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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1. 1. 24. 11:11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自閉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주었다.”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작가로서의 나의 새로운 다짐이 있다면 남의 책에 밑줄을 절대로 안 치는 버릇부터 고쳐볼 생각이다. 내 정신상태 내지는 지적 수준을 남이 넘겨짚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일종의 잘난 척, 치사한 허영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폐증이라고 생각되자, 그런 내가 정떨어진다. 자신이 싫어하는 나를 누가 좋아해주겠는가. 나를 스쳐 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그나저나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지. 고통의 기억뿐 아니라 기쁨의 기억까지 신속하게 지우면서. 나 좀 살려줘,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리고 싶게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내 생애의 밑줄> 중에서

시를 읽는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 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을 때> 중에서

그 많은 사건과 인생들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면서 비천한 것들이 존엄해지기도 하고 잘난 것들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비천해지고 하는 게, 마치 지류의 맑고 탁함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큰 강이 도도히 흐르면서 그 안에 온갖 생명들을 생육하는 것과 같은 장관입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그런 큰 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문학이니까 가능한 축복이요 기적입니다.

 

                                                                                                                                                          -<신원의 문학>에서

 

 

 

 

박완서 신작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이 산문집은 세상으로부터 작가의 몫으로 떠넘겨받게 된 시대에 대한 소슬한 관조와 사사롭게 만나는 자연과 생물, 그리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사유의 결정(結晶)이라 할 수 있다. 4년 동안 쓰여진 글을 모은 이 산문집은 세대를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를 파노라마 같은 온갖 색조로, 그윽하게 뿌리내린 사유의 세계는 그의 작품의 원형이 된 자신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솔직 담대한 사실주의 그림과 같은 리얼리티를 담고 있어 더더욱 울림이 크다. 이번 산문집이 노작가만의 연륜과 성찰이 돋보이는 것도 바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이 진솔함 때문일 것이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는 사람과 자연을 한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새삼 발견하게 된 기쁨과 경탄, 그로 인한 감사와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 소유가 아니어도 욕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음과 “살아 있는 것들만이 낼 수 있는 기척”을 감지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대목은 작가의 자연에 대한 사랑을 강한 메시지로 전달한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의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작가에겐 못 가본 곳, 곧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의 충일함이 가득하다. 그곳에는 아직도 만나야 할, 다 하지 못한 새롭고 경이로운 시간이 작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산문집에서 작가는 꿈틀대는 생명력의 경이로움을 담아 “내 몸이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라며 죽음과 가까워진 생에 대한 담백한 성찰 또한 거침없이 고백하고 있다. 죽음을 초월한 초월자의 숨결이 느껴지는 이 말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잃은 상실감을 체험한 후 고통에의 의지로 죽음을 인정하게 된 후에야 비로소 ‘생명’이란 존재에 이르는 삶을 체험하게 된 고백이다. 아울러 “나를 스쳐 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보듬고 다독여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한다.


작가는 자신에게 자상하고 따뜻한 품이 되어준 김수환 추기경, 작가가 자신 안에 칩거해 세상을 등지고 있을 때 세상 속으로 이끌어준 박경리 선생, 더는 전락할 수 없을 만큼 전락해버린 불행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그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준 박수근 화백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에 보석처럼 빛나는 이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다 주고 가지 못한 사랑을 애달파 한다.

한편 이 책을 통해 작가는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아끼지 않는다. “경제제일주의가 만들어낸 황폐한 인간성”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무너져 내린 남대문, 천안함 침몰 사건 앞에서 오히려 작가 자신의 “뻔뻔스러운 정의감”과 “비겁한 평화주의”에 대한 반성은, 단순한 한 개인을 넘어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견뎌온 역사의 증인으로서 작가만의 상처를 되새겨본 반성이자 말할 수 없는 연민과 회한을 담고 있다.


또한, ‘친절한 책읽기’라는 제목으로 2008년 한 해 동안 신문에 연재했던 ‘책 너머 본 세상’ 이야기인 서평을 함께 실었다. 자신은 이 글을 “쉬엄쉬엄 쉬어갈 수 있는 책을 골라 읽다가 오솔길로 새어버린 이야기”들이라고 했지만, 책 한 권 한 권마다 삶의 제각기 자국들을 새겨놓은 글이어서 ‘박완서가 책과 소통하는 세계’의 색다른 재미와 깊이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글들이다.
‘영원한 현역’이라는 별명을 가진 작가답게, “기력이 있을 때까지는 계속 글을 쓸 것”이라는 박완서는 여전히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처럼 빨리 쓰지는 않지만 좋은 문장을 남기고 싶어서 더 공들여 쓴다.” 지금도 머릿속으로 작품 생각을 하면 뿌듯하고 기쁘다”는 그의 의지는 대지와 같은 생명력이 담뿍 담겨져 있다.


작가는 등단 40주년이라는 것에 어떤 큰 구속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존재의 영속성에 대한 끝없는 탐구로, 작가가 아직 가지 못한 길, 어딘가에 있을 더 아름다운 길을 찾아 나설 자유를 향한 의지와 내적인 충동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산문집이 작가의 현재를 읽는 즐거움은 물론 미래를 읽는 설렘까지 가져다주는 이유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울러 살아 있는 거목이라는 진부한 찬사를 동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6?25가 날 소설가 만들었어"

OSEN | 2010-08-11 17:30:31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268쪽|현대문학
 
"또 책을 낼 수 있어 기쁘다. 내 자식들과 손자들에게도 뽐내고 싶다.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 줬다."

 

작가 박완서가 4년만에 신작을 내놨다. 그 기간 동안 쓴 산문들을 묶었다. 시간이 흘러도 사람과 자연, 세상에 대한 그의 시선은 여전히 따뜻해서 김수환 추기경, 박경리 작가, 박수근 화백 등 자신의 삶에 이어진 인연과 사랑에 아파하며 고마움을 전한다.

 

일흔아홉의 노작가는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작가의 못 가본 길은 6·25로 인해 좌절된 젊은 날 그의 못 이룬 꿈이다.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토록 많은 작품에 털어놨으면서도 평생에 걸쳐 아직도 풀지 못한 한국전쟁에 대한 회한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올해가 전쟁 발발 60주년이기 때문인가. 애통을 넘어선 지는 오래겠지만 못 이룬 꿈에 대해선 체념이 되질 않는 모양이다. "6·25 경험이 없었으면 내가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느끼고 남들도 그렇게 알아줄 정도로 나는 전쟁경험을 줄기차게 울궈 먹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도 할 말이 얼마든지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이해 못할 세상에 대한 날선 비판도 서려 있다.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 천지였다. 경제제일주의가 만들어낸 황폐한 인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더 나아가 무너져 내린 남대문이나 천안함 침몰 사건 앞에선 오히려 자신의 '뻔뻔스러운 정의감'과 '비겁한 평화주의'에 대해 반성한다. 단순한 한 개인을 넘어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견뎌온 역사의 증인이 됐다가도 작가만의 상처를 되새기는 말할 수 없는 연민과 회한 속 인물이 되기도 한다.

 

그가 걸어온 기나긴 길에 대한 생명력은 내일로도 이어진다.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글을 쓸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으나 그가 내린 작가로서의 새 다짐은 '남의 책에 밑줄을 절대로 치지 않는 버릇부터 고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신이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고 썼다.

 

작가는 자신의 나이가 이미 여든에 이르렀음을 누구보다 자신에게 먼저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삶이란 존엄한 건지 치사한 건지 이 나이에 이르러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시종일관 '못 가본 길에 대한 미련이 노망인지, 집념인지'를 탄식하지만 그 길이 지금껏 그가 지나온 길에 감히 비할 바가 못 되리라는 걸 우리는 안다.

출처 : 산골의하루/petit masion
글쓴이 : 햇살지기 원글보기
메모 : dma
나두 조아해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