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월봉달빛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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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월봉 달빛사랑방

2013. 2. 2.

무연(無然) 스님과 함께하는

 

월봉달빛사랑방

 

 

- 제19회 -

 

 

주제 명상 1, 언어(言語) 내려놓기

  

 

                                                                                                                                                        2013. 2. 1

 

 

 

 

 

 

 

 

 

 

 

 

 

 

 

 

 

 

 

 

 

 

 

 

 

 

 

 

 

 

 

뉴페이스 자기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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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nce

명상으로 들어 가는데 있어 위 단어의 비중이 상당히 높음을 알 수 있다.

일종의 가수면(假睡眠) 상태로 생각이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의식불명을 뜻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무의식 속의 행동과 패턴이 DNA화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복제 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업의 관성이 아주 세기 때문이다. 

금생의 충격이 강하면 강할 수록 DNA화 되고 관성은 다음 생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후 49日 안에 업에 의한 다음 생이 결정되는 것으로 본다.

강렬한 갈증에 의해 내가 들어가야 할 자궁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일례로, 밥은 한 달을 안 먹어도 살 수 있지만 물은 일주일 정도만 마시지 않아도 죽게된다.

갈증을 30분만 참아도 우리는 물을 찾게된다.  이성이 물을 찾는다는 뜻이 아니라

무의식, 즉 우리 몸이 모자란 수분을 찾고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다시 말 해,

 이성(理性)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도 될까? 라는 것이고, 무의식은 해야만 되는 것이다.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12연기((緣起)에 첫번째로 등장하는 무명((無明)이라는 것도 

내가 살피건데, 어떤 점에서 보면 trance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2연기 중 두번째의 (行)선택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 가장 중요하다.

사후, 3,4일 동안은 쇼크상태로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이다.

내 몸에 대한 집착이 아직은 남아있는 상태다.

 

여기서 다시 "자아동일시"가 등장하게 된다.

숨이 멈추고, 유체이탈을 했다고 해서 영(靈)이 금방 새 집을 찾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연사 했을 때의 식() 가장 맑다고 본다. 반대로 원한을 갖고 죽는게 최악의 죽음이다.

귀신이란 강렬한 원한이다. 자기 몸에 대한 '자아동일시'의 극대화가 바로 귀신인 것이다.

'자아동일시'가 극에 달하면 결코 '자아동일시'는 해체(解體)되지 못하는 것이다.

 

자동차가 시속 60km 정도일 때는 180도 정도가 시야에 들어 온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점점 더 좁아지게 되고, 300km가 되면 시야가 15도로 좁아지게 된다.

'자아동일시'의 집착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시간이 좁아진다는 말이다.

귀신이 공간과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원한의 업에 대한 관성의 집착인 것이다.

'자아동일시'가 그만큼 무섭다는 얘기다.

 

부처가 중생을 볼 때는, 모두가 행동과 생각을 통제하지 못하는 가수면 상태이자

 무의식의 상태,  바로'자아동일시'의 과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내가 명상을 공부하기 위해 trance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바로 이 자리 여러분의 상태가  바로 trance, 가수면 상태인 것이다.

여러분은 바로 인정을 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내 자신 인정을 하기 시작했다.

참선을 하다 보니 나는 가수면 상태를 알게 된 것이다.

각성(覺醒)을 하기 전 모든 사람의 상태가 바로 trance 상태라고 보면 된다.

trance 상태에서 행동하고, trance 상태에서 선택하고,  trance 상태에서 판단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부처 당신이 발견한 내용임과 동시에 굉장히 에네르기가 높은 말이다.

 

  '자아동일시'가 깊으면 깊을 수록 시간은 정지된다.

문제는 시간이 헤체되어야 하는데 귀신의식은 그 때, 그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자아동일시'의 가장 극단적인 결과인 것이다. 앞서 자아는 심리적 질량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존재하고자 한다. 어떤식으로든지 자아를 드러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trance 상태에서는 자기 자신의 자아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인식을 못한다는 말이다.

 

나를 드러내는 순간에 나는 드러났지만,

그 존재라는 포멧 안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그림자가 생겨나는 것이다.

반복해서 얘기하지만 불교에서의 는 물리학적 서술로 시간과 공간의 flat 상태라고 말했다.

불교 심리적 flat해석은 나라는 존재가 해체됨으로서 시간과 공간에서 간(間)이 빠진 것이다.

인간 본성의 모순은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 놓고 영원하길 바란다.

하지만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에 바로 시공간의 에 휩싸여 지극히 유한해지게 된다.

늘 말 했듯이 질량이 생성되면, 질량만큼의 원자가 헤체되어 나가는 시간이 곧장 따라오는 것이다.

 영원불멸 하고자 했는데 막상 드러내 놓고 보니 시간에 잡혀버리고 마는 꼴이다.

바로 trance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네 개짓는 소리에서 벗어나려면 그 소리를 수용해야 한다. 조용히 끌어 안으면 된다.

 이것이 춤이요, 바로 고통 끌어안기 인 것이다.

여기서 '멈춤'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뭘 멈추란 말인가? 바로 trance 이다.

여러 가지로 연구해 볼때 trance = 무명((無明) 등식이  아주 유효하다고 보는 것이다.

분명 개짓는 소리는 날카로운 고주파지만 Let It Be " 그냥  한번 놔두고 바라 보라는 말이다.

어떤 목적론적 존재론에다 가둬놓는 이분법적  판단으로 부터 벗어나지 않는다면

trance 가수면 상태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지금의 강의는 목이 마르지 않은 여러분께 을 주고 있는 형국이다.

 

강의와 명상의 합일을 아쉬워 하는 무연 스님./

 

스승께서 지팡이를 짚고 잠시 노을을 바라 보고 있었는데 그 상태로 일주일이 흐른 것.

당신은 잠깐 노을을 보고 있었지만 일주일의 간(間)이 빠져 버린 flat 상태였던 것이다.

지극히 큰 것은 이 없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면  신은 무한대의 밖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대무외(至大無外)의 세계는 밖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 모두 빠져있어야 한다.

 

'멈춤'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인간은 언어의 노예이다.

동양은 직관적 언어(특히 한자의 경우)이다. 반대로 서양은 논리적 사고를 요구한다.

 타 종교의 누군가가 "불교는 비논리적이다."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정확한 표현하자면 " 불교는 탈논리적이다." 라고 하는게 맞는 설명일 것이다.

논리로는 결코 trance를 깰 수 없다. 왜냐하면 사유체계 자체가 이미 trance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양인이지만 이미 서양식 언어체계에 훈련되어 있다.

 이제는 직관적 철학체계의 기능과 직관사유 기능마저도 퇴화되어 있는 것이다.

부처는 언어적 직관이 가능했기 때문에 각성 또한 가능했던 것이다.

 

'멈춤'이라는 것은 논리적 사유체계를 버린다는 뜻이다. 논리는 또 다른 논리를 출생시킨다.

 한시(漢詩)를 직접 지어 보니까 당사자 말고는 그 뜻을 완벽히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극히 詩적 영감이 뛰어난 직관적 사유체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한시를 짓게된 심리적 배경, 그때의 감성, 이성, 고통의 과정 등을 지은이가 직접 설명 해 주어야만

완벽한 그 시의 내용을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자의 세계이다.

 

나는 오늘 "비움을 부화시키는 침묵"이 바로 명상이라는 색다른 해석을 내 놓고 싶다.

명상은 바로 직관 속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호흡이 지나가는 어떤 부분에 집중하는게 호흡명상의 시작이다.

가수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호흡은 바라보기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지그시 감은 눈을 바라보며 자기 돌보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에 맏겨 놓지 말고 최대의 안식처인 자기 내면을 바라 보라는 뜻이다.

 "비움을 부화시키는 침묵"이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감성은 칠정(七情)으로 드러난다. 이때의 가장 특징적인 변화는 호흡이다.

 deep breath에서 얕은deep breath로 가는 것이다. 칠정(七情)이 정리되어야 로 가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無는 완전한 nothing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에서 이 빠져버린 지대한 을 말하는 것이다.

flat 되었다는 것은 주름이 펴졌다는 뜻이요, 그 주름 사이가 바로 間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참선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무의식과 trance,  무명((無明) 등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healing은 불가능하다.

 

 침묵(沈默)의 설명을 위해 deep breath(심층적 호흡)을 말 하고자 한다.

불교공부는 무의식과의 싸움이라 정리할 수 있다.  결코 업의 관성에 자신을 맏겨서는 안된다.

 

 

 

 


 삼매(三昧)란 '자아동일시'가 끝난 상태이다.

플릇 / 슈베르트 세레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