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내복종(府內伏鍾)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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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2011. 8. 25.

                                                                                                                                                                   2011. 8. 24

 

부내복종(府內伏鍾)의 현장,

 

 충남 서천군 종천면 당정리 소재  '화산'을 오르면서 돌아본 모습.

 

 

  

종천리(鍾川里)는 백제 때 비중현 소속이었고, 신라때에는 서림군의 영현인 비인현에 속했다.

고려 때는 임천의 비인현이었으며 1413년(태종 13)까지 비인현이었다가 조선 말 비인군 일방면의 지역으로

북내가 있다 해서 북내 또는 부내, 종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어라리, 보현리,

종천리와 보도리, 하외다리(下外多里)의 각 일부를 합하여 종천리라 해서 서천군 종천면에 편입되었다.

부내 서쪽의 비인면으로 가는 고개를 어랭이재라고 하며, 그 아래에 있는 마을을 어랭이라고 한다.

어룡재(魚龍재)가 변해서 어랭이재가 되었다고 전한다.부내 서쪽에 있는 산을 용산(龍山)이라고 하는데,

이는 산 아래 용이 살았다는 용못이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낡은 절터 남쪽으로 새절터가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절이 없어졌다고 전한다

.어랭이재 동쪽으로 종천이 있으며, 이곳은 이토정(李土亭)이 찾던 명당자리가 있다 하는데,

명당을 제대로 찾으면 크게 번성할 마을이라고 전해지며, 냇물에서 물이 흐를 때 또는 마을 땅속에서

가끔 명당의 종소리가 들린다 해서 종천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 한다.

 

 

 

 야생 산도라지

 

 

山主 토석 선생과 함께 화산을 오른다.

 

 

장구만 풍경

 

조선시대 우리나라가 청나라와 친하게 지내어 우리나라에서 때때로 사신을 보낼 때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어도 일 년에 몇 번씩 청나라를 드나들었는데, 그 해엔 왕께서 마음씨가 곱고 예의가 바른 한 선비를 추천하여 보내기로 했다. 왕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선비는 자기일보다 나랏일에 온 정신을 바치는 깨끗한 선비였었다. 그는 그서 예의바른 사람으로 청나라에 건너가서는 청나라의 왕은 물론 여러 중신들로부터 많은 호감을 받으면서 일을 잘 처리했다. 그가 떠나올 때는 그들로 하여금 아쉬워서 몇 달만 더 쉬었다 갈 수 없느냐고 간청할 정도였는데, 그때 청나라에서 풍수에 밝은 도학자가 특별히 그에게 당신 같은 선비의 후손들은 당신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나올 것이라고 선물로 부채 하나를 주었다.그 부채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도학자는 그 지도가 가리키는 곳에 가서 땅을 파보면 금싸라기 서 되가 나올 것이라 하며, 당신의 나라에 가거든 그 장소를 남몰래 잘 봐두었다가 당신의 직계되는 사람의 묘를 쓰면 집안이 크게 되며 영화를 누릴 것이라 하였다. 그 사신은 배를 타고 여러 중신들의 전송을 받으며 중국을 떠났다. 육지를 떠나서 얼마나 되었을까 잠깐 눈을 붙이고 깨어서 선상에 오르니 망망대해에 나와 있었다. 날씨가 무더워 선물로 받은 부채를 꺼내들고 선상에서 부치다가 그 지도를 보며 희한한 산골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배가 갑자기 크게 흔들리고 바람이 획 불더니 그가 들고 있는 부채가 바람에 날려 바다에 떨어져버렸다. 그는 부채가 아쉬웠지만 풍수에 그리 관심이 없기 때문에 버려두었다. 그가 우리나라에 와서 여러 벗들과 중국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채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이런 도학자로부터 지도가 그려져 있는 부채를 받았는데 더워서 땀을 식히다가 바다에 빠트렸다는 이야기를 하자선비들은 경탄을 하며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후 부채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정사에 바삐 움직이다가 몇 년 후에 한가한 직책에 머무르게 되면서 부채에 그려진 지도를 생각하다가 그런 지형은 찾으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길을 떠났다.그는 전국을 누비다가 충청도 서천에 오게 되고 종천에 들러서 여기저기 지형을 보고 다니다가 언뜻 앞을 바라보니 여기가 틀림없는 그 부채 속의 명당자리와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 짐을 풀고 그 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는 사람을 사서 짐작이 가는 곳의 땅을 파보았다. 그러나 금싸라기는 나오지 않고 며칠을 두고 파다가 그냥 허탕을 치고 돌아간 후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그가 죽은 후 종천땅의 부내복종터를 부르는 명당터 이야기는 전국에 알려졌고,

풍수지리사들의 발길을 재촉하였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몇 년이 흐른 뒤 이지함에게도 이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펄쩍 뛰더니“그게 명당이다!” 하고선 그길로 달려와서 백일동안 기도를 올렸다. 그가 기도를 올린 지 백일이 가까워 왔을 때 그의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서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정성에 뜻이 있는 것 같아 내가 이 명당터를 가르쳐줄 테니 그대는 구경만 하여라” 하고 지형과 장소까지 가르쳐 주므로 그는 여러 번 머리를 숙이고 꿈에서 깨어난 후 노을이 밝아오자 그곳으로 달려가 봤다. 산신령이 가르쳐준 장소를 발견하고 풀을 뜯은 다음 살짝 땅을 파봤다. 땅을 깊이 파지도 않았는데 금싸라기가 손에 잡혔다. “바로 여기가 명당이다”그는 이렇게 기뻐하며 땅을 도로 파묻고장소를 알아두기 위해 곁에 있는 지장풀을 묶어서 표시를 해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는데 그때 꿈속에 그 산신령이 나타났다.산신령은 노한 얼굴로“누가 명당자리를 구경하라 했지 그 장소에다가 표를 해놓으라고 하였느냐. 다시 가서 찾아봐라”하고 바삐 사라졌다. 토정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산신령이 시키는 대로 그 장소에 가봤다. 그런데 한곳에만 묶어서 표시하였는데 온통 그 부근의 지장풀이 모두 묶여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처음 땅을 팠던 곳에 가서 땅을 파봤으나 틀림없이 있던 금싸라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 옆을 파봤으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주위를 파 봐도 금싸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또 잠이 들었는데 산신령이 또 나타났다.“그대는 산세 지세를 잘 볼 줄 아는 학자이기에 내가 진짜 명당자리는 이런 곳이라고

가르쳐준 것이지 그대가 쓸 명당은 아니야” 하고는 사라졌다.그래서 토정은 발견 하였으나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고 떠났다. 그가 죽을 때 그도 “천하의 명당은 종천에 있는데”, 하고 죽었다는데 그의 말을 들은 풍수지리사들이 종천들을 쑥밭으로 만든 것은 물론이다.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명당터는 종천1, 2구와 랑평리, 신검리 근처의 들이라 전해지는데, 지금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며 나름대로 명당이라고 묘를 쓰고 있지만 금싸라기가 나오는 명당터는 발견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부내복종터가 있다 해서 이 지역을 종천이라고 부른다 한다.

 

(서천군지에서 발췌한 내용)

 

 

당정리 화산 정상에서의 지세 확인

 

 

내림길에 바라본 건너편의 희리산((327.1) 휴양림과 산천제 하경

 

 

화산 등로에 깔린 이끼

 

 

내림길

 

 

 

 

 

집 뒷편에 심어놓은 오죽(烏竹).

 

 

 

 

 

 
▲ 권혁구씨

우리 민족에 있어서 풍수지리 사상은 하나의 세계관이자 종교였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줄기의 흐름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고

산의 모양이나 물의 흐름을 동식물이나 사람 또는 물질에 비유하는 데 이를 형국론(形局論))이라 한다.

서천군에 ‘부내복종(府內伏鐘)’ 형의 대명당이 있다고 한다.

마을 안에 종이 엎디어 있는 형국이라는데 종천이라는 지명과 부내초등학교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부내복종에 대해 오랫동안 자료를 수집하고연구를 해온 권혁구(68)씨를 만났다.

 

그의 사무실은 부내복종의 혈처가 있다는 종천면 화산리 화산 기슭에 있다. ‘부내복종연구소’라는 간판을 달았다.

산 아래 장구만을 가리키며 그는 “장구만의 물문을 터야 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역수(逆水)로 오는 물이 기가 가장 셉니다. 그런데 판교천 하구를 막아 기를 차단했습니다. 막힌 기를 뚫어주어야 합니다.”


그는 농사철에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비수기 때에는 판교천 배수갑문을 개방할 것을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금강하구둑과

 새만금방조제도개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서해로 흐르는 모든 강줄기를 막아 이에 따른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고 한탄했다.
부내초등학교 학생들이 부내복종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찾아오자 그는 “4대강 사업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는 것부터 설명해 주었다 한다.


“수나라가 대운하 공사로 결국 망하지 않았습니까? 산천토지를 잘 가꿔야 나라가 흥합니다”
육군 군악대 출신으로 서천읍에서 예식장을 경영하기도 했던 그가 풍수지리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개간하던 국유지를 정부로부터

 불하를 받고부터였다. 바로 그의 집안이 일구던 산밭에 부내복종의 혈처가 있다 말을 들었던 것이다.


풍수는 집짓는 일이나 마을 터를 잡는 양택풍수와 묘자리를 보는 음택풍수로 나뉜다.
조선조에 와서 음택풍수로 기울어진 것을 두고 권씨는 음택풍수가 발복이 빠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풍수에서는 산천을 파괴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고려조 충렬왕 때의 일이다. 왕이 중국의 궁궐처럼 크고 높은 집을 지으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의견이 나왔다.


“산이 드물면 높은 집을 짓고 산이 많으면 낮은 집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 만일 높은 집을 지으면 반드시 쇠퇴할 것입니다.”
이러한 풍수적 관념에 따라 높은 집을 짓지 않고 주위의 자연에 어울리려 했던 전통은 조선조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그는 남산성의 철탑도 반드시 이전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위는 넷상에서 권혁구 선생에 대한 기사를 발췌 내용이다.)

 

 

이른바 "부내복종연구원장"을 자처하시는

이 집의 쥔장  土石 권혁구 선생의 초청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쥔장이 지켜 보는 가운데 月星 이윤표 선생(右)께서 수맥 흐름을 측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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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공부와 온갖 잡서와 비결서를 섭렵해도 번번히 물을 먹는다는 풍수의 세계.

토정 이지함 조차도 물을 먹었다는 부내복종(府內伏鍾)의 혈처,

서천군 종천리의 들판과 장구만 일대.

 

 화산 위에 올라 종천리 일대를 조망해 본다.

금강이 흘러 내려와 마을 앞을 휘감아 도는 형국인데 바다의 형국이 마치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

동행한 지관께서 당신의 공부를 총 동원 세세하게 훑고 나서,

초청자이자 "부내복종연구원장"을 자처하시는 토석 선생과 한 판 설전을 벌이는걸로 봐서

이해와 상충의 부분이 명료하게 엇갈리는 형세.

 

산을 내려와 토석 선생께서 마련한 식탁 앞에 좌정,

튼실한 장어구이를 앞에 놓고 쐬주로 혀를 씻을제,

두 분 말씀 모두가 이 사람으로선 세세히 새겨 들어야 할 무쌍한 논변이요 경전이로고.

 

 

천하의 지관 토정 이지함도 결국 찾지 못하고 말았다는 부내마을 명혈.

 

'부내복종(府內伏鍾)'

 

 그곳은 과연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Alex Fox / Torna Sorren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