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읽고

2009. 4. 17. 16:45

해태 타이거즈, 아~그 무시무시했던 이름이여!  

해태 타이거즈와 DJ쌤.hwp

 

[화제의 책]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빙그레 팬에게 해태란

1987년. 오로지 삼성 라이온즈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기 위해 가전기기까지 모조리 삼성제품으로 도배한 집안에서 유년기를 보낸 빙그레 이글스의 어린이 회원이었다. 반 아이들이 파란색 삼성 잠바를 입고, 포항 아톰즈 마크가 새겨진 축구공을 갖고 다닐 때 홀로 검정색에 주황색 독수리 마크가 아로새겨진 빙그레 잠바를 입고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2년 후 가을, 빙그레의 어린이 회원은 "꼴찌 응원해서 좋겠다"던 반 아이들을 실컷 약 올려준 후, 웃음을 빙그레 머금은 채 검정색에 주황색 독수리 마크가 아로새겨진 잠바를 입고, 마치 신성행사라도 치르듯 '우리집 라면'을 끓여 먹은 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꽃게랑'을 손에 쥐고, 삼성전자에서 생산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정말 우승할 것'만 같았다. 마치 '진짜 타격의 신의 모습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듯 이강돈은 1회말, 다른 누구도 아닌 선동열의 공을 받아쳐 담장 한가운데를 넘겨버렸다. 그 무시무시하고 징글징글하고 너무나 너무나 짜증스러웠던 해태를, 이번에는 정말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어진 네 경기에서 빙그레는 내리 졌다. 도대체 이 놈의 해태라는 팀에는 무슨 천사라도 들러붙은 건지, 선동열을 넘어서도 문희수가 있었고, 김정수가 있었고, 김성한이 있었고, 장채근이 있었고, 한대화도 있었고, 이순철도 있었다. 팀 창단 후 92년까지 무려 네 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올랐던 빙그레는, 그때마다 번번이 해태를 만나(92년은 롯데 자이언츠) 맥없이 패했다. 이건 정말이지, 호랑이와 독수리의 싸움이라기보다는 고양이와 병아리의 먹이사슬 관계였다.

▲선동열은, 정말 차원이 다른 선수였다. ⓒ선동열 팬사이트 선동열닷컴
해태를 본격적으로 증오하게 된 계기는 91년 한국시리즈였다. '시속 145㎞ 강속구를 던지는 왼손투수(아마도 87년 빙그레 이글스 어린이 팬북에 이렇게 설명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송진우의,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첫 한국시리즈 퍼펙트 기록달성이 해태 때문에 깨졌다. 빙그레는 역시나 맥없이 패했고 당연히 한국시리즈 우승은 해태의 차지였다.

그저 신생팀이라는 이유만으로 빙그레를 응원했던 마음 여린 초등학생에게 당시 해태란 '왜 인간은 타인을 증오하게 되는가'라는 따위의 철학적 고민을 안겨줬던 선동열을 보유한 팀이었고, '어떤 거짓말을 해야 떡볶이 사먹을 돈을 받아낼까'하는 따위를 고민하던 아이에게도 '프로야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력 평준화가 필수적'이라는, 가히 하일성 뺨칠 정도의 문제의식을 안겨줬던 팀이었다(아마도 80~90년대 빙그레 이글스와 마찬가지로 해태 앞에서는 호랑이 앞의 고양이었던 삼성 라이온즈나 꼴찌를 도맡았던 인천 야구 팬들도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91년 한국시리즈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야구경기를 볼 힘을 잃어버린 초등학생은 검정색에 주황색 독수리 마크가 아로새겨진 잠바를 벗고 고향팀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스틸야드로 달려가 검정색에 붉은색 줄무늬가 수놓인 유니폼을 입고 뛰는 이기근과 나승화를 응원했다. 롯데와 OB의 한국시리즈가 열린 95년, 옛날 검정색에 주황색 독수리 마크가 아로새겨진 잠바를 입었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스틸야드에서 황선홍과 라데가 선보이는 환상적인 경기에 열광하고 있었다.

8~90년대 당시 해태란, 야구를 좋아하던 초등학생을 축구장으로 돌려보낼 정도의 위력을 가진 팀이었다. 해태와 포스트시즌에서 맞붙는 팀의 팬에게는 축제를 고통의 나날로 가득 채워준 증오의 대상이었다.

해태 타이거즈란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김은식 지음(이상미디어). ⓒ프레시안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은 아마도 해태를 마주한 빙그레 팬의 한숨 정도는 안드로메다 너머로 날려버릴 정도로 한을 쌓아왔음이 틀림없는, 삼미-청보-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인천 야구 팬이 쓴 책이다. 저자 김은식은 CBS 라디오 <파워스포츠>에서 80~90년대 한국 프로야구 스타들을 재조명한 '야구의 추억'을 방송했고, 인터넷 포털에 같은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묶어 역시 같은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

제목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언급돼 있지만 그는 군사독재에서 민주화,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대로 이어지는 20세기말 질곡의 한국사를 설명하는 하나의 코드에 불과하다. 어디까지나 책의 중심은 과거 한국프로야구 최강의 팀이었던, 보다 정확하게는 책에 나온 설명대로 '최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싸웠고 승자였지만 패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 해태 타이거즈다.

97년까지 해태의 홈 유니폼이었던 그 촌스러운 붉은색 상의-검정색 하의 콤비는 제대로 된 팀 구성원도 채우지 못하고 출범했음에도(82년 출범당시 해태 타이거즈 선수는 14명에 불과해 김성한이 선발투수로도 뛰어야 했다. 그는 프로야구 첫 시즌 10승을 거뒀다) 강자들을 차례로 거꾸러뜨린 악바리 야구의 상징이었다.

책의 설명을 빌리자면 아마도 세계 정치사를 통틀어도 그만큼 애절하고 처연한 별명이 없을 '인동초'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해태의 촌스러운 유니폼은 80~90년대 영남 정권 하에 이어진 온 국민적 '왕따'에 숨죽이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나가야만 했던 호남 사람들의 설움과 한의 상징이었다. 해태의, 정말 노골적으로 새빨갛던 상의와 칙칙한 검정색 하의로 이뤄진 유니폼은 96년 당시 정부적 차원에서 부르짖던 '선진사회'와는 담을 쌓았으나, 그러면서도 기아에 허덕이던 빈국을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린 주역이었던 가난한 노동자들이 흘린 땀의 상징이었다.

책은 이처럼 '최강이면서도 약자들의 팀이었던' 역설적 팀 해태 타이거즈를 핵심 키워드로, 또 해태와 함께 광주의 눈물을 상징하던 김대중을 부수적 키워드로 삼아 민주화와 군부독재, 경제 선진화와 외환위기라는 모순된 시공간으로 존재했던 8~90년대 한국사회를 차근차근 넘어간다. 따라서 책을 덮고 나면 자연스럽게 최강팀 해태가 승리한 날 경기장에 너무도 구슬프게 울려퍼지던 <목포의 눈물>이 해태의 응원가가 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해태는 농촌의 부모가 소 팔아 키운 돈으로 공부한 시골학생이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는 게 가능했던, '민주택시운전기사'들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초들이 민주화의 열망을 가졌고 실제 이를 이뤄낼 수 있었던 시절을 상징하는 팀이었던 셈이다. 해태는 그 모순된 시절의 시대정신이었다.

검정색에 주황색 독수리 마크가 아로새겨진 잠바를 입고 다니던 초등학생이 목놓아 응원했음에도 당시 시대정신을 품지 못한 빙그레가 해태를 넘어설 수 없었음은 따라서 당연했다. 고양이와 병아리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직접 흘린 피로 민주화를 이뤄낸 대한민국 서민과 독재정권의 싸움이랄 정도로 승부가 빤했기 때문이다. 이만수, 장효조, 김성래, 이선희 등 그 시절에도 최고 스타를 보유했던 삼성이나 '왕년에 미국을 주름잡았다던' 박철순을 거느렸던 OB, 일본야구를 평정했다던 백인천을 가졌던 MBC마저 해태를 넘어설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해태 타이거즈는 분명 한국 프로야구 최강 팀이었다. IMF 사태 이전까지. 사진은 1989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의 모습. ⓒ연합뉴스

신자유주의 오고 해태는 가고

그랬던 해태의 영광의 시절은 97년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공교롭게도 98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외환통장이 이미 바닥난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차관으로 연명하는 처지가 됐다.

서민 신화의 끝이요,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징글맞던 해태 야구가 더 이상은 먹히지 않는 시대가 열렸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공교롭게도 프로야구 8개 구단 중 가장 먼저 쓰러진 두 구단이 바로 호남을 연고지역으로 삼았던 해태 타이거즈와 쌍방울 레이더스였다.

모기업이 부도나면서 해태는 쌍방울과 마찬가지로 주축선수를 모조리 타구단에 팔아넘기는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김응용 감독의 말처럼 "동열이도 가고 종범이도 갔다". 처음부터 돈 먹는 하마로 출발했던 한국프로야구 시스템에서 열악한 재정 상태에 놓인 해태의 근성은 더 이상 발휘되지 못했다.

정말 역설적이게도 호남의 상징 김대중이 위기 극복의 기법으로 퍼뜨린 신자유주의 세례를 호남 서민들은 버텨내지 못했다. 아니, 한국의 어떤 서민도 견뎌내지 못했다. 그렇게 '악으로 깡으로' 싸우던 서민의 시대가 저물면서 해태는 사라졌고, 뒤를 이은 기아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해버렸다.

호랑이가 사라진 왕좌는 외환위기를 견뎌낸 다른 공룡들의 차지였다. 선진야구 시스템이라던 자유계약선수제도(FA)가 도입되면서 돈다발을 가진 팀이 곧 승리를 독식하는 시대가 됐다. 빙그레 못지않게 해태 앞에서는 비운의 팀이었던 삼성은 돈으로 스타들을 쓸어담으며 21세기 초 최강팀이 됐다. 역시나 역설적이게도 삼성의 전성기는 옛 해태 전성기 주축을 이뤘던 김응용, 선동열, 한대화, 조계현, 임창용 등이 열었다.

심지어 마치 고양이 앞의 병아리만 같았던 빙그레마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한화의 이름으로). 그러나 기아는 외환위기 사태 이후 단 한 차례도 우승하지 못했다. 그 새빨갛던 홈 유니폼이 원정 유니폼으로 바뀐 것만큼이나 극적이었다.

그 옛날 검정색 바탕에 주황색 독수리 마크가 아로새겨진 잠바를 입고 다니던 초등학생은 외환위기 직후 대학생이 됐다. 무시무시함의 상징이었던 그 새빨간 유니폼을 마치 한 때는 지구를 호령했으나 이제는 화석으로 변한 공룡의 뼈를 보듯 가볍게 넘길 정도로 기억이 희미해진 대학생은 성인식을 치르며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했다. 어느새 놀라우리만치 세련된 경기장, 호쾌한 플레이가 넘실대는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 메이저리그의 팬이 된 채로.

퇴근길 지하철에서 책을 다 읽은 후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켰다. 한 스포츠 케이블 방송에서 기아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가 중계됐다. 마치 텍사스 레인저스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세련된 모자를 눌러쓴 채, 새빨간 원정 유니폼을 입은 서재응이 호투했으나 결국 기아는 패했다. 끝내기 안타를 친 강민호가 클로즈업된 뒤로 덕아웃에서 고개 숙인 기아 선수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최강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가장 약한 자들의 영웅을 추억하게 된 것이. 그 무시무시했던 해태를 다시 떠올린 것이.

/이대희 기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416172506§ion=04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김은식, 이상, 2009, (090419).   

머리말 - 가장 약한 자들의 영웅을 추억하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도시는 서울이었고, 서울이며, 서울일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자원들이 섭취되고 소화되고 배설되는 곳 역시 서울이다. 그러나 1980년 5월 이후 대한민국의 심장은 광주였다. 죽음의 공포가 길게 드리운 채 몇 사람만 모여 앉아도 정보기관원의 뱀 같은 시선을 느끼며 숨죽여야 했고, 해가 뜨면 내 가족, 내 친구의 피가 얼룩진 거리 위에서 또다시 비굴하고 피곤한 삶의 좌판을 벌여야 했던 광주 시민들. 그들에게 무등 경기장은 유일하게 수천 명이 모여앉아 목어 터져라 함성을 질러볼 수 있는 곳이었고, 그들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서러운 패배와 차별의 굴레를 벗고 승리의 희열과 부러움의 눈길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이 글은 아주 특이한 경로로 특이한 팀을 응원하며 해태 타이거즈에게 특이한 적개심을 품었다가, 다시 특이한 방식으로 그리워하는 내 마음의 흔적이다. 그러나 약한 자들의 나약함을 상징했던 삼이 슈퍼스타즈와, 약한 자들의 강인함을 상징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어쩌면 한 몸의 두 성징을 잘라 나누어 가진 N극과 S극의 자석처럼, 기억 속에서 묘하게 일치되고 상반되는 이란성 쌍둥이 같은 존재가 아닌가도 싶다. 최강이었지만 가장 약한 자들의 영웅이었으며 돈 앞에 무릎 끊고 사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아련히 남아 있는 야구팀, 사라지고 없는 해태 타이거즈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1980년의 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김소위 그리고 광주에 대한 소문

:

 

역사의 현장 - 1980년 5월 광주

:

 

광주항쟁과 김대중의 내란음모

:

 

진짜 프로야구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 1970년대 내내 야구의 주도권을 가진 것은 영남권의 학교들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영남세에 맞서기 시작한 세 학교(군산상고, 광주일고, 광주상고) 출신 선수들이 1980년대 중반 이후 절대강자로 자리 잡은 해태 타이거즈 왕조시대의 주역들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프로 원년 해태 타이거즈를 홀로 머텨내야 했던 것은, 바로 '역전의 명수' 신화를 만들어냈던 군산상고의 1972년 멤버들이었다.

 

못난 정치인들의 비열한 논리

:

 

해도 해도 너무한 팀, 1982년의 해태 타이거즈

: 1982년 1월 30일 해태제과 본사에서 치러힌 창단식에 참석한 선수는 달랑 열네 명에 불과했다. 김용남, 강만식, 이상윤, 신태중, 박전섭, 김용만, 김봉연, 차영화, 김성한, 최영조, 김준환, 김우근, 김종모, 김종윤, 광주일고와 광주상고, 진흥고 같은 광주시내 고등학교들이 아직 기지개를 켜기 전이었던 70년대, 호남의 유망주들은 모두 군산상고로 모여들어 야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멤버 중 광주일고 출신 강만식, 차영화, 이상윤 그리고 광주상고(지금은 동성고) 출신의 김종모를 제외한 열 명이 모두 군산상고 동문이들이었다. 선수의 수가 적다 보니 겪게 되는 가장 큰 문제는 포지션의 중복과 공백이었다. 창단멤버 14명 중 투수는 달랑 세 명 뿐이었기에, 해태 타이거즈는 세 명의 투수들이 연중무휴 3교대로 매경기 완투하며 풀가동하는 무리를 감수한다 하더라도 혹 누구 하나 다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하는 이유로 빠진다면 당장 야수가 마운드로 올라가 공을 던져야 했다. 결국 해태 타이거즈의 해도 너무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던 한국야구위원회의 암묵적인 승인과 지원을 업고 김일권을 국가대표팀 숙소에서 탈출시키는 작전을 감행했다. 그리고 대학생 투수 방수원을 자퇴시켜 데려오고, 서울 출신의 김경훈, 마산 출신의 임정면, 대전 출신의 홍순만 등을 얻어와 시즌 중반에 투입함으로써 간신히 머릿수를 맞출 수 있었다. 김성한은 1982년 시즌 전 경기에 출전해 3할 5리의 타율과 13개의 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으며 특히 타점을 69개나 만들어내 한국 프로야구 초대 타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그 해 투수로서도 무려 26경기에 불려나가 106.1이닝을 던지며 지원활동을 했는데, 그의 성적은 세 번의 완투와 한 번의 완봉을 곁들이며 올린 10승과 1세이브 그리고 5패였으며, 평균자책점도 2.88로 준수했다.

 

인터뷰 - 1982년 홈런황 김봉연

:

 

그분께서 전력평준화를 주문하셨다

: 1982년 1월 20일, 전두환은 프로야구 창립총회를 마친 6개 구단 구단주들과 관계 장관들을 청와대로 불러 점심을 먹이며 자상하게 '지시사항'을 불러주셨는데,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전력을 평준화되도록 하여 매 경기를 관전하는 국민들을 즐겁게 해주라. 프로야구의 성공을 위해 문교, 재무, 국방, 내무, 문공부의 모든 장관은 합심해서 도와주어라. 예컨대 TV중계방송을 많이 해주고, 각 구단들이 흑자가 될 때까지 면세조치를 해주고, 선수들의 병역도 면제는 안 되더라도 방위병으로서 복무하여 경기 출장을 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며, 또 정부가 도와줄 일들이 있는지 찾아보라. 그런데 정작 한 시즌을 치르고 나서 결산을 해보니 그 제일 앞쪽에 말씀하신 '전력평준화'에 실패했다는 점이 먼저 두드러졌고, 내부자원 배분만으로 팀들 사이의 전력 차이를 줄이는 것이 어렵다면, 외부자원을 들여와 적절히 배분해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외부 자원의 수혈이 가장 시급했던 두 팀은 삼이와 해태였다. 결국 1983년 장명부와 이영구, 주동식과 김무종, 이 네 명의 재일교포 선수들이 각각 슈퍼스타즈와 타이거즈의 유니폼을 입고 한국 무대에 등장했다. 30승의 장명부와 12승의 임호균을 제외하면 5승이란도 채운 투수가 단 한 명도 없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후기리그 모든 시즌 중후반까지 선두를 달리다가도 막판이면 바닥을 드러내며 제풀에 지쳐 주저앉곤 했다. 그러나 해태 타이거즈는 타격에서 평범했던 재일교포 포수 김무종이 상대 타자 분석과 투수 리드에 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고, 정규시즌 내내 평범했던 재일교포 투수 주동식도 한국시리즈에서만 2승을 올리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한국프로야구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할 1983년의 핵심은 예상과 달리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멤버들이 아닌 재일교포들이었고, 그 해의 팀은 삼미 슈터스타즈와 해태 타이거즈였다.

 

1983년 6월의 광주대첩

; 1983년 6월 7일, 8일, 9일, 그 사흘 동안 광주 무등 경기장에서 1983년 전기리그 우승을 다투던 삼미 슈퍼스타즈와 해태 타이거즈 사이의 마지막 3연전이 열렸다. 광주의 팬들이 '광주대첩'이라고 이름 붙인 그 3연전에서 삼미는 세 경기 합해 18대 1의 대패를 당하며 2.5경기차의 선두에서 반경기차 2위로 내려앉았고, 꺾이다 못해 짓밟힌 기세는 쉽게 살아나지 못했다.

 

1983년, 해태 타이거즈의 첫 우승

: 1983년 전기리그의 주역이 재일교포 출신 선수들을 앞세운 해태 타이거즈와 삼미 슈퍼스타즈였다면, 후기리그의 주역은 MBC 청룡이었다. 코리안 시리즈 내내 석연치 않았던 청룡 쪽 분위기를 놓고 뒷말도 무성하게 흘러 나왔다. 삼 년전 숱한 죽음을 겪으며 맺힌 광주 사람들의 한을 달래기 위해 정권이 해태에게 우승을 넘겨주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좀 더 세월이 흐르면서 밝혀진 것은, 후기리그에서 우승한 선수들이 보너스 지급을 요구했지만 구단에서는 한국시리즈까지 우승한 다음에 한꺼번에 주겠다고 나오면서 진작 분위기가 꺾여 있었던 것이었다. 어쨋거나 그것이 해태 타이거즈의 첫 우승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무려 여덟 번이나 반복될 역사의 출발점이라고는, 그 때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프로야구, 이대로 좋아해도 되는 걸까

:

 

선동열의 굴욕적인 데뷔전

: 1985년, 드디어 선동열이 프로무대에 등장했다. 그러나 선동열은 데뷔전은 그가 계약금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와중에 실업팀과 양다리를 걸치며 저지른 이런저런 법적 문제 때문에 그 해 후반기에 들어서야 치러질 수 있었다. 첫 우승의 기세를 잇지 못하고 1984년에 다시 5위로 떨어진 분풀이를 위해 1985년을 벌렸던 해태 타이거즈로서는 참 아쉬운 일이었을 테고, 팬들로서도 꽤나 원망스러운 일이었다. 7월 2일 대구에서 피러진 그의 데뷔전은 당연히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에 와서 기록을 꺼내보면 그나마 선동열이 7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버틴 무난한 경기라고 해야 옳았다. 그러나 내 기억에 남은 그날의 경기는 선동열의 무참한 굴욕일 뿐이었다. 선동열은 '타격의 달인' 장효조와의 맞대결에서 안타를 맞은 데 이어 어느 고비에선가는 고의사구로 도망을 다녀야 했고, 허규옥, 이해창, 박승호, 그리고 다시 김용국과 정진호에게 줄줄이 뭇매를 맞으며 8회에만 5실점을 하고 물러난 대패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선동열의 시대는 그 이듬해부터였다. 물론 진정한 '타이거즈 왕조시대'의 개막도 그 이듬해인 1986년부터였다.

 

해태 타이거즈가 써내려간 '가을의 전설'

: 해태 타이거즈는 강팀이었다. 특히 4년 동안 연속으로 우승했던 1980년대 후반에는 정말 강한 팀이었다. 그러나 그 연속우승의 4년 사이에도 정규시즌까지 석권한 '최강의 팀'이었던 것은 1988년, 단 한번 뿐이었다. 1986년, 한국야구위원회는 시즌 운영방식을 대대적으로 뜯어 고쳐야 했다. 바로 한 해 전인 1985년, 삼성 라이온즈가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모두 선권함으로써 한국시리즈를 생략한 채 우승컵을 가져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86년부터는 전, 후기리그에서 각기 1위와 2위를 한 팀들에게 포스트시즌 티켓을 한 장 주고, 티켓 두 장을 가진 팀은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며 나머지 팀들이 플레이오프를 치러 한국시리즈행 티켓의 주인을 가리는 방식으로 변경했던 것이다. 1989년에는 다시 한번 우승팀 선정과정에 변화가 있었는데,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나누지 않고 한 해를 통합시즌으로 치르기로 한 것이었다. 해마다 전기리그 초반에 불의의 연패를 당하며 어차피 2등 안에 들 가망이 없다고 계산한 팀들이 후기리그를 준비하며 전기리그 남은 경기들을 포기하는 맥없는 풍경들은 연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마다 2인자, 혹은 3인자로 가을무대에 등장한 해태 타이거즈는 어김없이 한국시리즈를 휩쓸었다. 86년 4승 1패, 87년 4승 무패, 88년 4승 2패, 89년 4승 1패, 그 4년 동안 한국시리즈에서 삼성과 빙그레와 각각 두 번씩 대결하며 열여섯 번 이기는 동안 단 네 경기만 내준 꼴이었고, 이렇다 할 위기의 순간마저 별로 연출하지 않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역시 그렇게 '이겨야 할 때 이길 수 있는' 비법의 중심에는 선동열이 있었다.

 

1987년 6월 29일 오늘 찻값 공짜

:

 

DJ vs YS, 양김시대

:

 

그가 불펜에서 몸을 풀면 경기는 끝났다

: 선동열이 프로 데뷔 2년차인 1986년에 기록한 평균자책점이 바로 0.99였다. 그리고 87년에는 0.89까지 내려가더니 88년부터는 1.21, 1.17, 1.13, 독주에 조금 질렸는지 1991년에는 1.55를 기록한다. 그는 데뷔 이후 무려 7년간 평균자책점 부문 타이틀을 독식하는 진기록을 만들어냈고, 허리 부상으로 한 숨 쉬러갔던 92년을 지나 마무리 투수로 전업한 93년에는 0.78이라는 역사적인 신기록을 또다시 만들어내며 무려 8번째 평균자책점 부문 타이틀을 따내기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통산 피안타율은 0.169에 불과했다. 무려 '4년 연속 우승' 같은 전설은, 선동열 같은 말하자면 한국프로약구 무대에서 오로지 해태 타이거즈만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와도 같은 일종의 '비대칭전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해태 타이거즈 때문에 불행했던 팀 1

: 80~90년대를 통해 가장 불운했던 팀은 단연 삼성 라이온즈와 한화 이글스였다. 최강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전력을 가지고도 해태 타이거즈라는 거대한 장벽에 막혀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한 팀이었기 때문이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 이글스는 가히 올스타팀에 대적할 만한 라인업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공수 양면에서 단단해진 전력을 바탕으로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다섯 해 동안 빙글레 이글스는 무려 네 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 시절의 최강팀은 이글스가 아니라 바로 해태 타이거즈다. 왜냐하면 이글스가 치렀던 네 번의 한국시리즈 중 세 번(1988, 1989, 1991) 맞상대해 매번 우승컵을 가로채간 것이 바로 타이거즈였기 때문이다.

 

목포의 눈물과 날개 꺾인 자들의 희열

:

 

인터뷰 - 타이거즈 응원단장 임갑교

:

 

선동열 방어율 학점과 학사경고

:

 

지역주의와 머릿수 싸움의 비애, 1992년 대선

:

 

대학생들, 문민정부시대에 길을 잃다

:

 

해태 타이거즈 때문에 불행했던 팀 2

: 라이온즈는 언제나 강팀이었고 대개는 최강팀이었다. 무려 여덟 번이라는 최다 준우승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팀. 한국시리즈 우승컵 앞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팀. 물론 '만년 준우승 라이온즈'의 야구는 매력이 있었다. 라이온즈의 상징인 이만수와 양준혁이 보여준 모습이 그랬듯이 말이다. '최강 라이온즈를 꺾은 투혼의 드라마'가 한국 프로야구 리그를 열광시킨 에너지였다면, 마지막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최강자가 남몰래 훔쳐내는 눈물은 그 온기를 전해주는 페이소스였다. 그래서 라이온즈는 최강의 팀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팀이었다. 93년 한국시리즈는, 3차전에서 삼성 박충식(광주일고 출신의 당시 신인)이 무려 181개의 공을 던지며 불사른 투혼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라이온즈가 우승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고, 승부가 갈리는 마지막 순간에 떠올리고 힘을 낼 수 있는 하나의 역사이며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강한 전력만으로 올라설 수 없는 것이 한국시리즈 정상의 자리다. 어쩌면 2000년대 들어 삼성 라이온즈가 해태 타이거즈 출신 선수와 지도자들의 대대적인 영입을 추진했던 것 역시 그 날 박충식이 뿌려놓은 단초로부터 흘러 나간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창단 후 해체로 돌격했던 쌍방울 레이더스

:

 

제8구단을 둘러싼 음모론

: 쌍방울 레이더스의 창단은 숱한 의혹과 소문을 몰고 온 사건이었다. 바로 해태 타이거즈의 독주를 시샘하고 해태 타이거즈에세거 정서적 구심점을 찾고 뭉치는 호남 사람들을 경계한 영남 출신의 집권세력들이, 해태 타이거즈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꾸민 음모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뒤를 따져보면 음모랄 것도 없는 흐름의 한 고비에서 빚어진 일이기도 했다. 빙그레 이글스가 리그에 참가한 1986년부터 곧바로 제8구단 창단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자연스럽게 프로야구팀을 창단할 만한 연고지로 물망에 오른 것이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와 마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였다. 한일그룹이 중도에 포기를 선언하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전북 연고의 쌍방울 레이더스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4년 연속 우승이라는 해태 타이거즈의 압도적인 전력이 프로야구 전체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부잣집 해태 타이거즈의 텃밭을 조금 잘라내 전체적인 전력평준화 효과까지 노릴 수 있다는 것 또한 중요한 고려사항이었을 것이다.

 

인터뷰 - 쌍방울 레이더스 팬클럽

:

 

굿바이 김성한, 그리고 선동열

:

 

해태 타이거즈, 잔설의 마지막 불꽃

: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소설가 박민규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를 이렇게 표현했다. '칠 수 없는 공은 치지 않고, 잡을 수 없는 공은 잡지 않는, 우아한 야구.' 삼미 슈퍼스타즈는 분명 형편없는 약팀이었다. 많이 져서가 아니라 맥없이 졌기 때문이다. 질 때마다 분해서 이를 갈며 다음을 기다리기보다는, 도대체 이놈의 경기는 언제나 끝이 나나 한숨 푹푹 쉬는 표정으로 무성의하게, 정말 역겹도록 무성의하게 배트를 휘두르고 글러브질을 해댔기 때문이다. 반대로 해태 타이거즈가 강팀인 것은 단지 많이 이겨서가 아니라, 지더라도 이긴 자의 입에서 단내 섞인 한숨이 훅 나오게 만드는 빳빳함 때문이었다. 한국 프로야구사를 통째로 열어놓고 찾더라도 선동열과 김성한의 공백을 고스란히 메울 수 있는 투수와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둘이 빠진 해태 타이거즈가 또다시 우승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96년과 1997년 두 해, 해태 타이거즈는 거짓말처럼 연속우승에 성공했고, 아래위로 검은 색과 빨간 색을 맞추어 입었던 해태 타이거즈의 이른바 '검빨 유니폼'이 상대 팀 선수들에게 공포심을 각인시켜놓은 것 역시 그 무렵이었다.

 

선동열이 존경받아야 할 진짜 이유

: 선동열이라는 이름은 한국 프로야구사 속에 누구도 넘볼 수 없이 높이 솟아오른 아성이다. 그러나 '영원한 강자는 없나'는 말이 진리인 이유는 역사에 다시 없는 월등한 재능과 기량을 가잔 자라 하더라도 '자만' 그리고 그보다도 더 두려운 '무료함'마저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동열도 굳이 새로운 구질을 개발할 필요도 없었고, 또 굳이 인심 잃어가며 타자의 몸으로 공을 바짝 붙일 필요도 없었다. 승부에 영향이 없겠다 싶은 상황이면 타석에 들어선 대학 선후배들에게 밋밋한 직구를 던져 안타를 선심 썼던 것도 그 시절이었고, 경기 당일 해가 뜰 때까지 퍼마신 술이 깨기도 전 비틀거리며 마운드에 올라 완봉승을 거두며 상대 타선에 몇 갑절의 모욕감을 선사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도 그 시절이다. 그런 선동열이 1996년 남벌을 떠났던 국보급 투수 선동열이 일본열도에서 좌초한다. 1996년 일본 시즌이 끝난 뒤 선동열은 한 차례 독한 심정으로 짐을 쌌고, 다시 그보다 더 독한 마음으로 짐을 풀었다. 스프링 캠프에서는 해태 시절의 10배에 가까운 3,000개의 공을 던졌고, 휴가기간도 루키군 투수코치를 붙들고 늘어져 개인훈련으로 채웠다. 1997년 그렇게 불안하게 출발했던 선동열은 39세이브포인트와 1.28의 평균자책점, 그리고 시즌 내내 홈런을 단 한 개도 내주지 않는 '원래의 선동열'을 돌아올 수 있었다. 이듬해인 98년도 32세이브포인트와 1.48의 평균자책점, 서른일곱에 접어들었던 그의 마지막 해 99년에는 조금 주춤하면서도 29세이브포인트와 2.61의 평균자책점, 그리고 팀의 우승. 선동열은 일본이들에 의해 한국 시절 가졌던 별명 '무등산 폭격기'보다도 더 호들갑스런 '나고야의 태양'으로 추켜세워졌다.

 

1997년과 1998년 사이 흐르던 운명의 강

:

 

지역주의의 벽을 끝내 넘지 못하고

:

 

서태지의 은퇴, 김대중의 컴백

: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의 바톤 터지

: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희망이었던 김대중의 휘두른 권력에, 그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 제일 먼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의 도 다른 우상이었던 해태 타이거즈 역시,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브라보콘 팔아 연봉 주는 팀

: 해마다 그렇게 야박한 연봉계약을 맺고 나선 경기장에서 해태 타이거즈가 번번이 우승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말해주는 것은 간단치 않은 시대의 단면이다. 즉, 그들에게 우승이란 목표는 돈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고, 경기장에서 승패 또한 돈의 액수 이상의 차원에서 갈리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논리와 윤리에 충실할 때, 프로야구는 '야구'이기 이전에 '프로'였고, 승부를 결정하는 것도 사실은 야구선수 이전에 돈이라는 것이 진실이다. 97년과 98년 사이 8개 구간 중 2개 구단이 모기업의 부도사태로 직격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얄?게도 호남야구의 형뻘인 해태와 아우뻘인 쌍방울이 그 주인공이었다. 2001년 후기리그부터 프로야구판에 들어온 기아는 팀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데 이어 9회 우승의 역사까지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담아 'V10'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그 사이 일본에서 돌아온 이종범을 영입하여 타이거즈의 부활을 천명했지만, 아, 아무리 생각해도 기아는 기아고 해태는 해태였다.

 

인터뷰- <스카우트> 영화감독 김현석

:

 

쌍방울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거즈의 시대

: 해태 타이거즈와 그 밖의 팀들이 1대7의 구도를 만들어 왔던 한국 프로야구가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의 한 시절 삼성과 현대라는 두 마리 공룡의 각축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우승에 쌍방울과 해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음을 알고 있는 이들은 이런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쌍방울 유니콘스'대 '삼성 라이거즈'의 쟁패시대.

 

감격과 배신의 기억, 현대 유니콘스

: 1998년 해태 타이거즈가 무려 14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며 생소한 가을풍경을 연출한 것은 몰락의 시작에 불과했다. 양대 리그로 운영되던 1999년과 2000년, 드림리그에 속해 있던 해태 타이거즈는 두 해 모두 리그 꼴지로 내쳐졌다.

 

비즈니스로서의 프로야구

: 2007년 겨울, 드디어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바짝 다가서 있던 그 무렵, 역설적이게도 아직 강팀으로 분류되던 멀쩡한 프로야구단 하나가 새 주인을 찾지 못해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현대 유니콘스였다. 이제 사라져버린 '현대 유니콘스'라는 구단은 아마도 한국 스포츠의 역사에서 길이, 그리고 깊이 기억될 이름일 것이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 7년 사이에 네 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다는 사실 말고도 1999년 전격적인 연고지 이전 발표를 통해 야구팬들로 하여금 '구단이란, 사정이 그렇게 돌아가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팬들을 속인 채 떠나갈 수 있는 존재'라는 간단한 진실을 깨닫게 했다면, 2007년에는 해체와 소멸의 과정을 몸소 겪으며 '언제든지 프로구단이 사라지고, 줄어들 수도 있다'는 보다 묵직한 진실을 선수들, 그리고 구단들에게까지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한국 야구의 팬, 구단, 선수 모두가 통증 없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현실, 바로 그 '현실'을 비로소 '현실감' 있게 느끼게 해준 것이 바로 '현대 유니콘스 소멸 사태'였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대한민국 야구

: 2000년에는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18승을 기록했고, 대한민국의 모든 야구팬들은 박찬호 덕분에 LA다저스라는 일종의 국가대표팀 팬으로서 대동단결할 수 있었다. 이제 야구경기 보면서 피곤한 입씨름을 벌일 필요도 없었고, 장면마다 환호와 탄식을 나누며 괜히 으르렁거릴 이유도 없었다. 나의 패배와 불안을 위로하는 것은 삼미 슈퍼스트즈였으며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은, 기껏 해태 타이거즈였다. 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기억으로 못난 나 자신을 용서하며 감싸 안았고, 해태 타이거즈의 기억으로 이를 악물고 보다 높은 곳을 꿈꾸며 걸었다. 그래서 꼴지 팀 삼미의 옛 팬이 오늘 해태 타이거즈를 그리워한다. 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싸웠고 승자였지만 패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 전라도라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눌리고 밟히면서도 고개 빳빳이 쳐들고 일어섰던 해태 타이거즈의 기억을 빌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밀쳐지고 떠밀려지는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출처 :상상력이 권력을 장악한다! 원문보기 글쓴이 : 바람과 술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곡

[스위치히터, 2009/04/23 14:33, Baseball allergy]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해태 타이거즈의 어린이 회원이 되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조악한 검은색 비닐 잠바를 입고 야구장에 드나들던 시절, 어른들은 경기가 후반을 향해 치달아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면 애절한 이별 노래인 ‘목포의 눈물’을 함께 불렀다.

승리의 순간이나 패배의 순간이나 해태의 안방인 무등 경기장에는 어김없이 수천 명이 함께 목놓아 부르는 이별의 곡조가 메아리쳤다. 선동열이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프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그날에도 축하 파티 곡은 ‘목포의 눈물’이었다.

‘목포의 눈물’을 이해하게 되기까지

1983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4승째를 따낸 해태선수들이 창단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리고 있다. 사진 가운데 콧수염 휘날리며 뛰는 김봉연이 보인다.(한국야구위원회 간 <한국프로야구화보>에서)

김성한의 ‘오리궁둥이’ 타법과 선동열의 강속구를 자랑하는 최강팀 팬이라는 자부심을 만끽해야할 신나는 야구장에 도대체 왜 이 구슬픈 노래가 울려 퍼져야한단 말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통닭을 나눠주시던 후덕한 옆자리 아저씨를 따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응원곡을 따라 부르며 내 키는 조금씩 커갔다.

‘목포의 눈물’을 이해하게 된 건 코 밑이 거뭇해지고 목소리가 변해가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된 ‘518 비디오’를 통해 전두환의 신군부가 저지른 ‘80년 광주’의 잔인한 학살을 알게 됐고 정치경제적으로 철저하게 소외되고 짓밟혀온 ‘광주’의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제서야 왜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되는 9시 뉴스가 시작되자마자 우리 집의 텔레비전은 침묵을 지켜야했는지, 5월 18일에는 왜 무등 경기장에서 야구 경기가 열리지 않는 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던 퍼즐조각들은 비로서 제 자리를 찾았다. ‘광주’에게 야구는 그저 던지고 치고 달리는 스포츠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시절을 추억하는 책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에서 저자 김은식은 이렇게 썼다.

“죽음의 공포가 길게 드리운 채 몇 사람만 모여 앉아도 정보기관원의 뱀 같은 시선을 느끼며 숨죽여야 했고, 해가 뜨면 내 가족, 내 친구의 피가 얼룩진 거리 위에서 또 다시 비굴하고 피곤한 삶의 좌판을 벌여야 했던 광주 시민들. 그들에게 무등 경기장은 유일하게 수천 명이 모여앉아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러볼 수 있는 곳이었고 그들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서러운 패배와 차별의 굴레를 벗고 승리의 희열과 부러움의 눈길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가장 약한 자들의 희망이었던 해태 타이거즈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중반 프로야구판을 지배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아홉 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모두 우승했다. 해태의 사전에 준우승이라는 기록은 없다. 불과 몇백 원짜리 ‘땅콩으로 버무린 튀김과자’를 팔아 선수단의 연봉을 대고 팀의 운영비를 마련한 탓에 가장 가난한 구단 중 하나였지만 타이거즈의 야구는 ‘가장 약한 자들’의 희망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97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광주의 한’을 풀었던 김대중 후보의 당선 이후 타이거즈는 몰락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처방으로 김대중 정부가 선택한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에 따라 기업의 퇴출과 구조조정이 일상화됐고 타이거즈의 모기업이었던 해태그룹도 부도라는 직격탄을 맞았던 것이다.

팀의 주축이었던 이종범은 거액의 이적료를 마지막 선물로 남기고 일본으로 떠났고 외환위기 덕에 몸집이 더 커진 재벌 소유의 구단들은 홍현우, 조계현, 이강철 등 팀의 주축 선수들을 데려갔다.

설상가상으로 해태 타이거즈의 10번째 우승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광주일고 졸업생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은 메이저리그 구단의 품에 안겼다. 계약금만으로 수백만달러를 제시한 미국 구단들과의 스카우트 전쟁에서 해태가 승리할 가능성은 애시당초 없었다.

이 모든 게 약자에게 가장 가혹했던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때문이었지만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팬들은 차라리 타이거즈의 독주를 시기했던 이들의 기도를 들은 신의 저주 때문이라고 믿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불굴의 의지와 근성으로 열세인 객관적 조건을 극복할 수 있었던 시절이 가고 ‘돈’의 힘이 실력을 좌우하게 된 현실에 저항하고 싶었던 이들의 마지막 자기 위안이었다.

하지만 ‘개천에서 용나는’ 시절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갔음은 ‘타이거즈의 시련’이 끝나가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확인 됐다. 타이거즈의 모기업이 몇백 원짜리 맛동산이 아니라 수천만 원짜리 '봉고'를 파는 재벌이 되고나서야 이종범이 돌아오고 그동안 빼앗기기만 했던 프리에이전트(FA) 시장에서 거물 선수를 영입할 수 있었으며, 미국으로 떠났던 서재응과 최희섭도 돌아왔다.

무너지지 않을 신화에 대한 아련한 추억 한편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은 다시는 오지 않을 그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 무너지지 않을 신화를 써내려갔던 해태 타이거즈에 바치는 헌사다.

인천에 살면서 “아주 특이한 경로로 특이한 팀을 응원하며 해태 타이거즈에 특이한 적개심을 품었던” 저자는 “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싸웠고 승자였지만 패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 그래서 약자와 패자들도 얼음 계곡물에 몸 한 번 담그고 정신 바짝 차리면 강자의 발목이라도 한 번 물어뜯을 수 있다고 악을 쓰며 항변하는 듯 했던 그 몸짓들을 그리워한다”고 고백한다.

<오마이뉴스>에 ‘야구의 추억’을 연재하면서 녹색의 그라운드 안에서 울고 웃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맛깔나는 글 솜씨로 버무려 냈던 저자는 이 책에서 ‘해태 타이거즈’를 씨줄로 ‘김대중’을 날줄 삼아 야구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넘나들며 아련한 추억 한 편을 더 짜냈다.

타이거즈를 함께 그리워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굴곡이 많았던 인천의 야구팬에게 큰 빚을 진 기분이다.

 

 

- 첨부파일

해태 타이거즈와 DJ쌤.hwp  
   
이런 방가운 글이.. 해태 그립다
울 와이번은 밑바닥인데도 최강팀이 되었습니다. 슈퍼스타하나도 없이..
(유일한 스타는 감독님뿐인듯, 그러나 명예은퇴도 아니고 내쫓았으니..)
홍콩직수입명품 취급하는곳인데
커스텀급 퀄리티보고 믿고 구매! ! !
사람들이 다들 예쁘다 칭찬해서 기분이 너무좋아요ㅎ
5년넘게 운영되는곳이라 믿고 살수있었던거 같아요ㅎㅎ
ㅎ제 이름 클릭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