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조선팔도 선비문화교류 - 3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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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2012. 10. 16.

2012년 제2차

 

조선팔도 선비문화교류

 

- 3편 -

 

 

 

           _ 주최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주관 : 교육문화공동체 '결'

           - 후원 : 문화재청, (재)고봉학술원, 행주기씨문헌공종중, 광곡마을 주민,

                       광산문화원, 광주향교여성유도회, 광산구문화유산 해설사회

 

 

 

■ 답사일 : 2012. 10. 11 ~ 12    ■ 답사지 : 부여백제문화단지  / 강화도

 

 

- 둘째 -

 

 

안해루(安海樓)

 

 

 

 

 

광성돈대(廣城墩臺)

 

강화도는 한강으로 들어가는 내륙 뱃길이 시작되는 관문이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특히 외적이 침략했을 때 왕실이 피란할 제1의 후보지였으며. 조선 조정은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의 방비를 더욱 강화해

5진과 7보, 153개의 돈대(평지보다 높은 곳에 설치한 관측소)를 설치했다. 섬 전체가 하나의 요새가 된 것.

 

 

 

 

 

광성돈대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때 많은 전사자를 낸 격전의 현장이다.

 19세기 중엽 조선은 통상을 요구하는 양인들의 빈번한 출몰로 심각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와중 흥선대원군은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을 지시했다.

병인년(1866년)의 박해로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해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것.

프랑스 함대가 이를 구실로 조선을 침입하게 되는데 이를 병인양요라 칭한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했지만 이후 문수산성과 정족산성 전투에서 연이어 패한 뒤 한 달여 만에 물러간다.

 그들은 퇴각하면서 대량의 은괴와 서적을 약탈하고 외규장각에 불을 질렀다.

 흥선대원군은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천주교 박해와 함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한다.

 

 

 

 

 

 

병인양요 5년 뒤인 신미년(1871년),

이번에는 미국 함대가 쳐들어오니 곧 신미양요다. 전장은 또 강화도였다.

 미국은 대동강에 정박했던 제너럴셔먼호가 조선 군민의 공격에 불탄 것을 따지며 통상을 강요했다.

미군과의 전투는 무기가 열세였던 조선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가장 치열했던 광성보 전투에서 미군은 3명이 전사한 데 반해 조선군은 350명이 목숨을 잃었다.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일어난 이 두 양요를 게기로 더욱 쇄국으로 치닫게 되는 조선.

 종래엔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불평등조약(강화도조약·1876년)을 받아들이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치욕과 수모의 현장.

세차게 흐르는 강화해협을 바라 보며 생각에 잠긴 답사 일행

 

 

 

 

 

홍남일 소장님의 해설

 

 

 

 

 

쌍충비각

신미양요시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신미양요 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하다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당시 중군 어재연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의 전사자 중, 어재연 형재는

고향인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손돌목돈대

 

일명 손석항돈대라고도 하며 구릉 정상부에 둥그렇게 쌓은 돈대이다.

강화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형에 자리하니만큼 그 역할을 짐작할 수 있겠다.

 

 

 

 

 

 

 

 

 

 

 

 세차게 감돌아 흐르는 강화해협에 불쑥 머리를 내민 용두돈대 가는 길

 

 

 

 

 

용두돈대는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위에 설치된 천연 교두보로

1679년에 세워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되었던 곳이다.

 

 

 

 

 

 

 

 

 

 

 

 

 

 

 

 

 

 

 

 

 

 

강화고려궁지

 

사적 제133호.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부터 1270년(원종 11)까지 39년간 사용했다.

〈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에 의하면 최우가 1232년 6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건립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234년 본격적인 궁궐과 백사(百司)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었고 궁궐의 뒷산도 송악(松岳)이라 했다.

고려궁의 정문은 승평문(昇平門)으로 양쪽에 3층루의 문이 2개 있었고, 궁내에 많은 관아·전각·창고·문이 있었으나

 1270년 송도환도 때 모두 허물어졌다. 1631년 행궁(行宮)을 고려 옛 궁터에 건립하면서 장녕전(長寧殿)을 지어

조선 태조와 세조의 영정을 모셨고, 강화유수부 건물들과 규장외각을 건립해 많은 장서와 문서를 보관했다.

그러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책과 서류를 약탈해갔으며 많은 건물이 불탔다.

지금 고려궁지에는 1638년(인조 16) 건립된 현윤관(顯允館)이 남아 있는데 1769년 중수하면서 '명위헌'이란 현판을 붙였다.

1977년 고려궁지를 보수하면서 담을 설치하고 고려궁지 진입로 옆에 있던 강화동종을  경역 내부로 옮겨놓았다.

 

 

 

 

 

 

 

 

 

 

 

 

 

 

 

 

 

 

강화동종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숙종 37년(1711)에 제조한 종으로, 높이 198㎝, 입지름 138㎝이다.

종 꼭대기에는 두마리 용이 좌우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부분이 돌출되었던 것의 변형된 모습으로 보인다. 어깨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9개씩의 연꽃으로 된 돌기가 있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2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 하였다.

횡선 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 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남아 있다. 이 종은 전통적인 고려 종의 양식이 퇴화하고,

조선 종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강화유수부 동헌

- 유형문화재 제25호 -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백하 윤순(尹淳)의 서체

 

 

 

 

 

 

강화 성당

 

 

 

 

 

 

 

 

 

 

 

성공회 강화성당

 

 

 

 

 

1900년에 건립된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으로 ‘성베드로와 바울로 성당’이라고도 한다.
사찰 양식을 본 떠 고요한(Charles Jone Corte) 초대 주교가 건립하였다.

바실리카 양식의 서양식과 한국 전통 건축양식이 혼재된 기와지붕 목조건물로 동서로 10칸, 남북으로 4칸으로 구성되었다.

중앙에 성당을 배치하고 서쪽에 동종과  후미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성당이 서양식 장식이 없는 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당시 한국인의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

천주교를 토착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성공회 소속의 한국인 신부가 처음으로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내부 모습

 

 

 

 

 

 

 

 

 

 

용흥궁 龍興宮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철종어진 御眞

 

현대/비단에 채색/114×164㎝ 복제

 

철종어진 진본은 1861년 (철종12년) 이한철, 조중묵 등이 그린 것이다. 

융복(군복)차림으로,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보기 드믄 손의 형태를 볼 수 있는 어진이다.

 1954년 부산 창고에 불이나 오른쪽 화폭의 1/3 쯤 소실되었다.

위 어진은 복원된 어진을 올 봄 전주 경기전에서 찍은 것이다.

불에 탄 1861년의 철종어진(보물 1492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사도세자 사후....

 

그의 아들 정조가 세손이 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세력들이 음모를 꾸민다.

정조가 왕이 되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한 자들을 가만 놔둘리 없기 때문.

허나 음모가 발각되어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남은 형제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병사하고 은언군은 유배지를 강화도로 옮겨오게 되었으니...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이자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이다.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큰아들 또한 음모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고,

은언군의 아내 송씨와 큰아들의 처, 며느리 신씨등은 천주인으로 죽임을 당한다.

 

 1844년 정조와 순조의 뒤를 이은 헌종 10년.

은언군의 남은 아들 이광과 그의 아들 원경이 연류된 모사가 발각되면서 이광과 이원경 또한 죽게되니

이광의 남은 아들 경응과 원범은 또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천애고아가 된 두 사람은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고 있었는데...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는다.

이에 헌종의 7촌 아저씨뻘 되는  지겟꾼 이원범이 하루아침에 스카웃되어 왕위에 올려지게 되었으니,

이가 바로 철종이요 그의 나이 19살에 불과 했다던가....

 

 

 

 

 


Oscar Lopez/Loving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