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과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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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18. 12. 20.


언어와 문자를 초월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에서는 경전이나 예배 공간에 구애됨 없이 참선이나 수행만으로도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직관의 체험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이는 선종이 경전이나 특정한 격식에 치중함으로써 드러난 기존 불교계의 문제점과 한계를

해결하려는 입장에서 성립된 새로운 신앙체계였기 때문이다. 특히직관의 개념은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할 때 말없이

한 손으로 꽃을 들자 제자들 가운데 가섭迦葉만이 오직 그 뜻을 이해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하였다.

 이를 염화미소拈笑 내지 염화시중拈華示衆이라고 하며, 부처의 말이나 글에 의거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르침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선종의 종지宗旨인 이심전심以心傳心은 일찍부터 시작되었지만, 교종에 대립되는 독립적인 종파로 발전한 것은

 인도 승려 보리달마菩提達磨가 520년 무렵 중국에 도착한 이후부터이다.


선종의 두드러진 특징은 경전과 이에 근거한 교의敎義을 무시한 것이며, 4대 종지인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통해 그러한 신앙체계를 직설적으로 표명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교외별전은 경전이 아닌 특별한 가르침을 통해 법이 전해진다는 의미이다.

직지인심은 바로 사람의 본심 자체를 가르친다는 것이며, 견성성불은 자신의 마음을 살펴 성불에 이르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결국 선종은 언어와 문자를 초월해 좌선坐禪이나 특정 행동의 반복만으로도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마음에 근거한 직관의 지혜와 일상에서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더불어 선종은 인도의 공空 사상을 중국 도가道家의 무無나 빌虛의 개념으로 받아들였고

여기에 성불成佛 사상을 결합하였기 때문에 '중국화된 불교'라고 할 수 있다.


개조開祖인 달마대사達磨大師(?-528)는 남북조시대에 양나라 무제武帝(재위 502-549)를 상대로

불법을 전하려 하였으나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밤 갈대 잎사귀에 의지해 양자강을 건너 북위北魏로 피신하였다.

하남성 낙양에 도착한 그는 숭산嵩山 소림사小林寺에서 9년간 면벽좌선面壁坐禪으로 가르침을 직접 실천하였다.

 제2조인 혜가慧可(487-593)는 달마에게 불법을 배우기 위해 문 앞에서 밤새도록 눈을 맞으며 서 있어야 했으며,

 이른 아침 오른쪽 팔뚝을 절단한 다음 파초 잎사귀에 글을 써서 바치는 고통을 경험한 뒤에야 달마의 제자로 인정받게 된 일화이며,

이후 제3조 승찬僧瓚(?-606), 제4조 도신道信(580-651), 제5조 홍인弘忍(601-674), 제6조 혜능慧能(638-713)으로 이어졌다.


특히 제5조 홍인은 그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호북성 황매현黃梅縣에 위치한 동산사東山寺로 모여든 제자가

700여 명에 이르며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하지만 홍인에게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은 神秀(606-706)를 제치고 갑자기 등장한 혜능이

제6조가 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후계자 선발 계송에서 신수는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으니 쉬지 않고 수련해야 한다는 내용의

시를 지은 반면, 글자를 전혀 모르는 혜능은 사람의 마음이 바로 보리심이라며 선종의 핵심을 직설적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승의 의발衣鉢을 받은 혜능은 다른 선승들의 박해가 두려워 강남 지역으로 피신하여 광동성 소주韶州의 寶보림사林寺와

 대범사大梵寺를 중심으로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돈오頓悟의 선법을 설파하였고, 신수는 북방 지역에서 점진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점수漸修를 강조하였다. 이는 남능북수南能北秀 또는 남돈북수南頓北修라고 하며, 깨달음에 이르는 방식의

차이를 나타낸 것이다. 특히 혜능의 뛰어난 제자들이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남종선南宗禪을 알리면서

오가칠종五家七宗이 성립되고 교단도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선종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승관계를 통해서만 법이 전해진다는 것이며, 법통을 이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몇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먼저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내용을 시로 읊는 것을

오도송悟道頌이라 하며, 스승에게 이를 인정 받고 의발을 받아야만 적통이 되었다. 그리고 깨달음에 이른 다음에

이를 유지하는 것음 보임補任이라고 한다. 참선할 때 마음에 담고 있는 화두를 모은 택을 화두집話頭集

또는 공안집公案集이라 하며 수행 과정에서 제자들에 의해 경전처럼 신앙되었다.

남종선의 초석을 마련한 혜능이 지은 『육조단경六祖壇經』이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남종선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된 것은 오대五代이며, 이때부터 일상에서 선禪의 개념이 실천되기 시작하였다.

송대에는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사대부들이 선종의 수행 방법인 '참선'을 정신적, 육체적 수양 방편으로 받아들이면서

 생활 종교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사대부와 선승의 교유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서화 작품 등에

선적禪的인 요소들이 적지 않게 반영되었다. 1086년경 영종英宗(재위 1063- 1066)의 사위였던 왕선王詵의 정원인 서원西園에서

소식蘇軾(1037-1101), 이공린李公麟(1049-1106), 미불米芾(1051-1107) 등 16명의 문인들이 모여 시서화와 음악을 즐겼던

 모임에 선승 원통대사圓通大士도 참여하였다. 이 모임은 유명한 서원아집西園雅集으로, 비록 허구임이 밝혀졌지만

문인들과 승려의 교유가 잦았던 정황을 유추하는 데 충분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원대에도 선종은 몽고족의 종교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 덕분에 지속되었으며, 명대 중반에 이르러

강남 지역 문인들이 북송 사대부처럼 일상에서 선을 실천하고 선승과 교유하면서 선풍이 다시 붐을 이루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당시성행한 출판업에도 영향을 미쳐 석가모니를 비롯아여 선종 조사祖師와 나한 등의 간략한 전기나

 관련 인물 삽화가 『선불기종仙佛奇踵』(1602)과 『삼재도회三才圖會』 (1607) 등에 포함되면서, 선종이 대중 사이로 확산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한국과 일본으로 전래되어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의 도상이 다양해지는 데 기여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선종이 처음 전래된 것은 784년 당나라를 통해서이며 본격적인 설파는 821년 당나라 유학승 도의道義가

귀국하면서부터이다. 그의 제자 體증이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를 중심으로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열면서 나말여초에 구산문九山門이

 성립되었다. 이처럼 선종이 경주가 아닌 지방에서 포교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은 중앙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던 지방 호족의 성향과 기존의 교종을 부정하고 수행을 강조하는 선종의 혁신적인 성향이 일치하며서, 그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이 구산문을 조계종으로 통합하여

중흥을 시도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선종이 불교계를 주도하는 양상은 지속되었다.


일본에서는 가마쿠라시대에 이이사이(1141-1210)가 송나라에 유학하여

천태산 만년사萬年寺에서 허암회창虛庵懷敞에게 임제종 황룡파의 선법을 배워 귀국하면서 일본 선종의 창시자가 되었다.

특히 무사계급과 결탁하여 엄격한 수양의 교법으로 기능하였고, 무로마치시대에는 선종이 국교로 지정되면서

지배층의 일상과 의식 깊숙히 영향을 미쳤다.





- 흩어져 존재하는 성현을 그린 산성도 -


산성도散聖圖는 '흩어져 존재하는 성현'을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이다.


선종의 공식적인 조사 계보에는 속하지 않지만 기이한 언행으로 민간에 이름을 알린 풍간, 한산, 습득, 포대 등을 그린 것이

이에 해당된다. 표현 기법은 순간적 깨달음을 중시하며 직관의 체험을 시각적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인지 대상의 특징만을

빠르게 그려내는 감필법과 발묵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는 선종이 체계화되지 않았던 당말오대唐末五代 시기에

직관에 의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기본 교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정황은 현전하는 전칭傳稱 작품을 통해 확인 가능하며,

오대의 선승화가 관휴貫休(832-912)의 작품으로 전하는 <풍간도>, <한산도>,<습득도>는 산성도의 초기 모습을 알려준다.

풍간, 한산, 습득은 정관貞觀  연간(627-649) 절강성 천태산天台山에 위치한 국청사國淸寺에머물던 유명한 선승으로,

국청삼은國淸三隱 또는 삼성三聖이라 불렸다.


풍간은 국청사 주지로 한산과 습득의 스승이며, 항상 호랑이와 함께 다녔다. 습득은 풍간선사가 데려다 키운 고아로

매일 아침 마당을 쓰는 하나의 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그의 곁에는 대개 빗자루가 놓여 있다.

한산은 국청사에서 떨어진 한암寒巖이라는 동굴에서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누더기를 걸친 채 찬밥을 얻어먹기 위해

국청사 부엌을 드나들다가 습득과 친구가 되었다. 또한 풍간은 미륵보살, 한산은 문수보살,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신으로 일반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관휴의 전칭작에서 서역인에 가까운 선승의 얼굴은 세필로 정교하게 묘사된 반면, 농묵濃墨의 거친 필선으로

빠르게 그려낸 의복 표현은 내면에 숨겨진 호방한 기운이나 정신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

 선승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듯 바위나 땅바닥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형식이나 격식을 거부했던 선종의 종교적 색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전傳 관휴貫休, <습득도>, <한산도>, <풍간도>

남송 12-13세기, 지본수묵, 각 109.2×50.3cm, 오사카 후지타미술관






전傳 석각石恪, <이조조심도> 중 한 폭

오대 10세기, 지본수묵, 36.5×64.4cm, 도쿄국립박물관


이 작품은 원대의 모사본으로 추정되며, 한 선승은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사색에 잠겨 있고, 다른 선승은 호랑이에 기대어 자고 있다.

선승의 평온한 얼굴과 거친 필묵의 복식이 대조적이며, 농묵의 필선을 초서草書처럼 휘둘러 빠르게 특징만을 나타내는

감필범의 뛰어난 경지를 보여준다. 이는 선종의 '돈오'를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당대 화단에서 채색 공필의 사실주의적 인물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직옹直翁, <六祖挾担圖>

남송, 지본수묵, 93×36cm, 도쿄 다이토큐기념문고


무배경의 화면에 대상을 심도있게 관찰하여 포착한 요점만을 매우 옅은 담묵으로 나타내고,

세부는 농묵을 점으로 찍듯이 그려내었다. 이러한 표현 기법은 망량화罔兩畵라고 하며, 남송 화승 지융智瀜에 의해 완성되었다.

'망량'은 대상의 존재가 명확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윤곽을 애매하게 처리하여 기운, 빛, 인물이 하나처럼 보이지만,

주관적인 왜곡이나 단순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재현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 그림은 청년 시절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던 혜능이 어느 날

『금강경金剛經』독송을 듣고 홀연히 출가를 결심하게 된 일화를 그린 것이다.

혜능의 얼굴, 손발, 의복은 엷은 담묵으로 간략하게 그려진 반면,

눈동자, 토 입 등은 농묵의 점으로 나타낸 것에서 수묵화의 일종인 망량화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목계, <관음원학도觀音猿鶴圖>

13세기, 지본수묵담채, 관음 172.2×97.6cm, 교토 다이토쿠지


불화 1점과 동물화 2점, 모두 3폭이 한 번로 구성된 이례적인 경우이다. 관음보살도를 중심으로 보는 이의 오른쪽에는강풍에 흔들리는

고목에 앉아 정면을 향하고 있는 원숭이 모자母字 그림이, 왼쪽에는 대나무 숲에서 학이 튀어나오며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 배치되어 있다. 무표정한 얼굴의 관음보살은 고요하게 바위에 앉아 깨달음에 이른 마음의 상태, 즉 돈오를

이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반면 양 옆의 원숭이와 학 그림은 깨달음에 이르기이 전의 현실적인 속세俗世의 모습으로, 불성佛性이

모든 중생에게 있다고 한 선종의 관점에서 보면 원숭이나 학도 관음보살과 동등하게 될 수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모든 존재에 대한 돈오의 경지를 다양한 소재와 형태를 빌려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 미상, <사수도四睡圖>

원 14세기, 지본수묵, 77.8×34.3cm, 도쿄국립박물관


풍간, 산산, 습득, 호랑이가 소나무 아래에서 하나로 뒤엉켜 잠을 자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도상은 남송 선사들의 어록 중 제찬에서 종종 발견되며 동일한 도상의 채색화도 전한다.

화면의 모든 경물은 굵기가 일정한 선묘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이공린李公麟이 사용했던 백묘법白描法이

원대 문인화가 조맹부에 의해 부활된 것으로대상의 특징만을 간결하게 그렸던 남송의 표현 기법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다시 말해 원대에 그려진 산성도가 인물의자세와 표현 기법 등에서 다양한 경향을 보이는 것은

신앙 대상으로서의 이미지가 희석되어가는 양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左, 傳 안휘顔輝 <한산습득도>

13세기, 견본채색, 27.6×41.8cm, 도쿄국립박물관

右, 나빙羅聘, <한산습득도>

청 18세기 후반, 지본수묵, 78.7×51.7cm, 미국 넬슨 엣킨스 미술관


한산과 습득은 선종에서 각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화신으로 신앙되었지만, 원대에는 가정의 화목이나 화합을 상징하는

화합선인和合仙人으로 의미가 바뀌면서 종교적 색채를 지닌 산성도가 아니라 길상적 의미를 지닌 도석인물화의 범주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원대 도석화가인 안휘가 그린 작품으로 전칭되는 <한산습득도>는 그러한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화면에서 두 선아의 얼굴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과 복식의 호방한 필선에서 오대의 일격逸格 화풍이 일부 보이지만,

치아를 드러낸 채 짝 웃는 모습은 원대 승려화가 인타라의 얼굴 표현법을 연상시킨다.

선종이 쇠퇴하는 명 · 청대에 이르면 산성도의 주인공이 도교나 민간신앙과 결합하면서 감상용 도석인물화로 완전히 옮겨가게 된다.

 이로써 한산과 습득은 선인처럼 평범하게 표현되었으며 양주팔가 揚州八家의 한 사람인 나빙(1733-1799)이 그린 <한산습득도>는

그러한 예에 해당된다. 화면에서 더벅머리 두 인물은 편안한 옷차림에얼굴 가득 웃음을 띈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며,

오른쪽 상단에는 부부화합에 관한 제시題詩가 적혀 있다.


따라서 한산과 습득 그림은 산성도가 아니라 화합이성和合二聖이나 결혼신이라는 길상성을 지닌 도석인물화에 포함된다.






座, 김명국, <달마도>

조서ㄴ, 17세기, 지본수묵, 83×58.2cm, 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 <달마도해도>

조선 18세기, 지본수묵, 35.9×27.6cm, 간송미술문화재단


우리나라에는 조선 중기에 활동한 화원화가 김명국金明國과 한시각韓時覺(1621-1691)이 감필법으로 그린 선종화가 현전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고려시대 기록에도 선종화가 보이지만 남아 있는 작품이 없고, 조선시대는 억불숭유 때문인지 두 화원화가의 작품만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김명국과 한시각이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경험이 감필법의 선종화를 제작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1636년 두 번이나 일본을 다녀온 김명국의 <달마도>가 대표적이며, 달마대사의 미묘한

심리상태를 원숙한 감필법으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역작이라 평가된다.


사회적으로 길상화에 대한 수요층의 증가로 인해 화원화가는 물론 문인화가들도 당시 유행한 사의적寫意的 남종화법으로

달마, 습득, 한산 등을 그리는 독특한 양상을 보여준다. 일례로 심사정沈師正이 그린 <달마도해도>는 손가락에 먹을 묻혀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로 자신의 심경이나 흥취를 담아내었다는 점에서 사의적 문인화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가오可翁, <한산도>

14세기 전반, 지본수묵, 일본 개인 소장


일본에서는 13세기 이후 무사계급이 선종을 적극 옹호하였으며,

여기에 일본 선승의 유학이나 중국 승려들의 도래渡來를 통해남송에서 수묵의 발묵법으로 그려진

선종화가 다수 유입되었다. 이작품은 기본적으로 원대 산성도의 표현 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처럼 산성도가 수묵화 발전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에서만 나타난 독특한 현상이다.

신앙적 의미를 지닌 일격의 산성도가 중국과 한국에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취를 감추며 도석인물화에 포함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오히려 수묵인물화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져 무로마치시대 이후에도 선성도 형식이 지속되는 특징을 보인다.





- 사자상승을 의미하는 조사도 -


선종에서는 법맥을 이은 조사들, 즉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전법이 이루어졌다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상징적인 증표로

스승의 모습을 그린 조사도調査圖가 다수 제작되었다. 다른 용어로는 고승진영高僧眞影, 영정影幀, 진영眞影 또는 정상頂相

등이라고 하며, 사제 간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정신적 결속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사도는 북송에서 선종의 계보가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교단이 조직화되면서 팽배한 조사신앙을 배경으로 성립된 것이다.


산성도가 일격의 감필법이나 발묵법으로 표현된 것과 달리 같은 시기 화단의 주류였던 채색 공필로 정교하게 그려졌다.

송대에 이르러 선종은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하나는 법맥의 체계적인 정리로 종교 교단으로서의 기반을 갖춘 것이며, 다는 하나는

당시 문화를 주도했던 사대부가 수양을 쌓는 방법으로 일상에서 참선을 적극 실천하면서 선종이 생활종교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특히 조사들의 계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들의 행적과 어록을 집대성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은 선종의 체계적인

정립과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송나라의 도원道源에 의해 총 30권으로 편찬된 것이다. 과거칠불過去七佛을 시작으로

 서역의 28조와 중국의 6조를 거쳐 법안法眼의 제자까지 총 1,727명의 전기와 주요 어록이 실려 있다.


이처럼 선종 조사들의 법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어록을 집대성한 것은

 조사신앙의 확산과 조사도 제작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左, 작가 미상, <대지율사 원조상>

12세기 중엽, 견본채색, 92.5×40.5cm,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

右, 작가 미상, <대지율사 원조상>

1210년, 견본채색, 171×81.7cm, 교토 센뉴지


조사도의 비교적 이른 예로 북송의 임단종臨檀宗 사찰인 영지사靈芝寺 주지로 경전에 능통해 법력이 뛰어났던

대지율사大智律師 원조元照(1048-1116)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 2점이 있다. 이들 작품은 일종의 초사오하로 채색 공필로

인물의 정신이나 인격까지도 드러내는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지향했기 때문에 산성도와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을 보면 원조선사가 무배경의 공간에 몸을 약간 오른쪽 방향으로 튼 채 서 있으며,

왼손에는 바리때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석장을 잡고 탁발하는 일상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형식은 북송의

문화를 주도했던 사대부 초상화에서 차용한 것이다. 비록 신앙대상이라는 종교적 색채는 약화되었지만 화단의 주류였던

채색 공필기법으로 조사도를 그린 것은 선종 교단의 조직화에 따른 종교적 자신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교토 센뉴지에도 원조선사를 그린 또 다른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데, 신앙 대상으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천이 덮힌 의자에 결가부좌한 채 양손에 붓과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이는 저서를 남긴 학승學僧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한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이 조사도는 센뉴지의 선승인 슌조(1166-1227)가 남송에 유학했다가 귀국하면서 가져온 것으로,

이후 나라 지역에서 원조선사가 중국 선종의 선구자로 추앙되며 모사본이 여러 점 제작되었다.






左, 마원馬遠, <법안선사상>

남송, 13세기, 견본채색, 79.2×32.9cm, 교토 덴류지


마하파의 변각구도를 따라 스승과 제자가 문답을 나누는 장면이 화면 한쪽에 치우쳐 있으며,

일종의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처럼 배경 보다 인물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선종오가의 법안종과 운문종을

각각 개창한 법안선사(885-958)와 운문대사(864-949)가 일상에서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므로 조사도로 분류된다.

특히 화면 상단의 찬문은 송 영종英宗(재위 1194-1224)의 제2대 공성인렬황후恭聖仁烈皇后(재위 1202-1224) 양씨楊氏가

직접 쓴 것으로, 황실과 선종 교단 간 관계가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右, 일암一菴, <중봉명본상中峰明本像>

원, 견본채색, 122×54.5cm, 효고 고겐지


중국인 화가 일암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선승 중봉명본(1263-1223)은 절강성 항주 천목산天目山에서

고봉원묘孤峰原妙에게 배운 다음 전국 각지의 암자를 돌며 선풍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 조명부와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안남安南, 일본 등 주변국에서 승려들이 그를 찾아와 구법을 청하기도 하였다.

 화면을 보면 더벅머리에 가슴을 풀어헤친 승복 아래로 드러난 비만한 육체에서 인간미가 포착되며, 특정 격식을 배제한

선종 특유의 종교적 면모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조사도는 명 · 청대에도 신앙의 대상으로 조성되어

제의적祭儀的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 미상, <제1세 보조국사 조사도>

《16조사진영》 중에서, 1780년, 순천 송광사 국사전


도의선사가 선종을 소개한 후로 지방 호족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 9세기 중반 에구산선문이 성립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조사도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현전하는 가장 이른 에인 송광사 《16조사진영》은 1780년 원본이 낡아

다시 옮겨 그린 것으로 배경 없이 승려가 의자에 측면으로 앉아 있는 전신의자상이며, 보조국사 지눌을 중심으로

진각眞覺, 청진淸眞, 진명眞明, 자진慈眞, 원감圓鑑, 자정慈精, 자각慈覺,, 담당湛堂, 혜감慧鑑, 자원慈圓,

혜각慈覺, 각엄覺嚴, 정혜淨慧, 홍진弘眞, 고봉高峰이 각각 좌우에서 중앙을 향하고 있다.

이 가운데 7점은 승려들이 두 발을 받침대에 올려 놓고 있고, 9점은 신발을 받침대에 벗어놓고 결가부좌하고 있다.

이 조사도는 1621년 기록인 「16국사진영기」와 화기를 통해 1560년 처음 조성된 이후 원본이 낡아 1621년과 1780년

두 번에 걸쳐 다시 그려진 것으로 16세기의 조사도 형식을 유추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송광사의 《16조사진영》은 1995년 제1세 보조국사, 제2세 진각국사, 제14세 정혜국사 3점을 제외한

13점이 도난당했으며 현재 그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도난문화재 도록』(문화재청. 1997)







유성, <포월당진영>

1766년, 견본채색, 103.5×75.5cm, 경북 안동 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