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유람록 <인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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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21. 6. 9.

김윤겸金允謙, <백악산白岳山>, 1763년, 28.6×51.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윤겸이 경복궁의 뒷산인 백악산을 그린 그림이다.

위쪽에 성와醒窩라는 호를 가진 인물이 1774년 봄에 7언고시의 제시를 적어두었다.

성와는 겸재 정선이 죽은 후 초산자樵山子가 가장 뛰어난 화가라고 하였다.

초산자는 산초山樵 혹은 묵초默樵라는 호를 사용한 김윤겸을 말한다.

 

 

 

 

김상헌金尙憲 「서산 유람기遊西山記」

 

 

 

한양의 산은 삼각산에서 나와 왕도王都의 진산鎭山을 이룬 것이 공극봉이고, 공극봉이 고개에서 나뉘어

구불구불 뻗어 서쪽으로 끌어안고 남쪽으로 에워싸고 있는 것이 필운봉이다. 나는 두 산 아래에 집을

정하여 아침저녁으로 출입하고 기거하였으므로 산과 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산도 우리 집

마루와 창, 궤 안에 다투어 들어와서, 더욱 친해지려고 하는 듯하였다.

이 때문에 늘 누워서 눈길을 보냈을 뿐, 한 번도 골짜기 안으로 가본 적이 없었다.

 

갑인년(광해군 6, 1614) 가을, 모친께서 안질이 생겼다. 좋은 샘물이 서산에 나서, 병든 사람이 씻으면

왕왕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날을 잡아 길을 떠났다. 형님(김상용)과 나, 광찬과 광숙도 따라갔다.

인왕동으로 들어가 예전에 우의정을 지낸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의 옛집을 지났다. 청심당 · 풍천각 · 수운헌

이라고 이름을 붙인 건물들은 무너진 문과 부서진 주춧돌만 남아 있어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양곡(소세양)은

문장으로 당대에 현달하고 부귀하였던 데다가, 또 집을 잘 설계한다는 명성이 있어, 건물의 꾸밈이 매우 교묘

하고 화려하였다. 사귄 사람들도 모두 한때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었다. 그가 짓고 읊조린 시문들은

반드시 기록하여 후대에 전할 만한 것이었을 텐데, 백 년도 채 되지 못한 지금 한둘도 남아 있지 않다.

선비가 의지하여 후대에 베풀 바는 여기(집의 설계와 시문의 창작)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곳을 거쳐 위로 올라갔다. 깎아지른 절벽과 날리는 샘물, 푸른 풀과 파란 언덕, 곳곳이 즐길 만하였다. 다시 그곳을

지나서 더 위로 올라갔다. 돌길이 비뚤비뚤하므로 말을 놓아두고 걸어갔다. 두 번 쉬고 나서야 샘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지세가 공극봉의 딱 반에 해당한다. 큰 바위 하나가 우뚝 지붕을 인 것처럼 서 있었다. 바위 귀퉁이를 두드리고 깨어

처마처럼 만들었는데 예닐곱 사람이 눈비를 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샘물은 바위 밑 작은 틈에서 솟아나오는데, 수맥이

매우 가늘다.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 동안 기다리고서야 구멍의 3분의 1 정도가 채워졌다. 그래도 구멍 둘레가 겨우

맷돌만하고 깊이도 무릎이 잠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샘물 맛이 떫지 않고 달았지만 그다지 시웒하지는 않았다. 샘물

곁의 숲에는 지전紙錢이 어지럽게 붙어 있다. 대개 무당이 영험을 비는 곳이라 그렇다. 석굴 앞의 흙으로 된 언덕은 평평

하다. 동서 길이가 겨우 수십 보밖에 되지 않는다. 빗물로 패인 곳에 오래된 기와가 나오므로, 인왕사 터임을 알 수 있다.

어떤이는 말하길 북으로 돌아가서 골짜기를 마주한 곳에도 폐허가 된 터가 있지만 유적이 인멸되어 아무것도 알아볼 수

가 없다고 한다. 이전에 들으니, 도읍을 처음 정할 때 인왕산의 석벽에서 단서丹書가 나왔다고 하지만,

그 또한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산은 전부 돌로 몸체를 이루었다. 정상에서 중간 부분까지는 높은 석대와 험준한 바위, 아슬아슬 높은 봉우리와

첩첩 포개진 절벽이 곧게 서 있거나 옆으로 늘어서 있다. 위로 쳐다보면 병기를 세워 놓거나 갑옷을 포개어 놓은

듯하여, 그 기이한 모습을 이루 다 묘사하기 어렵다. 산의 지맥이 이어져 묏부리가 되고, 여러 묏부리가 나누어져

골짜기가 되었다. 골짜기 안에는 모두 샘물이 흘러나온다. 맑은 물이 돌에 부딪히는 것이 일만 개의 옥이 쟁그랑

거리는 것 같다. 자연경관이 정말 도성 안에서 제일가는 곳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법으로 금하는 것이 느슨

해서 온 산에 한 길 이상 되는 큰 나무가 없다는 점이다. 해를 가릴 정도로 울창한 소나무와 전나무, 언덕에 빽빽

하게 서 있는 단풍나무와 녹나무가 바람에 "쏴" 하고 소리를 내면서 달 뜬 저녁 눈앞에 아스라이 펼쳐진다면, 신선

사는 봉래산이나 곤륜산 낭원이라 하더라도 굳이 부러워할 것이 있겠는가?

 

뒤로 굽은 성이 매우 가까워 보이기에 종을 시켜 길을 찾게 하였더니, 길이 험하여 오르기 어렵다고 하였다.

광찬과 광숙이 날랜 걸음으로 갔다가 왔다가 하면서 눈으로 본 것을 말하였다.

"사현沙峴의 행인이 개미처럼 조그마합니다."

"마포강의 바람을 받은 배가 몇 척인지 역력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나는 혼자 탄식하였다.

"나이도 차기 전에 아주 쇠약해지고 말았구나. 가까운 거리라 하여도 씩씩하게 걸음을 내딛을 수 없더니,

험한 곳을 만나 걸음을 멈추다니, 이래서야 어찌, 도열한 사람들 틈에 나아가 힘을 내어 젊어서 배운 바를

펼치고 도를 행하여 남에게 미치게 할 수 있겠는가?"

 

백형과 함께 남봉에 올랐다. 남봉 아래 주고酒庫가 있다. 두 채의 행랑이 마주보고 연이어 10여 칸으로 지어져 있다.

술기운이 뻗치므로, 날아가는 새도 이곳에는 모이지 않는다. 저 많은 광약狂藥(술)이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취하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앞쪽으로 남산을 바라보았다.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는 듯한 형상이다. 남쪽의 성이 산허리에

굽어 있어, 구불구불 뻗어나가 마치 용이 누워 있는 것 같다. 그 아래 어찌 인걸이 용처럼 누워 있을 수 있겠는가?

인걸은 이제 필시 여기에 있지 못할 것이다. 어염집 일만 채가 땅에 붙어 있어, 마치 고기비늘처럼 빼곡하다. 전쟁

이 끝난 후 23년, 태어나는 아이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집들이 많아지는 것이 이처럼 왕성하다. 그 가운데 남자는

대략 헤아려도 수십만 아래는 아닐 것이지만, 한 사람이라도 임금을 보좌하여 요순 시절을 만들 수 있는 이가 없다.

나라의 힘이 더욱 약해지고 백성들이 더욱 사나워지며 변방이 더욱 소란해져, 나라가 허물어진 것이 오늘의 지경에

이르도록 하고 있을 뿐이다. 하늘이 재주 있는 이를 내리는 것이 어찌 이다지도 인색하단 말인가?

어찌 시운이며 운명이 아니겠는가?

 

경복궁의 빈 정원은 성곽이 무너지고 목책이 듬성듬성하다. 용과 봉을 새긴 전각들은 모두 무성한 잡초에 묻히고,

그저 경회루 앞의 못에 연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석양에 어른어른하는 것만 보인다. 앞에서 어진 이를 막아

서 나라를 그르쳐 외적이 이르게 하고 궁을 가시덤불로 뒤덮이게 하고, 뒤에서 부추기는 상소를 올려 총애를 구하고

사악한 말을 행하고 궁궐을 폐하게 한 간신의 죄는, 어찌 죽이는 것만으로 그칠 수 있겠는가?

 

동궐東闕(창경궁)의 두 전각이 우뚝 솟아 붉은빛과 흰빛이 중천中天에 어리고, 금원禁苑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울울창창하다. 날랜 군사와 용맹한 병사들이 호위하는 속에 맑은 궁궐로 주상께서 납시는 광경이 보이는 듯하다.

제왕의 거처가 폐하고 흥하는 것은 진실로 운수가 있는 법이다. 그곳에 임하시는 것도 아마 운수가 있는 것 같다.

 

흥인문興仁門의 아스라한 건물은 동쪽으로 바라보니 높다랗게 서 있다.

종로 큰 길이 한 가닥으로 통해 있다. 좌우에 늘어선 저자는 마치 별들이 궤도를 따라 도는 듯 가로세로 질서 정연하였다.

그 사이에 수레를 몰고 말을 타기도 하며 급히 치달리고 여럿이 모여 있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이익을 도모하는

들이다. 당시唐詩에서 이른바 "서로 만나느라 늙는 줄 모른다" 고 한 것이 정말 묘한 찬양이다.

 

불암산의 푸른 산빛은 바라보니 움켜쥘 수 있을 듯하다. 바위 봉우리가 빼어나 범상한 모습이 아니다.

가까이에서 궁실을 보좌하여 동쪽 진산鎭山이 되어 서쪽 · 남쪽 · 북쪽의 산과 함께 솟아 있었더라면, 바위들의

치달리는 듯한 형상이 실로 나라의 형세를 웅장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거늘 멀리 수십 리 밖 교외에서

마치 황햐에 은둔한 사람처럼 서 있으니, 조물주의 뜻이 자못 애석하다.

 

아아, 아침저녁 기거하는 곳에서 늘 접하던 것을 태어난 지 45년이 되어서야 처음 한 번 올라보았다.

천지는 여관과 같고 세월은 탄환처럼 흐르거늘, 우주에서 형체를 빌어 바람 속의 물방울처럼 떠다니며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흩어졌다 모였다 하면서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어쩌지 못하고 있다.

이제 남은 생애가 몇 년인지 알 수 없다. 어머니와 형을 모시고 조카를 데리고 다시 이 산을 유람하면서

먼 곳을 바라보고 하루의 즐거움을 영원하도록 하는 것을 어찌 다시 기약할 수 있으랴?

이 때문에 느껴서 글을 써 해와 때를 기록한다.

 

 

 

인왕산仁王山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과 종로구 무악동 · 누상동 · 옥인동 · 부암동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338.2미터의 산.

북한산에서 볼 때 북악산을 중심으로 좌측에 낙산, 우측에 인왕산이 있더 좌청룡 우백호를 이룬다.

북악산의 우측 곧 서쪽에 있으므로 서산이라고도 한다.

 

 

 

 

김상헌金尙憲(1570~1652)은 서산, 즉 인왕산에 올라 서울의 지세와 성곽의 풍수를 돌아보고, 국가를 중흥할 인걸이

필시 있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3년, 물질 생활이 풍요롭지 못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김상헌이 인용한 당시는 맹교孟郊의 오언고시 「유순을 전송하며」를 말한다.

"청산은 황하에 임해 있고, 그 아래 장안 가는 길이 있네, 세상의 명리인들은, 서로 만나느라 늙는 줄 모른다"

청산과 황하는 온전한 조화의 세계이다. 하지만 그 아래 나 있는 장안 가는 길에서는 명성과 이욕을추구하는

이들이 서로 만나 속내를 숨기고 희희하면서 스스로 늙음과 죽음이 오는 것도 모르고 있다.

세태를 풍자하는 뜻이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매우 신랄하다.

 

김상헌이 세태를 걱정한 것은 광해조의 정치 현실을 우려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왕도 서울이 길지이고 사직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김상헌은 서울 사람으로서

서울이 길지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 후기 경화세족을 낳은 장본인이었다. 본래 김상헌 일가는 백악(북악)

아래에 모여 살았다. 백악 아래의 순화방順化坊 창의동彰義洞은 장동壯洞이라 하는데, 그곳에 김상헌 일가가

거주 하였으므로 그들을 '장김壯金' 이라고 불렀다. 즉, 지금의 청운초등학교 뒷골목 안쪽 골짜기인 백운동 부근에는

청풍계淸楓溪가 있어 자하동(지금의 청운동)과 연결되어 있는데, 자하동의 음을 줄여서 장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청풍계에 김상헌의 생가 큰형인 김상용金尙容이 정착하면서 안동 김씨가 세거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을 특히 장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김상용의 저택에는 태고정太古亭과 늠연당凜然堂이 있고 태고정 석계 아래에 연못이 있었으며 늠연당과 내당은

느티나무 · 전나무 · 노송 사이에 배치되어 있었다. 겸재 정선이 <청풍청계도>를 그린 것이 현재에 전한다.

개울가 큰 바위에는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百世淸風' 이라는 여덟 자가 새겨져 있다. 청풍계에서 고개 너머

남쪽, 현재 종로구 궁정동 2가 로마교황청 대사관 자리에 육상궁毓祥宮과 담장을 이웃하여 김상헌의 집이 있었다.

김상헌의 사랑채 당호를 무속헌無俗軒이라 하였다. 뜰에는 동청冬靑(감탕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수) 여섯 그루가

있었다. 그 집에서 손자 김수항金壽恒이 살며 여섯 형제를 낳았으므로 육청헌六靑軒이라 명명하였다.

 

김수항의 별장은 현재의 종로구 옥인동 47번지인 인왕산 밑 옥류동의 칠성대 부근에 있었는데, 그곳에 김수항의

아들 김창업金昌業(1658~1721)이 살았다. 석벽 위에 옥류동이란 한자 각자가 현재도 남아 있다. 울 안은 송석원

松石圓이라 하고 앞 개울을 계래란鸂鶆瀾이라 하며 그 위 정자를 청휘각淸暉閣이라 하였다.

김씨들이 계속 살다가 고종 때 민규호와 민태호가 번갈아 살았고, 민태호의 둘째 아들

민영린이 살다가 윤덕영의 별장이 되었다.

 

 

 

 

소림 안중식安中植, <백악춘효白惡春曉>, 1915년,

125.9×5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제 강점기에 안중식이 빅악산의 서기와 경복궁의 위풍을 그린 것이다. 광화문의 북은 3문이 확연하다.

본래 제왕의 왕궁은 3문으로, 가운데 문을 제왕이 이용하였다. 훼손되지 않은 대문의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조선왕조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담은 것은 것으로 보인다.

 

 

 

 

안동김문은 순조의 국구인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1765~1832) 형제 때 극성하였다.

순조 때 김이교金履喬91764~1832)는 판윤에 일곱 번 제수 되고 김이양金履陽(1755~1845)은 네 번 제수되었다.

김조순은 삼청동 계곡 서편 산중턱에 옥호정玉壺亭, 玉壺精舍을 얽었는데, 화원이 그린 <옥호정도玉壺亭圖>

채색화가 전한다. 바깥사랑채 편액에는 옥호산방玉壺山房이라 썼다. 후원에 혜생천惠生泉이 있고 주변 숲에

죽정竹亭 · 산반루山半樓 · 첩운정疊雲亭 등이 있다. 그 뒤 넓은 석벽에는 '옥호동천玉壺洞天' 이라는 해서 대자의

붉은 글씨가 있고, 옆 바위에는 1815년(순조 15)에 새긴 '을해벽乙亥壁(을해년 벽에 쓰다) 산광여수고山光如邃古

(산빛은 태곳적과 같고) 석기가장년石氣可長年(바위 기운은 영구하리라' 이라는 각명이 있다.

 

김상헌은 서산(인왕산)에 오르면서 산기슭에 있던 소세양의 옛 집터를 거쳐 가면서

선비의 지상志尙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반성하였다.

 

소세양은 그다지 명문이랄 수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시를 잘 지어 당시 유력자인 이행李荇(1478~1534)의

후원으로 현달하였다. 곧 1521년 겨울 원접사 이행을 따라 정사룡鄭士龍(1491~1570)과 함께 종사관으로 참여해서

그 공로로 문한文翰의 여러 직을 여럿 맡았다. 1529년 예조판서, 1533년 한성부판윤으로 승진하였고,

1534년 진하사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런데 그른 기묘사화 다음 해인 1520년, 남곤南袞(1471~1521)이 김식金湜(1482~1520)을 조광조의 남은

당원으로 지목하여 반역죄를 씌울 때, 대관의 직에 있으면서 문사관問事官으로서 국청에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식자들의 비난을 샀을 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사신史臣은 "소세양이 중국의 시인들에게

칭찬받고 그 일을 임금에게 스스로 알렸으니 뻔뻔하게도 자기 재주를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시 식자들이 매우 비웃었다" 고 썼다. 1530년대 들어서면서 사림파 관료들은 문학 자체의 형식적 기능을

중시하는 사장파詞章派에 대해 맹렬하게 공격하기 지작하였는데, 소세양은 정사룡 · 이희보와 함께 비난의

첫째 대상이었다. 그러던 차에 1534년, 정치적 후원자 이행이 사망하면서 그는 고립 상태가 되었다.

 

소세양은 1535년 이후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관리의 직을 사양하기 시작해 벼슬길에 들고나기를 반복하였다.

1543년 모친의 상기가 끝난 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질병을 이유로 맡지 않았다. 그해 중종은 그를

형조판서에 기용하려 했으나 여론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는 1540년부터

몰년인 1562년까지 23년간 고향 전라도 익산에 은둔하였다.

김상헌은 사장파 문인으로서 일시의 영달을 이룬 소세양의 행적을 좋게 보지 않은 듯하다.

그렇기에 그의 옛 집터를 돌아보면서 영욕의 문제를 반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