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월봉달빛사랑방

댓글 2

문화/월봉 달빛사랑방

2013. 1. 12.

 

무연(無然) 스님과 함께하는

 

월봉달빛사랑방

 

 

- 제18회 -

 

주제 : 공평한 실재 / 삶과 죽음의 이중성

  

 

 

                                                                                                                       2013. 1. 11(금) 

 

 月峯茶談

 

 

 

 

 

 

 

 

 

 

 

 

 

 

 

 

 

 

 

 

 

 

 

 

 

 

 

 

 

 

 

강좌 서두,

장자(莊子)지락편(至樂篇)의 장자처사(莊子妻死) 고분이가(鼓盆而歌)에서 비롯한

고분지통(鼓盆之痛)을 말씀하신다. 

 

 

莊子妻死,惠子弔之,

莊子則方箕踞敲盆而歌 

 

 

//

장자의 아내가 죽자 혜자(惠子)가 조문을 갔다.

장자는 때마침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들기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鼓盆而歌)

 

혜자(惠子)는 부인이 죽었는데 슬퍼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장자(莊子)는 말한다. 아내의 죽음이 금방은 슬프지만,

그 처음을 생각해 보면 인간은 원래 생명이 없었고 형체도 기(氣)도 없었는데

나중에 기가 생기고 기가 유형(有形)으로 변하고 형체가 생명을 갖추었다가 다시 죽음으로 바뀌게 되었으니

사계절의 변화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내는 죽은 후 천지(天地) 사이에서 편히 쉬고 있는데,

 통곡 하면 내 스스로가 천명을 깨닫지 못하는 짓을 하는거지.

해서 울음을 그치고 물동이를 두드리고 있다네. (鼓盆之痛)

//

 

 

 

대칭은 균형을 의미한다.

장자는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았다. 즉 대칭으로 본 것이다.

스티브잡스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큰 선물이다."

불교식 사고에서는 몸을 바꾸었을 뿐이다. 깊은 선정 속에 들어가 보면 사실 죽음이란 없다.

단지 입자가 흩어질 뿐이다. 정보가 흩어진 것을 거칠게 표현하면 쓰레기일 뿐이다.

내가 들고 있는 분필만큼의 질량이 소멸됐다 하더라도 이 우주 속에서 분필만큼의 질량이 가벼워 졌느냐?

다만 입자가 흩어진 것일 뿐이다. 우리 마음의 정체는 일정한 정보에 의해 입자가 뭉쳐진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 우리 몸의 정보에 맞게 입자가 뭉쳐져 마음이 된 것이다.

 

도교에서는 우주 에너지를 정,기,신(精氣神)으로 분류한다, 두 자로 줄여서 정신(精神이라 한다.

정()은 자연의 순수 에너지이다. 정,기,신 셋 중에서 가장 거친 에너지 형태인 것이다.

이 중 기와 신은 정()이 가장 정제된 상태인 것이다. 도교에서는 신(神) 마저도 물질로 본 것이다.

 일례로 물리학자들은 죽음의 순간에 사람 몸의 질량 중 27g이 가벼워 진다고 한다.

사라지는 27g의존재는 다름 아닌 정신의 무게라고 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쇼크 상태에 빠진진다고 본다. 심지어 수면 까지도 죽음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죽는 것이다. 하루의 사이클이나 백년의 사이클도 같다는 말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음 생에 있어 나는 어디가서 수행을 할 것인가이다.

나는 금생에 스승을 잘 만났다. 허지만 스승을 잘 못 만나면 불교의 핵심적 메시를를 결코 얻지 못한다.

문제는 핵심을 놓치지않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라고 본다.

불교의 '심우도'의 표현에 첫 번째로 소 울음(진리의 낌새)을 듣고, 두 번째는 꼬리를 보고

세번째는 몸통을 보는 순서로 되어 있다. 핵심은 '기도와 정진'에 있고 그 중 가장 상위 개념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자기정화'와 '정진의 조화'에 있다. 기도와 참선 없이는 진아에 이르지 못 한다는 말씀.

 

문제는 서양적 지식과 관념과 논리에 지배당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흑인 노예 지배를 정당화 한 수단은 이원론적 서양식 논리다.

지극히 목적론적인 존재론으로 밖에 빠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비교 분석을 위해서는 서양철학의 일별은 있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동양적 철학의 근저는 대칭구조인 것이다. 즉 균형, 상생, 조화인 것이다.

지식(知識)에 있어 원래의 知는 알知가 아니라 지혜로 느낀다는 뜻이다. 안다는 것은 식(識)이다.

여기에서의 知는 관념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즉 '아직은 모른다'  '실감치 못한다'는 뜻이다.

불교는 죽검이나 목검이 아닌 진검해부를 요구하는게 매력이다.

좀 더 강력한 수행을 원하는 것이다.  '나'라는  자아의 해체와 강한 선정력을 끄집어내길 원하는 것.

'아(我)'가 끝나는 곳에 숨어있는 영적 에너지를 끄집어 내어 우주의 본질을 자각하라이다.

식(識)에서 지(知)로 가기 위한 부처의 교육이 곧 '위빠사나요' '반야심경'이다.

 知는 앎이요,(그렇구나)   식(識)은 느낌이다.(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에서 즉(卽)은 무엇인가?

260여 자 불교의 정수리 반야심경을 가느다란 체로 걸러내면,  즉(卽) 딱 한 자가 튀어나온다. 

 팔만대장경을 녹여낸 단 한 자가 바로 즉(卽)이라는 말이다. 즉(卽)은 바로 대칭구조라는 사실.

有즉無라. 완전한 無는 결코 변할 수 없다. 有의 외형이 변해서 無가 된 것이다.

이 우주에 완전한 無란 있을 수 없다. 이 것을 강조키 위해 부처는 無... 無... 無...라 말 한 것이다. 

  집착을 버리라는 말씀이자 조건부 생멸(生滅)에 관한 대칭적 구조론과 연기론을 부처가 밝혀낸 것이다.

생과 사는 불이가 아니라는 것. 생과 사 사이에 즉(卽) 자를 넣으면 전일적(全一的) 삶이 되는 것이다.

굳이 말 하자면 즉자적(卽自的) 관계이지만 그렇다고 관계는 아니다. 다만 방편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참선이 요구하는 궁극적 마음자리는 '무념무상'과 '유념유상'의 흐름을 살피는 것.

무한대 분의 자아는 제로와 같거나 다를 뿐, 전일적 존재로 드러나는 것이다.

 

공간축의 개념을 시간축으로 돌리는 것도 대칭성이다. (티벧승려 염소도축에 앞 선 기도의 예)

대칭 구조 안에서의 생사는 그리 어렵거나 슬프지 않다. (정보 파일의 동사화)

깨어 있으면 내가 선택의 주체가 된다 . (선정력을 갖추면 다음 생의 방향성을 내가 스스로 선택)

계(界)는 공간을 말 한다.

부처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사념체) 모조리 아(我)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말한다.

 육도(六道)가운데 가장 중도를 정확하게 각성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월봉달빛사랑방' 교재랄 수 있는 

 Ken Wilber 저, 김재성. 조옥경 역,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417쪽)" 의 한 대목을 읽어 주신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당신은 신에게 감사를 드린다.

(참고로, 무연 스님께서는 라마나 마하리쉬를 정신적 스승으로 여기신다고.)

하지만 나쁜 일에 대해서는 감사드리지 않는다. 거기에 잘못이 있다." 이 말은 뉴에이지 운동의 잘못을 매우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어쨌던 요점은 이렇다. 신은 자기중심적인 경향을 처벌하거나 보상해주는 신화적

부모(Mythic Parents)가 아니라 공평한 실재이자 드러난 모든 것의 본질이다. 매우 드문 경우긴 하지만,

이사야 Isaiah 조차도 "나는 좋거나 나쁜 일에 똑같이 빛이 들게 한다. 주(主)이신 나는 이 모든 것을 행한다"

라고 말했다. 선과 악, 쾌락과 고통,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이라는 이중성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드러난 모든것'과 '일미(One Taste)' 인 우주 전체와의 비이원적인 일체감에서 벗어나 있는 셈이다.

라마나는 우리가 고통, 질병, 통증과 친해져야만 진정으로 전체, 즉 진아(眞我)와의 더 크고 광범위한 일체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진아는 삶의 희생자가 아니라 공정하게 지켜보는 자이며, 원천이라는 것이다.

특히 라마나는 궁극적인 스승인 죽음과 친해지라고 말한다.

 

 

- 공평한 실재이자 드러난 모든 것의 본질 -

 

아주 지성적 표현이다. 서양식의 메뉴얼이 아니라 동양의 선정력을 가지고 신의 개념을 분석한 것이다.

동양적 사고는  결코 존재자로서의 神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대 분의 1일 뿐이다.

전일적 삶이자, 영원히 개방되어 있어야 한 그 무엇인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부처의 매력은 이런 것이다.

"무슨 얘기던, 어떤 것이던, 심지어는 내가 하는 말이라도 한 번쯤 의심해 보라고...."

'무조건 따라 오라'가 아니고 '와서 검증 해 보라'인 것이다.

 

 

- 선과 악 ,쾌락과 고통,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이라는 이중성에 사로잡혀 있다면 -

 

죽음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는 죽음이라는 실재에 대해 멀리하고 거부하면서 부터 삶은 허약해 지기 시작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죽음을 가까이 하면 삶은 아주 건강해 진다.

이분적 사고에 함몰되어 있기에 직자적 관계의 의미 부여를 자기 자신이 계속 거부하는 것이다.

나는 희로애락애오욕의 칠정(七情)을 음양(陰陽)의 파장이라고 본다.

심리 속에서 음양의 대칭 구조가 이루어지면  심층적 평화는 완성되는 것이다.

怒도 괴롭지만, 너무 강한 喜도 괴롭다는 사실이다. 칠정(七情)도 결국 질량인 것이다.

 차고 무거우면 陰이어야 하는데 陽인 경우가있다. 바로 확신범의 범죄심리이다. (영화 피에타 무표정의 예)

이전 강좌에서도 말 했지만, 음과 양이 플랫되어야  비로소 감성이라는 질량은 생성된다

 죽음과 친해지기 시작하면 내 주변의 존재가치는 무한 확장된다는 사실.

 

달라이라마는 말한다. 누구라도 죽는다. 언제 죽을 지 모른다.

 

 

 

 

********** 에필로그 **********

 

 

無역량의 이내 염량으로 무연스님의 강좌를 문자화 시켜보겠노라 종일토록 씨름 했다는 자체가

어찌보면 스님께서 그리도 강조하신 '심층적 평화'에 배치되는 사안은 아니었을까?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면 모든 걸 내려놓고 잊어야 한다는 궤변을 합리화 시키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그럴 수가...!

그 어떤 고승을 알현하더라도 이런 알토란 같은 내용의 법문은 내려 받기가 쉽지 않을 터.

회를 거듭할 수록 '자아동일시'는 차츰 멀어지고 '심층적 평화'로의 여행은 점점 가까워 오는 듯.

 

1월 혹한 속에서도 '월봉달빛사랑방'이 내뿜는 열기는 점입가경이라.

이 아름다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마냥 기쁘고 즐거울 뿐.

 영혼을 살찌워 주시는 무연 스님과 강선생님을 비롯한 월봉학파 여러분께 정중한 새해맞이 큰 절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