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과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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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18. 12. 23.


일상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참된 학문의 추구



중국에서 실학이 주목된 것은 명말청초이며 '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이라는 의미이다. 명 말의 정치 사회적 당면 과제들을 해결하지 못하였던 성리학과 양명학을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기초한 헛된 학문' 즉 허학虛學이라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상반된 개념으로 등장하여 청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동시에 실학자들은 유럽의 선교사를 통해 유입된 서양의 학문과 문물을 연구하는 서학을 배경으로 농경과 직접 관련된 역법이나 천문, 산술 등의 관련 서적들을 발간하여 생산력 향상에도 기여하였다. 따라서 실학은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자본주의적 맹아라는 토대위에 성립된 특수한 산물로 규정되기도 한다. 더불어 경제적 성장에 따른 피지배층의 각성은 문예와 과학기술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의 새로운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실학이라는 용어는 남송의 정이程頤가 처음 언급했다. 유학이 형식이나 이론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햇던 것이다. 또한 주희朱熹는 노장사상이나 물교가 '무용無用의 학문'이라면 『중용中庸』이야말로 실학에 속한다고 규정하였다.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라는 개념은 명대 중반 나흠순羅欽順(1465-1547)과 왕정상王廷相(1474-1544) 등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이들은 현실에서의 인간 생활을 중요하였기 때문에 사회적 위기 극복과 부국강병을 위해 토지, 수리, 조운, 조세, 과거제 등의 폐단을 비판하며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 말기는 전국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와 반봉건 투쟁으로 혼란을 겪는다. 이러한 시기 고헌성顧憲成(1550-1612)과 고반용高攀龍(1562-1626)등에 의해 정치, 사회적 혼란을 시정하기 위해 동림학파東林學派가 성립되었고, 시락의 이론적 기반이 갖추어졌다.


청 초에 강절江折 지역에서 활동한 황종희黃宗羲(1610-1695), 고염무顧炎武(1613-1682), 방이지芳以智(1611-1671) 등은 동림학파의 실학을 계승하여 현실 정치의 문제점을 적극 비판하고, 환관들과 결탁한 관리를 공격하였다. 특히 동림학파의 경세치용經世致用에 주목한 황종희는 농업 대신 공상工商이 모든 경제의 근본이라 하였고, 고염무는 상없을 간섭하는 정책을 반대하며 소금과 차의 판매를 자류롭게 허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청을 거부하며 은거한 저항 문인이었기 때문에 경세지학의 논의가 현실 정치에 직접 반영되지 못하면서 학문적 연구에 머무는 한계를 드러냈다. 옹정雍正 연간(1723-1735)부터는 안정된 청 황실이 비판적 학문을 불허하면서 실증적 연구방법론에 지나지 않았던 고증학이 학문으로 발전하며 실학을 대체하였다.


실학의 핵심 내용은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세 가지이다.

먼저 '경세치용'은 정치적 실용을 주장한 것으로, 성리학의 덕德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도덕적인 경세經世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체제 변혁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용후생'은 농업과 의학, 역법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실사구시'는 현실에 입각해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이며, 직접 조사하여 객관적인 사실을 도출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실제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빈말을 해서는 안 되며, 지행합일에 의거해 이론을 실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원래 실사구시는 학문적 태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실학의 연구방법론이 되었고, 건륭乾隆 연간(1736-1795)에 한족 출신 유학자들이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집대성하는 과정에서 고증ㅇ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전한前漢의ㅣ 유학자 유덕劉德에게 고증학은 실사구시로 고서 판본을 구분하는 태도와 방법론이었다면, 건가학파乾嘉學派 즉 건륭과 가경嘉慶 연간(1796-1820)에 유교 경전의 훈고와 고증에 집중했던 학자들에게 고증학은 학문을 하는 종지宗旨이며 지향점이었다.


조선은 임란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방면에서 모순이 드러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청으로부터 서학과 함께 실학을 받아들였다.

이때 중국의 실학은 체제 개혁을 내세운 반면,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기존의 사회질서를 인정하면서 유학의 본령을 회복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조선시대 실학의 선구자인 이수광은 성리학의 공론을 비판하며 "실심實心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實效를 거두어야 한다."고 하였고 국가 안보도 강조하였다. 그 뒤를 이은 유형원柳馨遠(1622-1673) 은 과거제, 토지, 조세, 군사, 상공업 정책 등에 관한 개혁안을 제시하고, 부국강병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실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8세기에 이익李瀷은 실학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토지나 행정기구 등 제도 개혁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경세치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학문에 대한 성호星湖 이익의 실증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계승한 제자들이 지리, 천문, 제도, 풍속, 자연과학 등 다방면에서 실증과 실용에 기반을 둔 연구를 전개한 결과 성호학파星湖學派가 성립되었다. 이처럼 현실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조류인 실학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조선의 산천이나 백성의 삶을 소재로 다루면서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성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 박지원과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상공업 유통이나 생산기구 등의 개혁을 통한 경제력 향상에 초점을 맞춘 이용후생의 실학을 발전시켰다. 동시에 이들은 청나라 학문과 문물의 우수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북학파北學派라고도 한다.

19세기 초 정약용丁若鏞(1762-1836)에 의해 실학이 집대성되었으며, 그는 "백성의 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며 실학의 개념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조선시대의 실학은 백성을 위한 경제적 안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용후생을 중요시한 것과, 광범위한 영역에서 우리의 것을 찾으려는 자주정신을 강조한 것 등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실학은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실업의 학문'으로 조선이나 중국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에서 성리학을 조선이나 중국처럼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불교, 양명학, 난학蘭學 등과 같은 학문의 하나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 때 조선인에 의해 일본에 전래된 성리학은 인간이 지켜야 할 일상의 윤리 규범 정도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실학은 성리학의 부정적 측면을 다루며 대안을 제시하려는 정치적 요소가 전혀 없으며, 국가 발전이나 백성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했던 순수 학문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성리학을 처음 수용한 사람은 에도시대(1603-1687) 초기의 유학자인 후지와라 세이카(1561-1619)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강항姜沆(1567-618)을 통해 성리학을 처음 접하였다. 당시 일본 사회는 불교가 종교와 학문을 모두 지배하고 있었으며 성리학의 전래를 계기로 종교와 학문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때 ㅂ루교와 노장은 허虛라고 비판되었고 남송의 유학자들처럼 성리학을 실實이라 하여 처음부터 일상에 도움을 주는 학문이라는 실학이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초기 일본 실학자들은 인간 내면에서 진실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실현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에도시대 초기부터 서구 과학이나 기술의 수용을 강조하면서 비실용적인 성리학을 비판하는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고, 중기 무렵 오규 소라이(1666-1728)를 기점으로 인간의 외부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일본 실학이 이루어졌다.

그는 기존의 모든 주석을 버리고 원문을 그대로 정밀하게 읽어내야 한다며 실증적 연구방법을 제안하였늕데, 이는 고문사학古文辭學이라고 한다.

동시에 막부가 지배체제의 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성리학으 장려함과 동시에 실증적 고전 연구와 자연과학 분야를 육성하는 정책을 펴면서,도시에서 새롭게 성장한 상공업자 계층인 조닌 중심의 현실주의적 문화가 급성장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오사카의 조닌을 중심으로 발달한 겐로쿠(1688-1703) 문화를 꼽을 수 있다. 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독자적 문화로 상공업자들의 자유롭고 향락적인 기질이 본의 시詩인 하이카이나 일본의 전통 연극인 가부키를 통해 표출되었으며, 유곽을 중심으로 한 퇴폐적인 측면도 있었다. 또한 현실에서의 삶을중시하는 경향은 특정 지역을 유람하고 직접 본 경관을 그리는 진경도眞景圖와 우키요에 풍속화가 크게 붐을 이루는데 직접 영향을 미쳤다.





- 명승지의 경관을 담은 실경산수화 -



홍인弘仁, <연단대煉丹臺>

《황산도》중에서, 17세기, 지본수묵담채, 21.5×18.3cm, 북경 고궁박물원


17-18세기 한중일 삼국에서 성행한 실경산수화. 이는 새로운 창작 경향으로 실질과 현실을 중시하는 실학적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중국의 황산, 한국의 금강산, 읿몬의 후지산이 대표적 명승지로 부상하였으며, 실경화와 관련해서는

 중국의 홍인弘仁의 화풍, 한국의 정선 화풍, 일본은 이케노 다이가 화풍이 대표적이다.


청 초에 안휘성 신안新安을 중심으로 황산의 실경으 즐겨 그리는 화가들이 등장하였으며 이들을 가리켜 안휘파安徽派, 신안파新安派,

또는 항산파黃山派라고 한다. 홍인, 簫소운종雲從(1596-1669), 사사표査士標(1615-1698),  매청梅淸(1623-1697), 석도石濤 등이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안휘파이며 유민화가이기도 한 홍인이 그린 《황산도》화첩은 원말 사대부가 중 한 사람인 예찬倪瓚(1301-1374)

의 필법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각 장면의 참신한 구도는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총 60점으로 이루어진 화첩 가운데 20번째인

<연단대>는 태고에 황제가 금단金丹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곳이며, 암산의 뾰족한 봉우리들을 예찬의 필법으로 묘사하여 평면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경물의 윤곽을 갈필로 그려 평면적인 효과를 내는 표현 기법은 홍인, 소운종, 사사표 등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소는 초기 안휘파 화가들이 옛 대가의 특정 화풍을 근간으로 새로운 표현법을 모색하는

의고주의적擬古主義的 창작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나아가 이 화가들과 명 말 의고주의를 대표하는

송강파松江派  문인들과의 긴밀했던 교유관계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매청梅淸, <황산문수대도黃山文殊臺圖>

17세기, 지본채색, 1894.2×48.5cm, 북경 고궁박물원


 안휘파 후기에 속하는 매청과 석도의 황산 그림은 홍인의 예찬풍에서 벗어난 톡특한 구도와 표현법으로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매청은 초기에는 홍인의 산수화풍을 수용하였고 과거를 포기한 뒤에는 명산대천을 유람하였으며, 60대로 접어든 1680년대 초부터는

개서억 화법으로 황산에 내재된 엄청난 자연 에너지를 담아내었다. 파격적인 사선구도에 짙은 연운과 산맥의

리드미컬한 동세 표현은 오랜 관찰을 통해 실경의 독특한 장면을 포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매청, <기봉운해도奇峰雲海圖>

《황산도》중에서, 1690년, 지본채색, 26×33cm, 북경 고궁박물원


근거리에서 포착한 특이한 구도로 주목된다. 두 사람이 화면 오른쪽의 정자에서 운해로 뒤덮인 황산의 기이한 자연 풍광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옆으로 규송虯松이 일렬로 자라 있는 산등성이와 암산의 여러 산등성이가 수평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장면 역시 실경에 기반을 둔 것으로 황산의 실제 경치와 비교하면 비록 수직의 암산을 수평으로 변화를 주었지만,

연은으로 뒤덮여 산등성이밖에 보이지 않는 황산의 독특한 경관과 매우 유사하다.








석도石濤, <연단대 요룡송>, 《황산팔상도黃山八勝圖》제7엽

청 초기, 지본수묵담채, 20.1×26.8cm, 교토 센오쿠 하쿠코칸


갈필의 선묘로 스케치처럼 경물의 특징만을 간결하게 묘사하였다. 이러한 화법은 매청도 황산의 실경을 그리며

사용했던 것으로, 석도와 매청이 황산 그림에서 표현 기법을 공유할 정도로 매우 친밀한 사이였음을 알려준다.







정선, <사선정>

《신묘년풍악도첩》중에서, 1711년, 견본채색, 36×37.4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이 금강산을 처음 방문한 것은 36세였던 1711년이다.

이때의 방문은 1710년 친구 李秉淵(1671-1751)이 금강산 초입에 위치한 금화金化 현감으로 부임하여 그를 초대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그은 자신의 세거지世居地인 한양을 비롯해 한강, 금강산, 영동 일대, 단양 등지를 유람하였으며, 이때 실견한 특정 장소를 남종화법

에 토대를 둔 자신만의 화법으로 그리며 한국적 진경산수화를 완성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선정은 삼일포三日浦의 중앙에 있는 섬에 세워진 정자 이름이며, 동일한 경관을 그린 다른 작품의 제목은 '삼일포'로 되어 있다.

화면을 보면 산자락과 해안선이 호수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이는 하늘에서 조망해야만 가능한 시점으로

 지상 어디에서도 포착할 수 없는 구도이다. 이러한 정선의 표현 기법은 당시 성행한 중국식 산수 판화집에서 일부 차용하기도 하였다.

일례로 정선의 <사선정>과 산수 판화집 《명산도》에 실린 <서호도西湖圖>를 비교해보면 이같은 사실이 분명해진다.







<서호도西湖圖>

『명산도』중에서, 1633년


정선은 산수를 그릴 때 토산土山에는 붓을 옆으로 뉘여서 가로로 찍는 미점米點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거칠고 뾰족한 바위산은

아래로 내리 긋는 수직준垂直皴으로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T자형 소나무를 즐겨 그렸다. 18세기 예원의 총수 강세황은 『표암유고』에서,


"평소에 익힌 필법을 마음대로 휘둘러 바위나 봉우리를 막론하고 일률적인 열마준법裂麻皴法으로 어지럽게 그린 것은 진경이 아니다."

라며 비판하였다. 표암은  자신의 화첩에 실린대로 진경산수화의 중요한 요건을 사실적인 묘사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강헤황, <청간정淸澗亭>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중에서, 1788년, 지본수묵, 35×25.7cm, 국립중앙박물관


이 화첩에 실린 <청간정>은 관동팔경의 하나이며, 설악산에서 내려온 청간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의

작은 구릉 위에 있는 정자로이곳에서 바라보는 동해안의 풍광은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김응환, <혈성루>

《금강산 화첩》중에서, 1788년, 견본담채, 23×42.8cm, 개인소장


금강산이 최고의 명승지로 유명세가 높아지자, 정조는 1788년 화원화가 김응환金應煥(1742-1789)과 김홍도로 하여금 금강산과 영동 일대

를 돌아본 다음 그림을 그려 바치도록 명하였다. 이때 두 화원화가는 강세황 일행가 금강산에서 만나 함께하는 동안에도 곳곳을 누비며 현장

의 모습을 스케치하였다. 정조에게 헌상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들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현장을 스케치 했다는 기록과 달리 정선

화풍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일례로 <혈성루>를 보면 중앙에 위치한 정양사正陽寺 건물들을 중심으로 근경의 내금강산은 미점으로 나타내고, 중경과 원경의 외금강산은 수직준으로 바위산들을 병풍처럼 표현하는 등 구도와 세부 기법에서 정선의 화풍이 엿보인다.






  


左, 김홍도, <명경대明鏡臺> 右, 명경대 실경

《금강팔경도》중에서, 1788년, 견본수묵, 91.4×41cm, 간송미술문화재단


반면 김홍도가 그린 《금강팔경도》는 망경대, 비봉폭, 구룡연 등을 포착한 시점이나 구도, 표현 기법 등이 새로워 정선 화풍은

찾아볼 수 없다. 그중에서도 <명경대>는 근거리에서 고원법으로 포착한 경물을 세필로 정교하게 묘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산세까지 나타내는 등 현장감 전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촬영한 사진과 비교하면 명확해지며, 카메라 렌즈로 화면의

경물이 모두 포착된다는 점에서도 정선의 그림과 다른 차별화된 면모를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김홍도는 현장을 세밀하게

관찰한 스케치를 근간으로 누가 보아도 공감할 수 있는, 객관성의 담보를 중요시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현실이나 실제를

중시한 실학과 상통하는 것으로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을 진경산수화보다 실경산수화로 분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케노 다이가, <아사마산진경도>

1760년, 지본수묵담채, 57×102.7cm, 일본 개인소장


일본에서도 17세기로 접어들며 막부 정권이 안정되자 에도를 중심으로 유람문화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여행 붐을 배경으로 18세기 중엽부터 명산을 소재로 한 진경도 제작이 유행하게 된다. 문인화가이며 비평가인 구와야마 교수

(1746-1799)는 『회사비언』(1790)에서 진경도라는 용어를 처음 언급하였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며 진경도의 유행을 이끈

이케노 다이가의 작품에 대해 "일본에 실재하는 명산대천의 진면목을 담아내었다,"라고 평하였다. 이케노 다이가와 정선은 활동 시기에

있어 약간 차이가 있지만, 창작 태도나 표현 기법 등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보인다. 첫째 자국의 명산이나 명승지를 직접 여행한 다음

그림을 그렸다. 둘째, 특정 장소를 사생하기도 하였지만 현장의 사실적 묘사 보다는 재구성을 통해 실경을 접했던 순간의 감흥을 전달

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셋째, 시에 대한 화답으로 진경을 그리기도 하여 시화일치라는 문인화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넷째, 명산이나

명승지의 실경 표현에 적합한 기법을 모색하면서 중국 화보를 참고하였다. 따라서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이케노 다이가의 진경도는

여행하는 동안 직접 관찰한 객관적인 현실 경관과 주관적인 감정 상태를 모두 담아내었다는 점에서,

관념산수화와 실경산수화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시바 고칸, <슨슈살타산후지망원도>

1804년, 견본유채, 78.5×146.5cm, 시즈오카현립미술관


양풍화가 시바 고칸 司馬江漢(1747-1818) 역시 후지산도와 관련해 주목되는 인물이다.

그는 1783년 일본 최초로 메가네에를 동판화로 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1788년 나가사키로 유학한 이후부터는 큰 화면의 일본 풍경화를

유채로 그리기도 하였다. 그중에는 후지산도가 여러 점 있으며, 1804년 그린 이 그림은 나가사키로 유학가는 길에 도카이도를

지나며 스루가완에서 후지산을 바라본 풍경을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가쓰시카 호쿠사이, <개풍쾌청>

《후가쿠36경》중에서, 1831-1833년, 다색목판, 25.72×38cm, 호놀룰루 미술관


'붉은 후지산'이라는 별칭을 가진 <괘풍쾌청>은 후지산과 남색으로 채워진 하늘의 강렬한 보색대비를 통해

자연의 미묘한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간바라역 주변의 눈 내리는 밤>

《도카이도53경치》중에서, 1833년, 다색목판, 22.6×35.1cm,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또 다른 우키요에 화가인 우타가와히로시게(1797-1858년 발간된 특정장소를 그린 각각이 풍경화는 계절이나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소나기, 저녁노을, 눈, 달 등을 더하여 인간의 서정적인 감성을 자극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진경도는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우키요에 풍경화로 재탄생되었으며, 이는 명소를 다녀오거나 동경했던 서민들 사이에서

외부세계를 기억하고 회상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기를 누리며 소비되었다.





- 백성들을 주인공으로 그린 풍속화 -



윤두서, <채애도採艾圖>

18세기 초, 견본수묵담채, 30.2×25cm, 해남윤씨 종가 소장


풍속화의 기원을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찾기도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풍속화는 18세기에 이르러

문인화가 윤두서尹斗緖(1668- 1715)와 조영석(1686-1761)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접근하였기 때문에, 윤두서의 <채애도採艾圖>나 조영석의 <말징박기>는 백성의 일상이라는

소재의 사실 전달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심리 상태는 배제되어 있다. 하지만 조영석이 서화 수장가 김광수의 부탁으로 그린

<현이도>에는 누가 이번 장기에서 이길 것이며 주변에서 훈수를 두고 있는 인물들의 심리는 어떠한가까지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김홍도, <점심>

《단원풍속도첩》중에서, 18세기, 지본수묵담채, 26.6×22.4cm, 국립중앙박물관






조영석, <새참>

《사제첩》중에서, 18세기, 지본담채, 20.5×24.5cm, 개인소장





김득신, <밀회투전>

《긍재전신첩》중에서, 18세기 후반-19세기 초, 지본담채, 27×22.4cm, 간송미술문화재단






작가 미상, <탕녀도蕩女圖>

17세기 초, 지본채색, 72.5×80.1cm, 일본 MOA 미술관


18세기에는 일본에서도 풍속화가 유행하였는데, 목판화인 우키요에라는 특수한 회화 형식으로 대량 생산되어

 불특정 다수에 의해 소비되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풍속화와는 다르다. 에도시대 초기에 도시의 목욕탕에서

 세신을 전업으로 했던 여성들을 그린 <탕녀도>는 이른 예로 주목된다. 무배경에 문양이 화려한 옷을 입은 탕녀 여섯 명이 걷고 있으며,

왼쪽으로부터 두 번째여성이 착용한 기모노 문양은 머리 감을 '목沐'의 전서체로 그녀들의 직업을 직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스즈키 하루노부, <미타테 손강>

1765년, 다색판화, 26.8×20CM, 보스톤 미술관


스즈키 하루노부(1725-1770)는 1765년부터 약 5년 동안 1,000여 점의 우키요에 미인도를 제작하였다. 그의 미인도는

화면의 경물이 단순하여 조형미가 돋보임과 동시에 대중이 선호했던 중국 고사나 문학작품 같은 고전적 주제를 당대의 분위기로

번안하는 <미타테손강>은 그러한 기법이 적용된 경우로 유녀가 창가에서 편지를 읽고 있는 장면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미인도가아니라 중국 진나라의 학자 손강이 눈빛으로 글을 읽어 재상이 되었다는

고사를 당세풍當世風으로 변형시킨 미타테에이다.







기타가와 우타마로, <부기지상浮氣之相>

『부인상학십체』중에서, 1793년, 다색판화, 37.8×24.3cm, 도쿄국립박물관


1792년부터 1793년에 걸쳐 제작한 미인화 시리즈인 『부인상학십체』아 『부이니인상십품』은 당시

 성행한 관상학과 연계되어 커다란 성공을 거두면서 간세이 시기(1789-1801)에 미인화의 대가로 부상하였다.







가쓰가와 슌쇼, <초대 나카무라 나카조인 오노 사다쿠로>

1776년경, 도쿄국립박물관


가쓰카와 슌소(1726년경-1793)가 가부키 배우의 얼굴을 실제로 닮게 그리면서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그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일상에서의 얼굴을 그리기도 하여 친근한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18세기에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경직도류의 제작에 그쳤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피지배층의 생활을

포착하면서 그들의 심지 상태까지도 담아내는 풍속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이때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백성들의 다양한 일상을

주제로 다루면서도 태평성대를 지향한 위정자의 정치적 색채가 더해지며 일본보다는 수요층이 제한적이었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풍속화가붓으로 그리는 육필화肉筆畵에서 목판화인 우키요에로 형식이 바뀌면서

 대량 제작되어 불특정 다수에 의해 소비되는 독특한 양상을 보여준다.



● 인용서적 : 한정희 · 최경현 著 『사상으로 읽는 동아시아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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