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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의 그루터기(stump)' 예수님의 제자의 삶~

☆ 수요저녁기도예배(주후 2021년 10월 13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배성진 부목사님)-사랑의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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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훈련-사역훈련 -주일예배-독후감

2021. 10. 13.


♣수요저녁기도예배(주후 2021년 10월 13일)
제목: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말씀: (로마서 1:16~17)
찬양인도: 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배성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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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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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신학대학원을 다니기 전에 직장을 6년 간 다니 적이 있다. 점심 때 볶음밥을 좋아해서 먹으러 간 적이 있다. 어느 날 밖에 나가보니까 새로운 볶음밥 집이 생겼다. 메뉴판을 펼쳐보는데 이상하게 볶음밥 메뉴가 없었다. 밥을 다 먹고 나와서 보니까 볶음밥집이 아니라 복음 밥집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복음으로 인도되었구나! 를 생각하게 되었다. 장차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인도하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는데 몇 년 뒤에 신학대학원에 가게 되었다. 또 그때 한 가지 느낀 것은 복음 밥집 주인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복음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쉬쉬하는데 이 분은 가게 이름을 복음밥집으로 정한 것이다. 복음을 정말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함을 느꼈고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시대는 복음 전하기가 어렵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누군가를 교회 오라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 어느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교회 예배에 참여하지 말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참 어렵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는 것은 코로나 펜데믹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불편한 마음과 편견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믿는 믿음에 대해서 세상이 흔쾌히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비웃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있는가?
 
그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에 등장한 세속적인 세계관들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꽉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18,19세기는 모더니즘시대였다. 이 시대는 기독교가 반지성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시대 사람들은 사람들의 이성이나 경험 과학적 증명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은 진리로 인정하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고대 어느 전설에 나옴직한 신화라고 칭하기도 하고 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아이들이 읽는 동화에 나옴직한 이야기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세상 사람들에게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주장은 어쩌면 터무니없어 보일 것이다. 또 20-21세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이다. 이 시대의 기독교는 배타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모든 것에 의문을 품으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 진리이며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복음의 주장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지금 세상 사람들의 배후에 있는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세속주의 세계와는 아주 강력하다. 얼마나 강력한지 옛날 이스라엘을 떨게 한 골리앗 장군처럼 느껴진다. 아무도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그 육중한 골리앗, 그 골리앗에 겁이 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에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소년 다윗 외에는 골리앗을 향해 감히 칼을 들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듯이 우리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이 골리앗 같은 세속주의에 겁을 내어서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불신자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복음을 전설이나 신화나 동화로 생각하며 그 복음을 전하는 우리를 혹시나 비웃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또 전도를 한다고 할 때,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그저 교회에 한 번 나오라는 말, 또 교회 나오면 복을 받는다는 등, 이런 애매한 말로 복음을 전하거나 전도를 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도가 나온다.
 
바울 사도이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를 살펴보면서 복음을 부끄러워할만한 시대에 사는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바울은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아주 단호하게 선언한다. 16절 상반기에 보면,
 
*로마서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
-바울의 이 선언의 함축된 의미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복음이 당시 사람들에겐 부끄러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바울에게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더 큰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 두 이유는 우선 당시에 복음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있었다. 당시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복음은 어쩌면 터무니없는 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물론 우리 시대와는 다른 이유이다. 바울시대 복음을 터무니없게 여기는 두 무리가 있다. 첫째는 유대인이고 둘째는 헬라인이다. 복음에 대한 유대인과 헬라인의 관점에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고린도전서 1:22-23,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유대인은 표적, 기적을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못된 상황에서 벗어나는 승리의 왕이다. 유대인은 메시아를 말할 때, 늘 모세를 떠올렸고 기적을 말할 때 모세의 기적을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장차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주었듯이 새로운 메시아도 탁월한 기적을 통해서 자신들을 구원하고 다윗 왕국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고, 다윗 왕국을 회복해줄 정치적 기적을 구했던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복음은 참 터무니없어 보인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긴 했으나 그 기적으로 백성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준 것도 많았고 다윗 왕국을 회복시켜 주지도 못했다. 그리고 죽었다. 그냥 죽었는가?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는데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다.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이며 그분을 믿을 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이 복음의 말은 유대인에게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로 들릴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저 십자가에서 죽은 거짓 메시아에 불과했다. 오히려 유대인의 신앙을 오염시키는 인물, 거리끼는 인물, 즉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런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이 복음의 말에 그들은 얼마나 비웃었을까?
헬라인에게도 복음은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늘 철학적인 지혜를 찾는다. 이런 헬라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혀 지혜가 아니다. 십자가는 심각한 죄를 사형시키는 형벌이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한 악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십자가가 도덕적인 원리나 철학적인 원리를 제공해줄 수 있는가? 또 그런 악한 사람이 어떻게 구세주가 될 수 있는가? 또 헬라인에게는 그리스로마신화가 있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신들은 영웅적이다. 그런 그들에게 신이 인간이 되어서 인간의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은 그들의 신학적인 관점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헬라인에게서는 그리스도인은 식인종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성찬식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헬라인들은 기독교를 조잡하고 교양 없는 종교라고 깔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이니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을 구원자이고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말에 그들은 얼마나 비웃었겠는가?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복음을 비웃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도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복음을 비웃었다.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헬라문화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바울은 다소라는 로마 식민지 제국에서 태어났다. 다소에서 태어난 이 바울은 헬라문화 중심에서 성장했다. 우리로 말하면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교포 2세 정도 될 것이다. 바울은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 식 정통 교육을 받게 되었다. 뉴욕의 교포 2세가 한국에 나와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온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양쪽 문화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십자가에 구원이 있다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어떻게 들릴 것이고 또 헬라인에게는 어떻게 들릴 것인지를 바울은 너무나 잘 알았다. 복음이 그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이고 나아가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겠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이해보다는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더 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더 큰 이유는 무엇일까?
 

I. 바울은 복음이 참된 구원의 길임을 확신한다.

 
-죽어가는 영혼이 살아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것이 바울은 복음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이 첫 번 째 이유이다.
오늘 말씀 16절에 보면,
 
*로마서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
- 이 복음을 믿는 그 누구라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곧 복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또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드리셨다가 부활하신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형벌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그렇다. 지금 바울의 눈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헬라인들이 보이고 예전의 자신처럼 예수님을 잘못 오해한 유대인들이 보인다. 그들은 구원의 길에 서지 못해서 영원한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죽음을 향해 갔던 발걸음이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갈 수 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복음이 부끄럽니? 부끄럽지 않니? 의 말은 바울에게는 참 한가한 소리이고, 참 무책임한 소리였을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지금 내 앞에 물에 빠져서 허덕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수영을 못해 물에서 허우적거린다. 지금 곧 구하지 않으면 익사할지도 모른다. 마침 내 앞에 밧줄이 있다. 그 밧줄을 던지면 그 사람은 살아날 수 있다. 문제는 그 밧줄이 더럽고 좀 까칠해 보인다. 문제는 새로 산 양복을 입고 있다. 밧줄을 잡아 던지면 좋겠지만 그러면 내 손이 더러워질 것 같기도 하고 자칫 새로 산 귀한 양복이 구겨지거나 잘못해서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손이 더러워지는 것이 문제이고, 양복이 상하는 것이 문제이겠는가? 무조건 밧줄을 던져야 하지 않는가?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바울도 그런 심정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과연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또 그들로 인해서 바울이 어떤 곤란한 일을 당할 것인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그 영혼이 죽느냐 사느냐가 이 귀로에 서 있는데 이 시점에서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무조건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들의 조롱, 그로 인해 내가 부끄러워지는 것, 그것들은 영혼을 살리는 것 앞에서는 바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복음이 그들의 영혼을 살려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음이 어떻게 구원의 길이 되는가? 그것은 복음 아래 하나님이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게 대해 17절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이 문장은 다소 난해하다. 이 하나님이 의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님의 두 문구를 이해하는 대에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경에서 하나님이 의는 두 가지로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는 하나님의 신적 성품을 가리킨다. 정의를 사랑하시고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신적 사유를 가르친다. 죄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적사역을 의미한다. 믿는 사람에게 의로운 지위를 주시는 구원사역이다. 17절에서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었지만 의미의 무게 중심은 신적사역을 가리키는 것에 있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를 의롭게 하시는 신적 사역이다. 복음이 전파될 때, 하나님은 그 복음을 통해 사람을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복음을 듣는 사람을 어떤 과정으로 의롭게 하시는 것인가?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이다. 17절을 다시 보면,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는 말이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통해서 철저히 믿음을 통해서 라고 이해한다. 그러기에 이 17절의 의미는 복음이 선포될 때 하나님이 죄를 의롭게 하시는데, 그것은 철저히 믿음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듣는 사람의 심령을 깨뜨려서 믿음을 갖게 한다. 그 믿음을 근거로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을 우리 신학적으로 ‘이신칭의’ 라고 말하는데,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 가운데 하나이고 또 종교개혁의 뇌가 되는 신학이기도 하다. 요약하면 사람은 오직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데, 하나님은 복음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을 복음만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길임을 알았다. 그런데 수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이 복음을 듣지 못해 죽어간다. 그러니 바울을 이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복음에 대한 바울의 심정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손에는 영혼의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비한 묘약, 복음이 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죽어가는 영혼들이 있다. 더욱이 주님은 우리에게 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라고 명령하셨다. 우리가 무엇을 부끄러워하는가? 우리가 무엇을 주저하는가? 영혼을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복음을 불신자들에게 전할 때, 그들이 복음을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의 육신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해도 그들의 영혼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혼은 어떻게 해야 심판을 피하고 구원 받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에 냉담한 그들의 육신을 보며 실망할 것이 아니라 그 육신 안에서 복음을 들으려고 아우성치는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의 육신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의 관계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여러분들이 이런 심정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II.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았다.
 
로마서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
-바울은 복음이 전파될 때 단순히 말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두 번째 이유이다. 이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뒤나미스’이다. 훗날 다이나마이트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다이나마이트를 지을 때 노벨이 그 이름을 지을 때 능력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인 뒤나미스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뒤나미스라는 단어를 쓸 때, 다이나마이트를 염두해 둔 것은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뒤니미스란 단어는 우리에게 굉장히 놀라운 통찰력을 제공한다. 복음은 영적인 다이나마이트이다. 복음은 영적인 다이나마이트이다. 복음은 복음에 반대하고 복음에 저항하는 이 시대의 세력을 폭파시킬 힘이 있다.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이 복음이 가진 폭발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마음이 깨져버린다. 그리하여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사도행전은 그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 그때 베드로가 다른 무엇인가를 한 적이 없이 특별한 기적을 행한 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전한 것뿐이다. 그 때 그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결신한 사람들이 몇 명인가? 삼천 명이다. 그전만 해도 겨우 120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날 그리스도인이 3120명이 되었다. 26배가 되었다. 그중에 일부가 로마로 돌아가서 로마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복음의 메시지가 그들의 귀로 듣는 동안에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의 심령의 깊은 곳에 들어가서 다이나마이트처럼 폭발시켜 버렸고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할 때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에베소나 고린도 외에는 대부분 짧게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헬라문화가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을 때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심지어 오랜 세월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우상을 다 버리는 구원 받는 일이 일어났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것을 알았다. 바울은 그러게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부끄러움이 없이 복음을 전한 것이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베드로와 바울은 사도들이기에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적 권세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가 전도폭발 교사 임상세미나에 참여하면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4박5일 동안 전도폭발 교사 임상 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다. 전도폭발은 40분 동안 복음전도 시나리오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지금은 20분으로 바뀌었다. 제가 처음에 40분짜리 그 복음전도 시나리오를 읽고 외울 때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그 복음전도 시나리오는 다소 고리타분하고 설득력이 약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런 복음 전도 시나리오를 듣고 사람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까? 굉장히 많은 의심이 들었다. 조금도 설득력 있는 논리, 또 우리 시대에 맞는 품위 있고 알맞은 예화를 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런데 그 세미나 기간에 생각이 완전히 깨졌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런 것에 게의치 않으셨다. 임상 세미나 기간에 실습할 것이 40분짜리 복음전도 시나리오를 노방에서 아무나 붙잡고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세미나 장소에 와서 실습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다. 그때 나이 많은 한 권사님의 구호를 들었을 때, 복음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다른 교회 권사님이셨다. 그 권사님은 반포 쪽을 배정받았다. 그곳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40분짜리 복음 시나리오로 전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용기가 없다. 말도 제대로 못하시는 분이셨다. 돌아올 시간은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가면 그래도 권사 체면에 면목이 없을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해보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고속터미널이다 보니 마침 휴가 나온 젊은 군인이 있었다. 손주 뻘 되는 젊은 군인이 권사님의 레이더망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그 군인에게 부탁한다. 지금 세미나 때문에 실습을 해야 하는데 40분짜리 복음전도 시나리오를 제발 들어주기만 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니까. 젊은 군인이 시간이 남았던지 아니면 자기 할머니가 생각나서인지는 모르지만 한 번 해보시라고 했다고 한다. 그 권사님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젊은 군인에게 40분 동안 전했다고 한다. 상상해보라 듣는 그 군인이 얼마나 따분했겠는가? 그 40분이 오기 전에 10분이 지나서 그 젊은 군인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신한 것이었다. 권사님은 너무 놀랐고 노방전도를 해본 적이 없었고 그저 실습만을 위해서 나온 자리인데도 그 젊은 군인이 뜻밖에 예수님을 믿겠다니 그 권사님은 당황한 것이다. 군인도 놀라고 권사님은 더 놀랐다. 그 권사님이 저녁에 세미나 장소에서 발표를 하는데 그 세미나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다 감동받았다. 비록 복음이 그 어설픈 권사님의 입과 어설퍼 보이는 시나리오를 통해 나갔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그 권사님의 복음 전함과 함께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그 청년의 마음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게 역사하신다.
 
바울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말을 잘한 것 같지는 않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자신의 말에 부족함이 있다고 인정했다. 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바울의 외모도 볼품이 없었고 키가 작고 대머리였고, 눈썹은 일자였고, 두 다리는 안짱다리였다고 한다. 바울은 자신의 이런 모습으로 전하는 복음을 누가 받아들일까를 늘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자만 바울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이 하나님이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도여러분, 우리도 이런 바울의 심령을 가지면 좋겠다. 복음을 전할 때 내 연약함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며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심정이어야 한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상대방이 받아줄까? 혹은 비웃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 실상은 내가 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그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그때 하나님은 능력을 사용하셔서 복음 듣는 이에게 마음을 열게 하실 것이다. 그러기에 내 모습, 내 언어가 어떠하든 아무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하나님이 아직 그 사람의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내가 복음을 잘 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시는 것이다. 그 결과에 우리가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바울은 복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또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런 확신이 있으니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바울이 행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양심 있는 사람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또 목숨을 빼앗기기도 하고 결국은 순교를 당했다. 그ㅏ럼에도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다. 물론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명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전한 복음으로 죽어가는 영혼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또 자신이 비록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 듣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는가? 그렇다면 죽어가는 이웃, 가족들을 위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이 구원의 길임을 확신하면서도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양심을 잃은 사람이다. ‘구조 불이행 죄’라고 있다. 선한 사마리안 법이라고도 한다. 위험한 사람을 보고서도 도와주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는 법이다. 유럽 선진국에 제정되어 있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는 이 법이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 헌법으로 도덕을 강제한다는 것이기에 그렇다. 하나님은 구조불이행의죄의 책임을 분명히 물으실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레위인과 제사장이 강도 만난 사람, 그 사람을 돕지 않는 인물로 나온다. 그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웃 사랑의 부수적인 조언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돌보지 않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죽어가는 이웃을 그대로만 보고만 있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불편해 하신다. 복음이 구원의 길임을 확신한다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이 전파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은 세속 적을 무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육중한 골리앗 같을 것이다. 그 육중한 골리앗을 우리는 한 없이 작아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복음 전하는 것이 두렵고 떨릴 수도 있지만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돌을 던질 때, 골리앗이 맞았다. 그때 다윗은 소년에 불과했다. 전투복이 맞지 않았다. 반면 골리앗은 삼 미터나 되는 거인이었다. 그런데도 소년이 던진 돌에 맞아 쓰러져버렸다. 하나님의 능력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 이스라엘 군인들은 부끄러웠을 것이다. 저 소년 아이가 어떻게 저 육중한 골리앗을 상대하겠는가?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골리앗을 맞이한 사람은 그저 평범한 소년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한 용사 다윗이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돌을 던졌지만 하나님은 그 돌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히셨다. 돌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돌과 함께 날아간 하나님의 능력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은 그저 어린 소년 다윗이 던진 돌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복음은 소년 다윗이 던진 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한 용사 다윗이 던진 돌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사실 복음만 전달된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에 복음을 전하기 참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연약한 마음으로 던진 이 돌이 세상 사람들의 강퍅한 마음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돌을 던질 수 없다. 우리가 던진 돌에 골리앗이 비웃기도 할 것이고 심지어 이스라엘조차도 비웃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은 골리앗을 비유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의 돌을 던질 때 확신해야 할 것은 복음의 돌은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날아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골리앗 같은 저 세상과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돌을 던질 때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덧입히실 것이며 돌과 함께 그 능력을 함께 날려 보내실 것이다. 그렇게 날려 보내는 복음의 돌이 그들의 죄를 깨뜨리고 그들을 살려낸다는 것이다. 영원한 죽음을 향해 가던 그 사람들이 우리가 던진 복음의 돌에 맞아서 영원한 생명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 가정, 우리 이웃이나 믿지 않는 자녀들, 우리가 복음을 전해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니 교회가자!! 이런 말이 아닌 우리는 죄인이어서 영원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핵심을 직설적으로 전해야 한다.
 

요약
복음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확신하고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던 낙심치 말고 복음을 담대하게 전해야 한다. 사도 바울처럼 복음만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린다는 것을 확신하듯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달아서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달아서 내 연약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애끓는 마음으로 가족, 자녀, 이웃을 불쌍히 여겨서 기도하고 주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행위나 공로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믿는 자의 구원이 그 목적임을 보여 준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복음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이 구원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능력이 없다면 복음은 죽은 글에 불과하다. 복음의 구원은 믿는 자들,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아무리 잘 조제된 약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복용되지 않는다면 환자를 낫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이 먼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게서 복음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그 복음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였다. 이제는 이방인도 유대인과 같은 위치에 있으며 똑같이 구세주께 환영을 받는다. 오랫동안 기다려졌던 메시야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일 뿐 아니라 '이방을 비추는 빛'도 되신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에게 구원의 도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칭의의 도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은 의로운 것을 나타낸다. '복음에는' 그와 같은 의가 '나타나' 있다. 복음의 의를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의이다. 그 의는 우리 자신의 행위로 인한 공로로부터 나오는 의에 대한 모든 주장들을 끊어버린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이다.

복음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즉 우리로 의롭다함을 얻게 해 주는 믿음에서 우리로 살게 해 주는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접붙이게 하는 믿음에서 우리의 뿌리이신 그로부터 덕행을 끌어내는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이 두 믿음이 다음의 말에 포함되어 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이란 말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란 말은 우리를 유지시켜 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그 믿음은 증가하고 계속되며 인내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갑작스럽게 유명해진 새로운 교리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구약에서 잘 알려진 성경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는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영광의 삶을 살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즉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약의 믿음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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