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학과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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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18. 12. 26.


실증으로 고전古典의 원형을 찾다



청대를 대표하는 사상인 고증학考證學은 문헌에 보이는 문자, 음운, 훈고訓告를 연구하여 도출된 실증적인 사실을 토대로 고전을 정비하고 해명하는 새로운 학문이다. 특정 사실이나 사건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방대한 자료 수집과 엄격한 검증을 근간으로 하였기 때문에 박학博學 또는 고거학考據學이라고도 한다. 그 연원은 청 초에 명 말의 국가적 위기를 지켜본 학자들이 경세치용經世致用을 내세우며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에서 문헌 연구를 통해 정치제도의 개혁을 모색했던 경세실학經世實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대 문인들은 성리학과 양명학, 서학을 두루 경험하였기에 송명이학宋明理學의 관념적 연구에 대한 반발로 한나라 훈고학訓告學을 계승하여 자료를 실증적으로 고증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처럼 고증학은 경세실학의 연구 방법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으나, 건륭 연간에 황실이 주도한 거대한 서적 편찬사업을 거치며 청대 학술 전반을 지배하는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고증학은 절강浙江의 서쪽에서 경학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정서학파折西學派에 이해 시작디었으며, 개조인 고염무顧炎武는 한대 훈고학으로 돌아가 문헌의 문자나 음운을 연구하였다. 또한 그는 『음론音論』에서, 증거를 원原 문헌에서 찾는 본증本證가 다른 문헌에서 찾는 방증傍證을 거쳐 사실을 정확하게 규명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 뒤를 이은 호위胡渭(1633-1714)와 閻若據(1636-1704)가 경전 위작 논증으로 주자학과는 상이한 실증적 경학의 모형을 제시하면서 고증학은 크게 발전하였다. 일례로 후위는 『역도명변易圖明辨』에서 송대 유학자가 말한 하도낙서河圖洛書가 거짓임을 밝혀냈고, 염약거는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에서 동진東晉 이후 나온 『상서尙書』는 모두 위작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실증적으로 규명하였다. 이로 인해 유교 경전이나 역사서를 연구할 때 명확한 증거 없이는 믿지 않는 학문적 풍토가 조성되면서 한대 훈고학을 추승하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18세기 중반 전성기를 맞이한 고증학은 혜동惠棟(1697-1758)이나 전대흔錢大昕(1728-1804)을 중심으로 한 오파吳派와 대진戴震(1724-1777)을 비롯한 단옥재段玉裁(1735-1815), 왕염손王念孫(1744-1832), 왕인지王引之(1766-1834), 노문초盧文弨(1717-1795) 등이 포함된 환파皖派

로 나뉘었다. 두 학파의 공통점은 주자가 완성한 송학宋學을 부정한 것이며, 오파는 한대 경학, 즉 한학漢學만을 존숭하며 연구하였다. 반면 환파는 소학小學(명물名物), 천문, 역법, 산학, 등의 원리를 고증에 적용하여 다른 학문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증의 결과로 새로운 이치를 탐색하였다. 대표적 인물인 대진은 문자나 음운으로 고증하는 소학을 발전시켰으며, 이를 경학이나 사학 등 여러 학문에 두루 적용하였다. 그는 1755년 북경에서 오파의 전대흔과 왕창王昶, 기윤紀昀(1723-1805)과 주균朱筠(1729-1781) 등 젊은 관료들을 만나 환파 고증학을 전하였다. 또는 그는 의리학의 경우 송학이 한학보다 우월하다며 상호보완적 공존을 인정하였으나, 1757년 양주에서 오파의 혜동을 만난 뒤에는 반자주적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대진의 주요 이론은 경전 연구에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정밀한 실증적 연구를 거친 다음, 경전에 담긴 성인의 뜻을 이해하고 주자 의리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의리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기론적 의리학으로 대진이 1766년 완성한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에 집약되어 있다. 어쨌든 이러한 학자들의 노력으로 위서僞書 경전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장 중에 다른 문장이 삽입되어 있는 오류도 다수 밝혀지고, 인멸되었던 한대 유학자 정현鄭玄의 『정지鄭志』라는 저서도 새롭게 복원되었다. 이로 인해 불교나 도가 사상이 뒤섞인 송학을 거부하고 오류가 적은 한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건륭제가 『사고전서四庫全書』(1772-1781)의 편찬을 주도하였고, 이를 계기로 고증학이 청대 학술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사업에는 3,600여 명의 한족 문인들이 동원되어 현실 정치에서 멀어짐과 동시에, 반청反淸의식이 포함된 서적들이 제외되면서 한족의 사상을 통제하는 역할도 겸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청 황실이 중국 고대 문헌까지 아우르는 학술 부흥정책을 실시하여 고증학이 발전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제공하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총책임자 기윤가 찬수관 주균은 일찍이 대진과 교유하였으며, 이들의 추천으로 대진, 소진함邵晋涵, 주영년周永年 등 다수의 고증학자들이 『사고전서』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청 황실의 문화 대통합을 위한 서적 편찬사업을 계기로 고증학은 방법론과 이치를 겸한 독립된 학문으로 부상하겨 이후의 학계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주계 성리학을 옹호하는 기존 유학자들이 주자를 부정하는 고층학에 거부감을 나타내면서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때 총책임자 기윤이 체제 통합이라는 대의를 위해 한학(고증학)과 송학(주자학)의 장점을 결합하는 '한송절충韓宋折衷'의 입장을 취하였고, 이는 19세기 청대 학술계의 보편적인 사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세기 전반에는 완원阮元(1764-1849)을 중심으로 초순焦循(1763-1820)과 능정감凌廷堪(1755-1809) 등이 한송절충론을 근간으로 후기 고증학을 주도하였다. 관료학자인 완원은 대진의 주기론과 의리학을 계승한 고증학자로서 체제 유지에 필요한 실천윤리를 강화하기 위해 고학古學과 실학적 실사구시를 강조하였다. 그는 고경정사古經精舍와 학해당學海堂이라는 서원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청대 고증학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 하였다. 이처럼 고관의 후원으로 고증학이 저변화되었다는 사실은 민간에서 성장한 고증학이 체제를 유지하는 교학의 범주에 편입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능정감은 송학의 이理를 예학禮學으로 대체하는 한송절충을 통해 체체통합의 실천윤리를 제시하였다. 이 밖에 완원은 북학파의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1748-1807), 김정희金正喜(1786-1856) 등과 교유하며 실사구시적 고증학풍을 조선에 전하였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같은 시기 강소성 상주常州에서 자존여長存與(1719-1788)와 劉逢祿(1766-1829)이 『춘추春秋』에 대한 『공양전公羊傳』의 금문경학金文經學을 주목하여 고학의 의리를 모색하면서 금문경학파金文經學派가 성립되었다. 또한 손성연孫星衍(1753-1818), 장혜언張惠言(1761-1802), 이조락李兆落(1761-1841) 등도 이에 속한다. 이들은 고전의 주석과 훈고에 치우쳐 현실 문제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으로 현실 개혁적 성향을 띠기도 하였다.


이런한 고증학의 성행을 배경으로 고대 청동기나 비석의 명문銘文으로 경전의 오류를 바로잡거나 한계를 보완하는 금석학金石學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더불어 청 문인들 사이에서 전국의 금석 자료를 찾아다니는 풍조가 만연하였고, 발견한 고비古碑, 텅동기, 석인石印, 고화폐문古貨幣文 등을 기록하고 탁본으로 정리한 다수의 저서들이 발간되었다. 고염부가 경전의 결함을 보충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데 금석문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편찬한 『금석문자기金石文字記』를 필두로 젅대흔의 『잠연당금석문자발미潜硏堂金石文字跋尾』, 왕창의 『금석췌편金石萃編』, 손성연 · 형팽邢彭의 『환우방비록寰宇訪碑錄』, 옹방강의 『양한금석기兩漢金石記』, 완원의 『적고재종정이기관지積古齋鐘鼎器款識』등이 발간되었다. 이 밖에 건륭제의 명에 따라 내부 소장 고동기와 명문이 『서청고감西淸古鑑』으로 정지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18세기 중반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고증학을 배경으로 금석문이나 청동기의 탁본을 정리한 다수의 서적들이 발간되었다. 특히 학문적 관심이 문자로 집중되는 고증학의 특징적 양상 때문인지 회화보다 서예 방면에서 전례 없는 획기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조선은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부터 청에 사은사謝恩使를 공식 파견하였으나 존명양이尊名攘夷로 인해 별다른 문화적 교유가 없었다.

하지만 17세기 중엽 이후 금석학이 처음 소개되었으며 호고적好古的,博古的 취미를 가진 조선 문인들 사이에서 금석 탁본이 수집 대상이 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인서화가 조속趙涑(1955-1668)과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1637-1693)가 우리나라 금석 탁본을 모아 각각 편찬한 『금석청완金石淸玩』과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이 이른 예로 주목된다. 그러나 이는 금석문의 내용보다 서예사적 위치와 가치에 비중을 둔 것으로 고증의 단계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영조 연간에 김재로金在魯(1682-1759)가 조선시대 비문의 탁본을 모아놓은

『금석록』도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18세기 중엽 고증학 관련 서적들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으며 이때 화이華夷의 구별을 배척하고 우수한 청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북학파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례로 홍대용洪大容(1731-1783)은 1766년 2월 북경에서 반정균潘庭筠으로부터 『한예자원漢隸字源』이라는 문자학 서적 뿐만 아니라 다른 음운학 서적들도 소개받았다. 박제가는 1778년 이덕무李德懋(1741-1793)와 함께 북경을 다녀온 이후 청대 문인 기윤, 손성연, 옹방강 등과 교유하였으며, 박지원은 1780년 북경을 방문하여 『사고전서』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유득공은 1801년 북경에서 청대 문인 이정원李鼎元(1750-1805), 진전陳鳣(1753-1817) 등과도 필담을 통해 새로운 의리학을 강조한 대진과 그의 제자로 음운학에 뛰어났던 왕염손과 단옥재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문인들이 받아들인 고증학은 명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 박학 및 엄정한 고증적 연구 과정을 통해 경세치용을 지향한 고염무의 초기 고증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상계가 고증학의 수용으로 한학과 송학 사이에서 흔들리자 정조는 의리학인 주자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며, 고증학은 새로운 연구방법론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절충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바꾸어 말 하면 송학, 즉 주자의 성리학에 대한 정통성을 재확인하면서도 한학의 장점을 일부 수용하여 송학의 한계나 문제점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다.


19세기 전반에 이르러서야 고증학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정약용과 김정희를 꼽을 수 있다. 정약용의 경우는 경전의 고의古義를 천명하기 위한 고증이었다면, 김정희는 옹방강, 완원 등 청 문인들과의 지속적인 교유를 통해 금석문을 고거考據하는 논증 위주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동시기에 이만수李晩秀(1752-1820), 정약용, 홍석주洪奭周(1774-1842) 같은 대부분의 사대부는 성리학을 추승하였기 때문에 고증학의 반주자적 입장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명물名物, 훈고의 문헌 실증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며 소극적이거나 보수적이었다.


특히 김정희는 1809년 북경에서 만난 옹방강이나 완원 등의 청문인들과 귀국한 뒤에도 서신을 교환하며 고증학과 금석학, 서예 등 다방면에 걸친 서적들을 접하였다. 1831년 고증학 저서를 집대성한 완원의 『황청경해』1,400권을 역관 이상적李尙迪(1804-1865)을 통해 전달받았으며, 이는 본격적인 고증학 연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김정희는 대진의 주기론적 의리학을 계승하면서도 한송절충론을 근간으로 송학의 이치를 예학으로 대체하며 체제 통합의 논리를 제시했던 완원과 능정감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상주에서 유봉록에 의해 성립된 금문경학파金文經學派도 알고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 금석학金石學과 예학을 결합시킨 장혜언의 성과를 조선에 처음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실사구시적 고증학을 수용한 김정희는 송학을 우위로 하면서 한학을 방법론으로 하는 병렬적 한송절충이 아니라 둘 사이의 모순을 제거하고 예학으로 체제 통합의 이치를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실증적 연구방법으로 금석학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추사체秋史體'라는 독특한 서체의 완성으로 높은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북한산 진흥황순수비> 탑본

김정희 부기附記, 1816-1817년, 종이에 먹, 134.5×82cm,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이후에는 남공철南公轍(1760-1840) 등 사대부들 사이에서 중국 비탁碑拓의 소장편이 보편화되었고, 김정희가 1832년부터 1834년 사이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완성하면서 금석학이 비로소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이 책은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또는 『운연과안록雲煙過眼록』이라고도 하며,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를 실증적으로 고증한 것이다. 김정희는 1816년과 1817년 두 차례의 북한산 답사를 통해 당초 부학대사비無學大師碑로 알려져 있던 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였으며 북한산 비분을 판독한 다음 『삼국사기』,『동국지리지』등의 문헌과 비교하여 신라 영토가 황초령에 이르렀고, 『삼국사기』에 진흥왕의 북방 원정 사실이 누락되었다는 것, '진흥眞興'이라는 시호가 진흥왕 생존 시에 사용되었다는 것 등의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혀냈다. 추사의 이와같은 연구와 고증은 금석학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김정희의 『금석과안록』은 현장 답사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비문 판독, 관련 문헌과 비교 분석하는 실사구시의 방법으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규명했다는 점에서 금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을 이는 역관 오경석吳慶錫(1831-1879)은 비록 미완이지만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1858년에 발간하였다.

원래 그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금석문 목록 147종을 정리한 다음 각각의 비문을 판독하고 고증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고성각자高句麗古城刻字'를 비롯해 8종 밖에 다루지 못하였다. 이 밖에 청대 고증학자 유희해劉喜海(1794-1852)는 조선의 문인들로부터 받은 금석문을 모아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1832)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도 18세기 후반 오타 긴조(1765-1825)에 의해 일본식 고증학이 정착되었다. 그는 한학과 송학 등 제학諸學의 장점을 취하여 경서를 실증한 다음 공자와 맹자로 돌아가서 그 의리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오타 긴조의 고증학이 지닌 특징적 경향을 잘 보여주는 것은

1804년 간행된 그의 저서 『구경담』에서 송학 관련 저서들이 빈번하게 인용되었는데 이는 오토 긴조가 송학(주자학)에 대해 친화적이었던 고염무의 초기 고증학을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훈고의 한학을 고증하과 동일시하면서 의리를 다룬 송학이 본本, 한학을 다룬 고증학은

말末이라고 간주하였다. 이는 고증을 의리 해명을 위한 수단 또는 방법이라 생각한 것이며, 청대 고증학자들이 고증을 본, 의리를 말이라고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견해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고증학은 동시기에 양주에서 대진을 계승한 완원과 초순이 한학을 중심으로 송학의 의리 문제로 나아가고자 했던 고증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문자학이나 음운학의 소학이 관과되었으며, 한국과 중국처럼 금석학이나 서예 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취들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청 말 서단에서 비학파의 성립과 확산 -



등석여鄧石如, <전서유신사찬篆書庾信四贊> 4폭 병풍

쇄금전灑金篆에 수묵, 179.8×56.8cm, 상해박물관


중국 서예사는 왕희지王羲之(307-365)를 비롯한 안진경顔眞卿(709-784) 이후 송· 원 · 명대의 법첩을 임모하며 옛 대가의 서체를 배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가경 여난(1796-1820)까지도 왕희지의 서품을 전하는 미불, 조맹부, 동기창 등의 법첩法帖으로 서체를 익히는 첩학파帖學派가 주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금석학의 급성장을 배경으로 도광道光 연간(1821-1850)부터는 비문, 특히 북비에 새겨진 서체를 따라서 쓰는 서예가들, 즉 비학파가 등장하였다.


 이는 고증학자들이 경서를 실증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들의 문자나 음운을 엄밀하게 교감하는 소학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처음에는 소학에서 이왕二王(왕희지, 왕헌지王獻之 부자父子)을 전형으로 하는 법첩을 자료로 활요하였지만, 반복된 목각模刻으로 원형이 손상되거나 변형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고대 금석문자로 고증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포세신包世臣(1775-1855) 등이 북비의 거칠면서도 힘이 넘치는 방형의 서체에 신선한 매력을 느끼면서 금석문에 새겨진 전서와 예서를 배우게 된 것이다.이때 비학파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고증학자 완원이며 그가 제기한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과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은 명 말 동기창이 회화사를 두 파로 정의한 남북종론처럼 중국 서예사에서 일획을 긋는 서론書論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북비는 북위北魏 비문에 보이는 소박하면서도 거친 서체를 배우려 한 서예가들을 가리키며, 남첩은 왕희지 계열의 부드러운 서체를 추종했던 이들을 지칭한 것이다.


완원의 이러한 서예론은 완원의 이러한 서예론은 '晉唐의 고법'이라 추숭된 법첩의 학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간단히 말하면 왕희지 이래의 부드러운 필법을 버리고 북위의 힘이 넘치는 서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 뒤를 이은 포세신이 완원의 서론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함풍咸豊 연간(1851-1861)부터는 비학파가 첩학파를 제치고 서단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포세신의 저서 『예주쌍즙藝舟雙楫』은 비학파의 경전처럼 추숭되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청대 서예가 101명을 평가한 「국조서품國朝書品」에서 등석여의 전서와 예서를 신품으로 분류하여 그를 비학파의 개조로 만든 것이다. 또한 북비를 근간으로 새로운 운필법인 '중봉설中峰說'과 '역입평출逆入平出' 등의 구체적인 기법을 제시하여 첩학에서 비학으로 전환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처럼 완원과 포세신은 비학파의 성립에 있어서 주요 이론과 기법을 제시하였지만, 그들의 서체는 안진경, 구양순歐陽詢으로부터 소식, 동기창에 이르는 첩학파의 부드러운 서풍을 보여준다.





       


左, <역산각석嶧山刻石> 부분

기원전 219년, 218×84cm

右, 李秉綬, <전서절임장천비篆書節臨張遷碑> 부분

138.9×38.1cm, 사천성박물관


동석여는 첩학과 북비의 전서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중봉의 붓끝을 역입평출逆入平出하여 진전秦篆(진나라의 전서)과 한예漢隸(한나라의 예서)

의 풍격을 지니면서도 굵기가 동일하게 두툼한 새로운 서체를 완성하였다. 그가 584세 이후에 쓴 <전서유신사찬篆書庾信四贊> 4폭 병풍은 그러한 예에 해당되며 <태산각석>이나 <역산각석> 등과 같은 비문의 전서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등석여의 글자는 약간 긴 방형이며, 획의 굵기가 동일하여 전반적으로 기운이 넘치면서도 중후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의 이러한 서체는 이병수, 오희재, 하소기, 조지겸 등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비학파의 전범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이병수는 등석여의 영향을 받아 한대 비문들 중에서 기원전 56년에 새겨진 <노효왕각석魯孝王刻石>이나 16년의 <내후자각석來候子刻石>처럼 가로획의 비중이 큰 질박한 글씨들을 근간으로 가로가 긴 방형의 독특한 서풍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전서와 예서 모두 동일하며, 사천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병수의 <전서절임장천비>를 보면 가로획 위주의 직필로 서체가 전반적으로 가로로 긴 방형에 가깝다. 이는 당시에도 등석여가 미칠 수 없는 높은 풍격을 지닌 것으로 널리 칭송되었다. 이병수의 이러한 개성적 글씨가 대개 세로로 약간 긴 방형이었던 것과 비교했을 때 차이가 있다.






조지겸趙之謙, <장형령헌張衡靈憲> 4폭 병풍

1668년


다른 비학파 서예가인 조지겸은 전각가이며 동시에 해상화파 화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던 인물.

그는 20대 이전부터 훈고학과 금석학을 배우면서 포세신의 『예주쌍즙』을 비롯해 다수의 관련 저서를 접하였다.

조지겸 역시 <역산각석>을 역입평출로 임모하여 전서를 학습하였기 때문에 등석여와 유사한 면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단연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해서체이며, 북비의 투박한 서체에 역입평출로 마무리하여 둥글면서도 중후한 기운을 더한 '북위체北魏體'라는 개성적 서풍으로 유명하다. 1868년에 쓴 <장형령헌> 4폭 병풍이 그러한 예에 해당되며, 중봉을 역입평출로 구사하여 글자의 굵기가 동일하면서도 유려한 특징을 보여준다.





<비구혜성위시평공조상기比丘慧成爲始平公造像記> 부분

북위 498년


조지겸의 북위체는 498년에 새겨진 북위의 <비구혜성위시평공조상기>와 매우 유사하여

북비를 근간으로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청 말 비학파의 서풍은 왕희지를 근간으로 한 첩학파가 해서나 초서에서 부드럽고 유려한 서풍을 주로 구사하였던 당대 서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확산되었다. 이때  등석여가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는 진한과 북위의 비문으로 전서와 예서를 학습한 결과 두툼한 획으로 이루어진 장방형의 새로운 서체로 남성적인 미감을 보여주었다. 이후 등석여의 제자인 포세신과 장혜언을 통해 강절 출신 문인들에게 퍼지면서 그의 서풍을 계승한 이들이 다수 등장하였다. 이 밖에 19세기 말 상해에 정착한 오창석의 경우는 비학파에서 진나라의 소전小篆을 주목하였던 것과는 달리, 진나라 이전의 대전大篆 인 <석고문石鼓問>과 <낭야대각석>을 반복적으로 임모하여 중봉의 가로획이나 세로 획에서 비백이 보이는 '석고낭야필'

이라는 독특한 서풍을 완성하였다.






김정희, <阮堂依古> 중에서

지본묵서, 각 33.8×26.7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중국의 금석문 탁본 수집이 성행하면서 글씨가 가늘어 옥저전玉筯篆이라고도 불리는 진나라 소전이 일찍부터 소개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나 이한진李漢鎭(1732-?)의 서예 작품들을 통해서 확인된다. 하지만 1809년 김정희가 북경을 방문한 이후 청 문사들과의 지속적인 교유 과정에서 첩학파와 비학파의 서풍이 동시에 소개되었다. 북경에서 돌아온 그는 첩학파 옹방강에게 매료되면서 해서는 구양순유의 옹방강 서체를 따랐으며, 행초서 역시 동기창풍이 가미된 옹방강 서풍을 수용하였다. 반면 전서와 예서는 비학파의 영향으로 금석학 관련 저서들에 실려있는 금석문을 주로 임서臨書하였다. 이때 옹방강의 『양한금석기』를 비롯해 완원의 『적고재종정이기관지』, 전대흔의『잠연당금석문자발미』, 왕창의『금석췌편』등을 참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정희의전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예서의 경우는 탁월한 성취를 남겼다. 그는 비학파의 개조인 동석여보다 예서에서 직필의 개성적 서풍으로 이름이 높았던 이병수의 예서풍을 선호하였다. 때문에 김정희의 한대 예서를 학습하기 위해 전서의 자취가 남아 있는 전한前漢의 동경銅鏡에 새겨진 종정문鐘鼎文

을 자주 임서하였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완당의고예첩》은 그러한 예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적고재종정이기관지』에 실린 금문을 참고한 것이며, 임서한 글자를 보면 굵기가 가늘고 가로획 위주의 서체인 것으로 보아 종정문과 이병수의 직필로 가로로 긴 방형의 독특한 서풍을 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김정희가 전한의 예서를 대표하는 <노효왕각석>을 임서한 것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로 보아 김정희는 해서와 행초서에서는 첩학파를,

전서와 예서에서는 비학파를 수용하였다고 할수 있다.






김정희,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境> 현판 탁본

1852년 이후, 54.8×96cm, 국립중앙박물관


김정희는 제주 유배 시절, 한대 예서는 물론 이병수의 예서체를 근간으로 첩학파의 해서체를 절출하여 고졸미古拙美가 돋보이면서도 조형적으로 파격적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진흥북수고경>은 현판을 탁본한 것으로, 추사체의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김정희가 1852년 함흥도 황초령을 방문하여 진흥왕순수비를 찾아낸 다음 감영으로 옮겨 보존하기 위해 세운 비각의 현판으로 쓴 것이다.'진흥황이 북쪽으로 순시한 옛 영토'라는 의미이며, 힘이 넘치는 고졸한 필획과 글자의 대담한 변형이 주목된다. 각각의 글씨를 보면 가로획이 강조된 가운데 '狩'의 좌변인 '犭''에서만 수직적 요소가 보이며 '境'은 한대 동경의 금문에서 보이는 '竟'으로 대체하고 머리의 점을 과감하게 생략하였다. 태세太細와 소밀疎密의 차이가 심한 필획과 직각에 가까운 파격적인 조형미에서 추사체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추사체는 김정희가 천착했던 한대 예서와 이병수의 예서가 교묘하게 절충되어 있으면서도 한국적 미감이 결합된 독창적인 서체인 것이다.







장요손張曜孫, <與爾同消> 대련

1845년, 지본수묵, 126.3×28.5cm, 간송미술문화재단


19세기 중엽 이후에도 조선의 서단은 첩학파가 주류였지만, 김정희에게 문예를 배운 역관 이상적, 오경석, 김석준 등에 의해서 비학파의 개조인 등석여의 제자 장혜언과 포세신에게 배운 이들의 묵적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이때 이상적, 오경석, 김석준이 교유한 청 문인들은 스승 김정희의 인맥에서 출발하여 점차 새로운 인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특히 이상적은 북경ㅇ르 12차례나 왕래하며 조선과 청의 문예 교유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청 문인들과 교유하며 등석여 사후 비학파를 대표하는 포세신과 오희재의 묵적을 실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소기를 직접 만나기도 하였다. 또한 1845년에는 북경에서 김정희와 교유한 장요손으로부터 <여이동소> 대련을 선물 받기도 하였다. 장요손은 등석여의 제자인 장혜언의 조카로 등석여 서풍을 계승하였으나 중국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김정희와의 교유 때문인지 등석여에 비견되는 필묵이라 평가되었다.






오경석, <임예기비臨禮記碑> 10폭 병풍 중에서 2폭

1876년, 지본수묵, 128.7×36.5cm, 개인소장


오경석은 1872년 오대징吳大徵(1835-1902)을 처음 만난 이후 막역한 관계가 되면서 그의 전서 묵적을 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오대징은 1884년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필묵을 조선 문인들에게 직접 선물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오경석이 비학파의 필묵을 단순히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학파 서풍의 글씨를 다수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 서화와 금석문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북경에서 수집했던 서화 작품들 가운데 포함된 금석문 탁본이나 비학파의 묵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밖에 김석준의 서예와 관련해 윤정현尹定鉉(1793-1874)은 그가 북조풍의 예서와 지두서指頭書에 뛰어났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는 김석준이 김정희의 영향 아래 1862년 역관으로 북경을 처음 다녀온 이후, 비학파 묵적들을 실견하며 그러한 서풍을 체화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청 말 상해화단에서 금석학파의 성립과 전파 -



조지겸, 《화훼도책花卉圖冊》 중 제3엽

1859년, 지본채색, 22.9×31.9cm, 북경 고궁박물원


아편전쟁(1840) 이후 계속된 서구의 침입과 태평천국의 난은 상해가 중국 경제와 문화이 중심지로 부상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함풍 연간(1851-1861)부터 1920년대까지 근대 상공업 도시인 상해를 무대로 다양한 계층의 서화가들이 활동하면서 해상화파海上畵派가 성립되었다. 해상화파는 상해화파上海畵派 또는 해파海波라고도 한다. 당시 상해 문화계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양인楊逸(1864-1929)이 편찬한 『해상묵림海上墨林』에는 이때 활동한 서화가 500여 명의 출신과 생애가 정리되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19세기 초반부터 상해에서 오원서화회吾園書畵會와 소봉래서화회小蓬萊書畵會 등의 서화회 모임이 열렸고, 거리가 가까웠던 향주, 소주 출신 문인들도 참석하여 청동기나 비문, 탁본 등을 감상했을 뿐만 아니라 시서화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특히 태평천국의 난을 피해 전국의 대수장가들이 안전지대인 상해 조계지租界

地로 모여들었고, 이들이 가져온 각종 고서적은 물론 고기물古器物, 금석문, 서화 작품 등이 대거 유입되면서 전통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동시에 서구와의 교역을 통해 유입된 서양 문물이 근대 도시문화를 형성하면서 동서문화가 공존하는 특수한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이때 서구와의 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새로운 서화 수요층으로 부상하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상해는 중국 서화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해화단의 두드러진 특징은 신분과 출신지, 사승관계 등이 다른 서화가들이 모여 활동하였기 때문에 회화 경향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해상화파는 특징적 화법을 기준으로 전통문인화파, 금석화파, 해파, 서양화파의 네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전통문인화파는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를 지낸 문인화가로 진병문秦病文, 오대징, 육회陸灰, 고운顧澐,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명대 오파吳派와 청 초의 사왕화풍四王畵風을 절충한 산수화를 주로 그려 보수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해파는 상해화단을 대표하는 직업화가들로 대중적 미감을 반영하여 길상성吉祥性과 장식성이 강한 화훼화와 도석인물화, 사녀화仕女畵를 주로 제작하였다. 대표적 하가로는 장웅張熊(1803-1886), 주웅朱熊(1801-1864), 임웅任熊(1823-1857), 주한周閑, 호공수胡共壽, 임백년任伯年, 허곡虛谷(1824-1896), 왕례王禮, 주칭朱偁, 전혜안錢慧安(1833-1911) 등이 있다. 서양화파는 일점투시법이나 명암법, 사실주의 표현 기법 등 서양화법을 수용한 경우로

오우여吳友如, 오경운吳慶雲, 정장桯璋 등이 이에 해당한다.


금석화파는 전각의 장법(구도)과 금석문 서체로 그림을 그린 일군의 화가들을 가리키며, 조지겸과 오창석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문인 교육을 받아 금석학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전각이나 서예에도 능하였다, 이보다 앞서 18세기 전반 항주에서 진한의 비문을 종宗으로 전각에서 두각을 나타낸 서령팔가西泠八家나 19세기 중반 서단에서 북비를 근간으로 힘이 넘치는 남성적 서체를 발전시킨 비학파가 등장했던 것은 상해화단에서 금석화풍이 발전할 수 있는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상해에서 전각 구도와 금석문의 서체를 그림에 처음 적용한 사람은 비학파 서예가 겸 화가인 조지겸이며, 이러한 금석화풍은 오창석에 이르러 집대성되어 중국화의 현대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조지겸, <화훼도> 4폭 병풍

1867년, 지본채색, 168×43cm, 북경 고궁박물원



조지겸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 후반 무렵이며, 금석학 연구를 기반으로 한 전각과 서예 방면에서의 예술적 성취를 회화 창작 과정에 적용한 결가 일찍부터 개성적 미감을 보여준다. 이 화책은 이른 예로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1엽의 국화와 해당화를 시작으로 연꽃과 붉은색 여뀌, 등꽃, 수선화와 영지, 수선화와 납매臘梅, 동백4, 매화와 붉은 대나무, 복숭아꽃, 양귀비꽃, 모란 장미, 연꽃과 금사도金絲桃, 봉선화꽃 그림까지 총 14엽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화면을 보면 공필工筆, 사의寫意, 쌍구雙鉤, 몰골沒骨, 갈필渴筆, 발묵潑墨의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붉은색, 녹색, 검정색을 위주로 하면서도 양홍洋紅, 황색黃色, 자색, 등을 더하여 진채의 화려한 색채감각이 돋보인다.

이러한 채색법은 장웅, 임웅, 주한, 왕례 등의 해파 화가들 작품에서 흔히 접할 수 있으며 서화 수요층인 대중의 미감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수 있다. 일례로 제3엽의 등나무꽃 그림을 보면 소밀疏密이 확연한 구도에서 전각의 장법이 연상되고, 화면 왼쪽 상단의 제시에서 "초서의 서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고 직접 밝힌 것처럼 등나무줄기 표현에서 서법의 일면을 엿볼수 있다. 비록 각의 화면에서 이선, 주지면, 왕무, 서위, 운수평 등 유명 화가의 필법에 의탁하였다고 직접 밝히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지겸 자신이 터득했던 전각의 장법이나 서법이 곳곳에 적용되어 있다. 이러한 금석화풍은 1867년에 그려진 <화훼도> 4폭 병풍을 포함한 다수의 작품에서 동일한 양상을 보이므로 지지겸은 금서화파의 개척자인 것이다.







, 조지겸, <화과도花果圖>

1869년, 지본채색, 132×65cm, 중국 개인소장

右, 장연창張燕昌, 오동발吳東髮 합작, <박고화훼도博古花卉圖>

1799년, 지본채색, 133.5×41cm, 중국 개인소장


조지겸은 청동기를 탁본하거나 탁본한 것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금문의 탁본이 포함된 박고도博古圖를 여러 점 제작하였는데,

1869년에 그려진 이  <화과도>는 그러한 예들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탁본한 청동기와 탁본 금문은 금석학 관련 자료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사용했던 탁본 기법이 청공도淸供圖에 적용된 겨우로서 조지겸이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원래 박고도는 청동기나 도자기와 함께 각종 화훼, 과일, 열매, 문방구 등을 그린 것으로 명대 말기부터 시작되었으며, 금석학의 성행과 더불어 문인들의 묵고 취미를 배경으로 해상화파 화가들에 의해 즐겨 그려졌다. 특히 탁본 청동기나 명문이 있는 박고도의 직접적인 유래는 18세기 말 금석학의 성행을 배경으로 전각가와 화가가 합작했던 사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각가 장연창과 문인화가 오동발이 1799년 공동으로 제작한 <박고화훼도>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화면에서 "태시육년(470년)립이라 새겨진 전돌과 청동기는 전각가 장연창이 전형탁본을 한 것이며, 그 다음에 동향 출신 문인화가 오동발이 복숭화꽃을 비롯한 구고하, 열매 등을 그린 것이다. 전형탁본은 청동기나 와당 등의 형태를 온전한 자료로 전하기 위한 기법 중 하나로 全拓(또는 傳拓)이라고도 한다. 이는 청동기나 와당 등을 몸체아 손잡이, 다리 등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탁본을 한 다음 각각의 부분을 오려 하나의 종이에 붙여 온전한 기형을 만드는 것이다. 포창희鲍昌熙가 1877년 편찬한 『금석설金石屑』권1에 의하면 마기봉馬技鳳의 1798년 6월 18일 전형탁본을 완성하였고, 그의 제자였던 육주六舟(승려 達受, 1791-1858)를 통해 유행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완원이 육주를 '금석승金石僧'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밖에 풍운붕가 풍운원이 1822년 이후 편찬한 『금석색金石索』이나 장정제(1768-1848)가 편찬한 『청의각금석문자淸儀閣金石文字』등에서도 전형탁본의 예를 확인할 수 있다.







장승업,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 2폭

견본담채, 128×36.1cm, 선문대학교박물관


해상화파의 박고도는 19세기 말 조선 화단에 전래 수용되어 장승업이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 를 완성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청동기와 벼루를 탁본한 것처럼 강한 음영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전형탁본을 염두에 둔 것으로 상해화단에서 유행한 박고도와의 밀접한 영향관계를 상정하게 한다. 장승업은 수묵과 공필채색의 두 가지 기법으로 기명절지화를 그렸으며 전자는 문인취향을 고려한 것이라면 후자는 당시 새로운 서화 수요층으로 부상한 일반 대중의 미감을 반영하여 장식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공필채색의 기명절지화는 그의 제자인 안중식과 조석진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이도영, 이한복 등에 의해 널리 그려지며 도식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左, 오창석, <등화도藤花圖>

1917년, 지본채색, 135.4×53.3cm, 북경 고궁박물원

右, 오창석, <홍매도紅梅圖>

1923년, 지본채색, 197.3×33.8cm, 북경 고궁박물원


오창석은 조지겸에 의해 시작된 금석화풍을 근간으로 새로운 시대적 미감을 결합하여 중국회화의 현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대표적 화가이다.

그는 40대를 전후해 전각에서 고졸한 각법으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진대의 소전이나 한대 예서를 즐겨 썼던 비학파 서예가들과 달리

전국시대의<석고문>과 진대에 새겨진 <낭야대각석>을 주로 임모하면서 독특한 서체를 완성하였다.


이처럼 전각과 서예에서 일가를 이룬 오창석이 회화 창작에 전념하게 된 것은 1893년 임백년에게 직접 그림을 배운 다음부터이다.

이전에 즐겨 그렸던 사군자에서 상해 대중들이 선호했던 소재인 등나무, 천죽天竹, 연꽃, 수선화, 모란, 도화桃花, 복숭아 등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동시에 밝은 채색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장식성이 커졌지만 이미 일가를 이루었던 전각의 장법과 석고문의 거친 필법으로 화훼ㅓ화를 그리면서 자신만의 개성적 화풍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오창석이 1917년 완성한 <등화도>는 그러한 예들 가운데 하나이며, 구도에서 소밀을 강조한 것이나 등나무 줄기에 서법을 적용한 것은 조지겸의 영향이 분명하지만 줄기 표현에서 보이는 비백飛白의 효과는 그만의 독특한 서풍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상해의 대중들이 선호하는 소재를 화려한 채색으로 그리면서도 금석기의 필법으로 세속적인 요소를 상쇄시키려고 하였으나, 아직은 다소 어색한 면모를 보여준다.


오창석이 아속공상의 격조를 지닌 독자적 화풍을 완성한 것은 상해에 정착한 1914년 이후이며, 현전하는 대개의 작품들은 이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그가 1923년에 그린 <홍매도>는 두 개의 바위를 배경으로 홍매가 그려져 있는 작품으로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 거친 붓질로 소박하면서도 고졸한 미감은 물론 문인화의 풍격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오창석의 이러한 개성적 화풍은 당시 상해화단에서 대중들의 미감을 반영하여 형태나 색채를 과장하여 속기俗氣가 넘쳤던 그림들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는 대중이 선호한 화훼화를 내면의 사의적寫意的 표현을 중시하는 현대적 문인화로 체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근대 한국화단에서는 김용진金容鎭(1882-1968)이 1926년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 화가 방명方洺과 교유하면서 오창석 화훼화풍을 수용하였으며, 한빛문화재단 소장의 <화훼절지도>는 그러한 예들 가운데 하나이다.







김용진, <화훼절지도花卉折枝圖>

20세기, 지본채색, 94×62.9cm, 한빛문화재단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증학을 배경으로 한 금석학의 성행은 비학파가 첩학파를 제치고 중국 서단을 주도하는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고증학이 학문으로 발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비학파의 성과를 수용하고 임모하는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오세창의 경우는 집안의 소장품을 근간으로 독특한 비학파의 서풍을 완성하였지만 첩학 위주의 서단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화단에서는 19세기 후반 이후 상해에서 조지겸이 금석화파를 개척하였고 오창석은 그러한 화풍을 계승하여 화훼화를 아속공상의 현대적 문인화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모두 전각과 서예에서 일가를 이룬 다음 그러한 성취를 회화 창작에 적용한 것이지만, 근대 한국화단에서는 서예나 전각에 대한 선행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오창석의 화풍을 표현 기법으로 수용하는 정도에 머무는 한계를 보였다.



● 인용서적 : 한정희 · 최경현 著 『사상으로 읽는 동아시아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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