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유람록 <관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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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21. 6. 11.

정수영鄭遂榮,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券>,

 1796~1797년, 24.8×1575.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수영이 1796년 여름부터 12797년 봄까지 한강과 임진강을 여행한 추억을

26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도권 가운데 관악산이 나와 있는 부분이 있다.

 

 

 

 

채제공蔡濟恭, 「관악산 유람기遊冠岳山記」

 

 

 

병오년(정조 10, 1786) 봄, 노량진 강가에 우거하고 있는데, 관악산 푸른빛이 눈으로 들어올 듯하였다.

그래서 산으로 가고 싶은 뜻은 왕성하였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4월 13일, 남쪽 이웃에 사는

이숙현李叔賢과 약속하고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 아이들과 종도 네댓 명이 따랐다.

 

10리쯤 가서 자하동紫霞洞으로 들어갔다. 한 칸 규모의 정자에 올라 쉬었다. 정자는 곧 신씨申氏의 별장이다.

계곡물이 산골짜기에서 흘러 나오는데 숲이 뒤덮고 있어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물길이 정자 아래 이르러 바위를

만나게 된다. 날리는 것은 포말이 되고 고이는 것은 푸른빛을 이루다가 마침내 넘실넘실 흘러 골짜기 입구를

에워싸고 멀리 떠나간다. 마치 흰 비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언덕 위에 철쭉꽃이 막 피어, 바람이 불면

그윽한 향기가 때때로 물을 건너 이른다. 산에 들어가기도 전에 시원하여 멀리 떠나온 흥취가 일었다.

 

정자를 경유하여 다시 10리쯤 갔다. 길이 험준해서 말을 탈 수 없었으므로, 말과 마부를 집으로 돌려보내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서 넝쿨을 붙잡고 골짜기를 지났다. 앞에서 인도하던 자가 절이 어디에 있는지

방향을 잃어버렸다. 동서남북도 알 수 없었다. 벌써 해가 질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다. 길에 나무꾼이

없어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하인 중에 어떤 놈은 앉았고 어떤 놈은 서 있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갑자기 숙현이 나는 듯한 걸음으로 끊어진 낭떠러지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동행한 좌우의 사람들이

바라보았으나, 홀연 어디론가 사라졌으므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한편으로는

괴이하게 여기고 한편으로는 괘씸해 하였다.

 

조금 있으니 흰 중 옷을 입은 사람 너덧 사람이 어디선가 나타나 빠르게 산을 내려왔다.

하인들이 모두 소리 지르고 기뻐하며 "스님이 오십니다" 라고 하였다. 숙현이 멀리서 절을 보고서, 먼저 가서

승려들에게 직접 우리 일행이 여기에 있다고 고하였던 것이다. 이에 승려의 인도를 받아 4리쯤 떨어져 있는 절에

이르렀다. 절 이름은 불성암佛性庵이다. 절은 3면이 봉우리로 둘러 있는데 한 면만 막히지 않고 탁 트여있다.

문을 열자 앉으나 누우나 천 리 먼 곳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다음 날 해가 뜨기 전에 밥을 재촉하여 먹고 연주대라 하는 곳으로 찾아가려 하였다. 건강한 승려 약간 명을 골라

인도하게 하였다. 승려들이 나에게 말하였다. "연주대는 여기서 10리쯤 됩니다. 길이 아주 험해서 나무꾼이나

중들이라 해도 쉽사리 넘어갈 수 없습니다. 기력이 못 미치지 않으실까 걱정됩니다." 내가 말 하였다.

"천하만사는 마음에 달렸을 뿐이네. 마음은 장수요, 기운은 졸개이니, 장수가 가는데 졸개가 어찌 가지 않겠는가?"

마침내 절 뒤편의 가파른 벼랑길을 넘었다. 길을 가다가 끊어진 길과 깎어지른 벼랑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 아래가 천 길 절벽이므로 몸을 돌려 절벽에 바짝 붙어 손으로 늙은 나무 뿌리를 바꿔 잡으면서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현기증이 나서 옆으로 눈길을 보낸 수가 없었다. 혹 큰 바위가 길 가운데를 막고 있는 곳을

만날 때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리 뾰족하지 않고 오목한 곳을 골라 엉덩이를 거기에 붙이고 두 손으로

주변을 부여잡으며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고쟁이가 뾰족한 부분에 걸려 찢어져도 안타까워할 틈이 없었다.

이와 같은 곳을 여러 번 만난 다음에야 연주대 아래에 이르렀다.

 

이미 정오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놀러온 사람들 중에 우리보다 일찍 올라간 이들이 만 길 절벽

위에 서서 몸을 굽히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흔들흔들 마치 떨어질 듯하므로, 보고 있자니 모골이

죄다 송연하여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하인을 시켜 큰 소리로 "그만 두시오, 그만 두시오" 라고 하였다.

나 또한 마음과 몸의 기력이 다하고 말았다. 엉금엉금 기어서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정상에는 바위가 있는데 널찍해서 수십 명이 앉을 만하였다. 이름을 차일암遮日巖이라고 한다.

전에 양녕대군이 왕위를 피하여 관악산에 살 때, 가끔 이곳에 올라와 궁궐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뜨거워 오래 머물 수 없어 작은 장막을 치고 앉아 있었다. 바위 귀퉁이에 4개의 구멍을

오목하게 파서 장막의 기둥을 고정시켰다. 그 구멍이 지금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연주대戀柱臺라고 하고 또 차일암이라 하는 것이다.

 

연주대는 구름 속까지 우뚝 솟아 있다. 내 자신을 돌아보니 천하 만물 중에 감히 높이를 다툴 만한 것이

없어 보였다. 사방의 봉우리들은 자그마해서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오직 서쪽에 거뭇한 기운이 쌓여

뻗어 있는데 마치 하늘과 바다가 이어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자면 바다고 바다에서 보자면

하늘처럼 보일 터이니, 하늘과 바다를 또한 누가 분간할 수 있겠는가?

 

한양의 성궐이 밥상을 대한 듯이 바라다보였다. 일단의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에워싼 곳이 경복궁

옛터임을 할 수 있다. 비록 수백 년이 지난 일이지만, 양녕대군이 배회하면서 군주를 그리워하며 바라본 그

마음을 지금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바위에 기대어 《시경》에 나오는 노래를 낭낭하게 외웠다.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언덕에는 도꼬마리가 있네.

그 누구를 그리워하는가? 서방의 미인이로세

저 미인이여, 서방의 사람아."

숙현이 말하였다.

"노랫소리에 그리움이 있군요. 임금을 그리워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어찌 차이가 있겠습니까?"

내가 말하였다.

"임금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륜이니, 고금에 무슨 차이가 있겠소. 다만 내 나이 아직 예순 일곱이라,

미수 어른이 이 산을 오를 때 그때 나이에 열 살을 하고도 여섯 살이나 미치지 못하오. 그런데도

수眉叟 어른(허목)은 걸음걸이가 날 듯하였는데, 나는 기력이 쇠진하고 숨이 차서 도무지 괴롭다오.

도학과 문장에 고금의 사람이 서로 같지 못한 것이야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지만

근력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 것은 어찌 이리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소.

천지신명의 힘을 입어 내가 나이 여든 셋이 된다면 비록 남에게 둘러 업혀 오더라도

반드시 연주대에 다시 올라 옛 사람의 발자취를 잇고 싶구려. 그대는 이를 기억하시오."

 

 

 

관악산冠岳山

 

관악구와 안양시 · 과천시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629미터의 산.

경기오악京畿五岳의 하나이자 남한산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이중으로 둘러싸고 있다.

연주대 · 용마암 · 자왕암 · 불성암 · 등이 있다. 북쪽 골짜기에는 서울대학교, 동쪽에는 정부 과천청사가 있다.

경복궁의 외안산外案山인데, 그 모양이 불과 같아서 서울에 화재가 잘 난다 하여 관악산 꼭대기에 못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넣어 불기운을 누르고, 경복궁 앞 광화문의 양쪽에 해태를 만들어 놓아 불기운을 없앴다고 한다.

지금은 연못이 없어지고 통신대가 들어서 있다.

 

 

 

 

 

 

 

정조 때의 남인 재상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1786년(정조 10, 병오) 4월에 관악산 등반길에 올랐다.

함께 유람한 이는 이광국과 생질 이유상李儒尙 · 집안의 동생 서공敍恭 · 아들 홍원弘遠 · 종질 홍진弘進 ·

손자뻘 되는 이관기李寬基· 겸인傔人 김상겸金相謙과 종 네댓 명 이었다 .

당시 채제공은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으므로 군주를 사모하여 충성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렇기에 양녕대군을 떠올렸고 여든 셋에 연주대를 오른 허미수를 언급하고 있다.

 

채제공은 상업 발달의 큰 고비가 되었던 신해통공을 주친하고, 노비혁파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정조 연간의 폭넓은 문화적 성취에 기여하였다. 신행통공이란 지전상인에 대한 일방적인 보호정책을

철회하고 일반 상인들에게 상업의 활로를 터주었던 정책을 말한다. 본관이 평강平康으로 1743년(영조 19)

문과 정시 병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1758년 도승지로 있으면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리자 죽음을 무릎쓰고 그것을 철회시켰다. 훗날 영조는 세손(훗날 정조)

에게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요, 너의 충신이다" 라고 하였다. 1762년 사도세자의 죽음이 있었을 때는

모친상으로 관직을 물러난 상태여서 화를 면하였다. 1777년(정조 원년) 창경궁 수궁대장으로

여러 차례나 벽파의 음모를 적발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다.

1780년 홍국영洪國榮(1748~1781)의 세도정권이 무너진 후 정조를 충실하게 보필 하였다.

 

관악산을 유람하고 난 이태 후 1788(정조 12, 무신) 채제공은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무려 80여 년 만의 남인 정승이었다. 이에 고무된 영남 남인들은 자신들이 과거 이인좌의 반군에 호응한 것이

아니라 맞서 싸웠다고 주장하는 <무신창의록戊申彰義錄>을 우여곡절 끝에 정조에게 바쳤다.

그는 이듬해 1789년 좌의정에 올랐고, 1790년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신서파信西派의 영수로 천주교 신봉의

묵인을 주장하였다. 여러 번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였으나 정조의 특별한 신임으로 1793년 영의정에 올랐다.

1794년 2월에 수원의 화성華城 건설이 착수되자 그 일을 주관하였다.

 

 

관악산에 오른 기록을 남긴 남인의 또 다른 학자로 이익李瀷(1681~1763)이 있다.

그는 어느 해인가 중춘仲春 갑자일에 삼각산에서부터 곧장 관악으로 들어가 동쪽 언덕을 넘어 불성암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익이 불성암 승려의 말을 인용한 것에 따르면 연주대는 영주대靈珠臺라 하였고, 자하동은 관악산에

네 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불성암의 남쪽 아래에는 남자하南紫霞, 서쪽에는 서자하西紫霞가 있는 데,

이 둘은 그리 풍광이 뛰어나지 못하다. 영주대의 북쪽에 있는 북자하北紫霞는 아주 산뜻하고 깨끗하지만,

동자하東紫霞의 기이한경관에는 미치지 못한다.

동자하에도 못은 있고 폭포도 있어서 영주대의 경관에 버금간다.

 

 

채제공이 연주대(영주대)에 오르기 전에 지나갔던 자하동의 신씨 누정은

훗날 신위申緯의 소유가 되는 누정이다.

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건물 옆의 자하연이 누정이 있던 곳이라는 설이 있다.

이익의 관악산 유람 기록을 보면, 저녁에 서암西巖에 올라 일몰을 보고 이어서 암자 속에서 잠을 자고는

아침 해가 뜨는 것을 기다렸다가 북쪽으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도성에서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등반하였던

산이지만, 숙박을 할 곳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이익은 옛날 의상 승려가 거처하던 의상봉을 지나

관악사와 원각사 두 절을 거쳐 영주암 터에서 쉰 후 마침내 영주대에 올랐다고 하였다.

그런데 영주대의 정상 서쪽에는 깎아지른 벽이 있고, 벽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으며

다시 돌 처마를 만들어서 비바람을 막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암자에 의지해서 단을 쌓고 돌을 포개고 흙을 메웠는데, 50여 명은 앉을 만하였으며

바위 머리에는 또 구멍을 파서 횃불을 밝히는 곶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모두 조선왕조에 들어와 불교를 숭상하던 때의 일이라고 하였다.

불교의 성행을 비판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차일봉을 경유하여 북자하를 굽어보고 동자하를 두루 거친 후 폭포를 구경하고

돌아왔다고 했을 뿐 영주대를 양녕대군의 고사와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이익의 기록을 보면, 양녕대군이 관악산 정상에 올라 연군戀君의 뜻을 지녀 차일까지 치고 경복궁을 바라

보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실이 아닌 듯하다. 그런데 채제공은 연주대의 고사를 양녕대군에게 결부시켰다.

이익의 남인 학맥을 이은 사람이면서도 이익과는 견해를 달리 한 것이다. 이익이 정계에 나가지 않고 재야의

학자였던 데 비하여 채제공은 정무를 담당하고 정국을 운영하였던 정치가였다. 그 때문에 전문傳聞을

하는 방식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관악산 정상을 '연주대' 라고 해야 할지 '영주대' 라고 해야 할지, 현대의 우리도 제각기 사상적 기반이나

정서적 상태에 따라 달리 선택할 수 있다. 옛 지명 가운데는 종종 이러한 사례가 있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