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유람록 <운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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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21. 6. 10.

 

 

정수영鄭遂榮,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 부분,

1796~1797년, 24.8× 1575.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수영은 조선 후기 지리학자였던 정상기의 증손자로, 1796년 여름부터 봄까지 한강과 임진강을 여행한

추억을 26장면으로 나누어 스토리가 있는 화첩을 제작하였다. 곧, 경기도 광주에서 배를 띄워 여주와 원주의

상류까지 14곳의 명승을 화폭에 담고, 다시 임진강 상류와 시흥 관악산의 명소 12곳을 그렸다.

수종사에서 내려다보이는 경기도 광주군 미호 · 여주 청심루 · 여주읍 · 우천을 그린 부분만 골랐다.

 

 

 

 

정약용丁若鏞, 「수종사 유람기遊水鐘寺記」

 

 

어렸을 때 노닐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되겠고, 곤궁했을 때 지나온 곳을 현달하여

찾아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되겠고, 홀로 외롭게 지나가던 땅을 좋은 손님들과 맘에 맞는 친구들을

이끌고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되겠다. 내가 옛날 아이 적에 처음으로 수종사에 놀러간 적이 있었고, 

그 후에 다시 찾은 것은 독서를 하기 위함이었다. 독서할 때는 늘 몇 사람과 짝이 되어

쓸쓸하고 적막하게 지내다가 돌아왔다.

 

건륭乾隆(청나라 고종의 연호) 계묘년(정조 7, 1783) 봄에 내가 경의經義로 진사가 되어 초천苕川으로

돌아가려 할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번 길에는 초라해서는 안 된다. 두루 친구들을 불러서 함께

가거라" 라고 하셨다. 그래서 좌랑佐郞 목만중睦萬中 · 승지丞旨 오대익吳大益  · 장령掌令 윤필병尹弼秉 ·

교리校理 이정운李鼎運 등이 모두 와서 배를 탔고 광주廣州부윤이 세악細樂(군중에서 장구 · 북  · 피리  ·

깡깡이로 편성한 음악)을 보내어 흥취를 도왔다.

 

처천으로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나 수종사에 놀러 가려고 하는데, 젊은이 10여 명도 따라나섰다. 나이 든

사람은 소나 노새를 탔으며 젊은 사람들은 모두 걸어갔다. 절에 도착하니 오후 서너 시각이 되었다.

동남쪽의 여러 봉우리들이 때마침 석양빛을 받아 빨갛게 물들었고, 강 위에서 햇빛이 반짝여

창문으로 비쳐 들어왔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즐겼다.

밤이 되어 달이 대낮처럼 밝아오자 서로 이리저리 거닐며 바라 보면서 술을 가져오게 하고 시를 읊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나는 이 세 가지 즐거움에 관한 이야기를 하여 여러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다.

수종사는 신라 때 지은 옛 절이다. 절에는 샘이 있어 돌 틈으로 흘러나와 땅에 떨어질 때

종소리를 내므로 수종사라 한다고 전한다.

 

 

 

 

운길산雲吉山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해발고도 610미터의 산.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를 조망하며 조곡계곡과 시우리계곡 등이 운치가 있다.

산행 기점은 송촌리와 진중리 두 곳에 있다. 수종사를 지나 500봉에 오른 후 안부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면 정상이다.  수종사는 세조 연간에 크게 중창한 절이라고 한다.

 

 

 

송촌리에서 바라본 운길산

 

 

수종사

 

 

 

수종사에서 본 두물머리

 

 

 

 

어느 외국 소설가가 말하였다. 과거의 기억이란 곧 사건의 의미가 풍경으로 변한 것이며,

나이든 사람에게 미래보다 과거가 더 다양한 것은,

그가 과거의 풍경을 여러 가지로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 글의 작가 정약용(1762~1836)은 "어렸을 때 노닐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 되겠다"

고 하였다. 곤궁하였을 때, 홀로 외롭게 지내던 땅의 추억은 곧 과거의 풍경이다. 과거의 풍경을 풍부하게

그려내면서 그는 운길산의 수종사를 다시 찾았을 것이다.

 

1783년(정조 7)  진사 시험에 합격한 정약용은 지인들과 수종사에 노닐고 이 글을 남겼다. 

수종사는 그의 생가가 있는 초천의 동쪽 운길산 중턱에 위치한다.

정약용은 어려서 수종사에서 독서를 하였고 초천 주변의 경승을 「사시사四詩詞」로 읊으면서

수종산 겨울의 설경 감상을 상심낙사賞心樂事의 하나로 꼽을 만큼 수종사를 사랑하였다.

운길산은 조곡산鳥谷山 혹은 초동산草洞山이라고도 불렀다.

《신증동국문헌비고》에 따르면 , 조곡산(초동산)은 달리 수종산이라고도 하였다.

1939년 절을 중수할 때 석조부도에서 청자호 · 금동구층소탑 ·은제도금육각감 등 고려시대 유물 등이 발견되었다.

 

세조 재위 4년(1458)에 그가 금강산을 다녀오다가 이수두二水頭, 兩水里에서 일박을 할 때,

한밤중 굴 속에서 물떨어지는 소리가 암벽을 울려 종소리처럼 들린 것임을 알고,

이듬해 절을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5층 돌계단을 쌓고 터를 닦아 16나한을 봉안하게 했고,

8각5층석탑을 세우게 하였다. 수종사는 여승방인 정업원에 속하여 왕실 비빈들의 불사가 이루어졌다.

 

1783년 다산이 수종사에 노닐 때, 동행한 젊은이 가운데는  목만중睦萬重(1727~?)이 있다.

목만중은 경신환국 이전과 기사환국 이후에 정권을 잡았던 목씨睦氏 · 민씨閔氏 · 유씨柳氏 등 남인 3대

가문에 속하였지만, 1780년(정조 4)에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 정권에서 축출당할 때 공격하였고, 정조 연간에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남인 시파으 서학도들을 박해하였다. 하지만 그는 1780년 이후로도 정약용의 숙부

정재운과 교유를 계속하였고, 1783년의 수종사 유람 때도 정재운의 주선이 있었던 것 같다.

 

목만중은 정약용과 수종사에서 노닐 때 여러 시를 남겼다.

오언율시 「수종사」 2수를 보면 정치적 혼란한 환경을 벗어나 수종사에 노닐어 기심機心을 잊을 만하다고

토로하였다. 또 장편고시 「운길산雲吉山」의 일부에서 수종사에서의 조망을 아래와 같이 노래하였다.

 

두 강물의 머리가 만나고 들판이 십 리에 열려

가벼운 꽃가루는 소나무에 들러붙고 연노랏빛은 보리에 아롱졌다.

저 아래 촌락은 헤아릴 수 있겠고 멀고 가까이에 길과 도랑이 이어있구나.

떠가는 배가 또렷이 시야에 들어오나니 맑고 깨끗한 물이 한 줄기로 희디희다.

여울을 내려오는 배들은 땔나무를 실었고 여울을 오르는 배는 바야흐로 돛을 건다.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과 숙부 정재운이 주선하여 마련된 남인 문인들의 수종사 유람은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던 남인들의 단합을 의도하였던 듯하다. 곧, 정약용의 유람기

이면에는 동심同心의 결속을 츼구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수종사는 오래된 절이긴 하지만 주로 궁중 비빈들의

법사를 열었던 곳이라서 사대부 문인이나 여항 문인들과 친밀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배를 타고 춘천으로

향하거나 충주나 단양으로 향할 땐 도미협을 지나 양근으로 악는 도중에 운길산에 위치한 이 절이 바라보였기

때문에 많은 문인들이 이곳의 풍광을 사랑하여 시들을 남겼다. 또한 수종사에서는 한강의 광할함과 청정함을

조감할 수 있어 마음이 쾌활하였다. 정약용보다 앙ㅍ서 광해군 때의 활달한 지식인 임숙영任叔英(1576~1623)

은 「수종사 유람기遊水鐘寺記」에서 수종사가 높은 곳에 위치하여 시야가 넓은데도,

고승대덕이 거처하지 않고 속승만 존재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절이 높아서, 내 생각에 여기 거처하는 자들은 틀림없이 석씨(불교) 가운데 고승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직접 보니, 도리어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여기 거처하는 자들은 승려 가운데 제 몸 단속을 하지 않는

자들이어서, 이익을 좋아함이 시정의 서민들보다 심하여, 그저 머리만 기르지 않을 따름이다. 그들은 농사도

짓지 않고 베도 짜지 않고서 입고 먹고 하므로, 힘써 일하지 않으면 몸뚱이가 춥고 배고프게 될 판이니,

나는 그들이 자활하는 길을 금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어찌하여 이런 판국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일 년 한 해와 조석거리가 갖추어져 있으면 그걸로 그만이거늘, 저자들은 부지런해서 그만두지를 않아,

반드시 많이 저장을 한 뒤에야 그치려 하니 장전長錢(이자놀이) 장석두長石斗(곡물 이자놀이)에[ 이르기까지

하지 안흔 짓이 없다. 아아, 저 상고 商賈란 것은 말업末業 가운데서도 가장 말없이거늘, 승려가 그 짓을 하니,

이익을 좋아하는 폐단이 어찌 없을 수 있으랴? 이자들도 그러하니, 그렇다고 어찌 꼭 승려일 필요가 있는가?

승려란 것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자들은 이름은 승려인데 실상은 속인이니, 어찌 참람

되지 않은가? 이름은 승려라 걸어놓고 실상은 속인을 따르니, 그들을 두고 승려라고 하면 실되지 않고, 그들을

속인이라 부르면 이름이 안 맞는다. 이 무리는 과연 어떤 자들이란 말인가? 이것은 승려를 도로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자기를 승려로 대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세속의 누를 스스로 버리지 않으

면서도 남들이 속되다고 부르는 것을 혐오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그릇되다!

이자들은 어째서 석씨를 떠나지 않는단 말인가?

 

 

불교 비판의 어조가 아주 신랄하다. 이것은 배불排佛의식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아마도 당시 수종사 승려들은 백성들에게 돈이나 쌀을 꿔주고 높은 이자로 갚게 하여 이익을 도모

하였기에, 그 실상을 알고서 이와 같은 비판을 한 것이리라.

또한 김숙영은 수종사의 연기 설화에 대하여 "고려 티조가 산상의 이상한 구름 기운을 보고 우물에서

동종銅鐘을 얻었기 때문에 절이 창건되었다고 적고, 개국의 군주가 불교를 섬기는 데 급급하였으므로

고려 500년 동안 불교가 만연하였다." 고 비판하였다. 수종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별도의 연기설화가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세조조의 창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군왕이나 궁중에서

불사를 벌이는 것을 넌지시 비판하려는 뜻에서 그렇게 적은 것일 수도 있다.

 

조선시대 유학과 불교의 관계는 정말 서로 용납하지 않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진보적 지식인들은 다른 종파에 대해 관용의 태도를 지녔다.

김시습이나 김만중 · 정약용 · 김정희 등은 그 대표적인 분들이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