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조선팔도 선비문화교류 - 1편 -

댓글 6

자연/산행·여행·풍경

2012. 10. 16.

2012년 제2차

 

조선팔도 선비문화교류

 

- 1편 -

 

 

           _ 주최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주관 : 교육문화공동체 '결'

           - 후원 : 문화재청, (재)고봉학술원, 행주기씨문헌공종중, 광곡마을 주민,

                       광산문화원, 광주향교여성유도회, 광산구문화유산 해설사회

 

 

 

 

■ 답사일 : 2012. 10. 11 ~ 12    ■ 답사지 : 부여백제문화단지  / 강화도

 

- 첫날 -

 

백제역사재현단지 

-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

 

원래의 사찰 유적은 이 곳에서 논산 방향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부여 나성(羅城)밖의 능산리 고분군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거기에서 발굴 조사된 유적을 기초로해서 이곳 규암면 합정리에다 1:1 크기로 재현해 놓았다.

 

 

 

 

 

 

 

 

 

 

 

 

 

 

 

 

 

능사5층목탑

 

능사는 사찰 명칭이 밝혀지지 않아 지명(地名)을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발굴된 사찰이라 하여 능산리사지로 부르며 줄여서 능사(陵寺)라고 부른다.

면적은 17평에다 높이는 39m(목탑부 30m, 상륜부 9m)이며 약 28만재의 목재가 사용 되었다고 한다.

백제시대 사찰의 배치 특징은 남쪽에서부터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중심축선상에 배치되는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배치로서

부여 정림사지, 왕흥사지, 익산 미륵사지 등에서도 동일한 배치 형태를 볼 수 있다.

 

능사 전체의 규모를 살펴보면

5층 목탑, 금당, 강당, 회랑, 등 총 1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목장 최기영 선생이 지었다.

 

 

 

 

 

심 주 목

 

능사5층목탑 중심에 3개의 나무로 연결되어 있다.

 

 

 

 

 

목조삼존불

 

 

 

 

 

 

 

 

 

 

 

중궁 정전

 

사비시대의 왕궁을 재현 중 인데, 외부는 2층, 내부는 1층으로

높이 19m, 면적은 102평으로 27만재의 목재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특징을 살펴보면, 백제 건축만의 특징이랄 수 있는 서까래 모양으로 경사지게 돌출된

부재로 되어 있는 하항(下昻)구조를 들 수 있겠고,

또 하나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밝은 단청과 대비되는

다소 어두운 색채의 오방색(五方色)을 들 수 있겠다.

 

참고로, 계백장군의 묘 옆에 지어진 사당에서도 이와 유사한 색상의 단청을 볼 수 있다.

 

 

 

 

 

 

백제가야금연주단

 

 

 

 

 

중궁 정전 내부에서 중남문을 바라본 모습으로

마당 가운데의 어도(御道)에는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문양전(紋樣塼) 8장 중의 하나로

임금을 상징하는 용문전(龍紋塼)을 복원하여 깔아 놓았다.

 

 

 

 

 

 

 

 

 

 

 

 

재현 칠지도

 

칠지도에 대한  분분한 해석을 종합해보면, 논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칠지도의 제작 시기를 알려주는 ‘태△ 4년’이 과연 언제인가 하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제작 주체,

곧 왜왕에게 칠지도를 만들어준 정치체가 과연 누구이며 어떤 목적을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태△’는 연호임에 틀림없는데, 어느 나라의 연호인지가 문제이다. 처음에는 태초(泰初) 혹은 태시(泰始)로 읽고,

중국 전진(前秦)의 태초(太初, 386∼394)라든가 서진(西晉)의 태시(太始·泰始, 265∼274), 남송(南宋)의 태시(泰始, 465∼471)

등에 주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는 태화(泰和)로 읽고 위(魏)의 태화(太和, 227∼232), 동진의 태화(太和, 366∼371),

 북위(北魏)의 태화(太和, 477∼499) 등에 주목하는 연구자가 많은 편이다. 또한 ‘태△’를 백제의 연호로 이해하기도 한다.

리고 명문의 ‘5월’을 6월 또는 4월로 판독하기도 하며, ‘16일’을 11일 또는 13일로 판독하는 사람도 있다.

 

대다수의 연구자는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에게 준 백제의 왕이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일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간지(干支)가 딱 맞아떨어지는 전지왕(腆支王) 4년(408)이라든가 동성왕(東城王) 2년(480)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연구 결과도 있다. 칠지도를 만든 주체와 목적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①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이라는 설, ②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③동진왕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④대등한 관계에서 백제왕이 왜왕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설 등이 있다.

①설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 52년조의 “백제의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와서

칠지도 하나와 칠자경(七子鏡) 하나, 그리고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는 기사를 염두에 둔 입장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신공기 기사가 매우 왜곡된 것이라는 데에는 학자들이 모두 공감하고 있으므로, 오늘날에는 거

의 부정되고 있다.③설은 명문에 동진의 연호(태화)가 사용되었다는 점과 뒷면에 성진(聖晋)으로 읽을 수 있는

문자가 있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적지 않고,

‘성진’보다는 ‘성음(聖音)’일 개연성이 더 높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

의의와 평가

결국 칠지도 문제는 ②설 또는 ④설의 입장에서 검토해야 한다. ‘제후국의 왕’ 운운하는 문구가 있는 점,

왜왕의 이름 ‘지(旨)’가 거명된 점,

칼을 준 사람이 왕세자일 개연성이 높은 점,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는 문구가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②의 백제왕 하사설이 상대적으로 더 타당한 듯하다.

한편 최근에 칠지도의 모양을 중국 산동성 가상현의 무씨사당화상석에 보이는 명협(蓂莢)과 연결시킨 연구가 주목된다.

육협(六莢)은 한 해를 의미하는데, 육협의 가운데 줄기를 세우면, 칠지도의 모양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칼의 모양을 달력을 상징하는 명협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칼을 만든 주체의 왕자적(王者的) 성격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

 

 

 

 

 

재현 환두대도

 

 

 

 

 

 

 

 

 

 

 

 

마구리장식기와

 

 

 

 

 

 

상자모양벽돌

 

 

 

 

 

산수문전(山水文塼)

 

 

세로 29.6㎝, 가로 28.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343-1호. 1937년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외리의 옛 절터에서

출토된 8문양전(보물 제343호)과 함께 출토된 것이다. 산수문양을 얕은 부조(浮彫)으로 판형을 떠서 구워 만든

고대 문양의 일종으로,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전개된 산수문의 특징과 함께 초기 산수화의 시원적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하단에는 수면을, 중간의 넓은 부분에는 선산(仙山)으로 생각되는 산악을, 상단에는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을 표현하였고,

산악의 중앙 하단과 그 오른쪽 아랫부분에는 건물과 스님 같은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둥근 삼산형식(三山形式)의 토산(土山)은

약간 도톰하게 부푼 모양으로 처리하고, 윤곽은 선조(線彫)로 강조하여 나타냈다.

 

토산 가운데의 높은 봉우리에는 윤곽의 능선과 같은 둥근 선을 긋고 그 사이에 속눈썹처럼 생긴 빗금을 넣어 부피감을 나타냈다.

토산의 좌우변과 하단에 총총히 서 있는 끝이 뾰족한 암산에도 구사되어 있는 이러한 빗금은 준법(皴法 : 동양 산수화에서 입체감을

나타내는 화법)의 시원적 양식으로, 6세기 중엽 무렵에 제작된 중국 남북조시대 석각화(石刻畫)에 묘사된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토산의 능선에 늘어서 있는 수목의 표현은 7세기 전후 무렵에 조성된 고구려의 내리(內里)제1호분의 산악도 수목과 비슷한

모습으로 다루어졌다. 각 경물들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고 형태들도 도안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균형잡힌 구도와 인물·건물의 점경적 배치, 산과 산 사이의 공간감 조성과 함께 산수경관다운 서정적 분위기의 표출 등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산악도들보다 발전된 양상을 보인다.

 

백제 특유의 완만하고 부드러운 기법으로 만들어진 이 산수문전은 건축물 부재(部材)에 장식된 문양이면서도

우리나라 산수화 발달의 초기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

 

 

 

 

재현 무령왕릉

 

 

 

 

 

 

 

재현 금동대향로

 

백제시대 발굴사업의 최대 성과물로 높이 64cm, 무게 11.8kg이나 되는 대형 향로이다.

백제시대 문화 역량의 모든것이 집약되어 있다라는 평.

 

 

 

 

 

 

 

 

 

 

 

 

 

 

 

 

 

 

 

 

 

 

 

 강화도 삼랑성(三郎城) 남문

 

전등사 일대를 에워싸고 있는 삼랑성은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성은 고대 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부우·부소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후 토성 자리에 표면이 거친 할석(割石)으로 성을 쌓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은 성 안팎을 할석으로 겹축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를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해발 222m인 정족산의 정상에서 동향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향한 계곡에 수구와 남문이 있다.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안부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있다.성벽이 꺾어 도는 곳마다 10여 개의 곡성을 이루며,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성(雉城)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 전등사 홈피 참조-

 

 

 

 

 

전등사( 傳燈寺)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다는데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1266년(원종 7) 중창하였고,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1282년(충렬왕 8)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

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玉燈)을 시주했으므로 절이름을 전등사로 고쳤다 한다. 그러나 현재 그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1337년(충숙왕 복위 6)과 1341년(충혜왕 복위 2)  중수하였다.

1605년(선조 38)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 버렸고, 1613년(광해군 5)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해서 1625년(인조 3)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

 

1678년(숙종 4)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으며,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다.

1719년 이 절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가람 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山地伽藍)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대웅보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명부전·삼성각·향로전·적묵당·강설당·종각·대조루(對潮樓) 등이 있다.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史庫藏本)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韓永福)이

 이 절에 전래되어 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宮內府)에 바치고, 중수비 200원(圓)을 받아 절에 내렸다.

 

-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

 

 

 

 

 

대웅보전

- 보물 제178호 -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졌다.

닫집의 화려함도 볼만 하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았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전등사 홈피 참조 -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裸女像)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하였다고.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했다는 말씀.

 

 

 

 

 

 

 

 

 

 

 

 

 

 

 

 

 

전등사에서  - 고은 -

 

강화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옛날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온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 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전등사 템플스테이

 

 

답사단 일행의 저녁 타종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하다.

이 종은 1097년 중국 하남성 숭명사에서 조성된 것으로 음통이 없으며 겉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 표면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이 종은 기하학적 무늬로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 종의 솜씨를 보이며 종소리가 맑고 아름다운 게 특징이다. 

일제 말기 군수 물자 수집에 광분한 일제가 공출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가는 바람에 한때 전등사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

 

- 전등사 홈피 참조 -

 

 

 

 

 

청동수조

전등사의 청동수조는 지름 112cm, 높이 72cm로 고려 충렬왕 때 정화궁주가 시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수조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수조 안에 물고기나 자라가 놀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청동수조는 불을 끄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며 물을 항상 담아 두었다가 긴급할 때 사용하였다.

중국에서는 수조(드무)를 아주 중요시 여겼다.
공중에 떠돌아다니는 불귀신이 불을 일으키러 큰 건물을 골라서 다니다가 드무 안의 물에 비친 자기의 흉악한 몰골을

보고는 동료가 불장난하러 와 있는 줄 알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전설도 있다. 인천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다.

- 전등사 홈피 참조 -

 

 

 

 

 

 

 

 

목조삼존불좌상

인천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된 목조삼존불좌상은 1623년(광해군 15)에 조성되었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의 높이는 125cm이고 무릎 폭은 88cm로 원만한 얼굴에 유난히 큰 귀를 하고,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채 결가부좌하고 있다. 신체는 우견편단의 법의를 걸치고, 가

슴께에는 군의를 묶은 자락 위에 3개의 꽃잎 모양이 있다.

 

- 전등사 홈피 참조 -

 

 

 

 

 

 

저녁예불에 참석한 답사단

 

 

 

 

 

저녁 예불 후 해인(海印) 스님과의 다담(茶談)

 

 

 

 

 

하곡학(霞谷學)과의 만남 

 

- 양명학의 형성 -

주자학은 그 체계가 완비되어 있어 원나라 때부터 수양과 실천을 위주로 할 뿐 이론적인 독창성이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 초기 진헌장(陳獻章)은 독서에 의한 자기수련방법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서를 버리고 정좌(靜坐)를 통하여 사색한 끝에 '곳을 따라서 천리를 체인(體認)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문인 임광(林光)은 진헌장에 대해서 "선생께서 교육할 시초에 반드시 정좌케 하여 그 착한 실마리를 기르게 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하는 까닭은 도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도(道)를 서적에서 찾으나 얻지 못하니 도리를

내 마음에서 찾는 것이 옳겠다'라고 했다." 이로써 진헌장의 심학(心學)은 양명학의 선구가 되었다.

 왕수인은 저장 성[浙江省] 위야오 현[餘姚縣]에서 태어났으며, 젊어서는 많은 정신적 편력이 있었다.

그는 용장(龍場)으로 귀양가서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만으로 스스로 넉넉하다. 따라서 밖으로 찾을 것이 아니다"라고

자각하게 되었다. 또 주자의 즉물궁리(卽物窮理)는 심(心)과 이(理)의 간격을 좁힐 수가 없으므로 격물(格物)의 격(格)을

주자처럼 '이르다'[至]로 해석하지 않고, 바로잡는다[正]로 했으며, 물(物)을 주자처럼 사물의 이라 하지 않고,

심의(心意)가 있는 인간사(人間事)라고 해석했다. 즉 심의 발동의 부정(不正)을 바루는 것[正]을 격물이라고 했으며,

치지(致知)의 지는 지식이 아니라 양지(良知)이니 양지를 수렴하여 확충하고 실현하는 것을 치지라고 했다.

그리하여 심즉리(心卽理)에 귀착하게 되었다. 뒷날 왕수인이 성인의 학문은 심학(心學)이라고 했듯이, 심학이 체계화되는

 기초가 여기서 마련되었다. 한편 구이양[貴陽]에 있을 때, 처음으로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하고, 저양(檍陽) 이후

정좌를 가르쳤으며, 강우(江右) 이래로 비로소 치양지(致良知) 세 글자를 제시하여 본체를 바로 지적했다.

흔히 왕수인의 교(敎)가 삼변(三變)했다고 하는데, 이는 지행합일설 - 정좌 - 치양지설로의 변화를 말한다.

지행의 본체는 심이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양지(良知)이기 때문에 지식과 실천이 심에 의하여 합일된다고 했지만

실천과 지식의 합일을 위하여 정좌공부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한때는 배우는 자가 깨우치는 듯했으나 오래됨에 따라

점차 고요한 것을 즐기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폐단이 발생해 치양지공부(致良知工夫)로서 그 폐단을 타파했다.

이처럼 양명학은 치양지설에서 체계가 완성되었다.

 

-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