키도록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관병일치를 생명으로 하는 항일유격대의 복무조례이고 생각키로는 오늘 북의 위에서 말한 선군정치에도 그대로 유효한 것이라고 본다.

‘관병일치’란 군대에서 전사는 지휘관을 위해 방패가 되고 지휘관은 전사들을 위한 육탄이 되는 고결한 동지애와 사상의지 만이 만 사람이 한 목소리로 말 할 수 있고, 한 걸음으로 걸으며, 한 숨결로 호흡하는 그러한 강철같은 통일체로 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지휘관과 병사를 방패와 육탄의 관계로 비유하면서 서로 방패가 되어 육탄이 되어 하나가 여럿을 위하고 여럿이 하나를 위하는 정신, 이것이 지금 북의 헌법 63조의 정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리랑 공연을 볼 때에 남한 사람들은 집단주의의 기계화된 인간의 표현으로 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서양 사상의 고질적인 전체가 여럿 위에 군림하는 ‘one over many’가 아닌 하나와 여럿이 상호 융화된 것이 바로 북을 지탱하는 정신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상하일치, 시종일관, 군민일치,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은 핵보다도 강하고 어떤 강대국도 당해 낼 수 있는 힘이라고 북은 믿고 있는 것이다.

“수정주의가 우리 체내에 침습하는 것을 결단코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당이 극단적인 군사 민주주의로 하여 구락부화 하고 장마당화 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극단적인 군사 민주주의로 하여 강요되였던 항일전쟁 당시의 전통과 동구라파의 교훈을 그렇게 하라고 부르짖고 있다.”(3-229) 노무현 대통령이 ‘개혁 개방’을 말했을 때에 북이 발끈한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지 않은가? 회고록을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정신으로 선군 정치를 하는 북을 향해 개혁 개방을 말하는 것은 너희들이나 가서 퇴물이 된 서구식 민주주의나 제대로 하라고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는 것과 같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김일성 주석이 남긴 회고록의 말을 듣는 우리의 마음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미얀마에선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고 있고 이 글을 쓰는 오늘 홍콩에선 840명 만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을 대중의 직접투표로 돌려 달라고 시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신당의 경선도 불투명한 상태이다. 참으로 다시 돌아와 남북이 같은 고민에 빠진다. “개방을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민주주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남북이 모두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출처 : 국익수호연합
글쓴이 : 농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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