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과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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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18. 12. 21.

 

 

앎과 행동을 하나로 하며

마음에서 이치를 찾다

 

명 말기에는 황제의 잇따른 실정으로 인한 당쟁과 관료의 부패, 환관의 전횡, 빈번한 재해 발생 등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하지만 통치이념인 성리학은 실천을 결여한 추상적 지식만을 추구하는 학문적 풍토를 조장하면서

사회의 당면 과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학자 왕수인王守仁(호 양명陽明, 1472-1529)은

성즉리性卽理의 주자 성리학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심즉리心卽理의 양명학陽明學을 새롭게 제창하였다.

다시 말해 왕양명은 성리학이 사회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하자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이치(理)가 아닌 마음(心)에서 참다운

이치를 찾아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이성을 중시하여 이학理學이라고도 불린 성리학과 달리 양명학에서는

마음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심학心學이라고도 하였는데, 결국은 유학의 한 갈래로서 그 지평을 넓혔다고 볼 수 있다.

 

심학의 연원은 남송 육구연陸九淵(1428-119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나라 초기의 진헌장陳獻章(1428-1500)도 독서를 통한 수련에 회의를 품게 되면서 책이 아닌 마음에서

도道를 찾아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왕양명은 환관 유근劉瑾의 비리를 고발하였다가 1508년 귀주성貴州省 용장龍場에

유배되었으며 이곳에서 육구연, 진헌장 두 학자의 심학을 근간으로 하여 심즉리의 원리로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기 하였다.

 

다음 해 유근의 사형으로 풀려난 왕양명은 귀양貴陽에서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처음 주장하였고,

1513년 저양에서는 정좌靜坐의 수양을 가르쳤으며, 1521년 강우江右에서 선천적으로 타고난 양심인 양지를 지극한 곳까지

확충해야 한다는 '치양지致良知'를 귀결점으로 제시하며 심학의 본체를 완성하였다.

 동시에 수행의 방법도 자신을 억제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전환하였다.

 왕양명이 제시한 단계적 변화를 교敎의 삼변三變이라고 하며, 지행합일은 성리학의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이 만들어낸

주지주의主知主義에 대한 반론으로 '지식과 실천이 마음에 의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지행합일의 방법으로 처음에는 '정좌'를 제시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요한 것을 즐기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면서

실제로 일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폐단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마음의 천리를 보존하고

실행하기 위한 핵심적인 방법으로 입지立志, 성의誠意, 치양지致良知를 제시하였다. 여기서 입지는 잡념을 버리고

양지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며, 성의란 사물을 대할 때 진실함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실천력과 진실성이

겸비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치양지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양지 본연의 모습을 끊임없이 성찰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동정動靜이 항상 유지되어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도덕적 규범,

즉 양지를 구현하는 실천적 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명학의 목표는 마음의 본성을 회복하여 사회를 개혁하려는 것이었으나,

명 말기에는 실천 없는 이론에 그치면서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야기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왕양명의 논리는 개인을 도덕적 주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그 본질이 불가피하게 왜곡, 변질되었다.

 다시 말해 왕양명에게 욕망은 일시적이고 우연한 것이었으나 제자들은 개인적 욕망이나 이기심을 오히려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명성, 여색, 재물 등을 탐닉하였다. 또한 개성을 중시하는 거침없는 행동들로 성리학을 근간으로 했던 기존의 사회적

통념이나 권위, 도덕을 극단적으로 부정한 결과 사회적 불안과 도덕적 혼미를 초래함과 동시에 퇴폐적 문화도 양산하였다.


조선에서는 1521년 박상朴祥(1474-1530)과 김세필金世弼(1473-1553)이 왕양명의 『전습록傳習錄』을 시로 화답하며 배척했던

사실에 의해 1519년부터 1521년 사이에 양명학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습록』은 왕양명의 제자 서애徐愛가

정리한 것으로 1518년 발간된 초간본이며, 왕양명이 살아 있던 시기에 전래된 것이다. 처음에는 양명학을 배척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습록』은남송 육구연의 문장과 함께 홍인우洪仁祐(1515-1554), 남언경南彦經(1528-1594), 한원진韓元震

(1682-1750) 등에 의해 읽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566년 조선 성리학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이황의

양명학 배척으로 크게 위축되면서 몇몇 인물들에 의해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허균許筠(1569-1618)과 이수광李睟光(1563-1628) 등도 양명학을 일부 수용하였으며, 허균은 이지의 『분서焚書』를 읽고유교적인 예교를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동심설도 수용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에서허균이 봉건사회의 모순과 서얼이라는 신분제를 비판하며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적극 피력했던 것은 좌파 양명학의 수용과밀접한 연관이 있다. 실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이수광 역시 양명학을 접하였는데, 『지봉집志峯集』「경어잡편警語雜編」에서'도道는 민생의 일상 속에 있으니 여름에는 갈옷을 입고 겨울에는 털옷을 입으며,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것이 바로 도이다."라고 적은 문장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양명학은 이후 장유張維(1857-1638)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용되었으며, 의 문집 『계곡만필谿谷漫筆』은 양명학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문헌 자료이다. 호란 이후 정국을 주도한 최명길崔鳴吉(1586-1647) 역시 양명학을 수용하였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는 한국적 양명학을 완성한 인물이다. 그의 한국적 양명학은 강화도에서 250여 년간 가학家學처럼 전해지며 하곡학파를 형성하였다. 이들의 학문적 근간은 양명학에 연원을 두었지만 실제로는 조선 사회가 당면한현실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문학, 음운학, 언어학 등에 치중하였다. 하곡학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양명학은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지 못한 채 실학과 그 흐름을 함께하며 독특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동시에 18세기 조선 문예계에서는 좌파적 양명학자인 이지의 영향을 받은 공안파의 性靈論을 수용하여 천기론天機論과도문분리론道問分離論을 내세우며 개성가 독창성이 강조되었다. 이는 성리학에 부합하는 관습적인 문예창작에서 벗어나 작가의개성과 감정이 발현될 수 있더록 자유로운 언어와 문체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논의는 공안파의 반의고적反擬古的 논리를 수용한 김창협金昌協(1651-1737)은 성리학이 진리를 독점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도와 문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도문분리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공안파의 논리가 확산되며 이옥李鈺(1760-1805)은 공안파의 논리를 창작물에 적용하여 창작 주체의 자의식을 드러내거나 인간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

 

명나라의 정유악鄭維嶽이 1594년에 쓴 『사서지신일록四書知新日錄 』에 의하면 일본에 양명학이 전래된 시기는 1590년대로 

알려져 있다. 왕양명의 『전습록』이 1650년 일본에서 발간된 이후 그의 어록과 문집이 잇달아 간행되었으며 나카에 도주

(1608-1648)는 주자학의 권위주의와 형식주의에 대해 처음으로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후 그의 제자인 후치고 잔(1617-1686)과

구마자와 반잔(1619-1691)에 의해서 양명학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는 1651년 경안慶安의 난을 일으킨

유이 쇼세츠(1605-1651)가 양명학 신봉자라고 보았기 때문에 양명학의 학습을 전면 금지하였다. 이로 인해 양명학은 개인적으로

학습되며 침체되었다가 1712년 미와 싯사이(1669-1744)가 『표지전습록標主傳習錄』을 서술하면서 중흥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일본에서는 양명학을 단순한 지식체계가 아니라 실천을 강조한 윤리학 내지 정치철학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근대까지 지속되었다.

 



- 명 말기에 감성 폭발을 보여준 서위 -

 


서위, <죽석도竹石圖>지본수묵, 122×38cm, 광동성박물관
서위徐渭는 즉흥적 감성이 물씬 풍기는 필법을 자유롭게 구사한 그림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독보적인 존재이다.그는 시서화 뿐만 아니라 희곡에도 뛰어났지만, 자신의 심정이나 삶을 적극 투사한 결과 기이하다(奇)는 평가를 받는다.일례로 그의 <죽석도竹石圖>를 보면 대나무와 괴석이 물기 많은 발묵潑墨으로 묘사되어 마치 금방이라도 녹아 없어질 것 같은느낌을 준다. 어두운 미래를 암시하는 화면의 제시題詩는 대나무의 시각적 이미지와 일맥상통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종이 옆의 젖은 붓 진할 필요 없으며

창에 비친 영롱한 푸른빛을 닮고자 하네.

두 장대의 가지 위에는 이파리도 많지 않은데

어찌하여 풍파가 하늘에 가득한가.

 

 

 

 

 

 

서위, <잡화도雜花圖>

지본수묵, 30×1053.5cm, 남경박물원

 

가로 10미터가 넘는 긴 화면에 모란, 석류, 연꽃, 오동나무, 국화, 호박, 콩, 수국, 포도, 파초, 매화, 수선화가

힘이 넘치는 자유분방한 필묵으로 그려져 있다. 두루마리 끝에는 "천지산인 서위가 장난으로 칠하다."라고 쓰여 있다.

사물이 지닌 외형적 특징이 자유분방한 필묵의 구사로 인해 상당히 무너져 있고, 순간의 폭발적인 감성이 투사되어

즉흥성이 극대화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 기법은 당시 화단의 주류였던 의고주의 화풍을 거부한다는

서위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피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잡화도> (호박부분 세부)

 

이처럼 서위가 <잡화도>를 비롯해 다수의 화훼화를 그리며 마음속에 내재된 울분이나 분노의 감성을 거친 필묵으로

쏟아낸 것이라든지 화단의 주류였던 의고주의 표현 기법을 거부한 것은, 그의 예술사상이 양명학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화면에 거침없이 휘두른 필묵이 만들어낸 추상적 조형성은 현대회화에서 순간의 행위를

통해 우연의 효과를 추구했던 액션페인팅과 매우 유사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20대 후반에 접한 양명학은

서위의 인식 기반으로 평생 자리하며 문학이나 서화 창작에 있어 주요한 예술적 원천이 되었다.

 

 

 

 

- 명말청초 문인에서 직업화가로 전락한 진홍수 -

 

 

 

진홍수, <굴자행음도屈子行吟圖>

『구가도九歌圖』중에서, 1616년, 목판화, 20×13.2cm, 상해도서관

 

명문가 출신의 진홍수陳洪授는 성리학과 양명학을 모두 배운 문인이었지만 과거 실패와 경제적 궁핍으로 생애 후반에는

직업화가로 활동하였다.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그의 예술세계는 의고주의와 반의고주의라는 상반된 개념과 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된다. 1642년, 그림을 팔아 모은 돈으로 관직을 사서 국자감國子監에 근무하기도 하였으나

모두들 그의 그림 재능에만 관심을 보였고 그는 '남진북최南陳北崔'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화명畵名이 높아진다.

1643년 마침내 관직을 사퇴하고 귀향하여 부친의 친구였던 서위의 청등서옥靑藤書屋에 머물며 시서화 창작에 전념하였다.

 

다수의 작품 제작과 후학양성에 매진하였으나 평생 사제관계를 지속한 유종주의 예법 가르침만은 견디지 못했다

일례로 그림을 서슴없이 그려준 것이나 여성을 존중했던 것 등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양명학의 성인관聖人觀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그가 소설 삽화를 다수 그렸던 것이나 반의고주의를 보여주는 독특한 회화작품들을 남긴 것은

그의 예술창작에 양명학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진홍수, <취수도醉愁圖>

『부자합책父子合冊』중에서, 1633년, 견본채색, 22.2×21.7cm, 개인소장

 

현전하는 진홍수의 작품들 중에는 의고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 예가 상당히 많은데, 이는 또 다른 인식의 산물로

성리학을 근간으로 했던 주류 문인들과의 교유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개성 있는 인물화는 고개지顧愷之를 비롯한

주방周昉, 관휴貫休, 이공린李公麟 등의 인물화법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 <취수도>는 독자적인 인물화풍의 완성을 알려주는

기년작記年作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남성이 서책에 비스듬히 기댄 채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데, 화면의 제시題詩를

통해 만주족 침공에 따른 불안한 심리를 드러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물의 자세는 위진남북조시대에 조성된

화상전 <죽림칠현도>가운데 왕융王戎의 도상을 취한 것으로 의고주의적 면모를 보여주지만,

 얼굴 표정으로 자신의 심리 상태를 드러낸 것에서 양명학적 요소를 엿볼 수 있다.

 

 

 

 

 

 

 

左, 진흥수, <오설산도五洩山圖>

1624년, 지본수묵, 118.3×53.2cm,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

右, 동기창, <봉경방고도烽經訪古圖>

1602년, 지본수묵, 80×30cm, 대북 고궁박물원

 

다른 한편 진홍수는 전통 화풍의 온전한 변이變移를 통해 반의고주의적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좌파적 양명학의 수용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오설산도>는 문인 주량공 등과 자주 방문했던 절강성 소흥

근처의 오설산을 그린 것이다. 화면을 빼곡하게 채운 무성한 나무들과 암석을 그려낸 필묵의 흑백 대비가 만들어낸

평면적 효과는 실경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었음을 암시해준다. 근경에서 하단부가 움푹 들어간 공간에 위치한

인물을 나무들이 감싸고 있는 구도는 명대 화가 문징명文徵明의 산수화에서 취한 것이며, 줄기가 드러난 나무들은

동기창이 그린 <봉경방고도烽經訪古圖>의 산세와 상당히 유사하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문징명과 동기창 등의

표현법을 차용하였지만 진홍수에 의해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로 재구성되면서 특정화가의 화풍은

거의 보이지 않는 대신 작가의 감정 상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진홍수는 전통적인 여러 요소를 자신만의 감성으로 녹여내 이색적이면서도 독특한 산수화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진홍수, <교송선수도喬松仙壽圖>

1635년, 견본채색, 202.1×97.8cm, 대북 고궁박물원

 

진홍수는 자신이 처한 애매한 상황을 그린 자화상에서 진솔하게 드러내기도 하였다.

제목과 소나무 등으로 보아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누군가의 생일선물로 그린 것이라 추정하지만, 이러한 정황을

입증할 만한 명확한 근거는 아직 없다. 화면에 극도의 형식화로 왜곡된 나무들과 바위들이 만들어낸 다소 불안정하면서도

부자연스러운 자연을 배경으로, 도사와 시동이 서로 외면한 채 각각 다른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도사 복장의 인물을 진홍수 자신이며, 시동은형 진홍서의 아들이자 조카인 진세정陳世情(1612-1642)이다. 전반적인

구성은 명말청초에 성행한 파신파波臣派의 산수인물도 초상화 형식을 빌려왔지만, 배경의 나무와 바위에서 보이는

특이한 조형성은 화단의 의고주의를 배격한 것으로 양명학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른쪽 상단의 찬문은 진홍수가 조카와 함께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책도 읽고 그림도 함께 그리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림 속 진홍수는 도복으로 온몸을 감싼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머리에

꽃을 꽂은 조카는 술동이를 든 채나무를 바라보고 있어 이들의 서먹한 자세는 찬문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처럼 현실과 이상, 전통과 개성이라는 상반된 요소가 미묘하게 공존하는 이 작품의 애매모호함은 진홍수가 입신양명의

관리를 소망 하였지만 생계형 직업화가로 전락하며 성리학가 양명학의 중간 지점 어딘가에 어중간하게 위치했던 정황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그가 명 말기에 발간된 『수호전』, 『서상기西廂記』등 대중소설의 삽화를 다수

그린 것은 소설이나 희곡의 문학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던 공안파의 문예사상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 청 초 유민화가 석도의 일획론 -

 

 

 

 

석도, <수진기봉도搜盡奇峰圖>

1691년, 지본수묵, 42.8×285.5cm, 북경 고궁박물원

 

석도石濤는 명 말 동기창에 의해 주창된 의고주의를 비판하며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통해 누구도 닮지 않은 개성적 화풍을

구사했던 문인화가다. 때문에 그는 팔대산인八大山人과 함께 특이한 구도와 자유분방한 필묵으로 개성의 극단을 보여준

서위의 미학 전통을 이은 청 초의 개성주의 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명나라 황족 출신인 석도가 회화 창작가 관련한 그의

입장과 견해를 서술한 『화어록畵語錄』은 청대를 대표하는 화론서로서 현재까지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의 『화어록』과 관련하여 사상적 연원이나 배경을 다룬다수의 연구가 있으며 이것을 크게 세 가지 맥락으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유불도 삼교합일의 입장이 고루 반영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일획一劃의 법'이 선종의 불이법문不二法門과

관련이 있다는 의견이며, 세 번째는 『노자』의 '일획' 개념이 중요한 근원 중 하나라는 도가적 입장에서의 논의도 있다.

하지만 최근 이러한 기존 학설에 문제를 제기하며 인간 중심의 심학사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양명학적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어 주목된다. 태주학파泰州學派의 이지에 의해 자아가 극단적으로 조명되면서 욕망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 도입되었고,

석도는 이러한 영향을 받아 창작 과정에서 마음속의 감성을 필묵으로 쏟아내며 고도의 자유를 추구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창작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법칙으로 제시된 일획론은 선종의 불이법문에서 출발한 것으로 유교, 도교 등이 혼합된

삼교합일적 양명학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석도의 『화어록』은 그가 사망한 다음 후학들에 의해서 출판된 것이며,

18장에 걸친 화론은 일획론을 근간으로 하였다. 일획이 혼돈보다 우선하며 원초적인 우주에서 생명이 잉태되어 자라는

혼돈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일획이라는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화가는 혼돈을 깨고 변화할 수 있는

 일획을 장악해야만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화면을 보면 산의 단면에 물결치듯 중첩된 필선과 연속적으로 가한 무수한 먹점은 어떤 맥락도 없이 화면을 어지럽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쳐지고 일어나고 엎드린 산수에 질서가 있으며 그 속에 사람들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람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직극한 필묵의 묘미로 웅대한 자연에 숨겨진 엄청난 에너지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청 왕조의 등장으로

억눌린 마음속의 감성을 투사한 것이 해석되기도 한다. 석도는 자유분방한 필묵으로 자연경관을 그려내었고, 이는 자신의

면 깊숙이 자리한 엄청안 울분을 토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석도 화론의 핵심을 이루는 일획론과 창작 과정에서

자신의 감성을 필묵으로 전달하려 했던 태도는 양명학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사회 이면을 풍자한 풍속화가 신윤복 -

 

 

 

신윤복,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

《해원전신첩》중에서, 18세기 후반, 지본채색, 28.2×35.6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최근 기방문화를 소재로 사대부의 욕망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신윤복의 풍속화를 양명학적 입장에서 조선 후기 문예사상과

연계하여 조명한 것은 새로운 시도로 주목된다. 여기서 풍속화는 교화적인 요소가 강조된 경우와 화가의 주관적인 감성을

드러내는 순수창작으로 구분하며, 전자는 성리학을 통지이념으로 하는 사회체제의 도덕 가치에 부합하는 것로 김홍도가

백성을 소재로 그린 풍속화가 이에 속한다. 반면 후자는 사대부 중심의 기방문화 같은 사회적 이면을 풍자와 해학으로 순화

시켰지만 화가 자신의 절제된 비판의식이 반영된 경우로, 신윤복의 풍속화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신윤복의 풍속화는 공안파의 영향으로 개성과 독창성을 간조하며 '진眞'의 개념을 추구했던 조선 후기 문예계의 코드 중

하나인 '인간 욕망'을 시각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명 말 공안파는 인간의 욕망과 진실한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출한

『서상기』,『수호지』, 『금병매』등의 소설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조선에 유입디어 읽혀지는 과정에서 '인간 욕망'

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형성케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신분제를 근간으로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하는 봉건적 사회체제를

위협하였기에 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일례로 문인 이옥李鈺이 명말청초

에 유행한 패관소품체로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글을 지었다가 정조의 문체반정에 연루되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준다. 그의 대표 작품인 「이언俚言」은 총 66수의 연작시로, 도회지 여성의 일상과 감정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한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남녀의 정욕도 다루면서 가부장제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감성을 섬세

하게 묘사하고 있다. 동시대에 활동한 신윤복의 풍속화는 여성을 그림의 중심에 두고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옥의 「이언」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신윤복이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시각적 언어로

표현하였다면, 이옥은 문자라는 기호로써 풀어낸 것이다.

 

 

<월하정인도>는 남녀 간의 감정을 진솔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달빛이 깊은 밤에 남녀가 담장 아래서 만나 애틋한

감정을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의 바로 왼쪽 담장 벽에는 "달빛이 깊은 삼경,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알고 있네.

혜원"이라 쓰여 있다. 이 제시는 신윤복이 현실 비판보다는 두 남녀의 욕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화면 속의 남녀는 봉건사회의 위계질서를 초월한 평등한 독립 존재로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신윤복, <단오풍정도端午風情圖> (부분)

《해원전신첩》중에서, 18세기 후반, 지본채색, 28.2×35.6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신윤복은 아버지 신한평申漢坪(1726-?)과 마찬가지로 화원畵員이었으나 남녀 간의 춘정을 즐겨 그렸다는 이유로

도화서圖畵署에서 쫒겨났다는 신윤복이 일화는 출사하지 못했던 이옥의 정황과도 유사하여 매우 흥미롭다.

 

<단오풍정도>는 나신의 여성을 다룬 최초의 풍속화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단옷날 계곡에서 기녀들이 목욕을 한다는 소재는 유교적 윤리규범에 억압되었던 성적 담론을 조심스럽게

드러낸 것으로 주목된다. 화면에서 두 명의 동자승이 바위 뒤에 숨어 기녀들의 목욕을 훔쳐보고 있는 장면은

수도자라고 하더라도 남성 누구에게나 있는 본능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이 밖에 <청금상련도>, <주유청강도> 등도 표면적으로는 도덕적이고 금욕적이지만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쾌락 지향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사대부의 이중적인 모습을 은유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신윤복의 《해원전신첩》은 성리학적 봉건사회에서는 다루기 어려운 매우 민감한 소재들을 시각화하였다는 점에서

인간이 타고난 본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좌파적 양명학의 문예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인용서적 : 한정희 · 최경현 著 『사상으로 읽는 동아시아의 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