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기야(hyacool) ◈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의 그루터기(stump)' 예수님의 제자의 삶~

☆주일예배(주후 2022년 1월 23일) "왜 시련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인가?"(김지찬 목사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초빙)-사랑의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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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훈련-사역훈련 -주일예배-독후감

2022. 1. 23.


주일예배(주후 2022년 1월 23일)
제목: "왜 시련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인가?"
말씀: 마태복음 15:21-28
대표기도: 윤주은 부목사님
찬양인도: 영광찬양대, 쉐키나 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예배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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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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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 스토리로 보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계속해서 귀신 들린 딸의 병을 고쳐달라는 여인의 울부짖음에도 예수님은 한 말씀도 아니 하시고 그 여인의 문제를 어떻게든지 해결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셨다. 여인이 간청하는데도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져 줌이 마땅하지 않다며 개 취급을 하셨다.
개관적으로 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충격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우리의 삶을 주관적으로 들여다보면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말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우리의 삶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點綴)되어 있다. 어떨 때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주변 사람들이 중보기도를 해주어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는다. 우리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일이 진행될 때가 많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혹시 개 취급 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스토리를 공감하다보면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스토리이다. 도대체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시련과 고난을 안겨주시는가? 간청하는데도 침묵하시는가? 때로는 우리를 모질게 대하며 모욕을 당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나안 여인의 가장 큰 장애물이 예수님이셨던 것처럼, 우리 삶에 가장 큰 장애물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의 답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이 본문은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페니미즘 진영에 속한 해석자들은 예수님이 여인을 개라고 칭한 것은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 이방여인의 관대함과 지혜로 예수님의 편견을 깨트리고 이방인 선교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판정패를 당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동안 2천년의 교회의 교리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첫째로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를 믿음으로 믿으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여인은 무슨 도덕적인 교훈이나 성경학적 위로를 담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 하나님 백성들에게도 고난과 시련이 그치지 않는 것인가? 왜 주님은 때로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신가? 에 고난의 이유를 물어도 왜 기대와는 정 반대로 모욕을 당하게 놔두시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면 근원적 지혜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교회 해석 자료를 들여다보면 루터가 1523-1543년 사이에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열세 번의 설교를 한다. 아주 흥미롭다. 루터가 고난과 시련을 ‘하나님의 안아주심’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가나안 여인의 스토리는 어떤 점에서 루터를 매료를 시켰기 때문에 열세 번이나 설교를 했는가? 게다가 인간으로서는 누구나 피하고 싶은 고난과 시련을 왜 루터는 ‘하나님의 안아주심’으로 해석하고 있는가?
 
특별히 우리 메인 채플을 ‘안아주심의 본당’이라는 특별한 명칭으로 부르는 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 왜 그리스도인의 시련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인지를 우리가 수로보니게 여인의 스토리를 통해 함께 살펴보면서 시련과 고난으로 점철된 우리의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하는 자가 다 되길 소망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설교를 마치시고 가나안으로 이동하시면서 그 중간 지점인 두로와 시돈 지점으로 들어가시게 되었는데 거기서 귀신들린 딸을 둔 여인을 만나게 된다. 마태복음은 가나안 여인이라고 되어있지만 마가복음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되어있다. 마태복음은 가나안 여인은 딸을 묘사하면서 흉악하고 귀신들렸다고 표현하고, 마가복음은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이 귀신 들린 딸의 문제를 어떤 정신병적 문제나 귀신의 빙의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왜냐면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이 가나안 여인의 딸이 보여주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자라고 말한다. 왜냐면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은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 바로 앞에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지가 나오고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라는 이야기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둘 다 수로보니게 여인 앞에 나온다. 마가복음을 예를 들어보면 속에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음란과 도둑질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수와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것이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오늘 날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에서 사로잡혀 자기 몸을 더럽히고 있는데. 어찌 보면 돈 귀신 권력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이 사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대선을 앞두고 상당수의 정치인들은 인권, 무한책임, 민생, 소수자의 권리를 외치면서 온갖 선량한 말을 외치지만 속에는 악한 생각들이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성 소수자 인권의 강조하는 사람들이 왜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왜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치뿐이 아니다. 음란 도둑질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수와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 모두 12개이다. 이 목록을 하나씩 따져보면서 자신은 정직하게 볼 줄 안다면 남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려는 사람들,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도 많다. 갭 투자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까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돈 귀신에 눌려 있다. 이렇게 귀신에 눌리거나 귀신에 사로잡히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귀신 들린 사람은 무덤에 산다. 다른 사람의 삶까지도 망가지게 하는 죽음의 영, 무덤의 영이 된다. 오늘 우리 사회는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에 사로잡힌 자들로 인해서 주변 사람을 망가뜨리고 우리나라를 무덤처럼 황폐화 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죽음의 더러움에 사로잡혀 황폐한 자의 해결이 무엇이겠는가?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나아가서 “나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내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와 귀신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유일한 비결(秘決)이다. 물론 주님께 나온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당장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 나와서 제자가 된 후에 고난과 시련의 설교 중에 하나를 나중에 살펴보겠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에 예수님은 어떠하신지 보자.
 
*마태복음 15:23,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 그렇다. 오늘 가나안 백성이 고난을 당할 때 가장 큰 시련은 하나님의 침묵이다. 오늘 날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 당할 때에 가장 큰 시련은 하나님의 침묵이다. 고 박완서 소설가는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실 때 인간이 어떤 고통을 느끼는지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다. 박완서씨의 아들이 명문대 의대생이었는데 1988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박완서는 주님께 이 사실을 내 아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달라고 처음에는 애걸했다고 한다. 그러나 1년이 넘도록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벽에 걸려 있던 십자가를 떼어내서 발로 밟고 원망하고 저주까지 했다고 한다. 이때에 박완서씨는 ‘한 말씀만 하십시오’라는 그의 수필집에서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 ‘신의 권위가 장난질 칠 권리가 아닐 바에야 의당 그 극형이 무슨 잘못에서 연유했지를 밝혀주어야 한다. 신, 당신의 존재에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한번도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부르고 매달리게 하는 그 이상하고 그 음흉한 힘이다.” -박완서-
 
-무슨 이야기 인지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왜 하나님이 왜 침묵할까도 나중에 살펴보겠다.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큰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자 제자들이 귀찮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제자들이 조치를 취해주시라고 어떻게든 해결해 달라고 한다.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예수님이 제자들의 요청을 받고 드디어 대답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아무데도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다.’라고 고 하신다. 공개적으로 거부하신다. 이 말씀을 충분히 들었을 텐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했다. 예수님은 전에 그 앞에 데려오기만 해도 고쳐 주셨지 않는가? 예수님은 원격치료의 원조이시기에 백부장의 종의 병도 그냥 고쳐 주셨다. 원격치료 하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되라, 네 소원대로 되라.” 그대로 다 나았다. 예수님은 굳이 도우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원격치료 하시면 되신다. 그런데 이렇게 엎드려 절하는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시지 않을리 없다. 예수님은 아예 그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 여인의 간청을 들었을 것이고 그러나 이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나아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한다. 마태복음의 앞에 부분을 읽어보면 귀신 들린 자를 아무소리 안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다. 그렇다면 절을 하며 도와 달라는 이 여인의 간청을 거절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충격적이다.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다.”라고 하신다. 일부 해석자들은 예수님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아니면 귀찮으시니까 모른척하시며 여인을 쫓아내신다는 것이기도 하다고 해석한다. 이런 해석을 하는 인간들을 보면 아무말이나 하는 것이며 아무 근거도 없이 해석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함부로 예수님을 이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왜 개라고 하시느냐를 중요시하여 그것을 알아내려 난리를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반려견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작은 개라고 말한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이상한 소리를 한다.
 
예수님은 개라고 하시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왜 고난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가 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개라고 할 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냐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씀이다. 주여 옳소이다. 라고 대답하는데 그녀의 대답은 헬라어로 ‘나이 퀴리(예스 로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맞습니다.’이다. 직역하면 Yes, Lord이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예스라고 할 만한 구석이 단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스 로드!’라고 말한다.
 
헬라어로 열두 개 단어이지만 중요한 단어는 여섯 개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 이 여섯 개의 핵심 가운데 예스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는다. 자녀의 떡이고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좋은 대답이 없다. ‘던져주다.’ 의 단어가 희망이 있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주겠는가? 요새는 좀 달라지긴 했다. 천오백 여만이 사람들이 반려 견을 키우고 있으니 개에게도 그렇게 주기도 할 만하다.
 
사실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대답은 그냥 NO가 아닌 절대적인 NO이시다. 그런데 이 여인은 절대적인 NO 속에서 YES LORD!를 찾아낸 것이다. 맞습니다. 주님, 도대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YES라는 단어가 단 하나도 없는데 주님께 YES라고 하지 않는가? 놀랍게도 개라는 모욕 속에서 예스를 찾은 것이다. 자신을 개라고 부른 저주 가운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축복과 희망이 있음을 본 것이다. 수로보니게 말을 풀어보겠다. “주님이 저를 개라고 하셨는데 주님, YES, 맞습니다. 저 개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자기 주인이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에게 준 떡을 개들이 먹지 못한다 하더라도 개들은 주인의 상아래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게 믿음이다. 기대와는 정 반대로 보이는 것, 심지어는 저주와 모욕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하며 ‘YES LORD’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라고 한 것이다. ‘개들에게 던져줄 떡은 없다.’라는 모욕에도 이 여인은 희망을 발견한다.
주님 맞습니다. ‘저는 자녀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주는 떡을 먹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까?’라고 한다. 누가 먹을 만한 것을 다 골라내고 남은 부스러기를 먹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저는 충청도 양반이라서 남이 남겨놓은 것은 절대 먹지 않는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아버지가 주시는 떡을 자녀들이 먹다가 흘리는 부스러기라도 좋으니까 저를 받아달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가 처한 상황이 수로보니게 여인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주변 사람들이 돈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 가족가운데도 돈 벌겠다고 이것저것 하고 망하고 정신까지 탈탈 털리는 분도 있지 않습니까? 주변에 주식하고 이렇게 아파트해서 돈 벌었다는 사람을 많이 못 보았다. 몇 사람은 있겠지요. 하루 종일 비트코인은 24시간 돌아가서 알람을 설정해두고 한다고 하지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산다. 댜선 주자들이 5천만 원까지는 비과세라고 하니까 귀신에게 눌려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해도 한 말씀도 하시지 않는다. 주변에 중보기도 한다는데 상황은 호전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녀 같은 느낌보다는 그저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개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럴 때는 수로보니게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고 우리는 붙잡고 기도해야 한다. 왜 루터가 20년 동안 13번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을 설교했겠는가? 시련을 당할 때마다 루터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위로와 힘과 용기를 얻은 것이다. 루터의 말을 인용하겠다.
 
※“이 여인의 신앙의 시련들은 YES보다 NO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련 안에는 NO보다 YES가 더 많다. 아니 그 안에는 오직 YES만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NO처럼 보이지만 이 YES는 매우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감정에서 벗어나 영적으로 깊은 예수를 부여잡고 NO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은 옳다고 말해야 된다.”라고 했다.
 
그런데 루터는 저주하고 모욕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님의 말씀에도 YES라고 동의하면서 그 안에 숨겨진 축복과 은혜를 찾아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너는 개다.”라고 말씀하시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인데요.” 라고 하면서 삐치지 말라는 것이다. 네 주님, 개 맞습니다. 라고 인정하고 그리고 나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개도 먹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숨기신다는 사실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중요한 신학자이다. 하나님이 숨으시는 것이 우리를 놀래 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혜로운 자와 강한 자에게서 자신을 숨기시므로 이들은 바보로 만들고 오히려 약한 자들과 아이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자신을 숨기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실 때 우리로부터 우리의 기대와는 정 반대되는 모습으로 자기를 숨기신다는 것이 루터의 통찰이다.
 
루터 같은 가장 중요한 예가 십자가이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축복과 생명과는 정 반대인 저주와 죽음과 모욕이 십자가 아닌가? 그 죽음과 모욕의 상징인 십자가 안에 생명과 부활을 숨겨놓으셨다는 것이다. 루터의 말을 하나 더 들어보자.
 
※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숨겨져 있다. 그것도 너무 깊이 숨겨져서 정 반대 모습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생명은 죽음 안에 숨겨져 있고, 사랑은 미움 안에 숨겨져 있고, 영광은 수치 안에 숨겨져 있고, 구원은 정죄 안에 숨겨져 있다. 우리의 왕권은 포로됨 안에 숨겨져 있고, 천국은 지옥아래 숨겨져 있다. 지혜는 어리석음 안에 숨겨져 있고, 의로움은 죄 안에 숨겨져 있으며 강함은 약함 아래 숨겨져 있다. 무엇이든지 좋은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 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으로만 시련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 가르쳤다.”

죄인이라고 하면 네!!~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하면 그 안에는 의롭다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며 말씀하시는 칭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간구에 하나님이 때로 침묵하시는 것도 좋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외아들을 잃은 다음에 한 말씀만 해달라고 애걸복걸 했지만 1년 내내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은 것을 경험한 박완서씨는 하나님의 침묵이 어떤 유익이 있었는지를 이렇게 말한다.
“그 고통의 순간을 지나올 때 내가 그렇게도 원망한 하나님이 곁에 계셨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고통의 순간의 수많은 원망 섞인 질문을 던질 때 그 많은 원망을 고스란히 들어주셨던 하나님 그 분의 침묵은 더 많은 원말을 듣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배려였던 것이다. 벽에 걸려있는 십자기 위에 그리스도의 표정을 읽은 것은 최근 일이다. 오냐, 실컷 욕하고 원망하고 죽이고 또 죽이려므나. 네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 나 여기 있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분의 표정은 생생하게 슬프고 너그러워 보였다.
 
고난의 이유를 물을 때 하나님이 침묵하면 가장 고통스럽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시련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믿음으로 견디면 나중에 고난의 이유를 안다. 왜 시련을 주시는지 처음부터 알려주시면 믿음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이다. 왜 나를 개라고 부르신가?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냥 '맞습니다' 한다. 하나님은 개라고 부르면서 그 모욕과 저주와 수치 안에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를 숨겨놓으신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시련이 임할 때에 하나님이 그 시련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견뎌낼 때 비로소 전혀 예상치 않는 방법으로 이 세상이 전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도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 믿고 시련을 견뎌내면 하나님의 침묵조차도 나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십자가의 모진 고통 속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었지만 하나님은 자갑게 침묵하셨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성부는 침묵하신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결국 하나님의 침묵 속에 거행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지의 상징이 된 것이다.
 
맥스 루케이도는 '예수께서 선택한 십자가'란 책에서 요한복음 3:16절을 이렇게 묵상하고 있다. 요한복음 16절은 단순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 사랑의 반경은 얼마나 넓은가!~온 세상을 품을 만큼 넓다. 자신의 사랑의 넓이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 앞에 그분은 한 손을 오른쪽으로 펴고 또 한 손을 왼쪽으로 펴신 뒤에 피에 못을 박아버렸다. 당신을 사랑하면서 죽어가는 사실을 당신이 깨닫기 위해'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안아주심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상징이 된 거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 믿음으로 견뎌내자 끝내 죽음 아래 감추어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 주어진 작은 십자가들을 짊어지고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내면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핍박아래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가 숨겨져 있기에 루터는 시련을 '하나님 안아주심' 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안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 자체가 하나님의 안아주심이라는 것이다. 루터의 말을 또 들어보자.
 
'시련이 있는 것은 어떤 것은 나쁜 것이다. 배부르고 등 따슬 때는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차갑게 대하고 치명적인 점잖 빼기 상태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돈 버는 일에는 열심을 내면서 하나님의 일에는 냉랭하고 점잖 빼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까 시련이 없는 게 사실은 나쁜 거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이 잘 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쁘게 생각 되는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시련을 당하는 게 시련이 없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다. 시련이 없는 게 가장 큰 시련이라고 루터가 말 했는데 시련이 없는 거보다 시련이 있는 게 더 좋은 것이기 때문에 루터는 하나님이 고난을 우리에게 주실 때 쓰는 사탄을 도구로 쓰기 때문에 사탄을 위로의 박사라 부른다. 처음에는 이런 이야기 들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 루터가 사탄을 위로의 박사라 부르는가? 사탄이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 안에 신앙의 냄새가 나거나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탄은 죄인들에게 관심 없고 다가가지 않기 때문에 이 사탄이 다가오면 내게 시련을 주면 '나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되고 이게 위로가 되기 때문에 사탄이 위로의 박사라는 것이다. 받아 들이려니 좀 찝찝한 거 같고 안 받아들이자니 좀 그러지 않는가? 사실은 루터가 왜 탁월한 대가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왜 우리는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의롭다 생각하니까 고난과 시련을 당할 이유가 없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되고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 어떠한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마귀한테 책임을 떠넘기고 심지어 하나님을 비방한다. 그러니까 자기의가 충만한 사람은 시련과 고난 가운데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라고 생각한다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만족하면서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 숨겨진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를 갈망하는 것이다. 루터가 20년간 수로보니게 여인을 설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적으로 루터는 어떤 때에는 자신을 개와 비교하기도 했다. 루터가 자기가 키우는 개가 있는데 토펠이라고 하는데 루터가 그 고기를 주려고 들고 있으니까 자기를 쳐다보는 그 눈빛에서 감동을 받은 것이다. 내가 만일 이 강아지가 고기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생각이 오직 고기에게만 쏠려 있는 게 아닌가! 그 외엔 어떤 생각도 어떤 희망도 소원도 없어 보인다. 이렇게 루터가 강의 시간에 한 것이 아니고 탁상담화라고 한다. 루터가 오래된 수도원을 썼다. 생활이 잘 안 되니까 아내가 닭도 키우고 동물을 기르고 밭도 일구고 포도원 같은 것도 했다. 학생들을 하숙도 쳤다. 학생들이 식사를 하고 나서 탁상에서 그들이 무엇을 물으면 루터가 끊이없이 이야기 해준다. 그 학생들이 적은 게 탁상담화이다. 이 탁상 담화에 이 아내를 안 끼워준 것이다. 아내가 똘똘하며 수녀원에 있다가 수녀원을 탈출해서 그래서 루터와 결혼을 했다. 그래서 루터와 그 부인과 여섯 명을 낳았다. 부인이 난리를 치니 루터의 탁상담화에 끼어주었다. 탁상담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견뎌낸 고난은 다른 모든 믿음의 형제들보다 더 크다. 시련을 당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은 시련을 당하지 않은 백 사람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선행을 행한다. 이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이라는 진리는 책을 읽거나 독서를 하거나 묵상을 하거나 해서 알아낼 수 있는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고난과 시련을 견뎌낸 사람만이 알수 있는 체험적 진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다 알다시피 루터는 교황이나 황제의 파문을 받아서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위험 가운데서 신체적인 많은 질병 가운데서 흑사병의 도시 피텐베르크 한 복판에서 끊임 없는 비난과 조롱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므로 하나님의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 숨겨놓은 축복과 위로를 발견했고 따라서 루터는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저는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이 안아 주심이라는 루터의 해석을 본 순간에 옥한흠 목사님의 '안아주심'의 설교와 '안아주심의 본당'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옥한흠 목사님은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아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을 신명기 1:31절의 이 말씀을 가지고 안아주심 설교를 하셨는데 핵심적인 부분만 발췌하겠다. 모세는 광야의 여정을 고난의 통로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은혜의 통로로 보았다는 것이다. 모세의 눈에는 광야의 생활은 어떤 삶이었느냐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품에 안고 걸으시면서 자상한 아버지처럼 보호해 주시고 공급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제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을 믿고 고백은 하지만 이 무서운 세상에서 나를 안고 걸어가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진짜 믿어지는지 스스로 한 번 물어보라. 누구에게 안긴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은 메마른 행위가 아니다. 안긴다는 것은 온몸으로 느끼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안겨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안아주시는 아버지라는 강한 확신이 모세처럼 아무도 혼 낼 수 없을 만큼 내 마음을 확 지배하고 있으면 나는 하나님에게 안겨있는 사람이다. 이상하게 세상이 두렵지 않다. 문제가 내 앞에 버티고 있는데도 걱정이 안 된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에게 안겨 있는 사람이다.
 
옥한흠 목사님은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많은 평범한 해석자들처럼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달콤한 하나님의 감성적 위로로 설교하지 않으셨다.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광야 한 복판에서도 물이 없고 간조한 땅, 전갈이 있는 위험한 땅에서 온 몸을 하나님께 던지는 신뢰의 할 때 경험되는 하나님의 신비로 해석을 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는 루터의 설교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우리는 목사님이 안아주심의 본당을 사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렇게 둥그렇게 생겨서 이게 안아주심 같고 어떤 장직적으로 표현으로 안아주심의 본당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는데 아! 오목사님과 사랑의교회 교우들이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를 오히려 경험하고 하나님의 안아주심이라는 사실로 고백하며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고백이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시련과 고난을 하나님의 안아주심의 경험하고 산다면 우리를 더럽게 만드는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생각들과 공중에 권세 잡은 자들과 더러운 귀신들의 사로잡히거나 눌려 살지 않게 될 것이다. 권력의 귀신이나 돈 귀신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다른 사람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고난과 시련 안에 끝내는 축복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심의 사실을 믿고 고난과 시련을 끌어안고 끝까지 믿음으로 견뎌내면 고난과 시련이 우리가 도망쳐야 될 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고난과 시련이 다가올 때 빨리 고난과 시련이 끝나기를 바라는 기도도 해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고난과 시련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를 경험하는 것이다. 아니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 인생길에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고난과 시련이 우리를 축복하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매순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일마다 안아주심 본당에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하나님의 안아주심에 감사하고 온 영혼이 엎드려 경배하는 복된 예배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하나님께서 주신 이 놀라운 비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어 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옳소이다 저는 개입니다.‘ 라고 부르짖으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영적으로 가난자의 자세를 가지고 우리 안아주심 본당에서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맛보는 축복을 경험해야 한다.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가나안 여자의 딸로부터 귀신을 내어 쫓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이방인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시는 매우 진기하고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위하여 예비해 주신 진기한 사랑이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여기서 이방인을 비추는 희미한 빛이 드러난다. 예수님의 선교 대상은 바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이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이방의 선교를 소홀히 하신 것은 아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큰 특권이다. 본문에서 이방 여인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의 부족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능력만 의지했기 때문이다. 참 믿음은 어떠한 고난과 굴욕 속에서도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러한 믿음은 성도에게 큰 기쁨과 축복을 가져다주며,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선교의 사랑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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