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과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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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18. 12. 20.


와 기로 설명한

우주의 원리와 인간 본성



성리학性理學은 우주 원리나 인간 본성의 구조 등을 이理외 기氣의 개념으로 설명한 철학체계이다.

이는 당나라 후기의 유학자 한유韓愈(758-824)가 현실만을 다룬 유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불교나 도교처럼 사후세계나 우주 원리 등을다룬 형이상학적 논리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송대의 주돈이周敦頤(1017-1073)와 정호程顥(1032-1085) ·  정이程頤(1033-1107) 형제를 거쳐 주희朱熹(1130-1200)에 의해

집대성 되었기 때문에 주자학朱子學이라고 하며, 훈고학이라 통칭된 당대까지의 유학과는 다른 새로운 철학적 사유체계라는 의미에서

신유학新儒學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 성리학을 지칭하는 다른 명칭으로는 송학宋學, 도학道學, 이학理學, 정주학程朱學 등이 있다.


역사적으로 유학은 중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대표적 사상인 유교儒敎를 지탱하는 학문이었다.

하지만 각 시대마다 학자들이 지향하는 목표나 방법론에 현격한 차이를 보이면서 당나라까지의 유학은 훈고학訓告學,

송대는 성리학, 명대는 성리학과 양명학陽明學, 청대는 고증학考證學이라 정의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문은 공자와 맹자에 의해 완성된 유가儒家사상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넓은 범주에서

유학에 속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더불어 이들 학문은 기본적으로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지 않았던 춘추전국시대의 선진先秦 유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국가체계나 사회질서의 안정 도모에 최고 가치를 부여하였으며,

삼강오륜을 사회적 실천 덕목으로 일상에서 강조하였다. 이때 삼강은 군신 · 부자 · 부부 사이를 각각 충忠 · 효孝 · 열烈을

 기준으로 하여 주종관계로 정의한 것이면, 오륜은 부자 · 군신 · 부부 · 장유 · 붕우의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덕德에 토대를 둔 친親 · 의義 · 별別 · 서序 · 신信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리학은 이러한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현실적 문제를 포함하면서도

불교나 도교의 개념을 빌려와 성리性理나 이기理氣의 관계로 우주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였다.

북송의 주돈이는 도교의 개념을 받아들여 인성과 우주의 원리를 태극도太極圖로 설명하면서 성리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성리학의 주요 이론은 주희에 의해 집대성되었으며 이치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이학理學이라고 하였다.

동시기에 할동한 육구연陸九淵(1139-1193)은 이와 달리 마음(心)을 강조한 심학心學으 발전시키면서 신유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다.

특히 주희의 업적은 후대에 높이 평가되면서 공자에 버금간다는 의미로 '주자朱子'라고 존칭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희가 살아있는 동안에 성리학은 위학僞學이라 박해를 받았으며, 원대에 이르러 관학官學이 되고 주희가 새롭게 해석한

『사서집주四書集註』가 과거시험 교재로 채택되어 명대 문인들의 주요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일상과 문예창작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작가 미상 <안향초상>

1318년, 견본채색, 37×29cm, 경북 영주 소수서원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전래된 시기는 성립 직후인 고려 인종 연간(재위 1122-1146)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충렬왕(재위 1274-1308) 때 원나라를 방문한 안향安珦(1243-1306)이 공자에 비견되는 주희를 존숭하여 그의 초상화를

모사한 것과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지고 귀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찬문에 의하면 흥주수興州守 최림崔林이 한 폭 더 모사하여 향교에 봉안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 말부터 주희가 『논어』, 『맹자』,『중용』,『대학』,을 정리한 『사서집주』에서 과거시험 문제가 출제되면서

 성리학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조선 건국과 더불어 통치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 성리학은 백성을 통치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치인지학治人之學이었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 사림 계열 성리학자들에 의해 점차 수기지학修己之學으로 바뀌어갔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수기의 전제 조건인 인간의 본성, 즉 사단칠정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는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는 태극론이 주로 논의되며 차별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사단과 칠정의 발생 과정을 이기론으로 해명하는 과정에서 '이'를 중시하는 영남학파와 '기'를 중시하는

기호학파로 나뉘어 커다란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황李滉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의 수양 철학에서는 존재의 본질인 '理'를 중시하였고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기호학파의 실천 철학에서는 현실 개혁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존재의 현실적 요소인 '氣'를 강조하였다.

특히 이이는 주자에 대한 맹신을 거부하고 왕도정치의 시작을 기자箕子로 설정하여 주체적인 입장에서 조선식 성리학을 토착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림 계열의 성리학자들은 대의와 의리를 중시하면서 일상에서 도학道學의 실천을 통한 자율적인 향촌사회

운영과가족 질서의 수립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 향촌자치적 성격을 지닌 서원이 건립되고, 주희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그림으로 그리거나 그의 행적을 따라 자신의 은거지에 정사精舍를 짓고 구곡九曲을 직접 경영하며

조선식 구곡도九曲圖를 제작하는 문화가 널리 성행하는 기반이 되었다.





- 북송의 대관산수화, 이理 개념의 시각적 표현 -



전傳 이성李成, <처만소사도晴巒蕭寺圖>

960년경, 견본수묵, 111.4×56cm, 미국 넬슨 앳킨스 미술관


북송의 사대부는 세습 귀족이 아니라 과거시험을 통해 등용된 새로운 문인관료로서 황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 확립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송을 건국한 조광윤趙匡胤(927-976)이 기존 귀족사회에서 벗어나 문인관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정치적 의도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따라서 사대부의 학문적 기반이었던 성리학은

북송의 정치, 사회, 문화, 사상 등에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신유학으로 무장한 북송의 사대부들은 자연에 은거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최상의 방편이라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자연 속에서 생활하며 욕망이 가득한 인간의 모습을 떨쳐버리고 정신을 자유롭게 하며, 자연과의 일체를 체험하는

수기적修己的 생활태도를 지향하였다. 때문에 일상에서는 감정이 적절하게 통제된 이성적인 상태의 지속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특히 천리를 보존하고 인간의 욕심을 멸해야 한다는 이학적 논리는 성리학자, 즉 사대부들이 자연경관이 삐어난 곳에서

학문 연마나 수양을 통해 도덕성을 지닌 군자의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기재로 작동하였다.


더불어 예술 창작에 있어서는 인간이 존재하는 자연 공간인 산과 물 등으로 우주의 근원적인 이치인 천리 또는 도道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려 하였다. 이러한 성리학적 논리가 반영된 결과물이 바로 북송의 대관산수화大觀山水畵이며,

화면에서 주산主山을 중심으로 좌우에 객산客山을 배치한 모습은 봉건사회의 도덕적 규율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이러한 대관산수화가 당대까지 성행했던 채색화를 제치고 수묵화로 그려진 것 역시

군자의 금욕주의적 삶을 강조했던 성리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면 중앙에 위치한 주봉主峯과 그 주변에 늘어선 군봉群峯이 각각 천자와 신하를 나타낸 것이라면, 그 사이로 여러 경물과

인간이 짜임새 있는 구도로 균형을 이룬 방대한 구조는 '송'이라는 새로운 통일 제국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성李成은 강남 산수화의 엷은 안개와 담묵법, 강북 산수화의 고산高山 구도법을 적절하게 결합하여 중국 역사상 역동적인

위업을 이룩한 북송의 국가적 이미지를 산수화로 그려내었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북송 화단에서 대관식 수묵산수화가 청록산수화

를 제치고 주류로 급부상한 것은 성리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사대부의 자연관이나 미감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주돈이의 「애련설」, 군자의 표상 -


주돈이가 사대부의 삶을 연꽃에 투사하여 읊은 「애련설」은 성리학의 확산을 배경으로 후대에 널리 파급되며

차운시의 제재가 되거나 정원의 연지蓮池 조성을 유행시켰고 그림으로도 그려졌다. 원래 연꽃은 인도가 본산지로, 불교에서 극락왕생을

나타내는 연화화생蓮花化生의 종교적 함의로 다루어졌다. 하지만 「애련설」을 기점으로 연꽃은 도덕적인 군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의미가 바뀌면서 성리학 확산을 배경으로 시서화는 물론 정원문화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연꽃은 사군자四君子와 함께

군자를 표상하는 화훼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물이나 뭍에서 자라는 풀이나 나무의 꽃 가운데 정말 사랑할 만한 것이 대단히 많다.

진나라 도연명陶淵明은 홀로 국화를 사랑했고, 당대唐代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몹시 좋아했다. 그런데 나는 유독 연꽃이 진흙 속에서

자랐지만 그에 물들지 않고, 맑고 잔잔한 물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은 것을 사랑한다. 연꽃은 줄기가 비었어도 겉은 곧으며 넝쿨도 없고

가지도 없다. 게다가 향기는 멀리 있을수록 더욱 맑으며 우뚝히 깨끗하게 서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적당하지만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국화는 은일隱逸을 상징하는 꽃이요, 연꽃은 꽃 중의 군자이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도연명 이후에 또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연꽃 사랑함을 나와 함께할 이 누구인가.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은 의당 많을 것이다.


이 글은 구법당舊法黨과 신법당新法黨의 대립으로 정쟁이 극심했던 시기에 성리학자 주돈이가 부귀를 탐하고 명예를 추구하는

세태에 물들지 않는 고고한  뜻을 지닌 군자의 모습을 연꽃에 의탁하여 지은 것이다. 따라서 연꽃은 부귀영화에 부합하지 않는 군자,

즉 주돈이 자신을 의인화 한 것으로 자기적 초상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상황에 대한 풍자도 겸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꽃에 담긴 도덕적 군자를 표상하는 성리학적 개념이 약화되면서,

단순히 '화중군자花中君子'라는 언어적 의미만 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석도石濤, <애련도愛蓮圖>

청 초기, 지본수묵담채, 46×77.8cm, 중국 광주미술관


연꽃이 최절정기를 지나 시들어가고 있는 상태이며, 왼쪽 상단에 「애련설」이 적혀 있다.

이는 이민족이 세운 청나라 땅에서 군자다운 삶을 지속할 수 없었던 한족 문인들의 현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가 청을 거부하며 출가하였기에 종교적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전국을 주유하며 문인들과 서화로 교유하는 데 전념했던 정황으로

 보아 도덕성을 지닌 군자의 모습을 그려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시기에 출가했다가 환속한 이후에도 반청反淸 의지를

피력했던 팔대산인八大山人(1626-1705)이 간결한 형태의 연꽃 그림을 자주 그렸던 것에도 성리학적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임백년任伯年, <애련도>

1873년, 지본채색, 103×54cm, 상해 공예품진출구공사


한화정책의 일환으로 청 황제는 유명한 한족 학자들의 문학작품이나 일화를 궁정화가들로 하여금 그리도록 하였는데

주돈이의 대표적 문학작품인 「애련설」을 소재로 한 애련도 역시 그러한 맥락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연꽃을 그린 화훼도가 아니라 문인이 연꽃을 감상하고 있는 산수인물화 형식으로 그려진 것이 달라진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법은 청 말기 상해를 중심으로활동한 직업화가 임백년(1840-1896)이 그린 <애련도>에서도 지속되고 있어

인물을 통해 군자의 이미지를 직접 전달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정선, <염게상련도濂溪賞蓮圖>

1747년경, 견본담채, 30.3×20.3cm, 개인 소장


「애련설」을 산수인물화 형식으로 그린 예이며, 제목은 호가 '염계'였던 주돈이가 초당에 앉아 

연지에 핀 연꽃을 감상하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강세황, <향원익청도香遠益淸圖>

18세기, 지본채색, 115.5×52.5cm, 간송미술문화재단


「애련설」은 화훼화로도 그려졌는데, 표암이 공필진채工筆眞彩로 그린 향원익청도>는 그런 예에 해당한다.

제목이 '향원익청'은 향기가 멀어질수록 더 맑아진다는 의미로 주돈이의 「애련설」에 제시된 시구이다.

한 여름의 연꽃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는 "염계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연꽃은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되 할부로 할 수는 없다'

고 하셨다. 나 역시 '연꽃 그림은 멀리서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겠다. 표암" 이라는 제문이 적혀 있다.






방희용, <화지군자도花之君子圖>

19세기, 지본담채, 23.2×32.3cm, 간송미술문화재단


후대로 갈수록 연꽃은 군자의 꽃이라는 언어적 의미만이 강조도는 양상을 보인다.

19세기 여항화가 방희용方羲鏞(1805-?)이 그린 <화지군자도>는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연꽃을 군자에 비유한 주돈이의 「애련설」은 성리학적 인식을 근간으로 한 문학작품이다. 그러므로 북송 이후 문인화가에 의해

그려진 연꽃 그림은 종교적 접근보다는 성리학적 군자를 표상하는 시각적 이미지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게 합리적이다.





- 조선시대 서원, 성리학적 이념이 구현된 공간 -


자연경관이 삐어난 곳에 위치한 조선시대 서원은 성리학과 조선의 문화가 결합되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이며,

동시에 향촌 자치기구로서 성리학적 지배질서와 확산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서원 건립 역시 주자가

강서성 성자현星子縣에 부임하면서 다시 중건했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과 무이산에 은거하여

1183년에 건립한 무이정사武夷精舍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남계서원 배치도, 『남계서원지藍溪書院誌』권2

1935년, 30×19.7cm, 경남 함양군


남계서원은 서원의 초기 건축 구조와 관련하여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당시 특정한 기준이 없던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마주하도록 하고, 그 바로 뒤에 강당이 있는 강학 공간은

앞쪽의 낮은 곳에 배치하였으며, 정여창의 사당을 중심으로 한 제향 공간은 뒤쪽 높은 곳에 조성하여 두 개의 독립적인 공간으로

분리하였다. 이런 구조는 이후 건립된 서원에서 그대로 따라하면서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이후 인격 수양을

위한 강학보다 선현 제향을 중시하게 된 서원에서는 강당을 맨 앞쪽에 두고, 다음에 동재와 서재, 안쪽 끝에 사당이 위치하는

구조로 건립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서원 건축을 경사가 진 구릉에 조성하면서 제향 공간을 강학 공간보다

높은 곳에 배치하는 특유의 위게성은 성리학의 위게질서를 건축물에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원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 위치하며 단아한 목조건물과 주변의 산, 나무, 돌 등이 조화를 이루는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서원은 자연 속에서 학문 연마나 정신 수양을 통해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했던

성리학적 자연관과 가치관이 적용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남계서원 사당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이 전래되어 한국적 문화전통과 결합되면서 건립된 서원 건축 구조는


 성리학적 가치관이나 자연관이 반영된 물리적 표상이라는 점에서 건축사는 물론 사상사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도동서원道東書院, 대구 달성 구지면


현전하는 서원들 가운데 빼어난 주변 경관과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예로는 도동서원을 꼽을 수 있다.

원래 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도학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568년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는 명칭으로 건립되었으나

임란으로 전소되었다. 1605년 정구鄭逑(1543-1620)가 낙동강을 바라보는 현재 위치에 동북향으로 중건하였으며

1607년 도동서원이라 사액되었다. 수직과 수평의 짜임새 있는 건물 배치는 뛰어난 균제미를 보여주는데, 이는 성리학의

주요한 행동 준거가 되는 중용中庸, 즉 '치우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상태'를 서원 구조에 적용한 것이라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