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내 사람아

2012. 7. 2. 08:35
없음

 


"농민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수천년 동안 농경민족으로 살아왔던 우리 민족에게 이 말은 민주화된 대한민국 땅에서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탈농촌화로 인해 농민의 비율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이 말은 현실 속에서 약발 없는 구호가 됐다.

현실에서 이처럼 '농민의 정치 세력화'는 이상적 구호로 인식되는 경향이 크지만, 강병기(52) 경상남도 정무부지사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여전히 "농촌 지역이 진보진영의 승부처"라는 생각으로 "농민의 정치 세력화"를 위해 달리고 있다.

그가 말하는 '농민의 정치'란 "농민의 이익을 위해 농민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대표를 공직자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강병기 경상남도 정무부지사.

강병기 경상남도 정무부지사.

 

"한 개인이 개별적으로 정치를 하겠다고 선거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진보진영 차원에서 원칙과 소신을 가진 농민후보를 선거에 내보내 조직적으로 정치에 참여시킨다는 건 기존의 낡은 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질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농민의 정치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확고한 신념을 앞세워 강 부지사는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정치위원장으로 있던 2003년 대중 투쟁과 선거 투쟁을 결합해 나가겠다는 정치 선언을 만들어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동안 지역 농민회 별로 개별적인 정치 참여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정당과 결부되지 않은 개별적 움직임에 불과했었다.

2003년 전농의 정치 선언은 2004년 총선 당시 경남 사천에서 전농 부의장을 지냈던 강기갑 의원의 당선과 2006년 지방선거에 100여명의 농민 후보들이 민주노동당 이름을 걸고 출마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끌어냈다.

"앞으로 과연 얼마나 많은 선거가 놓여 있을 지, 또 얼마나 많은 전사들이 당선돼 농업회생의 기수로 설 수 있을 지 아직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농업위기 앞에서 우리 농민운동 진영의 또다른 도전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냉소와 혐오, 절망으로 신음하는 농촌 지역에서 우리는 분명 농민들의 희망이 되어야 해요."

아내 때리는 선생님을 온화하게 바꾼 용기

그의 어린시절은 아이러니하게도 16년이 넘는 세월 동안 농민운동에 몸 바친 주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동자의 아들이었고, 공부도 곧잘 하는 모범생이었다. 아버지는 원래 농부였는데, 이촌향도 바람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이사를 가 도시 노동자가 됐다.

그가 지금 철저한 계급 의식을 갖고 있는 건 유년시절 받았던 상처들 때문일 수도 있다. 부산이라는 큰 도시에서 자리 잡는 것조차 벅찼기에, 그는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가정환경 때문에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던 그는 초등학교에서 유치원을 다녔던 학생들에 비해 성적이 좋지 않았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강병기는 공부도 못하고 꼬질꼬질한 볼품 없는 아이였다.

"유치원을 다녔던 부잣집 아이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 친구 집에 자주 놀러다녔어요. 그런데 어느날 그집 어머니가 내가 듣는 앞에서 자기 아들을 세워놓고 화를 내더라고요. 자기 아들보다는 나한테 하는 얘기 같았어요."

그 부잣집 친구 어머니가 큰 소리로 했던 말은 "너, 왜 저런 지저분한 애랑 같이 노는 거니? 저런 애랑 놀지 마!"였다. 그때 '부자들은 우리랑 같이 놀 수 없는 존재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고작 여덟살 밖에 되지 않았던 어린 아이가 말이다.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는 거기서 그친 게 아니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집 아이가 공부까지 못해야 하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로 독하게 마음 먹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지요."

어린 강병기의 '독기'는 무시무시했다.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때 50점짜리 아이였던 그는 한학기 만에 전교 1등을 독차지하는 똑똑한 아이가 됐다.

어린시절 그에겐 '독기' 말고도 무시무시한 무기가 또 있었다. 바로 '용기'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술 먹고 아내를 때리는 게 하루 일과 중 하나였던 선생님을 온화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강병기의 '용기'에 박수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재미있는 일화다.

"한번은 어느 가을이었는데, 그날도 조회에 안 나온 선생님을 찾으러 사택에 갔더니 사모님이 퉁퉁 부은 눈으로 나오더라고요. 어린 나이지만 화가 났어요.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뭔가 행동을 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어 반 아이들을 모아놓고 선생님이 정신을 차리게 하자는 생각에 작전을 세웠어요."

그의 용기 있는 선택은 공중보건체조 집단 거부였다. 군사정권시절이던 당시엔 점심시간이 끝나면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에서 집단 체조를 했었다. 그 체조를 공개적으로 빼먹고 집에 가버리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이다. 물론 처벌도 각오했다.

어찌 된 일인지 공중보건체조 집단 거부 사태 이후 선생님은 전혀 딴 사람이 됐다.

"나만 빼고 뒷산으로 도망간 애들이 전부 잡혀서 벌을 받았는데, 사태가 벌어진 사정이 선생님들한테 전해졌고, 담임 선생님 귀에도 들어갔어요. 선생님이 그 후로 마음을 잡고 저한테 잘 해 주시려고 무척 애를 썼고, 사모님도 나를 예뻐해주셨지요."

육군장교를 꿈꾸던 청년, 부마항쟁에 분노하다

고등학생 강병기는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어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육사는 모든 입학생에게 장학금을 줬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단 한번도 넉넉하게 지내 본 적이 없던 그에게 육사는 매력적인 학교였다.

하지만 '신체검사'라는 관문에서 그는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성적 만으로 되지 않는 게 있었던 것이다.

육사에 낙방한 그는 기자가 되고 싶다며 '정치학과' 진학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보장된 길이 아니'라는 6촌 누나의 만류와 '졸업 후 현대자동차 자동 입사'라는 메리트에 눈이 멀어 부산대 공대에 진학했다. '눈이 멀어'라는 표현은 어찌 보면 지나칠 수도 있겠다. '취직해서 어머니께 효도를 해야겠다'는 순수한 의도였으니 말이다.

적성과 상관없이 대학에 진학했으니 학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갑자기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해지면서 밀려오게 된 혼란이라고 할까요? 대학은 시골 출신인 내게 큰 문화적 충격이었어요. 적성도 문제였죠. 아무래도 공대는 영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슴 속에서부터 뭔가 모를 갈등이 서서히 싹터 오르는 게 느껴졌죠."

그가 느꼈던 이러한 갈등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던 것일까? 이제 막 20살 새내기였던 그는 전두환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어깨를 걸고 걸어가던 선배.동기들의 대열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나도 모르게 그 대열에 끼어들었어요. 그렇게 대열을 지어 운동장을 한바퀴 도는데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그땐 나조차도 왜 눈물이 흐르는 지 모를 일이었어요."

스무살 강병기가 처음 세상 다운 세상에 몸을 내던진 그날의 데모는 역사적인 '부마항쟁'의 첫 출발점이었다. 그의 운동 인생은 부마항쟁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농민운동을 하겠다."

피끓는 대학시절을 보낸 그는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를 맞았다. 그가 선택한 길은 '농민운동'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운동권 학생들은 졸업 후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는 달랐다.

"농촌 출신이라 그런지 정서적으로 농민운동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무리 이론적으로 우리 사회 변혁의 주체는 노동자이고, 농민의 숫자는 얼마 안 된다고 하더라도 과연 농민 없이 변혁이 되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거든요."

그는 그런 판단을 내린 배경으로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의식이 강하게 작용했다"고도 했다.

'내 어머니 같은 사람이 웃지 못하는 사회변혁은 변혁이 아니다. 어머니 같은 사람들, 착하고 힘들게 사는 그 민중들 속에서 사업을 해야 한다.'

마음 속으로 몇번이나 이 말을 되뇌이며 그는 진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곧장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농사에 농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도 혈혈단신으로 시골로 왔으니, 시작이 막막할 수밖에. 그는 돌파구를 찾아보기로 했다.

"진주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하려면 일단 경상대 학생들이랑 관계를 맺고, 경상대 학생운동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줘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고민한 결과 해답은 사회과학 서점을 차리는 것이었지요."

서점을 운영하며 학생들과 어울리던 그는 '가톨릭농민회'를 알게 됐고, 어떻게든 그곳에 발을 딛을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인 결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됐다.

"서점은 뒷전이었어요. 늘 가톨릭농민회 행사가 있으면 만사를 제쳐 두고 열심히 따라다녔지요. 어찌나 대책 없이 쫓아다녔던지 처음엔 프락치로 오인을 받았을 정도니깐요."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니 조직에서도 빠른 시간에 그를 인정했다. 경남 가톨릭농민회 총무 자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온 것. 그렇게 그는 가톨릭농민회 총무로 농민운동의 첫걸음을 뗐다. 그때가 6월항쟁이 있었던 1987년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운동인생의 전환점을 역사적인 민중운동의 시기에 맞았다. 학생운동은 부마항쟁, 농민운동은 6월항쟁과 함께 시작한 것이 아닌가.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농민대회를 내 손으로

경남 가톨릭농민회에서 입지를 굳게 다져가던 그는 1999년 아내의 권유로 전농 사무총장 직무대행을 맡아 서울 땅을 밟았다. 2년의 직무대행을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마친 그는 정식 사무총장으로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다짐한 게 하나 있다. 2001년 남북농민통일대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통일 노동자대회에 자극받은 그는 남북농민통일대회를 기필코 자기 손으로 개최해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남북농민통일대회의 당위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쌀 시장은 점점 개방되고 쌀 문제는 더 심각해지면서 농민들은 더 어려워 질 것이다. 이럴 때일 수록 통일 농업을 화두로 삼아 남에서 생산되는 쌀을 북으로 보내고 북의 광물을 남쪽의 공업지대로 유입하는 남북 상생의 경제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다."

분단 이후 단 한번도 없었던 남북농민대회를 추진하는 일은 어찌 보면 '맨 땅에 헤딩'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울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추진 과정에서 남모를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골치아픈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어요. 한가지 일을 하면 다른 한가지가 펑크나는 식이었어요. 겨우 한 가지 일을 진척시켜놓으면 통일부가 비틀고, 통일부를 해결하면 국방부가 비트는 식으로, 쉽게 진행되는 일이 무엇 하나 없었죠. 예산도 한두푼 들어가는 게 아니었어요. 이 과정에서 빚어진 혼란은 상상을 초월했어요."

그가 느꼈던 스트레스는 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측의 농민들을 만나는 남측 농민들은 기대감을 조금씩 키워가고 있었고, 그 기대를 져 버려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은 내게 더 큰 스트레스로 돌아왔어요.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했을 때 노래방을 찾아 실컷 노래를 부르고 나서 가슴을 진정시키고 일에 복귀했죠."

그렇게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7번이나 남과 북을 오가는 분주함 속에 금강산에서 남북농민통일대회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의 농민단체들이 처음 모이는 그야말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행사였다. 남측 농민 680여 명과 북측 농민 600여 명 등 모두 1천 300여 명에 이르는 인원이 참가했다. 단일 교류행사로는 역대 최대 규모였다.

이 행사로 인해 그는 '추진력'을 인정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전농 정책위원장이 된 2년 후 그는 농민운동 역사상 최대의 집회인 13만 농민대회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농민의 정치세력화, 결코 꿈이 아니다"

2010년 6월 지방선거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후보단일화의 힘을 얻은 무소속 김두관 후보가 당선됐고, 김 후보로 힘을 실어주기 위해 후보직에서 사퇴한 강병기는 김두관의 '러브콜'로 정무부지사가 됐다. 부지사가 임명직 공무원이긴 하나, 지난 지방선거의 주요 과제였던 야권단일화의 흐름 속에서 그의 후보직 사퇴와 부지사 임명은 그의 완벽한 정치적 성과다.

그는 2003년 전농의 정치선언 이후 끊임없이 민주노동당을 기반으로 한 '농민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왔다. 2004년 총선에 도전하려 했고,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08년엔 총선에 도전해 '농민의 정치세력화'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경험을 했다. '현실 정치'의 벽에 부딪히면서 '현실 정치'판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습득해왔다. 여기서 '현실 정치'란 거대한 자본이 오가는 비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닌, 그 판을 뒤흔들 수 있는 계급의 조직화가 기반이 된 정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에게 선거는 농민운동의 또다른 도전이었다. 농민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돌파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선거였기 때문이다.

"더이상 농민들이 정치의 방관자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어요.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하죠. 선거에서 후보를 낸 지역이든 그렇지 못한 지역이든 쌀 수입 반대 투쟁과 한-미FTA 반대 선전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해요. 선거를 통해 열리게 된 정치의 장을 십분 활용해 농업의 절대적 위기를 알려내고 주범들을 정치적으로 심판하는 공간을 창조해 나아가야 합니다."

지난 지방선거를 통해 농민의 정치세력화라는 그의 목표는 광역자치단체의 부지사를 맡게 되면서 절반 이상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제 그는 '농민 대표'다운 부지사 임무를 수행해야 할 때가 왔다. 부지사직에 내정되고 난 뒤 필자와 만나 그가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사람들이 저더러 빨갱이 부지사라고 하지만, 노동자와 농민을 대변하는 게 저의 임무가 아니겠습니까?"

<강경훈 기자 qwereer@vop.co.kr>
저작권자© 한국의 대표 진보언론 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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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기 경남도 정무부지사"농민의 정치세력화, 꿈이 아닙니다" http://t.co/0YSAOQB

 

 


 

 

출생 1960년 9월 15일(1960-09-15) (51세)
경상남도 진주시
거주지 경상남도 진주시
학력 부산대학교
직업 농민운동가, 정치인
소속 경상남도 정무부지사
웹사이트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강병기

(姜炳基, 1960년 9월 15일 ~ ) 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민선 5기 제7대 경상남도 정무부지사를 역임한 경상남도의 대표적 진보정치가이다. 대한민국 제 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예정하고 있었으나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치위원장 시절 2002년 30만 농민대항쟁을 주도했다는 명목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있는 상태로 사면복권되지 못해 출마가 좌절된 바 있다. 이후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 19.98%의 지지율을 얻었다. 이후 민선5기를 선출하는 6.2 지방선거경상남도도지사선거에 출마했다. 현 경상남도 도지사인 김두관지사와 야권통합을 통해 경남의 야권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민선 5기의 출범 이후 경상남도 정무부지사직을 맡아 지방공동정부의 수반역할을 했다.

[학력]

[정치]

  • 2001년 전국농민회 총연맹 사무총장
  • 2002년 전국농민회 총연맹 정책위원장
  • 2003년 전국농민회 총연맹 정치위원장
    진주시 학교급식조례제정 주민발의위원장
    달팽이 어린이도서관 건립추진위원장
  • 2006년~2007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진주을 출마
  • 2009년~2010년 6월 민주노동당 진주시위원회 위원장
  • 2009년 민주노동당 경남도당 농민위원장
  • 2009년 시외버스 부당요금 징수문제 해결을 위한 경남대책위 상임대표
  • 2009년 쌀값 지원 조례 제정 청구인 대표
  • 2009년 민주노동당 경남도당 더큰경남발전위원회 위원장
  • 2009년 민주노동당 경남도당 도지사 예비후보
  • 2010년~ 경상남도 정무부지사

[주석] 바깥 고리

 

 


 

 

당대표 출마 강병기 "이석기·김재연 제명 옳지 않아"
"자진사퇴가 가장 바람직"... 신 당권파, 후보 마련에 고심  
 12.06.15 11:08 ㅣ최종 업데이트 12.06.15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44385

 

 

강병기 선거결과 어떻든 강기갑 위원장과 함께 갈 것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46736&PAGE_CD=S0200

 


서두원의 시사초점 | 6월 21일 <강기갑 vs 강병기> 통합진보당 당 대표 경선 후보
http://wizard2.sbs.co.kr/w3/template/tpl_iframetype.jsp?vVodId=V0000349385&vProgId=1000697&vMenuId=1014429&no=370

 

 

 

 

 

 

 

 

 

 

벼랑끝에선 통합진보당을 구할 혁신의 기수는 누구인가?
<장창준> 강병기 후보가 당대표로서 ‘더’ 적임자인 이유
2012년 06월 25일 (월) 11:49:18 장창준 tongil@tongilnews.com

장창준 (전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정책연구원)


통합진보당의 심각한 내분 속에 25~30일 당직선거가 실시된다. 특히 당대표 후보로 강기갑 혁신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과 강병기 전 경상남도 부지사가  나서 이른바 '강 대 강' 대결이 벌어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통일뉴스>는 강기갑 후보와 강병기 후보를 지지하는 기고문을 각각 의뢰해 싣는다. 기고문의 모든 내용은 전적으로 기고자의 의견이며, 표기는 '후보'로 통일한다. 강병기 후보를 지지하는 장창준 전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정책연구원의 기고문이 도착해 먼저 게재한다. /편집자 주  


<통일뉴스> 기자로부터 합리적인 양측 지지자들의 글을 받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내가 합리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놈’인 것은 분명하다. 당 사태에 대한 그동안의 내 입장과는 ‘다른’ 후보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상한 놈인가, 당이 이상한 것인가, 세상이 하수상할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사람이 비정상으로 몰린다는 것. 스스로 그렇게 위안해본다.

‘反동부’ 장창준이 ‘親동부’ 강병기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

나는 경기동부(의 중앙당 파견자)의 파행적 당운영에 커다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5년의 당직자 생활 속에서 나에게 비친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그 중 일부 사람들은 이해 정도를 넘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의정지원을 책임지는 사람이 의원단총회를 몰래 녹음을 한다거나, 중앙당의 사무총국의 실무를 총괄하는 사람이 수시로 당원을 당기위에 제소하겠다는 협박을 하거나 실제로 당기위에 제소한다거나.

그렇게 나는 반동부가 되어갔고, 반동부 정체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 내가 ‘친동부’로 낙인이 찍혀있는 강병기 후보를 지지하고 강병기 선본에 부분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반동부인 내가 ‘친동부’ 강병기를 지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니.

우선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강병기 후보를 ‘경기동부 당권파와 야합한 후보’라느니, 강기갑 비상대책위원회를 ‘제명 비대위’니 하는 표현들은 대결의 산물이다. 선거가 이런 감정적인 비방과 비난으로 전개될 경우 통합진보당은 혁신도 화합도 거듭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양 선본 모두 감정적인 비난전, 낙인찍기를 자제해야 한다.

경기동부 혹은 당권파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강병기 후보가 ‘친동부’라고 규정할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현 상황에서 ‘경기동부와 야합할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강병기 후보를 ‘친동부’라고 규정하는 데는 ‘이석기, 김재연을 감싸도는 모습’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강병기 후보가 이석기, 김재연의 사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자진 사퇴가 옳다. 그러나 자진 사퇴를 거부하는 후보를 곧바로 제명 절차에 착수하는 것은 당을 더욱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2차 진상조사를 엄격하게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엄중하게 처리하자”는 문제의식이다.

이 문제의식에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동의되지 않는 주장을 한다고 해서 특정정파의 ‘꼭두각시’는 아닌 것이다. 대결이 격화되면서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현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

강기갑 혁신비대위를 ‘제명비대위’라고 부르는 것 또한 대결의 산물이며 대결을 격화시킨다. 혁신비대위는 중앙위원회로부터 ‘비례후보를 사퇴시키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사퇴를 권고했지만 사퇴하지 않네요!”라고 중앙위에 보고하라는 것인가. 그건 코미디이다.

이번 대표선거는 당 혁신의 적임자, 당을 정상화시키고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이다. 대결을 지양하고 양 후보가 내세우는 혁신의 과제를 당원들이 평가하고 그 과정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거듭나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당원들은 지혜롭게 누가 더 혁신의 적임자인가를 선택하게 될 것이고, 그 선택에 승복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기갑 비대위원장의 출마는 적절치 않았다. 강기갑 후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강기갑 후보는 ‘손에 피를 묻힌 사람’이 되었다. 그에 대해 한쪽에서는 강력히 반발하고, 한쪽에서는 강력히 지지하는 국면이 만들어졌다. 이는 강기갑 후보의 잘못이 아니다.

강기갑 후보가 대표로 출마한다면 강력히 반발하는 쪽에서의 반대 목소리가 올라갈 것이고, 강기갑 후보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그 반대 목소리에 반대하는 목청을 높일 것이다.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강기갑 후보의 출마는 대결전선을 강화하고, 혁신의 적임자를 뽑는 선거는 사라지고 대결전선이 강화되는 선거가 될 것이었다.

왜 혁신해야 하는가?

혁신은 통합진보당의 사활적 과제이다. 제대로 혁신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통합진보당의 국민들 속에서 거듭나지 못한다면 통합진보당이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며, 정권교체 역시 물거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은 왜 혁신해야 하는가이다. 왜 국민들은 이토록 통합진보당의 혁신을 강력하게 주문하고 있는가.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통합진보당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하였다. 통합진보당은 명실상부한 제3당이 되었다. 과거의 군소정당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은 통합진보당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으며, 과거엔 냉소하고 넘어갔을 문제까지도 이제는 관심을 갖고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제3당이 되면서 국민의 감시를 받는 정당이 된 것이다.

둘째, 이같은 국민의 요구에 화답하기에 통합진보당은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3주체가 물리적으로 결합하다보니 원활한 당운영이 불가능하였다. 비례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3주체는 극한 경쟁을 하게 되었고, 크고 작은 부정과 부실 선거가 진행되었다. 민주노동당 내에 존재했던 비민주적, 패권적 당운영이 잔존한 채 통합진보당을 출범시킨 것은 불을 지핀 격이었다.

문제가 발생하자 능동적으로, 혁신적으로 문제를 풀 동력은 사라지고, 당권파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용납될 수 없는 행위’를 일삼았다. 국민들은 실망하여 분노하였고, 당원들은 상처받고 분열되었다.

혁신은 바로 이 두 가지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국민의 요구에 화답해야 한다. 제3정당으로서 책임있는 정치를 해야 하며, 제3정당의 지위에 맞는 국가비전, 정책노선, 당운영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당원의 상처를 치유하고, 단결시켜 당을 정상화하고 국민들의 분노의 감정을 지지와 애정의 감정으로 바꾸어야 한다.

따라서 혁신은 통합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다. 일부 세력들이 그리고 언론들이 ‘혁신이 우선이냐 통합이 우선이냐’를 물어온다. 누가는 혁신이 우선이고, 누구는 통합이 우선이라도 대답한다. 잘못된 질문이고, 바보같은 답변이다. 혁신이 곧 통합이고 통합이 곧 혁신이다.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 “국민의 눈높이, 진보적으로 맞춰야”

혁신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혁신의 진정성과 혁신의 성공을 위한 출발점이다. ‘국민의 눈높이’가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당원의 눈높이’가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강기갑은 전자를 강조했고, 강병기는 후자를 강조했다.

강기갑은 새로나기 특위 보고서에서 제시한 혁신안을 받아들이는 모양새였고, 강병기는 새로나기 특위 보고서의 혁신안을 비판하는 모양새이다. 두 후보 모두 잘못된 출발을 했다. 특위 보고서는 통합진보당에 관심과 애정이 있는 외부인사가 참여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경청해야 할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

그렇다고 하여 특위 보고서의 혁신안이 혁신의 모든 것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진성당원제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진성당원제는 폐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보완해야 할 대상이다. 패권적 당운영과 잘못된 조직문화, 정파문화로 인해 진성당원제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패권적 당운영과 잘못된 조직문화를 혁파하여 진성당원제가 제대로 발휘될 수 있는 구조와 문화를 만드는 것이 혁신이다.

특위 보고서가 이같은 완결성까지 갖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차기 당대표가 특위 보고서를 참고하고, 당원들과 함께 특위보고서를 보완함으로써 진보정당다운 혁신안을 만들고,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

국민의 눈높이와 당원의 눈높이는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적 입장에서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수구정당은 국민의 눈높이를 수구적으로 맞추려 하며, 보수정당은 보수적으로 맞추려 한다. 진보정당은 국민의 눈높이를 진보적으로 맞추어 가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강병기 선본은 현재 혁신 중에 있다. 당원의 눈높이를 강조하는 초기 대응에서 벗어나 균형적 시각에 맞춰 혁신안을 새롭게 모색하고 있다. 자랑 같지만, 강병기 선본에는 필자를 포함해 젊은 세대가 상당히 결합하였고, 이들의 역할로 인해 선거 대응 방식과 정책이 변화하고 있다. 아래 글은 젊은 세대가 결합하여 만든 첫 번째 결과물이다.

   
▲ [사진제공 - 장창준]

강병기 선본은 지금 “혁신 중”

그러나 젊은 세대들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다 체계적인 혁신안을 만들어야 했고, 선본 관계자들과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혁신대표를 뽑는 혁신선거가 되기 위해 그래서 대표 선거 이후 당을 실질적으로 혁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가야 할 관문이었다.

“당원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것이 혁신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통합진보당은 정파에게 권력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입을 닫고 귀를 여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진보정당은 진보적 가치를 설파하기 위해 많은 주장을 했지만 국민과 당원의 목소리에 귀를 여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당원발의 총투표, 당원발의 공직자 소환제는 “당원에게 권력을” 주기 위한 혁신안이다. 당원대장정, 정치콘서트, 진보진영 정책포럼은 “입를 닫고 귀를 열겠다”는 취지에서 마련되었다. 물론 이런 혁신안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세부적으로 다듬어야 하고, 현실화하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요구되는 또 하나의 혁신과제는 “세력교체, 세대교체”였다. 세력교체만으로는 안 된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야 당 혁신을 힘있게 밀고 나갈 수 있다. 새시대 젊은 리더를 발굴,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되어야 하고, 통합적인 탕평인사, 당운영의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했다. 그래야 패기 있고, 정파로부터 자유로운 젊은 세대들이 당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문제의식은 아래와 같이 반영되었다.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서 더 많이 다듬고 보완해야 하겠지만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 있겠다. 강병기 선본은 지금 혁신중이다. 당을 혁신하기에 앞서 선본이 먼저 혁신하는 것. 젊은 세대들의 적극적인 목소리를 반영하여 선본이 변화하고 있다.

선거과정에서부터 혁신하고 있는 강병기 후보, 혁신대표로서의 자격이 있지 않은가?

힐링 선거 위해 양 선본 모두 끝까지 노력해야

당원들의 상처를 덧내는 대결적 선거는 절대로 지양해야 한다. 성남에서의 ‘유령당원 소동’,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대결 선거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대결의 한 전선에 서 있지 않은 당원들은 너무 아프다. 너무 아파서 외면하려해도 외면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당원들은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선거가 아무리 중요하고 자기를 지지하는 후보를 당선시키는 것이 선거의 기본 목적이라고 해도, 진보정당은 진보정당다운 선거를 해야 한다.

이번 선거는 당원의 아픔을 달래고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 선거’여야 한다. 강병기 후보가 당원연설회에서 강조했던 말이기도 하다. 200% 공감한다. 당원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혁신도, 통합도, 야권연대도, 정권교체도 불가능하다. 양 선본 모두 ‘힐링 선거’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다시 한번 당부드린다.
   
▲ [사진제공 - 장창준]
통합진보당은 지금 벼랑 끝에 서있다. 조그만 바람에도 무게중심을 잃어 낭떠러지에 떨어질 위기이다. 유권자들인 당원에게도 바란다. 대결적 시각으로 후보들을 판단하지 말자. 강기갑 비대위가 ‘제명비대위’도 아니고, 강병기 후보가 ‘당권파와 야합’한 것도 아니다. 비난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슬기와 지혜가 우리 당원에게는 있다고 믿는다. 강병기, 강기갑 모두 훌륭하신 분들이다. 대결적 상황이 이분들에게 오명을 씌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누가 대표가 되어야 하고, 누가 대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통합진보당에 요구되는 혁신을 누가 ‘더’ 잘 이끌 적임자인가 하는 것이 후보 선택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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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신이 없이는 진정한 단합도 야권연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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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병기님을 격하게?! 지지하는 것은 단 하나!!

통합과 혁신의 주체와 대상이 일방이 아닌 우리들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나 아니면 안된다며...", "너가 되면 다 죽는다면서"
"혁신의 대상과 주체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는분"들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이것만은 제가 2주간의 지역위원장 선거운동 기간!!
당원들과 직접 소통하고 만나고 통화하면서 나름 얻은 결론입니다...

함께 마주이야기 나누고, 다시 살부대끼면서 화해하고,
진보당을 믿고있는 일하는사람들, 깨어있는시민들 삶속으로
제발 들어가라는 그 명령을 온전히 실행할 우리를 위해,
저는 단결과 혁신의 최강 병기님을 지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